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타자는 어디에 있는가
전성태 소설집 『늑대』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 『소설의 고독』이 있음. myosu02@hanmail.net
전성태(全成太)의 두번째 소설집 표제작이기도 한 「국경을 넘는 일」에는 동남아 여행중 만난 한국인 남성‘박’과 일본인 여성 나오꼬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화자인 박은 그 특별한 잠자리에서‘육체의 열락’을 비집고 피어나는‘불온한 쾌감’에 당황한다. 나오꼬라는 여성은 그가 인생에서 가장 멀리 있다고 생각해온, 상상도 해보지 못한 낯선 존재였다. 그러니까‘일본 여자’. 서구의 독자에게라면 상당한 이해의 주석이 필요할 법한 이 기묘한 거리감은 “너는 그냥 어린 계집아이일 뿐이야”라는 소설화자의 공허한 외침 이후에도‘어정쩡하게’남는다. 그런데 이‘어정쩡함’속에‘타자를 향한 열림’이나‘경계넘기’라는 레토릭에 자신의 소설적 진실을 넘기지 않으려는 전성태의 저항선이 있는 것은 아닌가.
몽골에서의 체류 경험을 집중적으로 소설화하고 있는 세번째 창작집 『늑대』(창비 2009)에 와서도 타자 혹은 경계 앞에 선 작가의 어정쩡함은 여전한 듯하다. 아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비칠대는 모습이 제대로지 싶다. 광활한 대지와 유목의 땅이자 사회주의의 실패가 각인되어 있는 나라, 그리고 북한의 오랜 동맹국이었던 몽골.‘작가의 말’에서 전성태는 “몽골은 내게 특별한 고통과 영감을 주었다”고 쓰고 있다. 여기서‘고통’이란 무얼까. 불편함을 넘어 통증을 안기는 무엇이 몽골에 있었단 말인가. 인식이나 이해의 대상으로 놓일 때 타자의 타자성은 소멸되거나 해소된다. 이 경우 타자성은 주체의 소유목록에 추가될지언정 주체를 아프게 하거나 곤경에 빠뜨리지 못한다. 그리고 통증과 곤경 없이 주체의 진정한 성찰이나 갱신의 모색이 가능할 리 없다. 사정이 이렇다면, 몽골은 작가 전성태에게 광활한 대지의 충격이나 착잡한 현실 역사의 살아있는 유비이면서,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은 개념화하거나 이름 붙이기 힘든 고통의 출현이나 내습(來襲)이 아니면 안된다. 그럴 때만 자기보전의 집요한 의지에 둘러싸인 주체를 뒤흔드는 타자라는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늑대』에서 찾아내고 읽어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건, 혹은 사건의 징후다. 그러나 그게 쉬울까. 이것은 작가가 말한‘고통’의 진정성을 회의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반대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그런 사건의 가능성을 도래시키기 힘든 조건들로 가득 차 있다. 몽골은 외부가 아니다. 지금 이 세계에 외부는 없다. 마찬가지로 몽골이 특별한 타자의 공간일 수도 없다. 베트남도 히말라야도 마찬가지다. 그런 만큼 외부를 사유하고 타자의 시선에 자신의 주체성을 여는 일이 쉬울 이치가 없다.‘사건’이 있다 해도 아주 미미하거나, 어정쩡하거나,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번 소설집의 수록작 「코리언 쏠저」는 그런 의미에서 정직한 작품이다. 안식년을 맞아 몽골에 온 한국의 대학교수 창대가 이방인이자 단기체류자의 처지에서 겪는 이러저러한 곤경을 은근한 풍자적 어조로 그려낸 이 작품에서 그 풍자의 화살이 향해 있는 과녁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인이기도 한 화자 창대가 몽골의 전형적인 러시아식 아파트를 소개받을 때 떠올리는‘북방’혹은‘시원(始原)’의 이미지 따위의 이국에 대한 여행객의 환상이기도 하겠지만, 보다는 몽골을‘헐벗은 타자’의 자리에 놓아두려 하는 자기기만의 환상이다. 창대가 몽골의 재래시장과 인터넷 까페에서‘야만적’행패를 겪은 뒤 아파트 8층에서 현관문을 이중으로 잠근 채 두문불출하며 두려움과 경멸, 그리고 아마도 연민의 마음으로 내려다보았을 뿌연 모래바람의 도시. 이 시선의 구도는 「남방식물」에서 몽골 청년 돈얼과 그의 친구가 한국으로의 유학과 취업을 위해 도움을 청했을 때 한국인 병섭의 불편함을 숨긴 어정쩡한 손길에도 약간의 변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하다. 결국 「코리언 쏠저」의 창대는 30개월의 군복무 경험을 내세우며‘코리언 쏠저’로서 아파트 꼭대기층에서 전선줄에 몸을 감고 강하(降下)해야 할 딱한 처지가 된다. 이 장면에서 집요하게 되살아나 오히려 악화일로에 있는 한국사회의 군사문화를 떠올려야 한다면 그보다 더 처량한 독법이 어디 있으랴. 오만한 시선의 자기처벌이 전성태다운 정직하고 적실한 풍자의 표현을 얻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오도가도 못할 처지에서 문 닫기 직전의 호텔을 지키며 몽골 울란바타르의 이방인으로 부유하고 있는 전직 미술교사 병섭(「남방식물」)은 또 어떤가. 그는 북한에서 직영하는 목란식당의 평양처녀 명화가 귀국을 앞두고‘간절한 표정으로’건네준 편지를 탈북과 관련된 메씨지로 지레짐작하고 외면한다. 몽골의 성황당 격인‘어워’한귀퉁이에 버리듯 놓고 온 그 편지에는 정중한 작별인사와 함께 동료인 목란식당의 몽골 여성 오카의 한국 입국을 도와달라는 부탁이 들어 있었던 것. 병섭이 뒤늦게 어워를 찾아 그 편지를 열었을 때, 몽골 초원의 바람은 그 편지를 낚아채듯 빼앗아가지 않겠는가. 작가는 북방 울란바타르까지 올라와 뒤틀린 모습으로 자라난 남방식물 올리아스처럼 정처를 잃은 병섭의 처지를 소설의 시선으로 삼음으로써 애당초‘헐벗은 타자’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거절하려 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남는 병섭의 부끄러움은 그 완강한 구도를 역설적으로 증거한다. 그렇긴 해도, 한 개인의 실존적 자리 이전에 세계화시대 분단한국의 현실과 정치적 좌표로부터 알게모르게 강요되는 이러한 윤리적 부끄러움을 어떻게든 감당하려는 마음은 전성태 소설의 뚜렷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좀더 복합적이고 미묘한 소설적 진실의 울림이 시작되어야 할 곳은 가령 「두번째 왈츠」에서 몽골을 방문한 한국의 소설가‘나’가 매력적인 몽골 미망인 냐마에게 느끼는 한갓 바람 같은 연애의 감정이어도 좋지 않겠는가. 몽골에 귀화한‘북한 여인’을 찾아가는 두 사람의 여로가 실은 숨겨둔 감정의 줄다리기에 불과하다 해도, 몽골 북부 초원의 게르에서 그 북한 여인의 죽음을 확인한 뒤 두 사람에게 엄습한 알 수 없는‘그리움’은 정말 느닷없는 타자의 급습으로 그럴법하지 않은가. 몽골 시인 바르갈이 말한 대로 “추억이 없어도 그리움은 오는 법”일 터. 전쟁을 겪지 않은 화자와 같은‘젊은 세대’에게도, 전쟁고아로 동맹국 몽골의 보살핌을 받았고 30여년 만에 다시 찾은 몽골에서 볼강의 양치기와 결혼한 뒤 초원의 게르에서 생을 마감한 북한 여인을 아프게 그리워할 권리는 있지 않겠는가. 그 그리움은 사회주의 시절 명망있는 원로 작곡가의 세번째 부인이었다는 과거의 후광 속에서 고독을 앓고 있는 몽골 여성 냐마에게도 닥칠 만한 것이다. 소설가인 화자‘나’는 울음을 터뜨린 냐마를 품에 안고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 하고 자문하고 있지만, 사랑에 무슨 자격이 있겠는가.
자본의‘검은 혓바닥’이 삼켜버린 몽골의 초원에서 그 검은 탐욕의 시선이자 그것을 초과하는 욕망의 실재로서‘검은 늑대’의 자연과 숭고를 탁월하게 그려낸 표제작 「늑대」의 소설적 성과는 그러니까 몽골에 대한 사유를 상투적인 윤리적 구도에서 해제하고 외부 없는 세계현실을 고통과 실패 그 자체의 원풍경으로 포착함으로써 가능했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본다. 타자는 목마른 사랑의 대상이면서 몽매에도 죽이고 싶은 상대임을.‘검은 늑대’는 그렇게, 그 생생한 몰락의 얼굴로 실패한 세계의 알레고리가 되어 어두운 영혼의 울림을 남긴다.
결론을 맺자. 타자에 대한 인정이나 열림, 혹은 경계에 대한 사유가 어느 수준에서 긴절한 현실적 요구가 되고 있는 상황을 문학이 외면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몽골이든 베트남이든‘외부적’시선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는 좀더 깊은 소설적 표현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도 이러한 문학적 과제는 윤리라는 시대의 강박에 들리기 쉽다. 물론 이 강박은 쉽게 뿌리칠 수 있는 게 아니며, 더 큰 인간 진실의 발견을 통해 지양되어야 하는 것이리라.
문예지에‘자전소설’로 발표된, 이번 소설집의 숨은 백미라 할 「아이들도 돈이 필요하다」는 용이주도한 순진무구로 거창한 타자의 이야기를 무색하게 한다. 그런데 몽골 이야기의 정색과‘자전소설’의 무구 사이에는 누르스름한 곱슬머리와 갈색 눈동자의‘나-타자’에 대한 슬픈 이야기 「이미테이션」이 있다. 한국사람처럼 생기지 않은 특이한 외모 탓에 늘 놀림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아이가 게리 워커 존슨이라는 한 혼혈인의 인생(그 역시 완벽한 미국인 행세를 하는 또하나의 짝퉁 인생이다)을 이름까지 베껴 가짜 영어 원어민 강사로 살아가는 이야기. 여기서 원본과 이미테이션의 서열 혹은 경계가 전도되고 지워지는 지점이 자생적 자기 운명의 시선에서 포착되고 있다는 사실은 드문 소설적 개가가 아닐 수 없다. 이 미묘한 중간지대의 발견이야말로 리얼리즘의 심화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