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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우리 시대 문학/담론이 묻는 것

 

잉여와 초과로 도래하는 시들*

주체 과정으로서의 시 그리고 정치

 

함돈균 咸燉均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얼굴 없는 노래』가 있음. husaing@naver.com

 

* 살아서 불태워졌으며 죽어서 얼어붙은 자들이 있다. 300여일이 지나도록 수습되지 못한 채 냉동창고 속에 갇혀 있는 용산의 유령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필자.

 

 

1. 회귀하는 유령들

 

많은 주검들이 생겨났다. 그 주검들 중 일부는 사후적으로도 정중히 수습되지 못했다. 하지만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난 이 공적 살해에는 가해자가 없다. 사실의 부인과 책임의 회피, 그리고 애도의 부재. 궁극적으로는 말의 총체적인 타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 국면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정치’ 그 자체의 실종이라는 현실이다. 위기는 예상보다 전면적이고 심각해 보인다. 그러나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고 했던가(김수영 「절망」). 한국문학의 내부에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자연과 일체화된 서정의 우주를 구가하던 서정시인이 사회의 분열상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사물과 언어 사이의 부조리 탐구에 몰두하던 모더니스트가 정치체 속에서의 언어의 이데올로기를 따져묻기 시작했으며, 비평은 문학과 정치라는 해묵은, 그러나 잊혀졌던 주제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말의 타락이 곧 삶의 타락이고 시의 타락임을 직관하여, 일상어에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탈신화함으로써 시(詩)와 비시(非詩), 문학과 정치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던 김수영(金洙暎)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일까. 물론 진은영(陳恩英)이 당혹감 속에 토로한 대로 시의 내적 변화는 시인의 변화보다 훨씬 더디다(「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시인의 정치참여와 시의 정치성 간에 존재하는 이 작지 않은 간극은 이장욱(李章旭)의 견해대로라면, 시는 삶의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모든 부면과 맞닥뜨리면서 삶 자체의 근저에서 형성된 육화된 언어를 요청하기 때문일 터이다(「시, 정치 그리고 성애학」, 『창작과비평』 2009년 봄호).

그러나 이 간극은 ‘정말’ 불가피한가? 이 글의 문제의식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만일 이 간극을 넘어설 수 있다면/넘어서야 한다면 이는 어떤 식으로 ‘지양’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 이 간극을 넘어서는 일은 ‘지양’과 같은 변증법적 모티프 속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시는 논리적 봉합의 산물이 아닐 터이니 말이다. ‘시’는 시인의 이성을 통해 논리적으로 지양되거나 그의 의지를 통해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선물처럼 ‘도래’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시의 주체적 거점은 시인 자신이 아니라 도래하는 시라는 작품 자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시인은 항구적인 정체성을 지닌 일자(一者) 또는 시의 중심이 아니다. 시인은 시 작품이라는 주체적 거점 구성에 참여함으로써만, 참여하는 순간에만,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주체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므로 작품은 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은 이론에 대해 말할 수 없고, 그 거점 구성에 참여하는 주체 과정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이 시점에 존재하는 그 주체 과정의 형식들 중 일부를 적는다.

 

朝刊은 訃音 같다

사람이 자꾸 죽는다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서

죽였을 것이다

사람입니다, 밝히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죽이고 싶었다고, 죽였을 것이다

죽이고 싶었지만, 죽였을 것이다

죽이고 싶었는데, 죽였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죽을 것처럼 哀悼해야 할 텐데

 

죽인 자는 여전히

얼굴을 벗지 않고

心臟을 꺼내 놓지 않는다

 

여전히 拉致 中이고

暴行 中이고

鎭壓 中이다

 

計劃的으로

卽興的으로

合法的으로

사람이 죽어간다

 

戰鬪的으로

錯亂的으로

窮極的으로, 사람이 죽어간다

 

아, 決死的으로

總體的으로

죽은 것들이, 죽지 않는다

 

죽은 자는 여전히 失踪 중이고

籠城 중이고

投身 중이다

 

幽靈이 떠다니는 玄關들,

朝刊은 訃音 같다

-이영광 「유령 3」 전문

 

이것은 우리 시대의 정치상황 일단에 대한 문학적 폭로의 일종인가? 아니다. 조간을 ‘訃音’으로 읽는 이 시는 ‘폭로의 미학’에 근저를 이루는 원한(ressentiment)이나 분노 같은 감정의 층위보다 더 깊숙한 지점에서 발원하고, 그래서 더 오랫동안 지속되고 운동할 보이지 않는 모종의 에너지, 그러므로 더 근본적인 어떤 지점에 닿아 있다. 궁극적으로 이 시의 무의식은 정치적 현실의 표면이라기보다는 그 아래에서 표면을 결박하고 있는,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다시 그 표면 위로 넘쳐 회귀할 수밖에 없는 어떤 잉여의 에너지와 만난다. 따라서 부음 자체가 된 조간에서 ‘사람’의 죽음은 시인에게 하나의 기사, 단신(短信)으로 전달되는 어떤 정보 같은 것이 아니다. ‘訃音’이 된 조간은 삶의 공동체가 어느새 거대한 무덤이 되어버린 우리 시대의 총체적인 ‘표지’로서 ‘나타난다’. 시인이 읽은 ‘朝刊-訃音’은 그러므로 기호체계 속에서 소외되고 미끄러지는 앙상한 기표가 아니라, 세계상의 ‘실재’를 드러내는 알레고리적 기호, 예컨대 거북이 등뼈에서 재앙의 징조를 읽어내던 갑골문의 그것에 육박하는 표지이다. 그리고 거기, 원한의 감정보다 더 근원적인 바닥의 층위에서 시인의 무의식은 살의(殺意)로 가득찬 망령 같은 국가폭력의 무의식을 ‘객관적으로’ 마주한다.

“납치 중이고/폭행 중이고/진압 중”인 공권력, “계획적으로/즉흥적으로/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공권력의 무의식은 “죽이고 싶었다고” “죽이고 싶었지만” “죽이고 싶었는데” “죽였을 것이다”. 합법성을 갖추고 우연을 가장하며 필연을 동원한 이 국가폭력의 스펙터클은 사물화된 권력-폭력의 기제들이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들을 향해 분출하는 신랄하고 맹목적인 살의의 욕구 그 자체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드러낸다. 일체의 감정적 수사와 은유를 배제한 시인의 직관, 선언적 언표 속에서 공권력의 무의식은 벌거벗겨지며 그것은 ‘범죄적 사실’이 되어 시의 재판정에 회부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역설이 있다. 시의 법정에 회부된 이 폭력의 무의식은 ‘악(惡)’의 차원에조차 근접하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공권력에 의해 살해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명백히 ‘사람 아닌 존재’로 분류되어 있지 않은가. 사람 아닌 것을 죽이는 것, 사람이라고 밝히지 못하고 죽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비유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합법적으로’ 아우슈비츠에 근접해가고 있는 한 표지이다.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을 분류하는 휴머니티의 극단적인 기획은 아우슈비츠 프로그램의 핵심이 아니었던가. ‘訃音’이란 언표는 ‘哀悼’를 요구하지만, “죽은 사람은,/죽을 것처럼 애도해야” 하지만, 죽인 자가 죽은 자를 위해 “여전히/얼굴을 벗지 않고/심장을 꺼내 놓지 않는” 일이 그래서 가능하다.

주목할 점은 공동체에서 배제된 자들,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한 자들, 산 자들이 만들어놓은 노동의 질서에 자리를 할당받지 못한 자들, 사람의 범주에 들지 못하여 죽음의 자리까지 온전히 배당받지 못한 주검들, 그리하여 합법적으로 폭행당하고, 계획적으로 진압당하며, 즉흥적으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이 상황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는 것이 “궁극적으로, 사람이 죽어간다”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동어반복적 진술에 불과한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사람이 자꾸 죽”는 부음의 현실 속에서 ‘사람’의 ‘궁극적’ 이념이 동일자와 타자의 변증법을 넘어서 존재해야 함에 대한 시적 환기가 아닌가. 계급이든 민족이든 인종이든 성별이든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는 동일자-타자의 변증법은 합법의 공간에서 범죄의 정점을 이루며, 헤겔의 저 유명한 해석처럼 이 공간은 노예제의 형상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헤겔 『정신현상학』). 여기서 소멸하는 것은 ‘궁극적인’ 의미의 ‘사람’, 순수하게 ‘평등한’‘사람’이라는 이념 그 자체다. 그러므로 뒤집어 말해, 밝히지 못한 이 ‘사람’의 영역이야말로 순정한 무의식이 머무르고 옹호할 수밖에 없는 시의 거처가 된다. 그것은 법과 말의 질서가 억압하여 언표되지 못한 ‘바깥’의 자리로서, “나는 내가 있지 않은 곳에서 생각하고,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있다”(Je pense où je ne suis pas, donc je suis où je ne pense pas)라고 말한 라깡의 테제가 해방적 정치와 시적 언어에 공히 임재하는 자리이다(라깡 『에크리』). 랑씨에르의 관점을 빌려 말하면, 특권적 언표로부터 배제된 이 말과 사고의 유배지야말로 유일하게 ‘보편적’(universal)이기 때문이다(랑씨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하고야 만다는 프로이트의 견해처럼, 정치체에서 배제된 잉여, ‘사람’임을 밝히지 못한 채 “죽은 것들이, 죽지 않”고 유령으로(‘처럼’이 아니라) 회귀하며, 시인의 순정한 무의식이 그것의 ‘실재’와 조우하는 일은 그러므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억압된 정치의 회귀인 동시에 억압된 언표들의 회귀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는, 납치와 폭행과 진압이 “합법적으로” 진행중인 현실에서 “결사적으로” 죽지 않(으려)는 이 유령의 존재들은 “착란적” 죽음, 맑스적 의미의 ‘잘못된 믿음/허위의식’(mauvaise fois)의 기제를 뚫고 법의 공동체로 회귀하는 코라(chora)적 언표들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유령의 회귀가 노예적인 것의 회귀나 죽은 것들의 처량한 회귀가 아니라, 죽지 않은 것들의 회귀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경찰과 검찰과 법원이라는 법의 하수인들, 폭력적 국가기구,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폭력에 맞서 이 배제된 잉여들은 “결사적으로/총체적으로” “죽지 않는다”. 다만 “실종 중이고/농성 중이고/투신 중”일 뿐이다. 배제된 잉여들이, 다름아닌 궁극적이고 순수한 의미의 ‘(평등한) 사람’ 자체가, 그들을 죽이고 분리시킨 법의 권력 속에서 여전히, 아직, 결사적으로 죽지 않고 농성중이고 투신중인 것을 감지하는 이 시적 무의식은, 그러므로 죽은 자(것), 아니 죽지 않은 자(것)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런 방식으로 온전한 악의 형상에도 이르지 못하는 한 시대의 무능한 공적 살해를 죽은 자들의 법정으로 소환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애도를 통해 유령을 잠재우는 애가(哀歌)가 아니라, 실행되지 못한 공동체의 애도를 통해 애도의 실패라는 한 시대의 무능을 읽고, 이 무능을 피고로서 죽은 자의 법정에 소환한다는 점에서 시를 통해 도래한 소송적 사건이다. 그리하여 산 자들의 정치공동체에서 피소되고 폭행당하고 죽음에 내몰리고 애도받지 못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자들은 그들과 접속한 시적 무의식을 통해 죽은 자들의 법정, 시의 법정에 원고의 자리로 회귀한다. 물론 반복하건대 그것은 “전투적”이고 “착란적”인 이데올로기의 포화 속에서 언표되지 못한 억압된 말의 귀환이고, 동일자와 타자의 변증법 바깥에 있는 잉여로서의 말이다.

차마 제 스스로를 밝히지(언표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처소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은 오빠에 대해 애도를 요구했던 안티고네가 공동체의 애도의 실패를 증언함으로써 공동체의 무능을 폭로했을 때, 그녀가 왕과 산 자들의 법에 맞서 신들의 영원한 법과 죽은 자들의 법을 내세웠던 까닭이 또한 이런 맥락이다. 신들과 죽은 자들이란 법의 공동체와 이데올로기적 말의 질서 속에 감금된 타자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회귀하는 것은, 죽지 않는 것은, 죽음을 요구하는 법과 공권력에 맞서 결사적으로 농성중이고 투신중인 것은, ‘사람’이 되지 못해 죽고 만, 아니 죽지 못한, 이 사람들만이 아니다. 법과 권력이 시달하는 죽음과 노예의 변증법, 일체의 이데올로기(모든 이데올로기는 강자의 이데올로기라는 맑스의 말을 상기하라)에 맞서, 시의 무의식은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한 말, ‘사람’의 형상을 갖추지 못한 얼굴 없는 말, 찢어진 봉인 안에 여전히 꿈틀대고 있는 유령의 말을 위해 그렇게 농성중이고 투신중이다. 데리다의 해석을 빌리면 이영광(李永光)이 닿은 유령의 시간은, 역사의 시간 속에서 불행했던 햄릿이 그 주위를 배회하는 유령의 목소리를 들으며 “세계의 시간이 어긋나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고 선언했던 ‘정치적’ 순간과 비슷하다(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억압된 것들이 회귀하는 시간은 그렇게 정치적이고, 이 순간, 시의 도래는 불가피하다.

 

 

2. 불가능한 이야기들

 

억압된 것들이 회귀하는 시간은 정치적이고, 이 순간, 시의 도래는 그렇게 불가피하다. 이 회귀하는 것들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든 그것은 말의 질서와 결박된 정치공동체의 오인된 주체(의식)로부터 배제된 타자로서, 이 세계에 편입되지 못한 잉여이다. 그러므로 말의 이전이나 말의 바깥에서, 억압된 말의 존재를 확인하고 회귀하게 하는 이 시적 무의식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플러그에 접속하지 않을 수 없다. 주체 구성의 메커니즘에 대한 라깡의 직관이 알려주듯, 이 지점은 명백히 이데올로기적인 심급을 문제삼는다. 이러한 시적 무의식의 ‘정치적’ 접속은 의심할 바 없는 공동체의 지식들이 실은 하나의 ‘의견’(doxa), 또는 특권적 지식에 불과함을 폭로함으로써 정치체의 지식과 믿음의 질서를 탈신화화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단단하고 매끄러운 유클리드적 믿음의 세계에 의문을 도입하고 균열과 불화를 틈입시킨다. 이장욱의 많은 시들에서 그 무의식은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삶의 여러 부면들과 접촉함으로써 그렇게 정치적인 것과 조우한다.

 

동사무소에 가자

왼발을 들고 정지한 고양이처럼

외로울 때는

동사무소에 가자

서류들은 언제나 낙천적이고

어제 죽은 사람들이 아직

떠나지 못한 곳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前生이 궁금해지고

동사무소에서 우리는 공중부양에 관심이 생기고

그러다 죽은 생선처럼 침울해져서

짧은 질문을 던지지

동사무소란

무엇인가

 

동사무소는 그 질문이 없는 곳

그 밖의 모든 것이 있는 곳

우리의 일생이 있는 곳

그러므로 언제나 정시에 문을 닫는

동사무소에 가자

 

두부처럼 조용한

오후의 공터라든가

그 공터에서 혼자 노는 바람의 방향을

자꾸 생각하게 될 때

 

어제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거나

혼자 잠들고 싶지 않을 때

왼발을 든 채

궁금한 표정으로

우리는 동사무소에 가자

 

동사무소는 간결해

시작과 끝이 무한해

동사무소를 나오면서 우리는

외로운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왼손을 들고

왼발을 들고

-이장욱 「동사무소에 가자」 전문

 

동사무소의 “서류들은 언제나 낙천적이다.” 삶과 죽음에 관련된 모든 서류들이 비치되어 있는, 그리하여 “우리의 일생이 있는 곳”인 그곳은 “시작과 끝이 무한”하며 에누리없이 “간결”하다.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서류가 구비되어 있기에 “모든 것이 있는 곳”인 동사무소에는 그러나 “동사무소란/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유일하게 누락되어 있다. 시인은 의문의 여지 없이 명백하고 낙천적이기까지 한 이 동사무소를 통해 공동체적 삶의 근거가 되는 공적 지식더미들의 허구성을 역설적으로 야유한다. 간결하면서도 무한한 이 서류더미의 세계는 기입될 수 있는 말과 그렇지 못한 말의 형식을 갈라 정보(‘공적 지식’)로 등록하고, 희로애락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생의 부면들을 일사불란하고 매끄러운 서류적 코드로 가공하고 분류하며, 그럼으로써 삶을 ‘합리적’으로 규율하고 관리한다. 모든 과거가 있으므로 미래까지 규율할 수 있는 이 ‘정시’의 세계에는 오류가 없다. 가공된 지식과 승인된 언어, 인지착오적 믿음의 체계를 통해 구성된 이 세계에서 ‘(승인된) 주체’는, 기왕에 주어진 노동의 사회적 분할을 자진해서 수행하고 세계와 거짓화해를 함으로써 ‘낙천적’으로 삶을 살아간다.

“왼발을 들고 정지한 고양이처럼/외로울 때”는 이 오류 없는 세계 속에 ‘질문’이 ‘도래’함으로써 동사무소의 서류에 유일하게 누락되어 있던 이질적인 타자가 회귀하는 순간이다. 이장욱에게 이 순간은 ‘개가 되어 달리다가 늑대가 되어 문득 뒤돌아보는 순간’(「개와 늑대의 시간」)이나 ‘집과 직장을 왕복하다가/문득 뒤돌아보는 순간’(「불가능한 이야기」)에도 찾아온다. 시인에게 이러한 질문의 도래는 “모든 것이 있(다고 믿)는 곳”의 ‘그 너머’를 소환함으로써 완결된 기하학적인 믿음의 세계에서 배제된 ‘다른 시간’이 도래하는 일이다. “(그러한 때에는) 동사무소로 가자”라는 역설적인 야유의 형식을 취했지만, “조용한/오후의 공터”나 “혼자 노는 바람의 방향을/자꾸 생각하게 될 때” “어제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을 때가 또한 그런 순간이다. 이 순간 체계가 미처 분할하고 배치하지 못한 다른 감성의 코드가 주체를 통해 도입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기왕의 감성의 나눔 체계에는 미묘한 균열이 일어난다. 이장욱에게 이렇게 ‘질문’이 도래하는 순간들은 언제나 ‘시’가 도래하는 순간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언제나 또한 이런 방식으로 ‘정치적’이다.

하지만 이 정치성은 그 시의 ‘윤리’를 경유함으로써만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이 시에서 짐작되는 바대로, 그 시의 윤리는 ‘질문을 사랑하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라깡이 정초한 정신분석의 윤리학을 인용한다면, 이장욱의 시는 ‘네가 결코 알지 못하는 것들만을 사랑하라’라는 윤리학에서 태어나고, ‘정치(적인 것)’는 그 순간 매번 그렇게 도래한다. 그리하여 알려지지 않은 것을 향한 그 시적 욕망은 과거를 소환하기보다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어떤 것들, 언표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예감하는 데 오롯이 바쳐진다. 한명의 비평가로서 그가 주장하는 ‘리얼리즘론’이 이미 알려진 것들의 반복적 현시, 즉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생의 전방위적이고 심층적인 부면에서 감지되는 에너지와 맞닿는 장에서 ‘발생’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마치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메시아 신학이 그러하듯, 그 시의 무의식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존재와 닿음으로써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예감하고, 상투적인 일상의 즉각적인 판단중지를 야기하는(“외로운 자들만 읽을 수 있는 한권의 책이 되기 위해/모두들 생각을 멈추었다” 「목소리들」) 낯선 것과 일상을 대질시키는 방식으로 세계의 경계를 확장한다. 언표되지 못한, 사고하지 못한,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의 잉여들과 만나려는 이 시적 무의식의 집요함이, 하나의 윤리의 형식을 갖출 수 있음을 암시하는 다음과 같은 시를 간단하게나마 언급하는 일이 그래서 필요하겠다.

 

너는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꽃과 구름의 차이에 대해 말하고

그는 무서워서 무서워서 차라리

어둠이 되어버린 소년에 대해 말했다.

길에서 잠든 사람이 눈을 감은 채 긴 이야기를 시작하자

기도하던 여자들은

어디에서나 자라나는 묘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들이 자라나서

정말 꽃이 되는 이야기

무덤이 되는 이야기

처음인 듯 마지막인 듯

위험한 결심에 대한 이야기

집과 직장을 왕복하다가

문득 뒤돌아보는 순간의 이야기

-이장욱 「불가능한 이야기」 부분

 

왜 이 ‘불가능한 이야기’와의 조우는 ‘윤리적’인 것에 근접하는가? 그리고 왜 하필이면 이 순간 ‘시’가 도래한다고 말하는가? 이는 이 이야기가 “집과 직장을 왕복하다가/문득 뒤돌아보는 순간의 이야기”인 까닭이다. 하지만 이 순간은 회고적이고 성찰적이라기보다는 “문득” 도래한 순간이라는 점에서, 도덕적 성찰의 시간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반성되지 않고 매개 없는 도래라는 점에서 헤겔에 대한 바디우(A. Badiou)의 철학적 전유를 따른다면, 이 순간은 도덕적(Moralität)이라기보다는 윤리적(Sittlichkeit)이다(바디우 『윤리학』). 예기치 못한 이야기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이야기들이 “집과 직장”, 밥과 노동에 예속된 현실, ‘존재의 끈질김’이라고 할 만한 일상적 연속성에 단절을 초래하는 이 시간 속에서, 시인은 시라는 주체적 거점 구성의 과정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충만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공백을 초래하는 시간이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고된 바 없는 그 ‘불가능한 이야기들’은 언표되지 못한 세계의 ‘바깥’, 잉여, 혹은 ‘아직 아닌 것’들을 소환함으로써 “집과 직장을 왕복”하는 삶의 질서에 구멍을 내지 않는가. 오인적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공동체의 지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 개별적 불가능성들은, 불가능한 것들의 회귀를 통해 현실 속 가능한 것들의 가능성을 추궁하고 그것의 실재를 심문한다. 그렇게 ‘불가능한 이야기들’은 ‘신은 있는 것들(τα οντα)을 폐지하기 위해 있지 않은 것들(τα μη οντα)을 선택한다’는 사도 바울의 신학을 시적으로 실현한다(바디우 『사도 바울』). 예컨대 “낮과 밤을 구분”하는 우리의 지식은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인가(지식에 있어 ‘차이’의 범주들). 반대로 “꽃과 구름의 차이”를 말하는 일은 ‘불가능한 이야기인가’(지식에 있어 ‘동일성’의 범주들). ‘어디에서나 자라나는 묘지’와 같은 언표되지 못한 사물들의 세계가 도처에 있다. 하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 아직 아닌 것, “불가능한 이야기들이 자라나서” “정말 꽃이 되는 이야기/무덤이 되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시인이란 (이미 본 것을) 재현하는 자가 아니라 (아직 보지 못한 것을) 예감하는 자이다. 시인은 사물과 세계에 내재한 잠재성, 블로흐 식으로 말한다면 ‘근접해 있는 어둠’에서 존재의 개방을 앞서 감지한다(블로흐 『희망의 원리』). 그에게 도처에 근접해 있는 어둠은 단지 무(無)가 아니라 ‘메시아’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감의 순간은 ‘그저’ 도래하는가?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 시인은 말한다. “누군가는 미래로 전화를 걸고/누군가는 갑자기 차도로 뛰쳐나갔지만/모두가 거리의 정적을 듣는 것은 아니다”(「목소리들」). 예감은, 그리하여 ‘시’의 도래는 결단하는 자의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윤리’의 요청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집과 직장을 왕복하다가/문득 뒤돌아보는 순간”의 윤리, “처음인 듯 마지막인 듯/위험한 결심”을 할 수 있는 윤리. 시인에 따르자면 “그것은 욕설에 익숙한 소년소녀들의 몫”(「목소리들」), 다름아닌 잉여와 배제된 자들의 윤리이다. 그래서 예감을 도래하게 하는, ‘시’를 도래하게 하는 이 윤리는, ‘바깥’의 정치와 접속한다.

 

 

3. 넘침의 윤리학, 도래하는 정치 그리고 시

 

이제 우리는 ‘시’의 ‘도래’를 윤리의 요청과 더불어 이야기했고, 다시 이를 ‘바깥’의 정치와 가까스로 접속시켰다. 이 화두를 조금만 더 진행시키기 위해 다시 비평가 이장욱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는 맑스적 언표에 대한 마셜 버먼(Marshall Berman)의 관점을 인용하면서, 또는 현대의 군중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킬 때조차 스스로 그들의 공범자가 된 보들레르의 아이러니를 거론하면서, 이장욱은 ‘리얼리즘’은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취한다. 이 리얼리즘은 김수영이 실천했던 바대로 모든 종류의 경계가 한계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발생하며, 이 지점에서 삶의 한계를 체험하고 실험하는 시인의 언어와 타락한 세계는 구분되지 않는다. 이장욱에 따르면 이 ‘타락’은 시인 자신의 삶이 세계의 외부에 있지 않음에 대한 자각이며, 이 자각이야말로 세계의 타락을 넘어설 ‘시’를 발생시키는 조건이 된다(이장욱, 앞의 글). 이 글의 질문은 정확히 이 ‘조건’에 대한 숙고로부터 출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세계 연루는, 그리하여 시적 아이러니는 ‘시(의 정치성)’의 발생에 불가피한가? 관념의 고공비행을 피하면서도, 세계와의 연루를 넘어 세계의 경계를 확장하는 ‘시’의 발생은 불가능한가? 좀더 첨예한 지점에서 발생하는 삶의 윤리학을 정치학으로, 그리하여 다시 이를 ‘시의 정치(학)’로 전환하는 방식이 존재하지 않을까? 여기에서 바디우가 제안하는 ‘넘침의 윤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은 유익해 보인다. 물론 나는 암암리에 이 글에서 이미 이 윤리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일상적 이해관계 너머를 지속하고 계속 욕망하는 윤리, 이름하여 ‘계속하시오!’의 윤리이다. ‘동물적 생존명령’에 예속된 ‘존재의 끈질김’과 단절하고, 삶의 질서를 초과하는 과잉을 지속적으로 사랑할 것. 바디우는 이 윤리학을 라깡이 가르쳐준 것이라고 말한다. ‘너의 욕망을 따르라’는 정신분석의 윤리학은 삶의 초과를 욕망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졌던 것들과 단절하고, 내가 모르는 것들을 사랑하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바디우의 라깡 해석에 따르면, 욕망은 주체에게 있어 가장 미지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의 질서를 넘쳐나는 과잉들, 잉여들,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욕망할 것인가가 윤리의 관건이 된다(바디우 『윤리학』). 라깡이 가르쳐주고 바디우가 전유한 이 욕망의 윤리학은, 그러나 우리가 어딘가에서 이미 보았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것은 일찍이 바로 니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 아니었나. ‘너의 행위의 원칙이 모든 사람의 행위의 원칙에도 타당한 것이 되게 하라’는 칸트의 ‘보편타당한’ 윤리학에 맞서, 니체는 ‘나는 내가 지금 욕망하고 있는 것을 앞으로도 계속 욕망할 수 있는가’ 하고 자문한 적이 있지 않았나(니체 『유고』). 그런 의미에서 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란 바로 삶의 초과, 과잉을 계속 욕망하는 자가 아닌가. 정신분석의 윤리학, 능동적 니힐리즘의 윤리학을 정치(학)로 전환하려고 할 때, 우리가 접속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그런데 이 지점은 뜻밖에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정치학과 만나는 듯이 보인다. 대문자 혁명(Revolution)으로 표기되어 있는 프랑스혁명과 볼셰비끼혁명에 대해 아렌트가 보인 혐오감을 떠올려보자. 그녀가 보기에 근대의 정치체를 정초한 이 두 대혁명은 노동(경제)에 대한 정치의 전적인 예속을 보여주는 사건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정치’의 실종을 보여주는 ‘타락한’ 사건이었다(아렌트 『혁명론』). 맑스 이후의 시대-다름아닌 ‘정치경제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그 견해를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해도, 여기에는 예민하고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있어 보인다. 정치를 (경제적) 하부구조의 반영으로 해석하는 정치경제학과 비판철학은 ‘동물적 생존명령’에 정치를 예속시켰던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 말이다. 선의 본성과 필요한 것의 본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쏘피스트의 본질이라고 한 이는 플라톤이었다(플라톤 『국가』).

그렇다. 윤리가 삶의 초과를 요구하듯, 정치도 초과를 요구하는 게 아닐까. 정치 역시 동물적 생존 ‘너머’를 향해 넘쳐나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욕망의 윤리학이 단절을 지속하고 과잉을 욕망하며 넘침을 사랑하고 잉여에 귀기울이듯, ‘정치’의 윤리학이 있다면 그것 역시 단절과 과잉과 초과와 잉여를 욕망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이 단절과 넘침의 자리란 바로 ‘시’가 도래하는 자리가 아닌가. 무용(無用)한 것을 사랑하고, 자명한 것과 결별하며, 알지 못하는 것에 몸을 던지고, 삶의 질서를 초과하는 과잉을 계속함으로써 세계의 중력을 이탈하는 그 자리야말로 ‘시’가 발생하는 자리가 아닌가. 타락한 세계와의 연루를 넘어서, 그러므로 시적 아이러니를 넘어서, 저 자신에게 매개 없이 임한 ‘스승의 말’을 즉각적으로 수락하고, 존재의 끈질김과 단절하기를 지속적으로 욕망함으로써만이 주체적 거점 구성과정의 일부가 되는 자, 그가 바로, 오직 그 순간에만, 비로소 시인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 삶의 윤리학은 ‘정치(적인 것)’와 매개 없이 만나고, 은총과 같은 시의 도래는 필연적이다. 그리고 다시 그 자리에서 시의 리얼리즘은 확장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생의 한쪽을 주체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오히려 삶의 첨예한 중심을 잡고, 세계의 끈질긴 중력을 이탈함으로써만이 ‘표지판 너머’를 계속 욕망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질주’의 삶을 거기에서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낡은 오토바이에 철가방을 싣고

무서운 속도로 짜장면을 배달하지

왼쪽으로 기운 것은 오토바이가 아니라 나의 생이야

기운 것이 아니라 내 생이 왼쪽을 딛고 가는 거야

몸이 기운 쪽이 내 중심이야

기울지 않으면 중심도 없어

나는 오토바이를 허공 속으로 몰고 들어가기도 해

길을 구부렸다 폈다

길을 풀어줬다 끌어당겼다 하기도 해

오토바이는 내 길의 자궁이야

길은 자궁에 연결되어 있는 탯줄이야

그러니 탯줄을 놓치는 순간은 절대 없어

 

(…)

오토바이가 기울어도 짜장면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내 생의 중력이야

아니 중력을 이탈한 내 생이야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은 모두 이곳이 아니야

이곳 너머야 이 시간 이후야

나는 표지판은 믿지 않아

달리는 속도의 시간은 지금 여기가 전부야

기우는 오토바이를 따라

길도 기울고 시간도 기울고 세상도 기울고

내 몸도 기울어

기울어진 내 몸만 믿는 나는

그래 절름발이야

삐딱한 내게 생이란 말은 너무 진지하지

내 한쪽 다리는 너무 길거나 너무 짧지

그래서 재미있지

삐딱해서 생이지 절름발이여서 간절하지

길이 없어 질주하지

-이원 「영웅」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