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2012년 대선과 민주개혁의 과제들
2013년체제와 변혁적 중도주의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최근 저서로 『2013년체제 만들기』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2013년체제 만들기』 출간 후
졸저 『2013년체제 만들기』(창비 2012, 이하 『만들기』)가 세상에 나온 지 반년이 넘었다. 역동성을 자랑하는 한국사회는 그간에도 많은 변화를 겪었고 특히 정치 분야에서 그랬다. 4·11총선에서는 저자를 포함한 여러 사람의 예상을 깨고 여당인 새누리당이 승리했다. 총선 직후 세인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통합진보당 사태는 수많은 곡절을 거친 끝에, 현재 앞길이 잘 안 보이는 형국이 되었다. 대선국면도 이제 본격화되어 새누리, 민주 양당의 당내 경선이 한창이고 안철수(安哲秀) 교수의 출마가 거의 확실시됨에 따라 정국이 새롭게 요동치고 있다.
나로서는 먼저 총선결과를 잘못 예측한 채 ‘2013년체제 만들기’를 논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출발하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미래 예측에 실패하는 것 자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실패가 2013년체제론을 통해 경계했던 목전의 승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그에 따른 안이한 낙관에 연유했고, 그러다보니 나 스스로 반성했듯이 “총선에서 패배했을 경우에 2013년체제 건설이 어떻게 되느냐에 대한 그림이 없었다”1)는 점이다. 다시 말해 2013년체제를 위해 총선승리가 필수적이라는 논의를 깊은 생각 없이 펼쳤던 것인데, 여기에는 19대 국회를 야권이 장악하지 않고서는 정권교체를 이루더라도 다음 대통령의 국정운영이 수월치 않으리라는 판단과 함께, 총선을 통해 박근혜(朴槿惠) 후보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대선승리가 확보되리라는 기대도 작용했다. 그중 입법부 장악의 중요성에 관한 대목은 지금도 유효한 판단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 실재하는 세력균형에 비추어 다음 대통령과 그의 지지세력이 감당하고 어떤 의미로는 활용해야 할 현실이지 2013년체제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요인은 아니다. 반면에 손쉬운 대선승리에 대한 기대는 실제로 정권교체를 이루려면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안일한 자세였다.
그러한 안일함은 야권연대와 관련해서도 드러났다. 총선승리의 필요조건인 선거연대가 힘겹게 달성되었을 때, 그것이 충분조건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를 냉정하게 평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야권의 두 정당이 모두 얼마나 부실하고 2013년체제 건설의 준비가 얼마나 안되어 있는지를 선거패배를 겪고서야 실감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런 식의 선거연대라면 아예 안하느니만 못했다는 판단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새누리당은 18대 총선 때의 한나라당에 버금가는 압승을 거뒀기 쉬우며, 그런 입법부는 2013년체제에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총선에서의 야권패배에도 불구하고 2013년 이후 한바탕 크게 바뀐 세상, ‘2013년체제’라고도 부름직한 새 시대를 열망하는 국민은 여전히 많다. 2013년체제론이라는 담론으로 말하더라도, 새 시대를 향한 원(願)을 크게 세우고 그 준비를 착실히 진행함으로써만 2012년의 선거승리도 내다볼 수 있다는 기본논지를 총선패배 이후 더욱 확고히 견지할 필요가 실감된다.
그러므로 2013년체제론도 새로운 상황전개와 그에 따른 성찰을 토대로 더 진전시켜볼 일이다. 본고에서는 『만들기』에서 처음부터 강조했던 ‘마음공부’(제1장 42면 참조)에서 출발하여, 『만들기』에서는 거의 잠복했던 ‘변혁적 중도주의’를 다시 주목해볼까 한다. 『만들기』를 쓰면서는 총선을 앞두고 되도록 많은 독자들께 접근하기 위해 어려운 개념용어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생각이었지만, 이후의 교훈을 되새기고 새 출발을 다짐하는 마당에 한층 근본적인 성찰이 불가피해진다. 결국 ‘희망 2013’을 실현하고 ‘승리 2012’를 확보하려면 개념작업상의 수고가 좀 따르더라도 변혁적 중도주의의 본뜻과 현실적 용도를 짚어보는 일을 생략할 수 없을 것 같다.
2. 분단체제 속의 마음공부·중도공부2)
마음공부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정치문제를 윤리문제로 환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하려면 (…) 개혁되고 혁신된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준비가 되지 않고 개혁만 하려 하면 시끄럽고 무질서만 초래할 뿐”(大山 金大擧)3)이라는 점이 새삼 실감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는 2013년체제를 만들고자 할 때 각자가 명심할 점이며, “분단체제가 괴물이라면 분단체제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괴물 하나씩을 갖고 있다는 점”4)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변혁적 중도주의에 나오는 ‘중도’는 원래 불교 용어다. 유교에서도 중용지도(中庸之道)의 줄임말로 쓰기는 하고, ‘중용’의 개념도 크게 다른 것은 아니라 본다. 어쨌든 유(有)와 무(無)의 두 극단을 아울러 넘어선 공(空)의 경지가 중도인데, 물론 공 자체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참된 중도가 된다. 공을 깨쳤답시고 아무 데나 ‘공’을 들이대는 태도는 ‘공’에 대한 또 하나의 집착이며 진정한 중도가 못 되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유식불교(唯識佛敎)에서는 ‘악취공(惡取空)’이라 규정하고, 그런 부류를 ‘악취공자(惡取空者)’라 부른다고 한다.5) 다시 말해 중도는 진리가 텅 비었음을 설파하면서도 자기에 대한 집착은 그대로 안고 있는 것(我有法空)이 아니라 나와 법이 다 빈(我法兩空) 자리로서, 일상생활에서 탐(貪)·진(瞋)·치(癡)를 여의는 수행 및 현실 속의 보살행을 떠난 ‘공 타령’과는 무관한 것이다.
‘공’이 아닌 탐·진·치 여의기를 말하더라도 구체적인 정치·사회 현실과 동떨어진 초역사적 과제를 설정한다는 혐의는 여전하다. 사실 욕심내는 마음과 성내고 미워하는 마음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 등 삼독심(三毒心)은 모든 인간, 아니 모든 중생이 안고 있는 문제로서 이를 제거하는 공부는 어느 시대에나 어렵다. 그 점을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속한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는 그것들이 체제운영의 원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통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통일시대·마음공부·삼동윤리」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앞의 책 294~96면), 여기서 잠시 부연하고자 한다.
탐심(貪心)으로 말하면, 자본주의가 인간의 탐욕을 긍정하고 이를 사회발전의 동력으로 삼고 있음은 누구나 인정한다. 이때 개인적 차원에서는 탐욕스럽다고 보기 힘든 기업가도 얼마든지 있으나 ‘이윤의 무한추구’라는 체제원리를 경시하고 성공하는 경우는 소수의 예외에 머물기 마련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아니, 개인 차원의 금욕과 자기희생마저 ‘성공’의 도구, 곧 탐심에 의한 체제운영에 복무하는 방편이 되는 체제인 것이다.
진심(瞋心) 곧 성내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말하더라도, 끊임없이 경쟁자들을 도태시켜야 자기가 살아남는 것이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다. 물론 살벌한 경쟁이 발전을 자극하기는 하고 실제로 자본주의의 엄청난 성취가 그에 기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놀이나 운동경기 또는 학문과 예술에서와 같은—물론 이들 활동도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승자독식의 경향이 강화되게 마련이지만—‘선의의 경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심지어 아무런 개인적 증오심 없이도 남을 꺾어야 하고 내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으면 꺾인 이들을 거들떠보지 말아야 하는 것이 체제의 원리인지라, 용서와 나눔, 보살핌 같은 마음작용은 그 자체가 경쟁승리의 도구가 되지 않는 한 예외적으로만 살아남는다.
치심(癡心)과 관련해서는 자본주의 이외의 ‘대안이 없다’(TINA, There Is No Alternative)라는 명제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에 해당한다고 지난번 글에서 말했지만(앞의 책 295~96면), 이데올로기의 지배가 이렇게 전면화되는 것이 자본주의시대 어리석음의 핵심이다. 하기는 인류역사의 사회치고 그 나름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되지 않은 예가 없었고, 적어도 과학의 발달과 지식의 보급 면에서 자본주의 근대가 역사상 가장 계몽된 시대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하지만 문제는 개개인이 얼마나 똑똑해졌느냐가 아니라, 바로 ‘계몽’과 ‘과학’의 이름으로 과학적 지식이 아닌 참 깨달음의 가능성 자체가 부인되는 것이 근대적 지식구조의 특징이라는 점이다. 불교에서는 지혜의 광명에서 소외된 중생의 경지를 ‘무명(無明)’이라고 하는데 이런 ‘무명의 구조화’가 과학적 진실마저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 시대이다.
자본주의 일반의 이런 현상은 분단체제의 매개를 거칠 때 더욱 심각하고 저열한 형태로 나타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아마도 성냄과 미워함의 위력이지 싶다. 분단된 상대방에 대한 증오가 오히려 사상적 건전성의 담보가 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려마저 배척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툭하면 나오는 ‘친북좌파’ 타령이 그런 것이다. 게다가 불우한 이웃에게 남는 양식을 퍼담아주는 일은 우리 민족 전래의 아름다운 풍속이건만, 북녘의 굶주리는 어린이와 동포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조차 ‘퍼주기’라는 딱지를 붙여 가차없는 공격의 대상으로 삼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탐심의 작동은 거칠 것이 없어진다. 자본주의의 구조화된 탐심에 대한 민주적 견제장치로서 선진국에서는 상식화된 것들조차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로 매도되기 일쑤고, 개인적 탐욕의 적나라한 발동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이름으로 옹호된다. 오늘의 한국이 세계적인 경제대국의 반열에 오르고도 천민자본주의의 딱지를 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시에, 자본주의 세계체제보다 역사가 훨씬 짧고 성격이 특수한 분단체제마저 그것 외에는 대안이 없는, 마치 자연스럽게 주어진 생활환경인 듯 여기는 치심이 만연해 있다. 동시에 분단체제가 그 나름의 지구력이 있고 자칫 폭발할 위험이 상존하는 현실인데도 남쪽 사회의 집단적 탐욕과 증오심을 발동하여 휴전선을 멋대로 폐기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또한 ‘무명’의 위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독심들의 위세는 북녘에서 또 그곳 특유의 탐·진·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에 더욱 이겨내기 힘들다. 분단된 쌍방의 상호의존적 적대관계와 이에 따른 분단체제의 자기재생산능력이 바로 그런 데서 나오는 것이다. 예컨대 북측 당국의 적대적·호전적 발언과 때때로 이루어지는 도발적 행위는 남쪽 사회에서 증오심의 위세를 끊임없이 북돋는다. 심지어 이른바 도발행위의 증거가 박약한 경우에도 ‘북의 체제는 나쁘다, 따라서 모든 나쁜 행동은 북의 소행이다’라는 논리 아닌 논리의 도움으로 쉽게 넘어간다. 이것이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의 친미사대주의자들은 나쁘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불행은 그들 탓이다’라는 북녘 특유의 치심과 상보관계에 있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러므로 마음공부가 순조롭기 위해서도 탐·진·치의 위세를 보장하고 키워주는 분단체제부터 타파해야 한다. ‘변혁적 중도주의’의 변혁대상이 분단체제인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 불필요한 혼란을 막기 위해 ‘중도’ ‘중도주의’ ‘변혁적 중도주의’ 등 개념들의 상호관계를 잠시 정리해보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 정치노선으로 흔히 표방되는 중도주의 내지 중도노선·중간노선은 불교적 중도와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이고 내용상으로도 거리가 멀다. 다만 그것이 ‘변혁적 중도주의’가 될 때에는, 현실정치의 노선임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중도에 다시 가까워지는 것이다. 중도의 ‘공’이 ‘악취공’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이곳에서의 탐·진·치 극복작업과 결합해야 하는데, 오늘날 한반도의 경우 그러한 마음공부는 분단체제의 변혁을 지향하는 정치적 실천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 변혁적 중도주의 논의의 진전
그러면 변혁적 중도주의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방식도 『중론』에서 빌려옴직하다. 곧, 무엇이 ‘공’이며 ‘중도’인지 그 내용을 직접 일러주려 하기보다 무엇이 아닌지를 깨우쳐나감으로써 중도에 이르는 방법이다. 변혁적 중도주의 역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이념과 어떻게 다른지를 밝혀가다보면 저절로 그 길이 보이지 않을까 한다.
1) ‘변혁적’ 중도주의기에 ‘변혁’이 빠진 개혁노선 내지 중도노선과 다르다. 다만 변혁이라도 그 대상은 분단체제이므로 국내정치에서의 개혁노선과 얼마든 양립 가능하다. 다만 분단체제의 근본적 변화에 무관심한 개혁주의로는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중도’에 이르지 못한다.
2) 변혁이되 전쟁에 의존하는 변혁은 배제된다. ‘변혁’이라는 낱말 자체는 전쟁, 혁명 등 온갖 방식에 의한 근본적 변화를 포괄하지만, 오늘날 한반도의 현실에서 그런 극단적 방법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변혁적 ‘중도주의’인 것이다.
3) 변혁을 목표로 하되 북한만의 변혁을 요구하는 것도 변혁적 중도주의가 아니다. 남한도 변하고 한반도 전체가 같이 변하지 않으면서 북측만 변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일뿐더러, 남한사회 소수층의 기득권 수호에 치우친 노선이지 중도주의가 아닌 것이다.
4) 북은 어차피 기대할 게 없으니 남한만의 독자적 혁명이나 변혁에 치중하자는 노선도 변혁적 중도주의가 아니다. 이는 분단체제의 존재를 무시한 비현실적 급진노선이며, 때로는 수구보수세력의 반북주의에 실질적으로 동조하는 결과가 되기도 한다.
5) 그렇다고 변혁을 ‘민족해방’으로 단순화하는 노선도 분단체제 극복론과는 다르다. 이 또한 분단체제와 세계체제의 실상을 무시한 비현실적 급진노선으로서, 수구세력의 입지를 강화해주기 일쑤다.
6) 세계평화, 생태친화적 사회로의 전환 등 전지구적 의제를 추구하며 일상적인 실행 또한 게을리하지 않더라도, 전지구적 기획과 국지적 실천을 매개하는 분단체제 극복운동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었다면 변혁적 중도주의와는 거리가 있으며,6) 현실적으로도 소수파의 한계를 넘어서기 힘들다.
앞서 말했듯이 변혁적 중도주의 개념은 『만들기』에서 거의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나 자신의 담론에서는 오랫동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시대의 참 진보가 곧 변혁적 중도주의라고 못박기는 2006년이 처음이지만,7) 기본적인 발상은 6월항쟁으로 ‘민족문학의 새 단계’가 열리는 상황에서 ‘6월 이후’를 보는 당시의 세가지 중요한 시각들을 비판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형태로 발표되었다.8) 곧, 위에 열거한 ‘변혁적 중도주의가 아닌 것’ 중 1)에 해당하는 중산층의 온건개혁노선과 4), 5)에 해당하는 급진운동권의 이른바 민중민주(PD), 민족해방(NL) 노선들을 넘어서면서 이들 모두를 슬기롭게 결합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87년체제 내내 하나의 주장으로만 남았고, 이제 그 실현을 2013년체제에 걸게 된 형국이다.
물론 호응하는 논의도 적지 않았다. 『창작과비평』 지면에서는 이남주(李南周)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반도 변혁」(2008년 봄호) 등이 그 주제를 다루어왔고,9) 김기원(金基元)의 최근 저서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창비 2012)는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개념을 채용하지는 않았지만 “NL과 PD의 진보적 사상에는 발전적으로 계승할 부분도 있다. 민족문제와 계급·계층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이다. 그것을 현실에 맞게 응용하되 낡은 사고틀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179면)라든가 분단국가인 한국사회에서는 ‘진보·개혁·평화’의 상호보완적인 삼중과제가 존재한다는 인식(214~22면) 같은 것들은 변혁적 중도주의에 친화적인 발상이다.10)
『만들기』에서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표현을 일부러 자제했다면, 4·11총선 이후의 상황은 논의를 기본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성을 일깨워주었다. 통합진보당 사태만 하더라도 어떤 것이 참 진보인가를 철저하게 토론할 필요성을 상기시켰고, 나 자신 총선 직후 한국진보연대, 통합진보당, 민주노총, 범민련남측본부 및 한국여성연대 공동주최의 초청강연(2012.4.25 영등포역사 3층 강당)에서 진보당과 진보단체의 조직문화 쇄신을 주문하면서 변혁적 중도주의 주장을 다시 내놓았다.11)
통합진보당의 운명이 어찌 될지는 현재로서 예측할 길이 없다. 그러나 다가오는 대선도 그렇지만 2013년체제 건설의 긴 과정에서 이른바 진보개혁세력의 폭넓은 연합정치는 여전히 필요할 터이며, 이는 지난 총선에서 민주, 진보 양당이 이룩한 정책연대보다 훨씬 탄탄한 가치연합이면서 실천적으로는 훨씬 신축성있는 역할분담을 허용하는 성격이어야 한다. 아니, 기본적인 가치와 비전을 공유하는 연대만이 전략적 유연성을 지닐 수 있는 법이다. 그에 반해 4·11총선에서의 정책연대는 후보단일화라는 선거연대를 위한 한갓 구실에 머물기 일쑤였고, 아니면 선거연대의 댓가로 상대방이 수용하기 힘든 정책을 받아내어 ‘발목을 잡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물론 ‘가치연대’ 또는 ‘가치연합’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는 했다. 그러나 ‘정책연대’를 그냥 멋있게 포장하는 데 불과하거나 더러는 선거연대 자체를 거부하는 명분으로 이용되었다. 사실 ‘MB심판’이라는 낮은 수준의 목표 또는 추상적인 미사여구가 아닌 ‘공동의 가치’는 각 당 내부에서조차 공유되지 않았고 진지하게 논의된 바도 없었다.
다행히 총선 이후로 기존 정책연대의 부실함과 미흡함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특히 통합진보당의 당내갈등 과정에서 본격적인 노선논쟁이 벌어졌다. 현재의 정치지형을 일별한다면, 민주통합당은 위의 ‘아닌 것’ 중 1번에 치우친 면이 있으나 전통적으로 남북관계 발전에 적극적이고 2~5번에 대한 반대입장이 확고한 편이므로 한층 진보적인 세력과의 연합정치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변혁적 중도주의에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 통합진보당의 경우는 말하자면 ‘변혁적 중도주의 좌파’로서의 자리매김이 가능한 정파와 5번의 입장을 고수하는 정파—물론 이때도 노선 자체의 문제와 온갖 비민주적 방식으로 조직을 장악해서 그 입장을 관철하려는 작풍의 문제는 구별해야 하지만—의 대립으로 당장의 대선국면에서 의미있는 역할을 못할지도 모를 형국이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차이가 공론화된 것 자체는 하나의 진전이다. 다른 한편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은 이명박정부 아래 기승을 부리던 2번 및 3번(전쟁불사론과 흡수통일론)에 해당하는 세력을 견제하고 1번(온건개혁주의)에 가까운 노선을 표방하고 있는데, 그 집단의 체질화된 수구성과 지도자의 역시 체질화된 권위주의 및 퇴행적 역사인식을 탈피하고 변혁적 중도주의에 근접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12월의 대통령선거가 변혁적 중도주의를 위해서도 관건적 승부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4. 대선국면에서 검증기준으로서의 변혁적 중도주의
그렇더라도 대선국면의 구호가 ‘변혁적 중도주의’일 수는 없다. 변혁주의와 중도주의라는 흔히 상반되는 두 낱말의 결합이 한반도 특유의 현실을 반영한 이 개념의 강점이고12) 바로 그 애매함이 화두(話頭)다운 매력을 지닌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난해한 개념은 선거전에서 무용지물이다. ‘승리 2012’에 동원될 법한 구호는 역시 ‘희망 2013’이요, 개념으로서는 ‘2013년체제’가 거의 상한선이 아닐까 한다. 그렇더라도 2013체제의 내용을 변혁적 중도주의의 기준으로 검증하는 것은 가능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
예컨대 ‘경제민주화’의 경우를 보자. 이는 여야 모두 핵심 정책목표로 내세움으로써 2013년 이후 정부의 우선과제로 떠올랐다. 그런데 재벌규제, 불공정거래 근절, 중소기업 육성, 노동권 보호 등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각 당과 후보들의 구체적 정책구상을 점검하기에 변혁적 중도주의는 너무 추상수준이 높은 개념이다. 이런 점검은 전문성을 갖춘 별도의 작업에 당연히 맡겨야 한다. 그렇더라도 정책구상과 구상자의 기본자세에 대한 검증을 변혁적 중도주의의 관점에서 해보는 일이 그것대로 필요하다.
먼저, 변혁적 중도주의는 분단체제의 변혁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분단체제가 제공하는 온갖 이권과 반칙면허권을 고수하는 세력, 또는 그런 세력이 유난히 많이 모인 정당이 경제민주화 실현의 적격자인지는 일단 의심해봐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분단체제 극복이란 한반도 남북의 점진적·단계적 재통합과정인 동시에 남북 각기의 내부개혁을 통해 반민주적 기득권세력을 약화 또는 제압해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경제민주화를 표방한 이런저런 정책들이 그러한 역사적 과업의 다른 의제들과 얼마나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지가 경제민주화 자체의 성패를 가르게 되어 있다.
특히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임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이는 소위 진보진영에서 흔히 듣는, 한국사회가 87년체제를 통해 정치적 민주주의는 달성했으나 경제적 민주주의는 이룩하지 못했다는 언설이 오히려 흐려놓기도 하는 진실이다. 6월항쟁 이후 민주정치에 필수적인 절차들을 상당부분 쟁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87년체제의 성취로 말하면 그에 더해 경제면에서 노조활동의 자유를 확대하고 기업에 대한 국가의 자의적 통제를 약화하는 ‘경제적 민주주의’의 성과도 적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자율권이 증가한 대기업들이 사회통합을 파괴하고 국가권력마저 위협할 정도로 비대해진 것이 87년체제 말기의 현실인데, 이렇게 된 데에는 87년체제 아래 한국의 정치적 민주주의 또한 엄연한 한계 속에 머물렀다는 사실도 작용한 것이다.
물론 정치민주화의 험난한 도정 자체가 경제민주화가 안된 탓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기보다 각종 경제개혁 정책이 민주주의라는 변혁적 중도주의의 핵심과제에 얼마나 충실한 가운데 나오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어떤 의미로 시장경제—시장 자체보다도 거대 기업법인들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는 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상충하는 면이 있다. 이른바 ‘1인1표’ 대 ‘1원1표’의 원리상 차이가 그것이다. 물론 경제를 1인1표제로 운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른바 시장경제가 나라 전체를 민주주의가 아닌 ‘전주(錢主)주의’ 사회로 만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경제의 민주화, 곧 경제영역에 대한 민주정치의 개입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공정언론, 검찰개혁, 반민주적 과거사와의 정직한 대면, 선거제도 개선 등 ‘정치민주화’ 의제에 무관심한 채 경제민주화를 달성할 수는 없게 마련이다.
한반도 평화는 변혁적 중도주의에 의한 검증과정에서 또 하나의 핵심사안이다. 경제민주화와 달리 평화문제가 대선정국에서 큰 쟁점이 될 확률은 높지 않다. 그러나 정치민주화와 경제민주화가 긴밀히 맞물려 있듯이 국내의 민주주의 문제 전체가 남북관계와 맞물려 있는 것이 분단체제 특유의 현실이다. 따라서 2013년 이후의 한국을 이끌어나갈 대통령과 정당이 이러한 현실을 얼마나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어떤 복안을 가졌는지는 나라의 앞날을 좌우할 사항이다.
아니, 이는 남북관계에 한정된 문제도 아니다.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 10위권을 넘나드는 경제강국이요, 동북아 평화체제뿐 아니라 동아시아 또는 아시아 전역에 걸친 지역유대를 강화해가는 과정에서도 미·중·일·러와는 또다른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를 위해서도 한국에 어떤 대통령이 나오느냐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단순히 ‘누가 해도 남북관계를 MB처럼 엉망으로 만들기야 하겠느냐’고 간단히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관계와 국제관계에서 한국이 지닌 잠재력을 십분 발휘할 담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후보가 나타난다면 선거과정에서도 폭발적 지지를 얻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2013년체제의 과제로 꼽는 또 한가지가 사회통합·국민통합이다. 변혁적 중도주의의 관점에서는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의 점진적 재통합과정을 도외시한 남쪽국민만의 통합은 난망이고, 더구나 2012년에 통합이 당장에라도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거나 기만술이기 쉽다. 사회통합을 원천적으로 저해하는 수구세력과의 일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13) 그러나 이 분야에서도 2013년 이후에 대한 구상과 준비는 지금부터 진행해야 한다.
이 문제 역시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검증 잣대에 국한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변혁적 중도주의가 ‘아닌 것’을 열거했는데, 그것들이 ‘아닌’ 이유 중에는 그 어느 것도 진정한 사회통합의 이념이 될 수 없다는 점이 포함된다. 현상적으로는 1번(변혁 없는 개혁노선)이 그나마 많은 대중을 확보한 편이지만, 분단시대에 분단체제에 관한 경륜이 결여된 산발적 개혁은 큰 성공을 거두기 힘들고, 온건한 개혁마저 거부하는 수구세력을 제압하지 못한다. 다만 남한사회의 개혁작업에 진지하게 임하다보면 근시안적인 개혁주의를 넘어 변혁적 중도주의에 합류할 가능성이 열리기 쉽다.
위의 2번(무력통일) 또는 3번(전쟁 없는 흡수통일)에서 보듯이 수구세력 나름의 변혁노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실현 가능성이 거의 전무한 이런 구상이 일정한 위세를 유지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남북대결을 부추기는 일이 남한 내에서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북의 변혁은 명분일 뿐, 실질적으로는 분단체제의 변혁과 그에 필요한 남한 내의 개혁을 막는 데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4번이나 5번에 해당하는 이들—흔히 PD와 NL로 지칭되기도 하는 급진세력—은 모두 소수집단에 머물러 있고, 기존 노선을 고집하는 한은 다수세력으로 자라기 힘들 것이다. 아니, 점점 더 세가 줄어들기 십상이다. 그에 비해 6번의 녹색주의, 평화주의 등은 세계적 시민운동의 뒷받침이 한층 든든한 편이지만, 국내정치의 현실 속에서는 역시 고립을 면하기 어렵다. 물론 녹색당 운동의 경우 독일에서처럼 현실정치에 뿌리내릴 가능성도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변혁적 중도주의로 합류 또는 적어도 그것과 제휴하는 일이 불가피할 것이다. 아무튼 4, 5, 6번 모두 중도 공부와 분단체제 공부를 통해 각자가 내장한 합리적 문제의식을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변혁적 중도주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으면 한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2013년체제의 통합된 사회가 획일화와는 무관한, 다양성과 창조적 갈등이 넘치는 사회가 될 것임을 강조하고 싶다. 정당정치의 영역에서도 변혁적 중도주의 노선에 입각한 거대정당 따위를 꿈꾸지 않는다. 변혁적 중도주의의 이념을 공유하면서도 변혁과 개혁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보수정당, 그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인 중도개혁정당, 그리고 변혁적 중도주의 노선을 공유하지만 평등, 자주, 녹색 등의 가치에 남다른 열정을 지닌 한층 급진적인 정당(들)이 서로 경쟁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들의 병존과 선택적인 제휴를 수월케 하는 비례대표제의 대폭 확대 같은 선거제도의 개혁도 생각해볼 일이다. 다른 한편, 체질적으로 분단체제의 변혁을 수용할 수 없는 수구세력도 그들 나름의 극우정당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평등주의, 반제국주의 또는 녹색주의의 이념적 순결성을 고수하는 세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만 지금처럼 강력한 수구세력이 상당수의 합리적 보수주의자들마저 포섭하여 최대 정당으로 군림하는 구도는 깨져야 한다는 것이다.
5. 『안철수의 생각』에 대한 몇가지 생각—마무리를 대신하여
2012년 대선정국에서 당장의 가장 큰 변수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8월초 현재 그는 아직 출마 여부를 밝히지 않았고, 출마했을 때 어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의 거취가 정국의 양상을 크게 뒤흔드는 요소임은 분명하다. 이는 다른 후보들을 무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편으로 박근혜 후보는 일종의 상수로 자리잡은 지 오래고, 다른 한편 민주당 후보들은 아직 여럿이 후보지명을 놓고 다투는 중이라 당장 어느 한 사람의 위력을 지목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안교수 자신은 최근 『안철수의 생각』(김영사 2012, 이하 『생각』)이라는 저서를 통해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지도’를 제시하면서 출마 여부는 여전히 미정으로 남겨놓았다. “저를 지지하시는 분들의 뜻을 정확히 파악해야 진로를 결정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 냉정하게 판단하는 게 중요하고요. 일단은 이 책을 시작으로 제 생각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일을 해나가야 하겠지요. 제가 생각을 밝혔는데 기대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진다면 저는 자격이 없는 것이고, 제 생각에 동의하는 분들이 많아진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겠지요.”(52면)
출간되자마자 책이 기록적인 판매고를 달성 중이고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 출연과도 겹쳐 그에 대한 여론조사 지지율이 크게 상승한 점으로 보면, 저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이제 와서 그가 ‘저는 도저히 감당할 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갑자기 물러선다면,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 전체에 일대 타격이 될 공산이 크다. 출마하자마자 검증을 못 이겨 추락할 게 아니라면, 민주당 공천후보를 누르고 야권단일후보가 되든 단일화 경선에서 패한 뒤 이긴 후보를 밀어주든 지지자들의 정치참여를 적극화하는 데까지 가야 시대적 책임을 다하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 같다.
물론 『생각』에 대해 모두가 동의와 지지를 보내고 있지는 않다. 한편에서는 ‘교과서적 모범답안의 짜깁기’라느니 ‘지루한 정답주의’라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북한 핵문제에 관한 안교수의 생각이 북한의 입장과 같다는, 다시 말해 정답은커녕 위험천만한 오답이라는 지적도 있다.14) 또한 책 내용에 대한 한결 진지한 서평을 통해 ‘안철수는 부실한 건축물이다’라는 결론을 내린 경우도 있다.15) 『생각』은 일종의 공약집 내지 예비공약집이므로 공약으로서의 적절성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 당연히 필요하다. 그런데 문학평론가로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이 책이 여느 공약집이나 출마용 저서와 달리 하나의 ‘작품’에 해당하는 울림을 지녔다는 사실이다.16) 미리 진로와 전략을 정해놓고 그에 맞춰 내용을 개진하는 대부분의 선거용 저서와 달리, 지은이 안철수 교수와 엮은이 제정임(諸貞任)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가 다같이 마음을 열고 대화하며 모색하는 과정의 진정성이 전달되기 때문일 것이다. 출마선언 전에 정책구상부터 내놓고 독자들에게 지지여부를 묻는 것이야말로 고도로 노회한 정략이라고 보는 이도 없지 않겠으나, 적어도 독서의 실감은 능동적 독자의 몫을 남겨두는 ‘작품적’ 성격에 가깝다.17)
그러나 독자가 아무리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더라도 “제가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 냉정하게 판단하는” 대목에는 미리 동참해줄 길이 없다. 그것은 안교수만의 몫이고, 독자나 국민대중은 안교수가 일단 판단한 다음에 그것이 옳았는지 글렀는지 사후적으로 판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말하자면 설령 『생각』이 매우 훌륭한 ‘문서파일’이라 해도 어떤 성능의 ‘실행파일’이 딸렸는지는 문서만으로 판단할 수 없고 실행파일을 돌려봐야 알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한 exe 프로그램일 필요는 없고, 일단 돌려가면서 단기간에 업그레이드가 가능한지가 초점이다. 그럴 만한 수준이라면 일단 실행하면서 사용자의 피드백을 받아 ‘앞으로 나가는’ 추가적인 협동작업도 가능할 테지만, 독자가 미리 도와줄 수 있는 대목은 아닌 것이다.
『생각』에 제시된 정책구상에 대해 여기서 자세히 논평할 생각은 없다. 두어가지만 언급할까 하는데, 먼저 복지와 경제민주화 분야에서는 (적어도 나 같은 비전문가가 볼 때) 그 어느 전문가 못지않은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구상을 준비한 것 같다. 특히 대다수 복지전문가나 야당 후보들에 견주어 돋보이는 점은 경제민주화가 혁신경제의 창달에 직결됨을 체득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민주화 구상이 변혁적 중도주의와 얼마나 합치하는지는 더 검토해볼 사안이지만, 저자가 ‘복지・정의・평화’라는 3대 의제를 제시하면서 그 상호의존성을 강조한 것은 고무적이다.18)
평화 대목은 복지와 경제민주화 대목만큼 소상하지 않지만, 통일을 ‘사건’이 아닌 ‘과정’으로 파악한 점이나 평화체제 구축의 긴요성과 북한인권 문제의 중요성을 동시에 거론한 것 등(『생각』 151~59면)은 본인의 성찰이 담긴 발언으로 보인다. 다만 천안함사건에 대해서는, “저는 기본적으로 정부의 발표를 믿습니다. 다만, 국민에게 설명하는 과정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문제가 커졌다고 생각합니다”(159면)라는 일종의 ‘수비형 정답’에 머물렀는데, 과학자이자 낡은 체제와의 과감한 결별을 주장하는 안교수가 이 문제에 관해서도 독자적인 학습과 성찰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튼 문제는 역시 ‘실행파일’이다. 그런 점에서 『생각』의 내용에 국회와 정당정치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은 ‘문서파일’로서도 부족한 점이며, 이에 관해서는 김대호(金大鎬)의 비판이 날카롭다. “이런 내용이 빠진 것은 책 지면이 좁아서 그런 것 같지가 않다. 정치인 중의 정치인인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이 정치와 정당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낮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19) 더구나 안교수는 ‘소통과 합의’를 무엇보다 중시하면서도, ‘상식과 비상식(또는 몰상식)’의 대립구도를 말하기도 한다. 이는 2013년체제가 사회통합의 시대가 되기 위해서도 수구세력과의 격돌이 일단 불가피하다는 나 자신의 생각과도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식을 바탕으로 소통하고 합의하자고 해도 도저히 안 먹히는 것이 진보와 보수의 이념을 떠나 오로지 자기 이득만 지키려는 ‘수구’의 특성 아니겠는가. 저들을 선거승리와 의회관계 등 제도정치를 통해 제압하고 견제하는 방책은 ‘실행파일’의 필수장치 중 하나일 것이다.
이는 또한 12월 대선에서 어떤 연합정치가 승리를 위한 최선책일지에 대한 ‘정치공학적’ 계산도 요구한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2013년체제’라 부름직한 획기적인 새 시대를 열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열정이며, 국민의 불안감을 부추기면서 다시 한번 변화 아닌 변화로 세상을 홀리려는 세력을 단연코 용납지 않는 시민들의 결기다. 뜻이 확고하다면 그에 맞춘 계산을 할 사람들은 때가 되면 나오게 마련인 것이다.
--
1) 백낙청·윤여준·이해찬 대화 「4·11총선 이후의 한국정치」, 『창작과비평』 2012년 여름호 183면. 비슷한 반성적 발언을 총선 직후(4월 19일)의 프레시안 인터뷰에서도 내놓은 바 있다(「2013년체제, 어떤 대통령 나오느냐가 관건」, 프레시안 2012.4.23).
2) 마음공부가 비록 중요하다 생각할지라도 일반 독자나 청중을 상대할 때 그 이야기를 길게 하기는 조심스럽다. 그러던 중 지난 5월 24일 조계종 선림원(禪林院)의 초청으로 강의할 기회를 얻은 김에 「2013년체제와 중도공부」라는 제목으로 불교적 중도공부에 대해 조금 자세히 언급했는데, 그중 상당부분을 여기 원용한다.
3) 졸저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창비 2009) 제14장 「통일시대・마음공부・삼동윤리」, 292면 참조. 그간의 내 작업에 다소나마 친숙한 독자에게 ‘분단체제’의 개념을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독자를 위해서는 『만들기』 제7장 「한국 민주주의와 한반도의 분단체제」에 비교적 상세한 소개가 있음을 밝히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4) 졸저 「북의 핵실험 이후: 남북관계의 ‘제3당사자’로서 남쪽 민간사회의 역할」,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141면.
5) 龍樹菩薩, 『중론(中論)』 金星喆 역주, 경서원 2001(3차개정판) ‘역자후기’ 참조.
6) 이런 논지를 녹색담론과 관련해 펼친 것이 졸고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 이남주 엮음 『이중과제론』(창비담론총서 1, 창비 2009)이다(특히 3절 ‘분단체제 극복운동이라는 매개항’ 참조).
7)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창비 2006) 제2장 「6·15시대의 대한민국」 중 ‘6·15시대의 참 진보는 “변혁적 중도주의”’ 대목(30~31면) 참조. 이 논지는 같은 책 제4장 「분단체제와 ‘참여정부’」의 덧글 ‘변혁적 중도주의와 한국 민주주의’에서 부연된다(58~61면).
8) 졸고 「통일운동과 문학」, 『창작과비평』 1989년 봄호; 졸저 『민족문학의 새 단계』(창작과비평사 1990), 124~29면 참조.
9) 같은 호에 백낙청·조효제 대담 「87년체제의 극복과 변혁적 중도주의」도 실렸다. 나 자신이 그 주장을 계속해왔음은 물론이다.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에 이르면 ‘변혁적 중도주의’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어에 가까워지며, 서장 「시민참여 통일과정은 안녕한가: 중도 공부, 변혁 공부를 위하여」, 7장 「변혁과 중도를 다시 생각할 때」, 13장 「2009년 분단현실의 한 성찰」, 15장 「변혁적 중도주의와 소태산의 개벽사상」 등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10) 다만 그가 설정한 X(진보↔보수), Y(개혁↔수구), Z(평화협력↔긴장대결)라는 3개 축이 ‘한국사회의 이념·정책지형’의 분석도구로서 얼마나 유용한지는 모르겠다. 이 그림의 큰 미덕은 한국 사회과학자들의 현실분석에서 곧잘 무시되는 ‘남북관계’를 추가함으로써 2차원적 평면도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3차원의 입체적 인식을 요구한 점이고, 통상적인 ‘보수 대 진보’의 구도가 현실 속의 ‘수구 대 개혁’ 전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김기원의 오랜 지론이자 탁견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분석도구로 기능하려면 Y축과 Z축도 X축처럼 양극이 “선악이 아니라 조화로운 균형을 달성하는 관계”(210면)로 설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에 대한 논의는 다른 기회로 미룬다.
11) 당일 배포된 강연 요지문 및 『통일뉴스』(www.tongilnews.com) 2012년 4월 26일 기사 「진보진영, 폐쇄적인 조직문화 쇄신해야」 참조.
12) “끝으로 ‘변혁’과 ‘중도주의’라는 얼핏 상충되는 개념들의 결합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식 통일이라는 특유의 역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임을 상기하고자 한다. 남북은 6·15공동선언을 통해 기왕의 어떤 분단국가도 못 가본 평화적일뿐더러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통합의 길에 합의해놓은 상태니만큼, 이 합의의 실천에 양극단이 배제된 광범위한 세력이 동참할 때 전쟁이나 혁명이 아니면서도 점진적인 개혁의 누적이 참된 변혁으로 이어지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졸고 「변혁과 중도를 다시 생각할 때」,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178~79면)
13) 『만들기』 제4장 「다시 2013년체제를 생각한다」 중 ‘본격적 사회통합은 2013년체제의 숙제로’(73~75면) 참조.
14) 7월 25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새누리당 김영우 의원의 질문에 대한 류우익 통일부장관의 답변. 다만 류장관은 김의원이 안교수의 저서임을 밝히지 않은 채 읽어준 특정 대목을 두고 비핵화에 관한 정부의 기존 입장을 밝힌 것뿐이라는 통일부 대변인의 해명이 있었다(「류우익 장관, 안철수 북핵 견해에 “북한과 같다”」, 한겨레 2012.7.26).
15) 김대호 「안철수는 부실한 건축물이다—〔기고〕<안철수의 생각> 읽고 세번 놀라다」, 프레시안 2012.7.28.
16) 그 점에서 『문재인의 운명』(문재인 지음, 가교 2011)도 비슷한데, 역시 선거용이기보다 자신을 성찰하고 정리하는 작업에 치중한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17) 이는 또한 기존의 정치인들이 비유컨대 자기가 만들어낸 ‘영화’를 보여주고 관객에겐 품평의 기회만 주는 데 비해, 안철수현상은 개개인이 직접 참여해서 내용을 만들어가는 ‘게임’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열광한다는 진중권 교수의 분석(‘이슈 털어주는 남자 김종배입니다’ 107회 ‘〔전방위토크〕안철수는 왜?’, 2012.6.1)을 상기시키는 면이기도 하다.
18)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안교수가 “정의에 대한 착각”을 범하고 있다고 혹평하지만 이는 지나친 단정이다. 김대호 자신은 출발선에서의 공평한 출발을 ‘공정’, 결승선에서의 합리적 격차 내지 불평등을 ‘공평’으로 규정하면서 안철수 책에 후자에 대한 언급이 없음을 비판한다. 그러나 안교수가 공평한 출발과 공정한 경기운영을 요구하되 균일한 결과를 요구하지 않는 것은 결과의 일정한 격차 내지 불평등을 인정한 것이고, 다음에 벌어질 경주에서도 출발선이 공평하고 경주과정에 반칙이 없으며 패자에게 재기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말에는 결과의 격차가 ‘합리적 격차’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합리적 격차’의 구체적 내용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두고 비판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점에 생각이 다른 것을 기본개념에 대한 착각이라며 초보자 실수로 몰아서는 생산적인 토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19) 김대호, 앞의 글. 다른 한편 총선 전에 제3당을 건설해서 한국정치를 쇄신하자는 주변 일부인사들의 제안을 안교수가 거절한 것이 “몸을 던져 정치적 신기원을 열어제끼려는 책임의식과 결기가 부족한” 탓이라거나 그로써 “안철수가 역사적 기회를 놓치고, 역사적 소명을 저버린”(김대호, 같은 글) 것이라는 주장은 일방적인 단정이다. 오히려 제3당 건설이 ‘정치적 신기원’은커녕 한나라당=새누리당을 도와주기 십상임을 간파하는 정치감각을 보여준 것이 정치경험이 없는 안교수였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