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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제10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
김재근 金宰槿
1967년생. 부경대 토목과 졸업. zepal2@hanmail.net
여섯 웜홀을 위한 시간
시간이 벌레처럼 손목을 기어다닐 때 당신의 시계는 멈추고
문을 닫아도 다시 바깥. 찬바람 속 나는 손톱에 달을 키우는 목동. 방목한 별들의 울음을 듣다 잠이 들면 내 몸은 얼었다 녹았다 부서지는 중.
숲을 건너온 바람이 눈동자에 번진다. 주머니에서 죽은 새가 운다. 물구나무를 서면 시간이 얼 수도 있다는 생각. 허기가 진다.
허기가 지면 휘파람 소리는 어둡다.
아름다운 목수가 잘라 만든 천체; 비가 새는 걸 본다. 관음(觀音)하기. 반복되는 발작으로 말더듬이는 태어나고 개들은 비가 와도 흘레붙어 즐거워한다.
그건 지구 저편 저녁의 일, 중력 때문이라고 그림자가 속삭인다. 그림자의 손을 잡고 내일은 비오고 내 그림자는 없다.
발바닥이 두근댄다. 키가 자라지 않는 꽃은 어느 화병에서 죽어갈까. 바람이 몸속에 머물다 떠나는 가벼운 여행 같은 느낌.
인디언들은 새해가 되면 사랑하는 사람의 손톱을 땅에 묻어준다. 내가 묻은 인형들 모두모두 안녕한지, 부러진 왼팔을 흔들며 잘 가. 안녕.
가시에 찔린 붉은 혀를 쓰다듬고 깨어나기 싫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이상한 꿈들. 명왕성이나 목성 근처, 밤을 통과해 날아온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대가 보여준 지도에는 요일이 없다. 목요일과 화요일이 겹칠 때 그대의 자궁과 자궁을 연결하면 환한 별자리가 될까? 지금도 구름은 무섭고 밤의 냄새는 깜깜.
오늘은 중요한 날
오늘은 중요한 날, 비가 오지.
우산 속으로 아이들은 모여 참새처럼 재잘대지.
어른들은 그저 휘파람을 불거나 애인의 귀에 바람의 숨결을 흘려보내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그녀의 방」에 그녀는 없지.
재빨리 벗어놓은 꽃무늬 팬티가 세탁기를 빙글빙글 돌며 노랑꽃을 피우지.
다시 말해 오늘은 중요한 날
어른들은 키가 더 커지고 목소리는 상냥히 빗물에 젖지.
젖은 머리카락을 기울이면 귓속에 고인 음표들이 천천히 흘러나와
죽은 애인을 찾아가지.
깜박이는 음표에 맞춰 말라붙은 눈알은 잠들지도 않고
꿈을 꾸지. 차분하게 잘려진 배꼽의 대화. 들은 듯
안 들은 듯 잠들기.
다시 말해 오늘은 중요한 날
비가 오고 빗방울만 바쁘게 떠다니지.
안드로메다 교실
당신의 밤이 지루해지는 순간, 당신은 이 글 어딘가 홀로 버려진다.
당신의 조화 같은 얼굴에 물을 뿌려주고 나면 화장대에서 밤의 냄새가 난다. 시간과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얼굴을 거울 안쪽에 매달고 집을 나선다. 잘 있어, 밤의 그을음아! 피가 익으면 돌아오겠다.
창문에 별들이 달라붙어 있다. 유모차를 밀며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늙은 얼굴들.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태어나면서 이미 늙어버린 얼굴들이 틀니에 맞춰 노래하고 부러진 틀니는 어느새 불어난 당신의 젖을 물고 있다. 오늘밤은 침이 끓고 싱싱한 밤의 꽃들이 지하에서 피어난다.
더 빨리 꽃들이 피려면 피가 익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간은 하루. 당신은 지금 문장의 중심에서 점점 버려지고 있다.
지구에서 채집해온 두개골은 바람과 그늘에서 말리면 좋은 악기가 된다. 두들길 때마다 생각들은 쏟아져 화음이 된다. 음악. 구멍 뚫린 눈알에서 새어나오는 바람의 음악은 달나라까지 퍼졌다가 쓸쓸히 되돌아온다. 죽은 자의 머리를 두들겨보면 악— 하고 별의 울음이 스친다. 두개골의 음악이다.
부러진 틀니가 웃는다.
이곳 바다는 물이 없다. 간혹 고래가 달려와서 사람을 물고 모래 속으로 사라진다. 불알을 만지듯 모래를 뒤적이는 당신의 손끝에 별의 꼬리가 만져진다. 지금 반짝이는 별은 모두 우주의 미아가 된 지 오래.
나는 안드로메다에서 추방당한 몸, 주말이면 편지가 온다. 어머니,
얘야, 밥은 먹었니? 죽을 보내마. 이곳에서는 비가 오는 날 목욕을 한단다. 사람들은 비가 내리면 모두 밖으로 흘러나오지.
너의 애벌레가 밤마다 나방이 되어 날아다닌다. 그건 박쥐예요, 어머니. 거꾸로 매달려 달을 갉아먹고 있잖아요. 달이 사라질지도 모르니 어서 날려보내세요.
국수를 먹다 발견된 음모. 누가 여기까지 와서 빠졌을까? 사라진 음모를 찾아 주인은 얼마나 헤매고 있을까. 밤새 남은 음모를 헤아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줌마, 여기 주인 없는 음모 제발 찾아가세요.
주전자에 바퀴를 넣고 차를 끓여 마시면 바퀴에 실려 감기가 달아난다. 무슨 맛일까? 계란을 삶는다. 뜨거운 물에 뒤척이다 껍질째 익어버린 알. 어미에게 버려진 무정란의 울음이 양은냄비에서 끓고
낙엽을 입고 잠을 잔다. 집을 나온 이래 나는 불면의 나무. 내 몸 구멍구멍 나방이 알을 슬었다. 쿨럭이는 알들의 기침소리에 비늘은 날고 깨어나야 하는데 나는 아직 잠들지도 않는다. 젖을 먹일수록 너는 나방이 되어가고
너의 눈 안에서 나는 길을 잃는다. 나는 잠들지도 않았는데 너의 흰 날개가 날아와 내 부러진 틀니와 입맞추고.
안드로메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물소리가 보인다. 바람이 우주에 풀어놓은 자장가 나의 연인 안드로메다.
밤새 빨간 담뱃불을 그으며 이제 안녕, 나의 어두운 사랑 안드로메다.
직선으로 때론 느린 곡선으로
죽을 거예요. 눈이 오잖아요. 당신의 눈알이 빙빙 휘어져 내려요. 당신은 곡선으로 달아나고 나는 직선으로 당신을 쫒아가요.
밤새 눈이 오고 입안에는 당신이 쌓여요. 휘휘 저으며 달려가던 팔다리가 몸속으로 사라져요. 어쩌죠, 눈사람이 되려나봐요.
이러다가 정말 죽을 거예요. 당신이 물이면 나도 물이에요. 찬물이 찬물 속으로 들어와 끓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왜 이리 차가운가요?
버려진 당신의 발자국을 외등 아래에서 처음 보았어요. 당신을 찾는 입김이 흘러나와 밤의 그을음이 된 지 오래. 누군가의 그늘에 떨어진 눈알은 살아 움직여요.
직선으로 때론 느린 곡선으로, 군무를 추듯, 당신은 날 부르고 내일 목소리는 없어요. 눈이 오잖아요.
설전(舌戰)
나와 당신의 혀는 동면하는 뱀처럼 감기우고.
하필 ㅛㅛㅛ 모양으로 끼어 이 지랄!
설익은 달에서 떨어져 나온 애인의 혀는 두 개다. 봉분 같은 너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열고 일순에 빨대를 꽂아 쪽쪽 단물만 뽑는다. 미안하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너에게 혀마저 빌려야겠다.
눈앞에 비수 같은 바람이 똬리를 틀고 나를 본다. 몸을 가질 수 없는 바람이야 누구를 붙잡고 늘어져도 상관없지만 국수 같은 머리카락이 방바닥에 떨어져 휘날리는 이즈음, 밤마다 피는 맑아진다. 옷이라도 풀어 널어야겠다. 탈수기를 돌다 나온 새끼 고양이 울음이 내 젖을 빤다.
불안한 마음이야 없지 않았지만 애당초 이게 아니었다. 말랑한 입술 뒤에 숨긴 뾰족한 송곳니가 너의 무기이듯 기웃거리며 탁발하며 살아온 나의 오랜 연애도 불온.
암거미처럼 허공에 매달려 천장과 어두운 바닥을 타고 다니는 아슬아슬한 나의 오랜 연애를 위해. 이제, 장미의 피라도 뽑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