책머리에
촛불을 기억하고, 계승하고, 그리고 넘어서자
“하나의 유령이 우리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촛불이라는 유령이.” 촛불항쟁 1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시대적 사건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진행되고 있다.
우선 촛불항쟁의 정당성을 뿌리째 부정하려는 ‘신성동맹’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일부 언론과 뉴라이트 계열 시민단체는 ‘거짓과 광기의 100일’ 같은 선동적 표현을 앞세워 촛불항쟁의 의미를 깎아내리려 하고 있다. 이러한 공중전과 함께 정부·검찰·경찰은 언론통제를 강화하고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대대적으로 제한하는 등 촛불시위의 재연을 차단하려는 지상전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도전에 맞서 촛불의 정당성을 지키려는 움직임 또한 없을 수 없다. 촛불항쟁이 민주주의와 사회발전에서 갖는 의미를 평가하는 토론회를 비롯해 촛불정신을 계승하려는 다양한 실천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두 움직임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발생하고 있지만 촛불항쟁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듯싶다. 시민집회와 시위가 한창이던 작년 6월 이명박 대통령 자신이 청와대 뒷산에 올라 촛불이 민심임을 인정하지 않았던가. 또한 정부는 쇠고기협상의 문제점을 시인하고 재협상까지는 아니어도 잘못된 협상을 보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촛불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잊고 싶거나 잊혀진 일일지 몰라도 시민들의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촛불항쟁을 부정하려는 ‘신성동맹’이 원하는 바는 단지 촛불로 인한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목적은 촛불에 밀려 일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정책들을 다시 추진할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지난 4월 27일 발표된 이른바 ‘4대강 살리기 사업계획’이 대표적 사례이다. 이 계획에는 지난해 촛불의 반대로 거둬들였던 대운하사업의 일환으로 간주할 내용이 많을 뿐 아니라 설혹 대운하사업으로 안 가더라도 ‘4대강 죽이기’로 귀결될 위험성이 크며, 법적 의무인 환경평가조차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운 촉박한 일정에 따라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밀어붙이기식 정국운영이 계속되는 한 촛불항쟁을 계승하는 새로운 저항의 출현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촛불이 곧 다시 그것도 더 격렬한 형태로 타오르리라는 막연한 희망에 기댄 저항으로는 큰 성과를 거두기 힘들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촛불이 타오를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앞으로 상당기간 작년과 같은 양상은 출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많던 촛불이 어디로 사라졌느냐고 원망하고 좌절할 이유도 없다. 촛불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촛불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라는 노래에 집약적으로 표현된 것처럼 시민들을 주권의 주체로서 재탄생시키는 정치문화적 변동을 촉진했으며, 이는 경기도 교육감 선거와 4·29 재보궐선거에서 보인 풀뿌리들의 다양한 투표독려 활동과 높은 투표율로 다시 확인되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촛불에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남긴 미완의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 두 차원에서의 실천이 동시에 요구된다.
우선 촛불은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했지만 쟁점으로 부각된 사회적 의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분명한 방안까지 제시하지는 않았다. 촛불로 표출된 민심은 일원적이고 자명하기보다는 다의적이고 복합적이었다. 수도, 의료 등의 공공써비스 민영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거셌지만 그렇다고 모든 민영화가 악이라는 식의 선험적 전제를 승인하지 않는 듯한 미묘한 균열도 보여주었다. 촛불을 거친 우리에게는 경직된 모델로써 이러한 균열을 덮고 메우는 것이 아니라 이 균열을 감당하는 가운데 생명력있는 새로운 사회비전을 만들어가는 데 촛불을 넘어서는 길이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당장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대해서도 환경보호냐 지역개발이냐의 대립구도에 갇히지 않고 환경파괴적 개발에 대한 저항이 적절한 발전과 결합할 수 있는 실현가능한 대안을 만들어낼 때만 촛불의 활력을 사회변화의 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촛불은 우리의 사회적 의제들의 해결을 특정한 주체에 위임하지도 않았다. 이를 두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정치적 주체를 형성하지 못한 것이 촛불항쟁의 한계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촛불에 정치적 주체의 형성까지 요구하는 것은 촛불에 너무 많은 부담을 지우는 것일 뿐 아니라 촛불의 해방적 기능을 억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정치적 실천을 추구하는 세력들이 짊어져야 할 과제이며, 이들이 촛불로 표현된 정치적 지향을 올바르게 포착하고 그에 맞는 정치연합을 구축함으로써 해결할 문제다.
촛불 이후 지금까지 그 진전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4·29 재보선에서 표출된 민심은 의미심장하다. 이명박정부에는 엄중한 경고를 보내고, 민주당·진보신당·민주노동당 등 야권 정치세력에는 무조건적인 지지를 거부하면서도 반MB 연합전선 성공의 희망을 보여준 유권자들의 선택은 그야말로 절묘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정부가 정치, 경제, 남북관계에서 계속 퇴행적 움직임을 보인다면 반MB의 요구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반MB를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목표로 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 그러나 ‘이명박 퇴진’까지는 아니더라도 반MB는 분명히 작년의 촛불 민심이었고 4·29 재보선의 판정이었다. 이 민심에서 이탈하거나 그 진의를 교란하는 목표설정으로는 신뢰받는 정치세력으로 발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MB는 단순한 반대의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새로운 정치지형을 만들어내기 위한 실천이어야 한다. 누구나 강조하는 새로운 사회비전의 수립도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근사한 설계도를 작성함으로써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민심의 요구가 집중된 영역에서 정치적 실천을 펼치는 가운데 구체화될 수 있다.
촛불항쟁 1년을 맞는 우리의 자세는 촛불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촛불을 넘어서기 위한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논의와 실천을 다짐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촛불을 살리는 길이다.
이번호 특집은 ‘이 시대는 어떤 인문학을 요구하는가’라는 대담한 물음을 던진다.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새로운 사회적 실천과 결합할 수 있는 인문학의 모색이라는 문제의식 아래 대화와 산문, 논문들을 묶었다. 얼핏 무거워 보이는 주제지만 다양한 형식과 시각으로 최근의 ‘인문학 현상’을 다루고 있어, 읽는 재미와 진지한 고민의 계기를 동시에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집의 서두를 장식하는 대화에서는 창비 전·현직 주간이자 대학의 안팎을 넘나들며 활동해온 최원식과 백영서가 사유와 실천의 길로서의 인문학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탐색한다. 최근 높아진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실천과 유리된 주지주의적 함정에 빠질지 아니면 사회와 소통하고 실천하는 새로운 사상운동으로 진전될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화두 삼아, 인문학의 엘리뜨주의, 대학제도 안팎의 변화와 시도, 동아시아론의 가능성, 사회인문학의 거점으로서 창비의 활동에 대한 평가 등 현장과 담론을 넘나드는 대담자들의 체험을 곁들인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이어진다.
이어지는 네편의 산문은 특집에 활력과 실감을 더한다. 오창은, 고봉준, 임옥희, 이현우가 각각 대학제도 밖의 연구활동과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인문학 교육의 실험들, 보수화된 인문학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 인터넷 공간을 무대로 전개되는 지식교류와 비평활동 등 다양한 실험과 실천의 현장을 소개한다. 제도 밖 인문학의 현황을 점검하고 그 의의를 보여주는 짧지만 소중한 글들이다.
이어지는 권성우와 황정아의 글은 새로운 인문학 모색에 빼놓을 수 없는 쟁점들을 다룬다. 권성우는 창간 40주년을 맞아 창비가 내걸었던 ‘운동성 회복’과 ‘자기쇄신’의 목표가 문학담론과 사회담론을 비롯해 언론과 문학씨스템의 문제 등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우리사회 건강한 논쟁문화를 떠받쳐온 창비가 ‘정치적 올바름’과 ‘미학적 품격’이 함께하는 실천적 인문학의 처소로 거듭날 것을 당부한다. 황정아는 최근 국내 문학평론에 많은 영향을 미친 알랭 바디우와 조르조 아감벤의 이론을 중심으로 인문학의 외국이론 수용방식을 점검한다. 보편주의나 동일성, 평등과 법적 영역 등 이들 주장의 핵심적인 맥락이 우리의 담론장에서 특권적 혹은 주관적으로 활용되는 문제를 지적하고, ‘윤리’ 비평에서 ‘묻혀버린’ 질문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함으로써 주체적 인문학의 모습을 그린다.
논단과 현장에 실린 세편의 글은 최근 우리 사회와 학계의 쟁점과 주요 변화를 심도있게 분석하고 있다. 하승창은 반MB라는 민심이 표현된 재보선을 평가하면서, 이를 전지구적 사회변동과 우리의 정치현실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비전과 결합시키기 위한 정치적·사회적 기획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김용창은 용산참사 문제가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시(재)개발에 폭력성이 내재할 수밖에 없는 정치경제적 구조를 검토하고, 이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확보하는 방안으로서 ‘도시권’을 제안한다. 마크 쎌던은 16세기 이래 동아시아에서 형성된 지역질서를 세 단계로 나누어 거시적 시야로 살핌으로써 전환기의 세계체제 속에서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중요성과 향후의 과제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문학평론란에는 최근 문단과 독서계의 관심을 반영하는 논쟁적인 글들을 준비했다. 한기욱은 창비 2008년 겨울호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특집에 실린 자신의 글을 포함한 몇몇 글에 대한 손정수의 비판(창비 2009년 봄호)에 답하며 우리시대 문학의 새로움에 대한 논의를 더욱 확장하고 있다. 유희석은 현재 한국문학 최대의 화제작 『엄마를 부탁해』의 가족서사에 대한 일면적 비평과 대결하며 가부장제적 모성을 넘어선 예술적 성취를 분석한다. 정철훈은 「잉여인간」의 작가 손창섭의 잊혀진 말년을 추적하며 현대문학사의 작은 공백을 메운다. 지난해부터 신설된 문학초점란도 안정감을 더해가며 최근 주목할 작품들을 조명한다.
창작란에서는 2회를 맞는 김연수의 연재소설이 극적인 흥미와 긴장감을 더해가고 김금희, 전성태, 정지아가 각각 개성적 소설세계를 펼친다. 이와 함께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주는 열분 시인의 신작들이 독자의 눈길을 기다린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 신간에 대한 간명한 소개와 날카로운 비평으로 항상 지면을 맛깔나게 해주는 촌평 필자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이번 여름호에 담긴 열기가 독자 여러분이 더운 계절을 다스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李南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