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책머리에

 

통권 150호를 내며

 
 

계간 『창작과비평』이 통권 150호를 낸다. 창간 44주년을 지내고 이제야 150호를 간행하게 된 저간의 사정은 새삼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독자들이 아실 것이다. 우리는 이 기념호 간행을 진지한 성찰과 또 한번의 자기갱신의 기회로 삼는 것으로 자축을 대신하려고 한다.

그간 창비의 성취는 나라 안팎에서 이미 두터운 평가를 받은 바 있지만 자기갱신의 필요성을 상기시키는 안팎의 목소리도 많다. 더구나 지금은 참여정부 시기에 비할 바 없을 정도로 심각해진 민주주의의 후퇴, 그리고 그와 상호작용하는 분단된 한반도의 위기가 동아시아 질서의 불안정까지 격화시키는 때가 아닌가.

우리는 창간 40주년을 맞은 2006년 초에, ‘운동성 회복’을 통해 계간지를 쇄신하겠다고 독자들께 약속드렸다. “자기쇄신을 거친 진보세력이 제도 안과 밖의 활동을 연동적으로 추진하자는 것”을 운동성의 요체로 인식하고, “이미 주류문화의 일부가 되기도 한 『창비』 편집진부터 타성을 떨치고 우리시대의 요구에 헌신하는 과제 수행에 더 많은 이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앞장서”(2006년 봄, 40주년 기념호 책머리에)겠다는 것이었다. 극도로 불안한 오늘날의 시대상황은 어느 때보다 더 치열한 운동성 회복을 요구하고 있음을 우리는 통감한다.

운동성을 강화하기 위해 『창비』에 대한 우려와 비판을 점검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긴요한 일이다. 우선, 각자의 취향에 맞는 전문매체를 선호하는 젊은 세대의 출현과 블로그나 트위터 등 새로운 매체의 발전 등으로 비롯된 상황변화 속에서 『창비』처럼 종합적 지성과 전체적 전망을 중시하는 종이잡지가 얼마나 파급력을 지닐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그런가 하면 도리어 『창비』의 영향력을 무겁게 보면서 창비가 ‘문화권력’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전자의 문제제기에 관해 우리는 한편으로 온라인판 창비를 운영하고 인터넷 칼럼 ‘창비주간논평’(weekly.changbi.com)을 간행하는 등 인터넷 세대에 다가가려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 새로운 매체를 이용하면서도 종이잡지 창비를 읽을 필요성을 느끼는 독자를 더 많이 확보하는 일에 가일층 힘을 기울이고 있다. 새 매체를 이용하든 하지 않든 우리 사회에는 한반도의 구체적 현실에 대한 심층적 인식과 함께 문학과 예술, 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종합적 비판의식을 제공하는 지적 구심작용에 대한 갈망이 있으며, 제대로 하기만 하면 계간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그것에 부응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화’되었다는 일각의 비판은 물론 창비가 나태해지거나 타락하지 않도록 다그치는 고마운 채찍질로 받아들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창비가 쌓아올린 성취에 합당한 영향력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지는 않으며 오히려 최대한으로 키워나가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실제로 창비는 보수적 주류언론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그로부터 소외당하기 일쑤라는 점에서 여전히 비주류의 위치에 있지 않은가.

사실 6월항쟁 20주년을 맞았을 때 어느 진보적 일간지가 내린 평가는, 군사정권하에서 정간, 폐간, 판금 처분을 거듭 겪으면서도 “비판적 연구자-문인-저술가 그룹을 한데 묶은 ‘비판지성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유지”하여 “유일하게 시장에서 성공한 비판적 지식인 미디어”(경향신문 2007.4.30)라는 것이었다. 또 아시아의 한 비판적 잡지 편집자에 의해 “이 지구화시대에 『창비』는 더이상 한국인들만의 자산이 아니라 전체 아시아인의 자산”(천 꽝싱, 40주년 기념호)이라고 기대를 받기도 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보여준 이런 반응들은 창비가 “한결같되 나날이 새로운” 자세를 지키려 노력한 결과라고 내세우고 싶다. 시대상황에 밀착하여 그날그날의 현장에 충실하되 언제나 긴 안목의 시야를 함께 견지하려 노력해온 결과이기도 하다. 창비는 거대담론에 냉소적인 일부의 태도에 대해 거대담론을 무시하면 남의 거대담론에 자기도 모르게 포로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한편, 그때그때 구체적인 정세에 대응하여 핵심고리를 짚어내 풀어나가는 데 소홀한 원론적 논리 또한 거부해왔다. 이런 자세는 장기적 과제와 중·단기의 과제를 동시에 사고하면서 그것을 일관된 실천으로 연결시키는 작업과 닿아 있다.

이 작업의 이론적 기반은 우리의 시대인식이다. 2000년대 첫 십년을 마감하는 지금, 창비는 한반도가 매우 특이한 성격의 ‘통일시대’를 맞고 있다는 시대인식을 지니고 있다.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통일이 진행되는 한반도식 ‘통일시대’로 진입했으므로, 이 시대적 특성에 부합하는 총체적 개혁의 실천의지를 다잡는 것이 창간 이래 지켜온 ‘창조와 저항의 거점’으로서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의 심각한 악화를 포함하는 ‘나라 다스리기(거버넌스)의 총체적 난국’을 창비는 87년체제의 말기현상으로 파악한다. 19876월항쟁으로 시작된 민주화 이행은 구체제를 제대로 청산한 이행이 아니라 구체제와의 타협에 기초한 이행이었고 그것이 내포한 긍정적 동력이 차츰 소진되면서 여러 사회세력간에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나쁜 교착상태’에 이르렀는데, 그 말기적 증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게 오늘의 상황이다. 이제 한국은 87년체제보다 못한, 민주주의의 퇴행에 순응하는 파국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시민참여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민주적 거버넌스’를 짜는 데 성공해 분단체제극복을 가속화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처해 있다.

이렇듯 엄중한 국면에서 150호 이후를 내다보며 창비가 40주년 이래로 해온 주요 성과를 점검하고 또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가다듬으려 한다.

먼저 계간지 창간 40주년을 기념하여 시작한 사업 중 하나인 ‘창비주간논평’은 “계간지를 통해서 가다듬은 담론들을 매일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과 대면시켜 그것의 설명능력을 실험하는” 일이기에 당연히 더 힘을 기울여나갈 것이다. 한미FTA, 촛불집회, 4대강사업, 천안함사건 등 국내 핵심현안에 대한 논평들을 비롯해 나라 안팎 여러 분야의 쟁점을 밀도있게 다뤄, 이미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했으며 그들로부터의 폭넓은 반향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 주요 내용의 일부가 매년 『A4 두 장으로 한국사회 읽기』 씨리즈로 간행되고 있는바 그에 대한 진지한 반응도 큰 격려가 된다.

이와 더불어, ‘운동성 회복’을 통해 계간지를 쇄신하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창비식 담론’의 발신과 그것을 뒷받침할 ‘창비식 글쓰기’의 모범을 보이겠다고 한 약속을 되새겨본다. 그 약속은 거버넌스 위기 분석과 신자유주의 비판에서 한반도의 대안적 발전전략 제시에 이르기까지 현정세에 치열하게 대응하되 중장기적 전망과 결합하는 데서 나름의 성과를 보였다고 자부한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작년에 시작한 ‘창비담론총서’ 간행작업도 더욱 알차게 추진하고자 한다.

새로운 담론과 글쓰기가 대세를 이루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체계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이런 판단에서 우리는 150호 발간을 계기로 ‘창비사회인문학평론상’을 제정함으로써 ‘사회인문학’의 구현에 기여하고자 한다. 사회인문학은 자연과학을 포함하여 분과학문의 틀을 벗어나 통합적 학문을 지향하는 부호이다. 문학적 상상력과 현장의 실천경험 및 인문사회과학적 인식의 결합을 꾀하는 창비의 오랜 경험이 녹아든 구상인바 이를 통해 탈분과학문적 연구와 글쓰기가 한층 더 진작되기를 소망한다. 이 시도가 대학 안팎의 혁신 노력과 어우러질 때 기존 학문체제 재편의 윤곽이 드러나리라 믿는다.

사회인문학이 제대로 작동하는 데 문학의 역할이 커다란 동력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창비는 “정말 문학다운 문학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삶이 요구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변증법적 인식의 가장 충실한 표현”이란 인식에서, “문학계간지가 인문사회과학 여러 분야의 논의를 수용하는 것도 () 문학 본래의 변증법적 성격이 자연스럽게 실천되는 과정의 일부”인 것으로 확신하고 그렇게 실천해왔다.(「창작과비평을 다시 내며」 1988년 봄호) 그래서 계간지 지면에 빼어난 창작물을 실으려는 노력을 배가함은 물론, 위기의 시대에 문학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물으면서 문학과 시대의 상호작용, 문학의 정치성과 리얼리즘, 실험적인 문학과 소통에 대한 대중의 요구, 그리고 한국문학과 세계의 소통 같은 중요한 논의를 이끌어왔다. 민족문학론 이후로 창비 문학담론의 존재감이 희미해졌다는 이야기가 한때 돌기도 했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음을 점점 많은 독자들이 인정하게 되리라 본다.

아울러 올해 초에는 창비 문학블로그 ‘창문’(http://blog.changbi.com/lit)을 개설하기도 했다. 작가의 연재지면 확대와 좋은 문학 콘텐츠로 발빠르게 독자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장편소설 또는 산문의 연재 말고도 다양한 꼭지를 배치하여 비록 소규모이나 내실있는 블로그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이 싸이트를 많이 방문해주시기 바란다.

새로운 10년대로 넘어가는 현시점에서 지난 10년간 우리 문학이 거둔 성과를 짚어보며 2010년대의 향방을 가늠하는 것이 이번호 특집 ‘2010년대 한국문학을 위하여’이다. 백낙청은 19876월항쟁 이후의 20여년, 멀리는 1970년대 이래를 ‘우리시대’로 파악하되 지난 10년간에 집중하여 시, 소설, 비평 분야의 주요 성과를 선별적으로 검토하고 한국문학의 ‘활력과 빈곤’을 균형잡힌 시각으로 가늠하고자 한다. 2000년대 한국문학의 몇몇 사례를 그가 제시한 세계적 시야에서 평가함으로써, 현재의 엄연한 빈곤에도 불구하고 2010년대 한국문학이 세계문학 및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한 거점으로서 자리잡을 수 있으리라는 그의 기대를 독자는 공유하게 될 것이다. 김수이는 ‘자체제작 소리를 내는 상자들’이라는 독특한 비유로 2010년대 시의 향방을 가늠하고 있다. “자기 자신 및 세계와 시의 재창조에 대한 자의식으로 충전된” 젊은 시인들의 시적 기획을 비판적으로 살피고, 이를 통해 향후 시의 갱신을 위한 조건들을 제시한다. 또한 이경재는 2000년대 소설의 윤리와 정치를 “외부와의 만남”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점검한다. 그는 외부 또는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시대적 요청을 기준으로 김훈 김연수 박민규 등의 문학이 보여주는 윤리적 성찰과 정치적 책임의 양상을 꼼꼼하게 비교 분석하고 있다.

본래 특집 기획에는 ‘페미니즘과 근대성’이란 시각에서 지난 10년간의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글이 있었는데, 필자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빠져 매우 아쉽다. 그러나 문학초점란에 실린 간명하면서 예리한 6편의 평문은 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자의 글과 함께 특집을 적절히 보완해주고 있다.

창작란에서는 신예소설가 6인의 단편과 원로・중견・신예 시인 12인의 시들이 150호 기념 특별기획으로 단연 돋보인다. 또한 이번호로 공선옥의 장편소설이 감동적인 결말로 연재를 마무리한다. 연재 3회째를 맞는 김애란의 작품도 가세해 창작란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다.

문학과 더불어 본지가 중시하는 정론의 영역에서 먼저 눈을 끄는 기획은 서로 입지가 다른 네 분의 정치가, 시민운동가, 학자가 ‘2012년’을 두고 나눈 허심탄회한 ‘대화’다. 이 좌담은 독자들로 하여금 2012년이 큰 틀에서 한국사회의 중대한 재편기가 되리라는 예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국민이 진보개혁세력의 혁신과 통합을 요구한다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된만큼, 대선이 다가오기 전의 일상적 시기에 연합정치에 대한 신뢰를 쌓아나간다면 진보개혁세력의 공동승리인 동시에 각자가 더 크게 이기는 결과를 이룩할 수 있다.

대화에서 다뤄진 연합정치에 대한 총론적 논의를 뒷받침해주는 생생한 지역현장의 체험도 실려 있다. 지난호 인천의 사례에 이어 임근재가 소개하는 경남 민주도정협의회의 실험은 그외 스물여섯 곳의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의 다층적 경험과 더불어 2012년을 준비하는 우리의 값진 자산이다. 본지는 계속 그 추이를 지켜볼 것이다.

지난 10월 정부의 천안함 최종보고서 발표에도 불구하고, 아니 도리어 그로 인해 ‘천안함’은 대한민국의 상식과 합리성을 묻는 국내적인 화두이자 동북아 지정학적 변화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 짧지만 정곡을 찌르는 황준호의 시평이 그 구도를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연중연속기획 ‘한국사 100년 다시 보기’의 마지막은 재일사학자 조경달이 장식했다. 한국강제병합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 그는 규율주의적 일본 유교문화에 기반을 둔 일본적 근대국가를 비판할 계기를 교화 중심의 조선 유교문화에서 찾는다. 그리고 식민지가 되어 패배한 조선의 정치문화에서 100년 뒤인 지금의 한국사・동아시아사의 방향성을 찾고자 한다.

간단히 언급할 수밖에 없어 안타깝지만, 이번호로 1년간의 연재를 마무리짓는 조광희의 산문과 일곱편의 촌평도 정성들여 준비한 읽을거리다.

올해 창비신인문학상 심사위원회는 소설 부문에서 최민석, 시 부문에서 김재근, 평론 부문에서 윤인로를 각각 수상자로 선정했다. 아울러 제4회 창비장편소설상은 치열한 경합을 거쳐 황시운에게 돌아갔다. 올해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박철 시인에게도 독자와 더불어 축하를 드린다. 끝으로, 150호 출간을 자축하며 독자 여러분에게 사은의 뜻을 담아 두툼한 기념호와 더불어 창간호부터 150호까지의 총목차·총색인을 별책부록으로 마련했다.

시인 신경림은 본지 100호 기념 축시에서 “우리들의 내일이 보인다, 백호 창비 너에게서는”(「백호 창비에서는」)이라 노래했다. 150호, 나아가 200호 이후에도 계속 같은 노래가 들리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하다.

 白永瑞

백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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