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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문재 李文宰
1959년 경기 김포 출생.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등이 있음. nonbat3711@naver.com
내가 어디 멀리 다녀온 것 같다
적어도 앞으로 백년 동안은
좋은 것은 나쁜 것이고 나쁜 것이 좋은 것이다1
멀리 떠나 있다 온 것 같다
죽어가는 것들은 여전히 죽어가고 있고
대량생산은 국경을 넘나들며 여전히 혈기왕성했다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종합비타민은 하루 한 알씩 복용하고 있었고
사랑을 유지하는 데는 백년 전과 다름없이
돈이 들어갔다 그러나 만주에서 돌아온 외삼촌이 그랬듯이
사랑을 추억할 때는 사랑을 위하여 그 비용을 제했다
내가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다
민주주의는 소음과 똑같은 소음의 대결이었고
쯔나미는 쯔나미가 발생한 직후에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
은행나무는 일억번째 가을을 맞이하면서
일억년 전과 똑같은 향기를 내뿜었다
일요일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왔다
암을 이겨낸 초로의 성직자가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자식 교육에는 왕도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이탈리아 명문 프로축구 구단주에게 친선경기를 갖자고
제의한 바 있는 멕시코반군 부사령관이
우리를 제발 그냥 내버려두라고 요구하는 탈근대 혁명가가
다시 대장정에 오른다는 소식이 인터넷에 떴다
내가 어디 오래 떠나 있다 온 것이다
정보화사회로 진입한 이래 인간은 전기인간이었다
선진국 아기는 태어나기 전부터 전원에 연결되었고
죽은 사람은 죽고 나서 사흘 만에야 전원에서 떨어져나갔다
자궁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오염되었으며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군인들의 정자는 무기력해졌고
코폴라 감독 마니아를 자처하는 경비행기 조종사는
양 날개에다 고성능 스피커를 달고 항공 방제를 했다
일상은 여전히 일상적이어서 두려웠다
개똥은 약에 쓰이지 않기 위해 늘 숨어다녔으며
없어도 될 것들은 개똥처럼 지천에 깔려 있었다
농부는 농사를 잘 지으면 배 두드리며 겨울을 나고
시 잘 쓰는 시인은 언제 어디서나 당당해야 하는데
아직도 여전히 시인과 농부가 맨 끝 인류의 마지막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어디 멀리 갔다가 온 것이다
과도정부는 윤달에 들어 있는 농경사회의 명절이었으며
칠칠이 최북은 애꾸눈 그대로 눈 아래 얼어 죽어 있었고
지금 머리를 긁적이며 비밀번호를 새로 만드는 사람들은
거개가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사람들이었다
혁명은 여전히 냉장고와 좌변기 사이에 있었다
케이비에스 제일 에프엠 방송처럼 나른한 오전이다
아무래도 내가 또 어디 멀리 다녀와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너 말이다 너 너는 어디 갔다 오지 않았느냐?
마음의 발견
마음은 늘 먹이 쪽에 가 있다
먹고 나서도 매양 먹이 타령이다
마음에는 마음이 너무 많아서
잠깐 한눈 파는 사이
마음은 또다른 마음에게 추파를 던진다
마음이 사회간접자본이었으면 좋겠다
공기나 별빛 또는 공룡시대처럼
거리에서 마주친 두살배기 아이의 웃음처럼
블로그에서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처럼
개인이 가질 수 없었으면 좋겠다
배타적 소유권이나 저작권을 너나없이
포기했으면 하는 것이다
왼종일 먹이를 잔뜩 먹고 돌아온
마음들이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다
텔레비전이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마음들의 잔등이 왼쪽으로 휘어져 있다
마음들은 새우잠을 자면서도
머리맡에 휴대전화를 켜놓고 있다
마음은 언제나 온 온라인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려는데 뭔가 물컹했다
국가였다 가슴에 늘 국가가 들어있는데도
매일 아침 깜빡깜빡 한다
내 속엔 마음이 너무도 많아
내 마음 쉴 곳이 없다2
마음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낯선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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