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책머리에

 

이야기의 주인공을 바꾸어야 할 때

 

 

이명박정부 5년에 이어 박근혜정부와 여당이 마치 근원적 소통 불가능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는 듯 하루도 빠짐없이 언어를 뒤집고 비틀고 난도질한 결과는 번번이 단순하고 유치한 형태의 도착(倒錯)으로 귀결되었다. 그들이 한국사회를 대상으로 늘어놓는 공적 진술들은 고스란히 말로 그린 자화상이라 싶을 지경으로, 흡사 거울을 들여다보며 내놓는 발언인 것처럼 구구절절 ‘자기통찰’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그들이 헌재에 통합진보당의 해산심판을 청구하며 내세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그간의 착잡한 현실에 지친 나머지 건성으로 들었다면 순간 발화 주체를 오해하기에 딱 좋을 대목인 것이다. 국정원과 군까지 동원된 불법 선거개입에 대한 수사가 진작부터 허위와 은폐의 노선으로 접어드는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 대부분이 곱씹어온 생각이 바로 이것 아니었던가. 이 어이없는 거울놀음이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질지 모른다고 믿는 데 그들의 유치함이 있지만, 어쩌면 이같은 도착적 행태는 그냥 단순유치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말의 ‘고전적’ 차원마저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 코울리지(S.T. Coleridge)의 시 「늙은 수부(水夫)의 노래」에는, 배를 뒤따르며 순풍을 불러오던 길조(吉鳥) 알바트로스를 쏘아 죽인 후 끔찍한 저주에 걸려 갖은 시련을 겪고 간신히 뭍으로 돌아온 노수부가 등장한다. 죽음의 저주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그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자신이 저지르고 겪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거듭 되풀이할 운명을 지고 살아간다. 상징으로 가득한 이 작품을 두고 여러 다른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독해에 따르면 ‘죄의식’이 시의 핵심 주제이다. 떨쳐버릴 수 없는 자신의 ‘죄’에 대한 의식이 늙은 수부로 하여금 강박적으로 이야기를 반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코울리지에게 몹시 죄송한 일일지 모르겠으나 지금 박근혜정부가 자기반영적인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데도 그와 유사한 죄의식의 기제가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극히 의심된다. 노수부가 그랬듯 고통스럽도록 정직하게 죄와 대면하는 방식이 아니라 적반하장의 도착적인 방식이라는 수준 차이가 현저하지만 말이다.

차이로 친다면 ‘죄’ 이야기에 어쩔 수 없이 연루된 쪽에도 엄연하다. 지속적인 공안정국을 조성하며 일종의 민간형 군국주의를 향해 한국사회를 조이고 비트는 일을 민주주의라는 알바트로스의 살해에 비견하더라도, 노수부의 행위로 시련을 겪는 동료 수부들처럼 그저 알바트로스의 시신을 당사자의 목에 걸어 행위주체를 적시하고 비난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실천일 수는 없다. 코울리지의 이 시에서도 저주가 실행되는 방식이 바람 한점 없는 ‘부동의 바다’(still sea)에서 꼼짝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니와, 지난 몇년의 세월을 거치며 우리가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온갖 정당한 폭로와 개탄이 곧 사람들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여 그 힘으로 세상을 나아가게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제도적인 것으로 채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분노와 비판만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때로 심연처럼 느껴지는 이 간극을 바라보게 될 만큼은 댓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사태를 인정하고 처벌을 받아들이며 인간으로서 마땅한 감수성을 회복함으로써 간신히 파국을 모면하고서도 노수부는 계속해서 스스로 죄를 상기함으로써 책임을 다한다. 우리의 현실에서 그의 모범을 기대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면 이야기의 주인공을 바꾸는 도리밖에는 없다. 민주주의의 죽음을 저들의 목에 걸어 전시하는 대신 우리 손으로 꺼져가는 숨을 되살려야 하고, 꼼짝하지 않는 바다에서 불어올 바람 한점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각자 노를 꺼내 저어야 하는 것이다. 실상 언제나 힘겹게 노를 저어온 사람들이 이미 있었으므로 움직이지 않는 배를 조급하게 탓하기 전에 적어도 그런 이들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존중하고 힘을 보태지 않으면 안된다.

민주주의란 그렇게 각자가 수행하는 나날의 개입과 책임으로 이루어지기에 몹시 피곤한 제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보다 비할 바 없이 더욱 피곤하고 힘겨운 ‘개발’과 ‘자기개발’을 수행해온 것이 그간의 세월이었다. 그에 비추어 볼 때 이제 의미를 상실한 ‘막개발’ 대신 민주주의적 실천을 ‘개발’의 지향점이자 그 의미의 원천으로 삼기에 충분한 에너지가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 어떻게, 또 어느 방향으로 노를 저을 것인가라는 더 중요한 질문에 답을 구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여기서도 귀중한 논의들이 이미 있어왔으며 ‘변혁적 중도주의’를 비롯하여 창비가 모색하고 제시한 담론들도 그에 포함된다고 믿는다. 그러니 이제껏 주인공을 자임한 ‘대안은 없다’를 몰아내고 우리가 쌓아온 것들에 이야기의 주역을 맡기면서, 이번호에 실린 아리엘 도르프만의 말처럼 “아무리 작은 곳이라도 가능한 모든 공적 영역을 장악”해야 할 때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책임질 일 없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언명은 드물게 문자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발언이다. 개인적인 책임은 우리가 질 것이니 대통령께서는 절대 ‘개인적으로’ 책임지지 마시고 부디 국가 전체의 차원에서 책임지시길 바라는 바이다.

 

이번호 특집은 문학의 정치성과 장편소설의 가능성 논의를 통해 그간 창비가 꾸준하게 천착해온 주제들을 세계문학의 현재성이라는 각도에서 이어나가고 검증하려는 시도이다. 임홍배는 세계문학의 고전이자 근대를 바로 그 초입에서 지켜보고 성찰했던 괴테의 대표작 두편을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시각으로 읽어낸다. 이를 통해 괴테가 근대적 이행에 따르는 복합적 모순을 날카롭게 포착하면서도 역사적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김동수는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명제로 널리 알려진 엥겔스의 발자끄론을 그 전사(前事)로서의 졸라의 발자끄론이나 후사(後事)라 할 루카치의 발자끄론과 세밀하게 비교하면서, 문학사조에 그치지 않는 ‘방법’으로서의 리얼리즘이 갖는 현재적 함의를 짚는다.

한편 유희석과 백지운의 글은 비유럽지역에서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을 살펴본다. 먼저 유희석은 마술적 사실주의로 손쉽게 분류되는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이 역사와 허구의 통상적 대립을 역동적인 서사 속에 통합함으로써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고, 지역현실에 대한 충실성을 기반으로 세계와 접속한 이 작품이 동아시아문학 구상에 던져주는 의미를 살펴본다. 백지운은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층 주목받게 된 모옌의 작품이 갖는 모호성과 그로 인한 해석적 곤경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의 소설이 구축하는 원시성을 ‘민간’ 개념과 연관지어 설명함으로써 문학이 수행하는 저항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로 삼는다.

대화에서는 역사학자 서중석과 박준형이 교학사 교과서 논란을 비롯하여 박근혜정부가 들어선 이래 전면화한 ‘역사전쟁’을 면밀히 살펴보고 대응책을 모색한다. 이들의 대화는 국가의 편향적 개입이 역사교육에 초래한 심각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증이 빠진 이념논쟁에 치우친 끝에 우리 역사와 현실 일반에 대한 관심을 급속히 상실한 진보적 역사학계에 대한 성찰도 놓치지 않는다. 또한 박정희 평가에서 민족주의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의 주요 쟁점들을 두루 다루고 있어 그 자체로 현대사 공부에 좋은 텍스트가 된다.

작가조명에서는 『안녕, 내 모든 것』을 출간한 작가 정이현과 같은 세대 평론가 정여울이 만난다. 문화계 전반에서 집단적 향수의 대상으로 부각된 1990년대를 불안과 상실의 시대로 환기하는 이 소설이 어떤 시각으로 당시를 주조하는지 그리고 소설 속 인물들이 그간의 정이현적 주인공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두고 세세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백지연의 문학평론은 최근의 장편소설 메타비평들이 권위화된 근대담론 속에 장편소설의 개념을 묶어두고 추상적인 장편무용(無用)론에 빠져 있음을 비판한다. 나아가 여전히 유효한 장편소설의 역동적인 가능성을 입증하는 사례로서 김려령과 구병모의 작품을 주목하면서, 이들 장르화된 장편소설이 본격 장편과 뒤섞이면서 드러내는 변모의 양상을 집중적으로 고찰한다.

이번호의 논단과 현장은 특히 풍성하면서도 날카롭다. 브루스 커밍스는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이하여 전쟁도 평화도 아닌 한반도의 정전체제가 미국의 지속적이고 현실적인 핵위협을 동반하고 있는데도 북한의 핵도발이라는 틀에 갇혀 사실상 그 원인을 제공한 위험천만의 상황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음을 일깨운다. 2013년은 또한 마틴 루서 킹이 그의 유명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전한 지 50주년 되는 해인데, 아리엘 도르프만의 글은 그 연설의 메시지를 되새기며 전세계 모든 사람이 잠재적 감시대상이 된 이 엄혹한 시대에 우리가 어떤 싸움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에 관한 지혜를 구한다. 이승환과 홍성태는 현재 한국사회를 사납게 뒤흔들고 있는 첨예한 현장 이슈들을 다룬다. 이승환은 공안정국의 한복판에 놓이게 된 통합진보당 이석기그룹의 정체성과 사상적 지반 및 대북인식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이석기사건으로 제기된 ‘진보의 재구성’ 논의의 기준으로 변혁적 중도주의를 강조한다. 한편, 국정원 댓글공작 사건을 다룬 홍성태의 글은 이 사건을 영향과 내용과 방식 면에서 분석한 다음 정보사회학의 시각으로 그 심각성을 부각한다.

우리 문단의 튼실한 허리를 이루는 손홍규 윤이형 이장욱의 단편과 회를 거듭할수록 흡입력을 더해가는 성석제의 장편연재로 꾸민 소설란도 이번호를 읽는 재미다. 더불어 저마다의 개성적인 세계를 펼쳐내는 열두분의 시를 만나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계절의 화제작을 선별해 많은 이들에게 독서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촌평과 문학초점에 글을 보내준 필자들에게도 감사인사를 전한다. 문학초점은 다음호부터 확 달라진 모습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미리 여러분의 관심을 부탁한다.

경사스러운 소식도 전해드린다. 제15회 백석문학상은 고독의 높은 경지와 시적 정련을 보여준 엄원태 시인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올해 7회째인 창비장편소설상의 주인공은 젊은 작가 정세랑으로 정해졌다. 두분께 진심어린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

다사다난했던 2013년이 저물고 있다. 창비는 대선 직후에 간행한 봄호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자기갱신을 포함한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노력에 대한 평가는 온전히 독자의 몫일 터이다. 올 한해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정진해온 독자 여러분을 기억하며 새해에 한결같되 새로워진 모습으로 그 길에 보탬이 되기를 다짐한다.

黃靜雅

황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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