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87년체제를 넘어 2013년체제로 나아가자
87년체제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 실패로 인해 민주화투쟁의 성과가 미흡하고 왜곡된 형태로 제도화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실패의 그늘은 어둡고 깊었다. 독재와의 투쟁 속에서 야당-재야·시민사회운동-대중을 아우르며 형성된 최대 도전연합은 이후 민주화를 이끌 사회세력연합으로 발전하는 대신에 전에 없이 반목하며 흩어져버렸다. 반독재투쟁 속에서 민주적 감수성을 단련한 자유주의세력이 독자적 정체성을 가지며 발전하기는커녕 지역주의에 편승해 권력을 재생산하는 퇴영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3당합당이나 DJP연합처럼 보수세력과의 타협 속에서 겨우 정치적 대안을 조직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개혁적 자유주의세력과 진보진영 사이에도 심대한 분열이 일어났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치른 것은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의 심화나 수구적 사회세력의 존속 같은 사회경제적 대가에 한정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심리적 대가가 컸다. 과거의 정치적・사회적 악행에 대한 청산과 평등하고 공정한 삶으로 나아갈 길이 비틀리게 된 원인의 일부가 민주개혁진영 내부에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었으며, 그것이 주는 자존감의 상처는 컸다. 또한 지도자들의 이기심과 오판이 열성적 추종자들을 경유해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감으로써 사회적 분열도 증폭되었다. 이후 우리는 사회개혁의 비전과 담론, 정당 그리고 사회집단이 제대로 정렬되지 않고 어긋나는 착종과 혼동의 긴 시간을 겪어왔다.
하지만 이런 87년체제의 제약을 넘어서려는 탈피의 운동도 지속되어왔다. 이 움직임은 민주화 이후 최초로 대규모 반동을 시도한 이명박정부하에서 문턱을 넘기 시작했다. 체제 변동을 이끄는 담론의 수준에서도 박정희체제를 넘어 87년체제 내내 영향력을 발휘했던 보수적 성장주의 그리고 보수파가 주도한 신자유주의가 설득력을 상실했다. 그 대신 수평적인 사회적 유대에 터한 복지, 평화 그리고 정의의 담론이 헤게모니를 획득했다. 2008년 도심을 밝힌 촛불항쟁에서 모습을 드러낸 대중의 직접행동은 일관성있는 투표와 정당 및 정치 혁신의 요구로 발전했다. 그렇게 해서 담론-정당-시민사회운동-대중을 연결하는 최대 도전연합이 1987년 6월항쟁 이후 처음으로 재출현했다. 그리고 87년체제로부터의 탈피 운동을 새로운 체제 수립으로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 시험하는 단계에 접근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87년체제의 출범기에 마주쳤던 지도자 문제를 다시 대면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회동이 이루어졌으며, 회동 직후 발표된 합의문은 그 전에 엷게 퍼져 있던 긴장과 불안감을 상당부분 씻어내렸다. 이로써 체제 전환을 향한 또 하나의 중대한 고비를 넘어섰다. 단일화 실패 속에 출범한 체제를 단일화를 통해 극복할 길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문, 안 두 후보는 양김보다 정치적 훈련이 모자라고 그들만큼 확고한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감히 말하건대 이들은 바로 그 미약함 때문에 도리어 우리에게 더 위대한 것을 선물할 수 있다.
이미 시작된 ‘새정치 공동선언’ 협상에 이어 벌어질 단일화 협상 그리고 대선 승리를 향해 가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러가지 문제들이 출현할 텐데, 이와 관련해 두가지 점을 말해두고 싶다. 우선 단일화 방식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계산이 있을 수 있다. 두 후보가 대의를 지향하며 계산을 억제하려 해도 지지자와 대중에 의해서 그리고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의 부추김을 통해서도 계산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계산은 불신을 자아내는 통로 구실을 할 것이다. 이때 요구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각자가 승리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공정한 규칙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보나 지지자들 모두 자기 쪽이 질 가능성을 허심탄회하게 수용하는 마음가짐이다.
다른 하나는 단순한 후보 단일화가 아니라 현재의 도전연합을 대선 이후 개혁연합으로 공고히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라는 억견을 넘어서는 일도 필요하다. 생각해보면 그런 말 자체가 권위주의적 통치의 유산일 뿐이다. 민주화란 권력의 분점과 분권화이며 궁극적으로 권력 형성과 행사가 시민 모두에게 분산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권력을 나눈다는 것이 아니라 나눌 만큼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나눔을 통해 더 큰 씨너지를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일화 경쟁에서 진 후보와 그 세력이 대선 승리 이후에도 국정에 참여할 길을 폭넓게 여는 창의력있는 정치적 실험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럴 때 단일화 결과보다 가치와 정책의 연합이 더 중요해지고 단일화 승부에 대한 집착을 떨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단일화에 이어 민주진영의 대선 승리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 민주파가 단독으로 집권에 성공하는 첫번째 사례가 된다. 그런 경우에도 여전히 여소야대의 국회 상황이 기다리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안철수 현상으로 대변되는 정당혁신과 정치혁신의 움직임은 대선 승리를 이룰 경우 현재의 정당체제 전반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런 견지에서 현재의 단일화 논의가 민주적 세력연합에 조응하는 대안적인 정당운동을 구상하고 지향하는 쪽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이런 흐름이 결실을 맺는다면 새누리당 또한 현재의 틀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도 대선 승리는 2013년체제를 수립하는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을 밖으로 돌릴 때도 체제 전환의 의미는 중대하다. 87년체제는 냉전 속에서 이룩된 성과였다. 그래서 체제의 내적 한계와 외적 제약요인 때문에 분단체제를 동요로 이끌긴 해도 결정적 전환을 이루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동서냉전이 종식된 지 오래임은 물론 자본주의 세계체제 변화의 폭과 깊이가 심대해지고 있으며,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과 북한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권력교체 시기를 경과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공고한 민주적 세력연합에 기초한 새로운 민주정부의 탄생은 한반도발(發) 세계체제 변동의 계기가 될 수 있으며, 분단체제의 질곡을 결정적으로 돌파하는 시대를 열 수 있다.
이렇게 커다란 가능성과 기회가 우리 손 안에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가능성과 기회의 포착 가능성이 현재의 정치 과정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미시적인 행위와 발언에서의 신중함, 창의력 그리고 열정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도래한 미래를 현실화하는 것, 87년체제로부터의 탈피를 2013년체제의 수립으로 잇는 것, 문턱을 마침내 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내야 할 일이다.
세계 최저의 출산률과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 말해주듯이 우리 사회 성원들은 힘겹고 불안하며 억울하고 답답하다. 이런 시대에 문학은 고통에 대한 깊은 감수성을 통해 그 고통을 넘어설 길을 모색한다. 그런 행로를 살피기 위해 ‘고달프고 억울한 사람들과 우리 시대의 문학’을 특집 주제로 삼았다. 황정아는 과잉긍정과 과잉억압에 함몰되지 않고 맞서는 소설적 주체의 양상을 박민규, 김사과, 황정은의 작품을 통해서 탐색한다. 그리고 그런 주체의 문학적 형상화 자체가 “이미 와 있는 더 나쁜 미래를 경고하는 작업과 이미 와 있는 더 나은 미래를 알아보는 작업”의 동시적 수행임을 보여준다. 정홍수는 우리가 직면한 중심 문제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고통과 배제에 있다고 진단하며 김애란, 조해진, 공선옥의 근작을 통해 그 고통받는 다수의 이야기 속으로 이끈다. 그는 이런 이들의 고통을 담아내려는 과정에서 문학이 어떻게 공감과 연민 그리고 증언의 윤리를 실현해가고 있는지 말하고 있다. 복도훈은 최근 활발히 발표되는 르뽀르따주가 이전 시대의 르뽀문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타자의 목소리에 깃든 욕망의 복잡성을 읽어내는 동시에 기록자의 자기연루를 끊임없이 윤리적으로 되묻는 글쓰기가 되었음을 전해준다.
대화에서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는 2013년 이후 한국 외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미국의 동아시아로의 귀환 정책과 중국 굴기의 연관, 그리고 미중 사이에서 한국 외교가 취할 전략, 남북관계가 우리의 외교 전반과 맺는 관계 등이 깊게 다뤄졌다. 논단과 현장에서도 내년에 들어설 새로운 정부를 향한 제언들이 이루어졌다. 김종대는 서해에서는 연평도 포격과 NLL 문제로 시끄럽지만 동해안에서는 귀순자가 내무반을 노크하는 우리 국방의 난맥상을 극복하고 안보의 합리성을 실현할 길을 모색한다. 정태인과 홍인기는 각각 민주진보진영의 성찰과 분발을 촉구하는 김기원의 최근 저서에 대해 논평하고, 최근 제출된 중등교육 개혁안들을 검토하는 속에서 교육 거버넌스 구축의 필요성을 논한다. 이일영의 ‘상생의 새 구상,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 심포지엄 참관기는 토론회의 열띤 분위기는 물론 김석철 교수 작업의 의미를 개인적 소회를 곁들여 소상히 전해준다. 그리고 미국의 사회비평가 리베카 쏠닛의 월가 점거 시위 일주년을 기념하는 글 두편도 빼어난 읽을거리다.
문학평론란은 한・중・일 비평가의 글로 동아시아문학의 현황을 조명한다. 최원식은 김형수의 조드를 통해 한국인이 중세 몽골과 칭기스 칸에 대한 소설을 쓴다는 것의 심층적 의미를 따진다. 사또오 이즈미는 올해로 등단 50년을 맞은 황석영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동시에 그것을 일본문학과 일본사회를 성찰하는 거울로 바짝 끌어당긴다. 중국사회의 고단하고 억울한 주변부 삶을 조명하는 ‘저층문학’에 대한 리 윈레이의 소개는 이번호 특집과도 깊이 공명한다. 여기에 더해 신인평론상 수상자 윤재민의 글도 실었다.
작가조명에서는 함돈균이 세번째 시집 『훔쳐가는 노래』를 발간한 진은영과 대화를 나눈다. 투명한 감수성과 지적 면모, 강렬한 정치성이 어우러진 진은영 시의 매력을 탐사하고 끊임없이 갱신하는 ‘시적 모험’의 일단을 목격한다. 이번호 시란은 신인시인상 수상자 안희연을 비롯해 열세명 시인의 신작으로 풍성하다. 소설란의 정이현과 황정은 장편은 연재 중반을 넘어서며 궁금증을 배가한다. 윤고은, 오성용 그리고 신인소설상 수상자 최정화의 단편도 흥미롭다. 이밖에도 하나하나 소개하진 못하지만 묵직한 내용을 간결한 필치로 다뤄준 문학초점, 촌평, 그리고 문화평 필자들께 감사를 전한다.
제14회 백석문학상 수상자로 최정례 시인이 결정되었다. 차분한 시선과 정련된 언어로 한국시의 깊이를 더해온 시인께 축하를 드린다. 제6회 창비장편소설상과 2012 창비신인문학상(시・소설・평론)도 모두 수상자를 배출했다. 김학찬과 안희연, 최정화, 윤재민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 한국문학의 주역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어느 호라고 쉽겠냐만은 이번호 제작은 유달리 힘들었다. 특집에서 필자의 신병으로 아쉽게 빠진 글도 있으려니와, 계간지의 특성상 대선의 한가운데서 그 이후를 전망해야 하는 어려움도 감당하며 겨울호를 선보인다. 2012년에서 2013년으로 넘어가는 이 겨울을 체제 전환의 문턱을 넘는 역사적 획기로 만들자고 독자와 더불어 다짐한다.
金鍾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