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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10년대 한국문학을 위하여

 

2000년대 소설의 윤리와 정치

 

 

이경재 李京在

문학평론가. 평론집 『단독성의 박물관』 등이 있음. ssmart1@hanmail.net

 

 

1. 외부와의 만남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토록 다양하고 그토록 의미심장한 2000년대의 소설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할 수 있는 비평적 호명의 개념이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를 조망할 총체적인 시야도, 수많은 작품을 귀납할 물리적 조건도 허용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2000년대의 현실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소설적 흐름이 바로 ‘외부의 탄생’이다. 지난 10년은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방면에 걸쳐 활발하게 경계넘기가 이루어진 시기다. 인종・국민・계급적 경계는 물론 성적・인류적 경계까지도 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유되기 시작했다. 그 원인으로는 우선 자본과 노동의 전지구적 이동 및 신자유주의의 전면화로 인한 사회격차의 심화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615104 선언으로 상징되는 변화된 남북관계도 중요한 원인임에 분명하다.

수많은 경계넘기를 통해 우리 앞에는 수많은 외부자가 등장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새로운 ‘외부의 등장’이 아닌 ‘외부의 발견’이다. 타인과의 만남이 언제나 외부와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사정은 이렇다. 1980년대의 인간이 이념적 대타자에 기초해 자신의 위치를 규정짓고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타인과 관계맺었다면, 1990년대의 인간은 그러한 방식의 정체성 규정이 지닌 한계와 문제점에 반발하며 자기만의 세계로 급속히 회귀했다. 1980년대에는 거대한 타자의 이상에 의지하는 상징적 도덕을 통해, 1990년대에는 거울상의 무제한적 조응에 바탕한 상상적 환영을 통해 타인과 관계맺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두 방식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이에 따라 이념적 대타자 혹은 상상계적 거울상에 의해 위치지어진 수많은 개체는 광장에 내던져졌다. 일정한 삶의 규칙과 법도를 공유하던 이들은 아무런 공통규칙도 전제할 수 없는 낯선 외부로 거듭난 것이다. 비로소 사람들은 곁에 선 이들을 자신과 같은 규칙과 감각을 공유하는 내부가 아닌 이질성과 혼혈성을 특징으로 하는 외부로서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외부의 발견,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만들어야 할 공동체의 성격은 2000년대 문학의 한복판을 가로지른 가장 핵심적인 과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지난 10년간 소설에 대한 논의의 최종심급으로 윤리와 정치가 그토록 자주 언급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2000년대 내내 독자와 평단 양쪽에서 가장 주목받았으며 이 시기를 대표한다고 이야기되어온 김훈(金薰), 김연수(金衍洙), 박민규(朴玟奎) 세명의 작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이로써 외부를 사유하는 대표적인 방식을 살펴보고, 2000년대 소설의 특징적인 경향에 대한 희미한 윤곽이라도 그려볼 것이다.

 

 

2. 눈가리개 한 이순신, 오줌 누는 여인

 

김훈이 즐겨 다루는 배경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쟁터다. 전쟁터에서의 가장 큰 과제는 살아남는 것이다. 생존이라는 절대명제 앞에 승자독식, 무한경쟁, 적자생존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원칙이 된다. 김훈은 2000년대의 기본 조건이라 할 신자유주의에서의 지배적인 삶의 방식을 반복적으로 독백한다. 김훈이 그려낸 소설 속 상황과 그 속을 헤쳐나가는 인물의 삶은 지금 이 시대와 너무나 닮아 있다.

김훈이 그려내는 인물은 꼬제브(A. Kojve)가 말한 역사 이후의 인간 형상과 흡사하다. 꼬제브는 역사가 끝난 이후 가능한 삶의 양식으로 동물화된 삶과 속물화된 삶을 들었다. 동물화된 삶은 육체적인 생존과 그에 따른 만족만을 추구할 뿐이다. 한편 속물화된 삶이란 철저하게 형식화된 가치에 기초한 방식으로, 속물에게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매개된 고통과 쾌락만이 존재한다. 속물과 동물 모두 타인지향적 삶이라고 할 수 있으며, 깊이나 내면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부정해야 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특별히 이루고자 하는 대상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1 김훈의 소설에서는 인간의 동물화와 속물화가 동시적으로 나타난다.

김훈이 가치를 부여하는 속물에게는 타인과 사회로부터 주어진 역할과 그것에 성실한 삶의 자세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당면한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칼의 노래』(2001)의 이순신, 『현의 노래』(2004)의 우륵과 야로와 이사부, 『남한산성』(2007)의 이시백이나 서날쇠는 이러한 삶의 준칙에 철저하다. 김훈이 옹호하는 이순신이나 이시백이나 서날쇠 같은 인물은 공통적으로 스노비즘(snobbism)을 체화하고 있다. 이때의 스노비즘이란 실질이나 내용이 텅 비어 있음을 알면서도 거기에 엉켜 있는 형식이나 의례 같은 것을 따르는 삶의 방식이다. 그들에게 행위는 진정성이 결여된 의전(儀典)행위에 불과하다. 자신의 역할이기에 할 뿐이라는, 혹은 삶은 무의미하지만 무의미하기 때문에 산다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2

속물과 더불어 김훈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은 동물로 표상된다. 동물화는 생명과 생존에 매인 노예적인 삶의 영역, 즉 오이코스(oîkos)에 해당하는 삶의 방식이다.3 『남한산성』에서 관료의 입이 먹는 것과 더불어 말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병정의 입은 오직 먹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김훈이 일반인을 비유할 때 가장 많이 동원하는 것은 동물이나 식물의 이미지다. 『현의 노래』에서 아라는 반복적으로 오줌을 누고, 비화에게서는 자두 냄새나 버들치의 비린내가 난다. 이 소설에서 아무런 말도 없는 “계집”들은 “이동하는 새떼들과 흡사”(126면)하다. 『남한산성』에서 “들짐승”(42면)처럼 보이던 사공은 “풀이 시들듯 천천히”(46면) 쓰러지고, 아이나 군병 들은 새떼나 야생동물에 비유된다. 『공무도하』(2009)에서 장철수는 “엎드린 후에(베트남 여인—인용자)의 몸”을 “물고기 같기도 했고 새 같기도 했다. 포유류와 조류와 어류를 합쳐놓은, 혹은 종족이 분화되기 이전 지층시대의 생명체처럼 느껴졌다”(284면)고 말한다. 후에는 잠수일을 마치고 물 위로 올라오면 오줌을 지리고, 때로는 “반도의 서쪽 연안에 중간기착한 새처럼”(290면) 보이기도 한다. 김훈에 의해 이들은 하나의 자연이자 생명에 머문다. 생존을 위한 그 절박한 몸짓이 사회적 규범과 분리되어 자연화되는 것이다.

김훈에게 이러한 속물과 동물은 결코 부정적인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사실의 세계에 속한 존재로서, 그 반대편에는 김훈이 그토록 부정하는 언어의 세계가 자리한다. 언어의 세계와 사실의 세계라는 이분법은 너무나 뚜렷하며 둘 사이의 경계나 그 안의 세부를 탐구할 가능성은 배제된다. 김훈의 소설은 작가의 관념이 모든 현실을 미리 규정지은 선험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김훈의 제국’이라 부를 수 있는 그의 소설에서 외부는 부인된다. 이미 세상은 그 자체로 완결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목소리와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은 너무나도 확고해 다른 목소리나 시각은 상상하기 힘들다. 인물과 인물, 인물과 서술자 사이의 대화는 존재하지 않으며, 일인칭 독백이 지배하는 그의 소설에서 다른 삶이나 세상의 가능성은 사유될 수 없다.4 각자에게는 주어진 역할이 있고, 얼마나 그것에 충실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매겨질 뿐이다. 그에게 현실이나 세상은 사회적 구성물이라기보다 하나의 자연적 실재다. 중요한 것은 그 자연적 실재 속에서 어떻게 생존하느냐다. 얼핏 보기에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역사소설은 시간상의 외부를 도입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 소설에서 역사적 배경은 작가가 선험적으로 규정한 세상을 강조하기 위한 병풍에 불과하다. 오히려 과거라는 시공간은 작가가 상정한 지금의 세상을 변화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인간의 숙명으로 인식하게 한다. 김훈의 소설에서는 인간도 현실도 역사도 외부를 상정할 수 없는 고정된 실체로서 자연화될 뿐이다.

외부를 상상할 수조차 없는 김훈의 제국에 거주하는 인물은 속물 내지는 동물이다. 이들은 21세기 세계의 리얼리티를 온몸으로 구현하는 존재다.5 김훈은 미메씨스를 통해, 2000년대의 동물화・속물화되는 주류적 인간에게 맘껏 활약할 서사적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김훈은 비장한 미문과 몇백년 혹은 몇천년을 훌쩍 뛰어넘는 시공 속의 영웅을 통해 동물 혹은 속물이 되어가는 현대인에게 장엄한 환상과 따뜻한 위안의 메씨지까지 던져준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결코 이 시대에 한정된 특수하고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병자호란 때도 임진왜란 때도 고대에도 해당된다는 것, 그렇기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 내용이나 가치를 믿지는 않더라도 지금-이곳에서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라는 것.

이처럼 김훈 소설에는 외부가 없으며, 새로운 외부의 가능성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 순간의 삶이 있을 뿐이다. 김훈이 반복적으로 그려내는 외부 없는 무한은, 스피노자(B. Spinoza)가 말한 무한의 정반대편에 놓인 세계다. 스피노자와 김훈은 모두 세계가 닫혀 있으며 어떠한 초월성도 상상물로 여긴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스피노자와 달리 김훈의 무한은 타자의 발견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6 이 세상처럼 비루하고 치욕적인 것은 없다. 또한 고통스러운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김훈에게는 무한하고 영원한 세계의 전부다.

 

 

3. 한국어를 말하는 외국인, 외국어를 말하는 한국인

 

지난 10년 김연수처럼 외부에 민감하게 반응한 작가도 드물다. 김연수는 외부에 대한 사유를 가장 집요하게 해온 작가다. 타자의 외부성을 거의 강박적으로까지 탐구해오고 있다. 타자에 대한 그의 탐구는 우리에게 외부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운다. 김연수의 많은 작품은 다른 시대와 나라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하며, 외국인을 중심인물로 내세운다. 여기서 문제적인 것은 우리 앞에 새롭게 나타난 외부가 아니라 늘 우리 곁에 있었던 외부를 새롭게 발견했다는 점이다.

김연수가 외부에 반응하는 방식은 철저히 윤리적이다. 달리 말하면 타자를 연민과 동정의 대상 혹은 질시와 모멸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7 김연수의 소설에는 주체 이전에 타자가 있고, 존재론 이전에 윤리학이 있다. 그의 소설에서 타인은 결코 표상 불가능하며 이해 불가능한 존재, 즉 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밤은 노래한다의 이정희,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의 세희, 세영, 네즈미,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의 동생,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여자친구, 「달로 간 코미디언」의 아버지가 신의 얼굴을 한 타인들이다. 그의 소설을 지배하는 타자를 향한 망설임과 주저함은 공동체에 의해 부과된 준칙이 아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준칙에 따르기 위해 요청되는 시간이고 절차다.

그의 소설에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어구는 “세계의 끝”(「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세계의 끝 여자친구」 등)이라는 말이다. ‘세계의 끝’은 대타자의 붕괴라는 상황을 압축해서 보여주며, 이는 윤리가 등장하는 배경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본래 윤리는 도덕과 달리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대타자의 법을 의심하고 거부하며, 불확정적이고 혼돈스러운 자기로의 복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8 대타자의 붕괴라는 상황을 김연수만큼 집요하게 환기시키는 작가도 드물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2007)에는 대타자의 붕괴라는 상황에 맞서 자신을 확립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1991년 “반석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123면)을 깨달은 ‘나’는 정처없이 방황하다가 “자기 자신이 되어라”(124면)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간신히 자신을 추스른다. 이후 ‘나’는 “내게 조국은 하나입니다, 선생님, 나 자신이죠”(167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된다.9

대타자의 기능부전을 강조하며 윤리만 내세울 경우 그것은 자폐 또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될 수도 있다. 윤리에 함몰된다면 행위로 이어질 수 없으며,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만 신경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태도가 반복될 경우, 자기진실성의 물신화, 성찰의 도구화로 귀결될 수도 있다.10 아예 외부를 부인하여 현실을 수리(受理)한 김훈과 달리, 지나치게 외부를 사유하여 현실을 수리하는 역설적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타자의 외부성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으로 인해 아무런 행위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지금 김연수가 우리 문학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그가 타자의 외부성을 충분히 사유하면서도 외부를 향해 말을 걸고 계속해서 나아간다는 점 때문이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사막이나 설산 같은 곳을 향해 목숨 건 여행을 떠나고, 가망 없는 연애에 매달린다. 그에게 사랑은 “개입하려는 의도를 지닌 여러가지 행동들과 말과 감정들”11이다. 흥미로운 것은 소통에의 지향과 앎의 의지가 병행한다는 사실이다. 지난 10년 내내 김연수를 지배한 것은 바디우(A. Badiou)가 말한 ‘실재에의 열정’(passion du réel), 즉 실재를 탐구하기 위해서 현실의 의미망을 넘어서려는 열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장편 『밤은 노래한다』(2008)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 나타난 정치적 행동 역시 세계의 실상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과 상징계의 구조마저 파괴하려는 행위(act)라고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김연수는 외부의 표상 불가능성에 대한 강박적 반복을 벗어나 외부와의 소통 가능성에 희망을 건다.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언어를 초월한 소통의 가능성과 끝내 “나 혼자뿐”(290면)인 소통의 불가능성이 연출하는 아포리아의 장관을 보여주었다면,12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와 「모두에게 복된 새해」는 소통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두 작품 모두 언어가 다른 외국인과의 소통을 다루고 있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에는 “으아아아으으어”(26면)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아이도 등장한다. 주지하다시피 타자의 전형은 언어가 다른 외국인과 아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서는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그것은 이성이나 언어가 아닌 공감의 힘을 통해 가능하다. 이성이란 늘 한계투성이고, 언어는 “nak” “하이퍼바이터미노우시스에이”처럼 애당초 번역이 불가능한 구멍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어는 결코 동일시될 수 없는 개인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한 상징일 것이다.

이들 작품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소통이 그야말로 윤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에 나오는 한국어에 서툰 인도인의 한국어와 영어에 서툰 한국인의 영어로 이루어지는 소통이란 결코 일방적일 수 없다. 나아가 이 작품에서는 ‘나-인도인 손님-아내’라는 세명의 관계를 통해, 상징적으로나마 이자(二者)관계에 바탕한 상상적 윤리의 자폐적 위험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 가능성까지 막연하게나마 제시된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공감의 상상력을 넘어 새로운 차원의 총체성을 구성하는 것으로까지 변모하고 있다. 그는 이제 모든 이야기(개인)가 연결돼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피력한다. 처음 ‘나’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소설은 후반부로 갈수록 모든 등장인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나’의 할아버지, 레이의 할아버지, 이길용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정민의 삼촌이 하나의 그물망 속에 놓여 있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13 그리고 세상은 하나로 연결됨으로써 “삼등급의 별이라고 할지라도 서로 연결될 수 있는 한, 사자도, 처녀도, 목동도 될 수 있”(113면)는 것처럼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그렇기에 등장인물들은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 만큼 누구든 “연결”(68면)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윤리적 성찰을 통해 강력하게 주장되었던 자율성의 바탕 위에, 공감의 상상력에 기댄 새로운 인식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연수는 인드라망(그물코마다 붙은 수많은 보석 각각에 그 전체가 비친다는 보석 그물)에 비유될 만한 하나의 무한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명의 인간과 하나의 사건에는 그것을 만든 세계와 우주가 들어 있다. 이때 고유한 내부란 존재할 수 없다. 내부란 외부에 따라 달라지는 조건에 의한 현행적 규정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김연수가 발견해낸 무한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매순간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이때의 무한은 외부를 향해 열린 지평이기에, 외부 자체가 부인된 선험적 내부가 아니다. 이러한 무한의 개념을 통해 비로소 외부와 내부가 동일시될 가능성이 열린다. 인간의 존엄성이 자율성(비동일시)과 공감(동일시)을 통해 탄생한다면,14 김연수는 두가지 어려운 항목을 결합시키는 지난한 과제를 풀어가는 입구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4. 인류의 구원투수로 투입된 그녀

 

박민규의 소설은 외부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씌어지는 것이다. 박민규는 2000년대 한국 현실이 만들어낸 수많은 외부의 입장에 서서 발화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사회를 주도하는 ‘다수’와 ‘프로’의 세계가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소외된 ‘소수’와 ‘아마추어’의 시각과 입장에서 그 내부가 보여진다. 이것은 외부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것이고, 동일자에게 균열과 충격을 가함으로써 외부와 대면하게 만드는 작업에 해당된다. 박민규는 외부를 부인하는 것(김훈)도, 외부와의 (비)동일시를 시도하는 것(김연수)도 아닌 제3의 방식, 즉 외부의 내부화(중심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지난 10년 가장 정치적인 작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그의 최근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2009)는 새로운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박민규가 수많은 외부를 발견하고, 외부의 시각으로 현실의 수많은 문제를 다룰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는 나르씨시즘적 자아에의 고착이라고도 볼 수 있는 한국문학의 지나친 내면 지향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다.15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러한 탈내면에 대한 일종의 되구부리기라고 할 만큼 상상계적 고착의 징후가 엿보인다.

그것은 이 작품의 기본 서사인 연애관계로 드러난다. 이 작품은 ‘나’, 요한, 그녀의 삼각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문제는 이 셋의 관계가 지극히 상상계적이라는 점이다. 먼저 ‘나’가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는 과정이다. 작가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못생긴 여자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다룬 최초의 소설”(416면)이라면, 남자주인공이 못생긴 여자주인공에게 사랑을 느끼는 과정이 그 어떤 소설보다 개연성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몸이 얼어붙는 느낌”(82면)을 받는다. 그런 매혹을 가능케 한 원인으로 추측되는 것은, 그녀와의 만남 이전에 매우 상세하게 기술되는 어머니의 삶이다. 박색인 그의 어머니는 나중에 탤런트로 성공하는 잘생긴 남편을 평생 뒷바라지했고, 성공한 아버지는 어머니를 배신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발견한 “최고의 숙주”(49면)였음에도, “언제나 아버지에게 미안해한다는 느낌”(48면)을 갖고 살았으며 결국 버림받는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나’는 깊은 연민과 애정을 가져왔으며, 그것이 그녀에게로 옮겨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어머니를 향한 사랑의 변형태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해 ‘나’와 요한의 관계 역시 문제적이다. 요한은 ‘나’의 거울상이라 불러 무방하다. 요한은 반대로 배우 출신인 미녀 어머니와 돈 많은 아버지를 두었다. 결국 둘의 어머니는 모두 크게 상처받는다. 요한에게서 그의 어머니 이야기를 듣던 날, ‘나’는 “요한이 나와 대척점에 선 인간이자, 마치 이복형제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이유 없이 느껴지던 동질감의 정체”(150면)를 어렴풋이 짐작한다. 이 소설의 결말은 두가지다. 하나는 요한이 말없는 존재가 되어 요양원에 머물고 ‘나’가 독일에 간 그녀를 찾아가 행복한 삶을 함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죽고 그녀와 요한이 결혼해서 사는 것이다. 이 두 결말에서마저 ‘나’와 요한은 대칭적이다. 작품 속에서 요한은 마치 선지자처럼 ‘나’에게 무수한 말을 하고, ‘나’는 조용히 경청할 뿐이다. 이 관계에서는 어떠한 균열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와 요한은 서로의 상상적 자아이며, 그녀와 나는 모자(母子)적 관계라고 볼 수는 없을까. 요한의 유서에 적힌 “세상은 거대한 고아원이다”(244면)라는 말은 이들의 심리적 상태에 대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삶’을 이상적인 태도로서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굴레를 빠져나가는 방법(308면)으로 제시된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모두 타자를 전제할 때만 가능한 반응임을 고려할 때, 이 어구에는 중요한 것은 오직 ‘나(들)’의 진실이라는 인식이 드러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모습은 2000년대 소설이 잃어버렸다고 이야기되는 내면성에 대한 추구임에는 분명하다. 이것이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진정성어린 삶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혹 상상계에 바탕한 자폐적인 삶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이전에 씌어진 장편 『핑퐁』(2006)을 함께 놓고 생각해보자. 『핑퐁』은 소위 우주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작품으로, 기성의 것(‘인류의 1교시’)에 대한 부정의 정신으로 펄펄 끓어오른다. 그러나 그 대상은 구체적인 시공간을 지닌 것이 아니라 우주적 보편성에 바탕한 것으로서, 전체 서사를 지배하는 것은 위기의식과 종말의 상상력이다. 이 작품의 주무대인 학교와 탁구대가 놓인 벌판은 아무런 매개 없이 수시로 연결된다. 못과 모아이가 중학교에서 겪는 고초는 곧 인류 전체의 문제로 연결되며, 다시 종말의식으로 이어진다. “나는 누군가와 의미있는 관계를 맺기가 싫다. 정말이지, 그렇다”(34면)에서처럼, 인류의 문제로 도약하기 이전에 주변 사람들과 맺는 사회적인 관계는 생략된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상상계로 회귀하는 이야기라면, 『핑퐁』은 실재계로 도약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16 이러한 사고 구조에서는 사회제도나 국가 같은 상징계의 차원을 발견할 수 없다. 우주적 차원 혹은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문제제기는 현실의 핵심만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매우 선명하지만, 일상의 구체적 실감과 주름을 배제할 수밖에 없기에 공허하기도 하다. 이러한 공허함은 외부의 내부화를 통해 2000년대 소설계에서 가장 정치적일 수 있었던 박민규가 치러야 할 댓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구현하는 정치성이 이전과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박민규는 제도권정치나 여타의 현실정치를 따지는 ‘치안’에서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배분을 문제삼는 ‘정치’의 차원으로 이동해간 것으로 보인다.17 아름다움과 연애를 새롭게 드러내는 과정과 이를 접하는 사람들이 겪는 낯설음을 통해서 아름다움과 사랑은 새롭게 전유된다. 그것은 기존의 감수성으로 추함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를 통해 미추(美醜)에 대한 기존의 감성을 거부하고 뒤흔든다. 이 작품의 상당부분은 못생긴 그녀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무시, 그로 인해 그녀가 받는 괴로움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묘사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 작품은 미추의 기존 관념을 뒤집으려는 것이 아니라 애매함과 모호함을 보임으로써 감각의 재분배를 꾀하고자 시도한다. “예쁘면 그만이지 더이상 뭐가 있어”라는 “당대의 상상력”(227면)에 매몰되는 것에 대한 거부나 “당신 <자신>의 얼굴”이 “우리의,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418~19면)한다는 데서 그런 의도가 드러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그동안 사랑의 영역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존재를 전면에 부상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나르씨시즘이나 자폐적인 세계로의 함몰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 작품에서 당대 사회와 그 감각체계는 어디까지나 부인(Verleugnung)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Negation)되고 있다. 침착하게 이 작품을 따라읽은 독자라면 이들이 선택한 행위를 가능케 한 욕망과 정념의 타당성과 의지를 인정할 수 있다. 이전에도 다수에 대한 강렬한 반감을 보였던 박민규는 아름다움과 관련한 세계의 낡은 감각적 분배를 파괴하고 다른 종류의 분배로 변환시킴으로써 삶의 새로운 형태들의 발명을 동반한다. 박민규는 상상계적 관계 속으로 퇴행한 듯 보이지만, 또 하나의 외부를 내부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5. 새로운 윤리와 정치

 

1990년대 소설이 넘겨준 내면의 진정성에 의지했던 개인은 2000년대 들어와 관계맺기에 열중했다. 대타자와의 싸움에 골몰했던 개인은 어느 순간 자기 곁에 거울상만이 가득함을 깨달은 것이다. 그들을 진정한 타자로서 발견하고, 새로운 연대의 통로를 내는 것이 2000년대 소설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이것은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연마해온 도덕적 책임과 1990년대 문학이 깨우쳐준 개인의 자율성을 종합해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하다. 외부와의 만남이라는 시대적 조건에 맞서, 작가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것은 크게 윤리적 성찰과 정치적 책임이라는 두개의 사유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외부와의 만남과 이에 대한 대응’이 2000년대에 창작된 모든 소설에 해당하는 전면적인 현상일 수는 없다. 김훈의 소설이 보여주는 것처럼, 외부와의 만남이 부인된 작품 역시 적지 않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재하는 외부’ 역시 ‘외부의 발견’을 전제했을 때 비로소 성립 가능하다면, 이러한 소설도 크게 보아 ‘외부와의 만남과 이에 대한 대응’의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김훈과 김연수는 모두 내・외부의 구분이 폐기된 무한을 만들어낸다. 이때 무한의 성격은 상반된다. 김훈의 무한이 외부를 선험적으로 부인하여 이루어진 내부의 확장이라면, 김연수의 무한은 외부에 의해 진행형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훈의 제국’ 속에서 외부는 부인되고, 이 속에서 윤리와 정치를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연수는 윤리적 성찰을 극단까지 밀고나가서 내부와 외부의 (비)동일시에 성공하고 있다. 박민규는 외부를 부인하지도, 외부와의 (비)동일시를 시도하지도 않는다. 박민규는 외부에 대하여 사유하는 자가 아니라 외부에서 부딪쳐나가는 자이다. 시종일관 유지되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서, 그는 외부의 내부화(중심화)를 꾀한다. 이것이야말로 박민규 소설이 지닌 정치성이다. 그는 내・외부의 경계를 유지하면서 그것을 미학적・감성적 차원의 정치와 연결시킨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들의 소설에서 시대와 사회의 구체적 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이 보이는 사유의 치열성과 문학적 진정성은 필자를 숙연하게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실험이라는 느낌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다. 이를테면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각기 다른 결말에서 그녀와 나 혹은 요한과 그녀는 한국을 떠나 독일과 일본에서 안식을 얻고, 나와 요한은 죽거나 죽음과 유사한 상태에 놓인다. 박색을 그리도 학대하던 한국을 떠나 미추의 관념으로 사람을 억압하지 않는 곳으로 그려진(상상된) 독일(일본)로 홀연히 떠나버리는 것이다. 단독자로서 서기 위해 이들은 일체의 외부적 관계를 끊고 자신과 자신의 가치에만 집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체념이나 순응과는 다른 해방적 힘을 지니며, 그들이 지닌 진정성의 강도를 증명하는 행위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너무나 쉽게 한국 현실과의 대면을 포기해버린다는 느낌을 지우긴 어렵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김연수가 대타자의 붕괴라는 상황을 끊임없이 제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새롭게 고민해볼 만하다. 반복이 지속되면서 어느 순간 특정한 ‘대타자’의 붕괴는 대타자 일반의 붕괴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대타자 일반의 붕괴가 과연 가능한 것인지, 그러한 상황은 바람직한 것인지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18 이와 관련해 김연수만큼 대타자가 지닌 힘에 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작가도 드물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나 「내겐 휴가가 필요해」 같은 작품에서는 거대서사가 없이는 살 수조차 없는 인간들이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설득력있게 그려지고 있다. 광주의 랭보 이길용인 동시에 서울대 법대를 중퇴한 문화운동가인 강시우는 이데올로기라는 유령에 의존해서만 자신을 지탱할 수 있다.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프락치나 남파간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프락치도 남파간첩도 아닌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내겐 휴가가 필요해」의 전직 형사는 자신의 지난 삶을 정당화할 거대서사를 찾기 위해 인생을 걸고, 결국에는 목숨을 바친다.

어쩌면 우리는 과거의 이념적 대타자와 결별한 대신 시장전체주의라는 새로운 대타자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에서, 그에 대한 의식마저 몰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문제는 새로운 거대서사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아닐까? 윤리와 정치를 담지한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서는 거대서사에 대한 부정을 넘어선 진지한 모색이 더욱더 절실한 시점이다. 이때의 모색은 2000년대 소설에서 결핍된 현실의 구체적인 실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 소설은 윤리나 정치에 대한 진술이 아닌 형상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다시 문제는 현실(the rea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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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옮김, 문학동네 2007, 116~30면 참조.
  2. 김훈 소설에 나타난 스노비즘의 양상은 양윤의・유준・차미령・이경재 좌담 「황혼에: 현재, 과거와 미래에 길을 묻다」, 『문학동네』 2007년 가을호 468~69면 참조.
  3. 한나 아렌트는 삶의 영역을 생명과 생존에 매인 오이코스(oîkos)의 영역과 생존이나 노동과는 분리된 폴리스(polis)의 영역으로 나눈다(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 외 옮김, 한길사 1996, 88~89면).
  4. 김훈은 한 대담에서 자신이 쓰는 문장은 일인칭 문장이라고 밝히며, 자신은 “계속 일인칭에 갇혀 있는 협소하고 좁은 인간일 수밖에 없어요. 그 운명을 잘 알고 있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어요. 넘어갈 수가 없는 거죠”(「아수라 지옥을 건너가는 잔혹한 리얼리스트」, 『현의 노래』, 341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때 일인칭은 내면적 진실에만 집착하는 평범한 개인이 아니라 신과 같은 위치에 선 전지적인 개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5. 김홍중은 포스트-진정성 체제(post-authentic regime)의 문제적 형상들인 동물과 속물이 97년 이후의 한국사회에서도 나타난다고 주장한다(『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75면).
  6. 스피노자가 말하는 의미에서 ‘무한’의 개념을 개시하는 것은 “타자를 발견했다는 사실”(가라타니 고진 「교통 공간에 대한 노트」, 『유머로서의 유물론』, 이경훈 옮김, 문화과학사 2002, 34면)을 의미한다. 이때 타자는 “공동체의 동일성・자기활성화를 위해 요구되는 존재이므로, 공동체의 장치 내부”(34면)에 있는 이방인〔異者〕과는 구별된다.
  7. 칸트는 ‘자유로워지라!’는 지상명령에 따르는 것이 윤리라고 보았다.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은 동시에 타자도 ‘자유로운’ 주체로 취급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칸트는 스스로 ‘자유롭다’는 것, 나아가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자유로운 주체)으로 대하라’”(가라타니 고진 『윤리21』, 송태욱 옮김, 사회평론 2002, 7면)는 것을 보편적인 윤리의 법칙으로 여겼다.
  8. 미셸 푸코 『성의 역사 2』, 문경자・신은경 옮김, 나남 2004, 41~46면 참조.
  9.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나 자신이 되어라’라는 명제는 하나의 정언명령이다. 양경자라는 본명을 지닌 안젤라 아줌마를 구원한 것도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인 동시에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226면)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길용과 상희가 경주로 여행을 갔을 때, 상희는 이길용에게 “더이상 다른 사람을 흉내내면서 살아가지 말”(254면)라고 주문하며, 자신도 “이제 더이상 누구가를 따라 하면서 살아가기 싫어졌”(255면)다고 고백한다.
  10. 이와 관련하여 정홍수는 용산참사 같은 사건의 “타자적 거리감을 소설적 긴장으로 끝까지 유지”하는 김연수의 작품들이 “쉽게 발화되지 않는 정치성”을 보여준다고 고평하면서도, 동시에 김연수의 딜레마는 “한국 소설미학의 어떤 보수성 앞에서의 곤경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진다.(「소설의 정치성, 몇가지 풍경들」, 『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 39, 48면)
  11. 김훈・김연수・신수정 좌담 「문학은 배교자의 편이다」, 『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 72면.
  12. 「달로 간 코미디언」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졸고 「진정으로 실종된 것들」, 『단독성의 박물관』, 문학동네 2009, 377~81면 참조.
  13. 이 소설의 곳곳에는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강박적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아름답게, 이토록 아름답게 연결되므로”(94면) “세계는 기묘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돼 있었다”(296면) “처음부터 우리가 모두 연결돼 있다는 사실”(338면) “처음부터 우리가 모두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68면) 등의 구절이 대표적이다.
  14. 린 헌트 『인권의 발명』, 전진성 옮김, 돌베개 2009, 8면.
  15. 김영찬 「2000년대 한국문학을 위한 비판적 단상」, 『비평극장의 유령들』, 창비 2006, 72~77면 참조.
  16. 『핑퐁』에 대한 논의는 졸고 「최근 한국소설에 숨겨진 소통의 가능성」, 『실천문학』 2009년 봄호 60~62면 참조.
  17. 랑씨에르에게 정치는 감성적인 것을 새롭게 분배하는 활동, 즉 감성적 혁명을 가져오는 활동이다(『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08, 47면). 한기욱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평가함에 있어, “랑씨에르적 의미의 ‘정치적’인 작업”과 “아감벤적인 의미의 ‘있는 그대로의 독자성’을 성취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면서, 결론적으로 “상대방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딴사람-되기’의 과정과 자신의 콤플렉스/편견을 극복하고 자긍심/겸손함을 회복하는 ‘딴사람 되지 않기’의 과정이 동시진행형으로 일어나는 과정이 꽤나 설득력 있다”고 고평한다(「문학의 새로움과 소설의 정치성」, 『창작과비평』 2010년 가을호, 409~10면).
  18. 대타자의 붕괴로 생겨난 자유는 문법적 틀이 없는 언어활동과 유사하기에 아무런 해석규칙이나 규범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로 인해 주체에게 자유 이전에 엄청난 부담과 고통을 줄 수도 있다는 지젝의 말을 경청해봄직하다. (S. Žižek, The Indivisible Remainder: An Essay on Schelling and Related Matters, Verso 1996, 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