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절망의 심연을 잠행하는 역설
현기영 장편소설 『누란』
박창범 朴昌範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생의 우울을 지탱하는 ‘지옥의 눈’」 등이 있음. arasaro@naver.com
본디 과작의 작가이니 근 십년 만에 다시 찾아온 현기영(玄基榮)의 더딘 행보야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유독 긴 산고 끝에 출간된 『누란』은 기왕의 현기영적 세계와는 이질적이어서 자못 흥미롭다. 예의 4·3의 비극을 다루지도 않거니와 그 직설의 화법 또한 다소 생경하다. 『누란』은 386세대 운동권의 막내 학번‘허무성’의 직정적인 목소리가, 더불어 허무성을 “좌파 꼴통”으로 치부하는 대학생들과 박정희를 신봉하는 파시스트‘김일강’의 언설들이 분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거침없는 목소리는 특정 장 전체가 대화로 일관하는, 그래서 희곡이나 씨나리오에서나 어울릴 법한 외투를 걸치기도 한다. 이러한 파격은 서정적이고 농밀한 문장들이 유년과 그 상처를 중심으로 번져나가던 『지상에 숟가락 하나』나 역사의 격랑에 휩쓸렸던 노년의 삶을 시적 세계에 육박하는 격조있는 문체로 보듬었던 「마지막 테우리」와 비교하면 더 확연해진다. 이는 궁극적으로 이 소설이 소비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전향과 파시즘 등의 난감한 테마와 또 그것에 반응하는 위축된 혹은 순응·영합하는 정신과 맞대면하고자 하는 절박한 인식을 보이는 데서 비롯할 것이다. 서술과 묘사에 기반한 유기적 짜임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듯한 것도, 인물들의 거르지 않은 목청이 부딪치는 향연의 장을 마련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견 낯익은‘80년대적 정신’을 간직한 혹은 끝내 저버리지 못한 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연유도 여기에 있을 듯하다. 어찌 보면 허무성은 역사의 현장과 항쟁의 거리를 향해 달뜬 걸음으로 내딛던 위기의 교사‘한기웅’(「위기의 사내」, 1988)이라 할 수도 있다. 정의와 분노의 함성이‘메아리로도 들려오지 않는’이미 파한 자리에 뒤늦게 도착한 한기웅/허무성 말이다. 동일한 장소에서 허탈한 신음(“그들이 바꾸려고 한 시대가 도리어 그들을 바꿔버렸다” 84면)을 흘릴 수밖에 없는 그들이란 결국 “잊혀진 시절이 남긴 초라한 잔해”(91면)이자 “다른 혹성”(79면)에서 온 이방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누란』은 “세상과 주파수가 맞지 않는 고장난 라디오”(63면)의 자리를 꿰차고 고집하는 낯선 이방인의 도시 체류기라 할 수 있겠다.
서사는 대략 두가지 물음을 축으로 직조된다. 그리고 그 질문이란 허무성의 두번에 걸친 지옥 체험과 관계한다. 80년대 막바지 남산 지하실에서 주인공에게 가해진 고문이 첫번째 지옥 체험에 해당한다. 혹독한 고문으로 초주검이 된 허무성은 결국 “겁똥 싼 한마리의 똥개”가 되어 동지를 판다. 훼절의 오명을 뒤집어쓴 그를 동지들도 애인‘문정선’도 외면한다. 그리하여 그는 안기부의 장학생이 되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5년 후 귀국, 서울 근교에 위치한 대학에 자리잡는다. 이후 허무성은 고문의 악몽과‘공포’를 떨치지 못해 김일강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또 그의 지시를 부득불 좇는다. 물론 여기에는 고문을 못이겨 동지를 저버렸다는 사실에서 오는 체념과 자조, 자기분열의 의식이 배어 있겠다. 그렇지만 표면상의 이러한 순종에도 불구하고 허무성은 자신을 여전히‘진보적 역사학도’라 여긴다. 이런 맥락에서 허무성의 행보는 위장 전향자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되레 배신과 변절의 명칭은 허무성의 옛 동지였으나 운동권의 이력을 훈장 삼아 정치판에 뛰어든‘한석민’류에 걸맞을 것이다. 이 소설은 결국 주인공이 파시스트 대변자 김일강에 진정 굴복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셈이다. 허무성은 안정된 교수 자리를 박차고 김일강에게‘식칼’을 보냄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것으로 답한다.
허무성이 체험한 다른 하나의 지옥이란 바로 시장이다. 그는‘80년대의 자식이었으나 아비를 잡아먹은’90년대를 자본의 질서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세계로 규정한다. “젊은 영혼을 달구었던 이성·명예·희생·용기”(83면) 등 80년대의 정신을 배반한, 그리하여 아비의 어떠한 유산도 거부한 듯한 90년대 이후의 세상이란‘시대를 닮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기에 또 하나의 감옥일 수밖에 없다. 아도르노는 일찍이 “인간과 인간이 갖게 된 경제적 운명 사이에 구별”이 없는 사태를 두고 “가장 슬픈 일”이라 칭했다(『계몽의 변증법』). 그의 탄식은 고스란히 허무성의 것일 테고, 또 그것의 뿌리는 모름지기 자본의 감옥과 소비향락의 전체주의적 풍토에서 벗어나기가 요원하다는 암울한 인식에서 온다. 이러한 비관은 서울에 불어닥친 극심한 황사를 바라보며 한때 번창했던 왕국‘누란(樓蘭)’을 삼켜버린 모래폭풍을, 신의 채찍을 들고 근대문명을 공포에 떨게 한 훈족의 왕 아틸라를 연상하는 대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 여기서 자본의 논리와 그 강고한 질서를 멈춰세울‘신적 폭력’(벤야민)을 환기하기란 그리 낯설지 않겠고, 때문에 환각으로 솟구친 허무성의 저 초월적 요청에 담긴 절박함과 암담함 또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대체 어디서 탈주의 발판을 기대할 수 있는가. 현기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섣부른 낙관과 희망을 호출하지 않는다. 대신 이 암담한 세상에서 절망의 저점을 향한 “철저한 추락”을 주문한다. 예컨대 “이종구의 편지를 부적처럼”(287면) 품고 노숙자의 세계로, 절망의 심연을 향해 고행을 떠나는 허무성의 행로가 보여주듯 말이다. 추락의 요청은, 「작가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절망의 밑바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새로운 정신과 자아’가, 갱신의 삶이 가능하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따라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여정 자체가, 절망의 전유와 몰입의 열정이 삶의 에너지가 된다. 칠흑에서, 칠흑에서야 빛을 발하는 별처럼 말이다. 이러한 역설은 암을 선고받고 추락의 길을 내디딘 바 있던 허무성의 친구‘이종구’의 삶이 예증하고 있다.
그래서 허무성이 천둥번개가 내리치던 노숙생활의 어느날 문득, 대학시절 지리산 역사기행에서 보았던 폐가와 조부모가 살던 집을 떠올리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그곳은 바로 빨치산 토벌 때 통비분자로 찍혀 처형된 조부모와 어린 삼촌, 그리고 그와 동질의 억울한 원혼들이 잠든 처소였다. 소설은 허무성이 “그 집의 유령들과 함께 살기로 결심”(298면)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이러한 대미가 의미하는 바는 허무성이 다다른 도정의 끝이란 충절이기도 한 애도의 행위라 할 수 있겠고, 그것은 또한 과거의 망각이‘지금-여기’의 암울과 참담을 초래한 것임을 알려준다. 과거의 참된 복원은 사실의 복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현재의 지평에 불러들여 지금 이 자리의 삶을 정초·재구성하는 데 있을 것이다. 허무성이 지리산 자락의 원혼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그리하여, 대의의 일념에 충절을 바쳤던 80년대의 숭고한 에토스를‘경제에 근거한 서글픈 운명들’이 여전히 돌보지 않는 작금의 세태에 대한 질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