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책머리에

 

비판이 아니라 심판이다

 

 

지난 4월 총선의 결과를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한 표현은 ‘야권의 승리’이지 싶다. 야권에 어느 당까지 포함되는지, 또 승리가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두고서는 의견이 갈리기도 한다. 정작 야권에 투표한 이들 다수는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력화하고 필요하다면 탄핵이나 개헌까지 밀어붙일 200석에 못 미친 점이 아쉬운 나머지 선거 직후만 해도 이긴 것 같지 않다는 기분을 털어놓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겼다는 사실이 차츰 실감되면서는 무엇보다 승리의 진짜 주체가 누구인지 곱씹게 된다. 누가 나를 지지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나를 지지하게 만들 것인가에 후보자보다 더 열렬히 집중했던 유권자들이야말로 주체의 자격에 부합한다. 선거의 본뜻이 당선을 향한 게임이 아니라 민의의 관철을 위한 수단임을 분명히 일러주겠다는 듯 공천부터 선거운동 전과정에 주도권을 행사한 이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누군가의 얌전한 ‘동료시민’이 아니라 흩어져 밝히다가도 때가 되면 무섭게 함께 타오르는 ‘촛불시민’이 그 가장 합당한 이름일 것이다.

승리의 실감보다도 늦게 오는 것이 패배의 실감이라는 사실을 총선 이후 이 정권의 행태에서 알게 된다. 벼랑 끝인 줄 모르고 허공으로 몇걸음 내딛다 보기 좋게 추락하는 만화 속 악당처럼, 얼마나 드라마틱한 퇴장을 보여주려고 이러나 싶게 버티는 중이다. 일찍이 아도르노(T. Adorno)가 ‘진정한 진보는 퇴행처럼 보인다’고 했다는데,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진정한 퇴행이 진보의 옷을 걸치는 장면이다. 이 정권은 소통이니 협치니 하는 얼핏 정당해 보이는 말들로 선거의 가장 선명한 메시지였던 ‘정권심판’을 지우려 한다. “어떤 문제와 관련된 일이나 사람에 대하여 잘잘못을 가려 결정을 내리는 일”이라는 ‘심판’의 뜻풀이에서 핵심은 결정, 다시 말해 분명히 정한다는 데 있다. 잘잘못을 그저 지적하고 따지는 ‘비판’과의 해석적 차이도 그로부터 비롯되는데, 이제 그만 끝내라는 이번 결정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한 소통이든 협치든 퇴행에 다름 아니다. 이른바 영수회담이나 기자회견에서 드러났듯 기만의 제스처조차 제대로 해낼 실력이 이 정권에 없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진보와 퇴행의 뒤섞임은 의외의 영역에서도 목격된다. 이번 선거를 통해 운명이 갈린 또다른 당사자가 대표적인 제도권 진보의 계보를 이어온 정당이었다는 사실은 오래 돌이켜볼 대목이다. 운명까지는 아니라도 평판과 위상의 하락이라는 면에서 제도권 진보언론 역시 유사한 경로를 밟는 듯 보인다. 이런 사태가 빚어진 데는 결정을 내리지 않는 위치가 진정한 진보의 자리라는 생각, 어떤 결정도 나쁜 결정일 수밖에 없으니 모든 결정을 비판하는 일이야말로 유일하게 정당하다는 생각이 있는지 모른다. 결정이 현 상태에 순응하는 수동적 행위라는 잘못된 전제는 현 상태 내부의 차이를 묵살한 채 이쪽이나 저쪽이나 결국 마찬가지라는 냉소를 조장한다. 여기까지는 늘 있어온 일이지만, 특히 촛불혁명을 거치며 결정을 통해 차이를 벌리고 그 틈으로 변화를 만드는 시민들의 주권적 행위가 전면에 나서면서 ‘진보적’ 냉소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자신의 비판이 갖는 정치적 위상을 높일 수 있다면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부인하기에 이르고, 일부는 심지어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편을 선호하는 기색마저 역력하다.

브루노 라뚜르(Bruno Latour)는 비판의 정당성이 위기에 처했다고 지적하는 글(“ Why Has Critique Run out of Steam? From Matters of Fact to Matters of Concern”, Critical Inquiry, Winter 2004)에서 비판적이기만 하다면 언제나 옳다는 분위기를 조성한 “비판적 야만성”(critical barbarity)을 위기의 한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때 ‘비판적’이라는 말에는 비판의 온갖 기제를 현란하게 휘두르는 기술과 얌전히 접어두는 기술이 모두 포함되는데, 흥미롭게도 이는 기소독점권을 쥔 검찰의 행태와 유사하다. 비판(또는 기소)을 구사하거나 삼가는 자의적 선택으로 모든 상대를 잠재적 비판대상으로 ‘평평하게’ 만들어 사태를 오히려 혼탁하게 만드는 한편 자신의 올바름만큼은 우뚝 서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라뚜르가 묘사한 서구의 경우 퇴행세력이 진보의 비판 기술을 베껴 더 강력하게 구사하는 바람에 문제가 부각된다면, 우리 사회는 촛불시민의 한발 나아간 정치적 행위 덕분에 비판의 ‘퇴행성’이 드러난다는 차이가 있다. 비판의 자기혁신을 위한 기회는 이런 차이에 주목하는 데 있으리라 본다.

지난 총선에서 ‘정권심판’만큼 주목받은 구호는 ‘3년은 너무 길다’였다. 이 구호의 주된 매력은 단연 그 통쾌함이었으나 선거가 끝난 지금은 3개월 아니 3주도 너무 긴 것 같은 느낌이다. 심판은 내려졌는데 어떻게 집행할지 정해지지 않은 데서 오는 조바심이다. 그럼에도 채상병특검법을 비롯하여 여러 특검법의 추진이 본격화되는 등 정치권에서 심판의 결정에 응답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정권의 조기종식을 공공연히 거론하는 흐름이 주류가 되고 있다. 선거 결과가 사태를 분기점 가까이로 끌고 갔으니 각각의 실천에 잠재된 폭발력도 커져 이제 어느 지점이 발화점이 되어도 놀랍지 않다. 어떤 퇴행 시도도 끝내 되돌리지 못할 우리 사회의 단단한 변화를 이번 선거에서 다시금 확인하면서 ‘상상의 공동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된다. 민족이나 국가의 근거 없음을 비판하는 데 쓰였던 이 말은 사실 촛불시민들이 실행하는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를 가리키는 데 더없이 적절하지 않을까? 우리가 느끼는 조바심은 이 상상을 더 크고 자유롭게 펼치고 싶은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번호는 마침 상상과 특별히 연관이 깊은 ‘시’를 주제로 특집을 꾸렸다. 상상의 본모습이 갖는 힘을 한국시의 다층적 계보를 통해 일깨우는 이 특집은 ‘오늘의 한국시, 이룬 것과 나아갈 길’이라는 제목으로 네편의 글을 묶었다. 송종원은 ‘운명의 지침’을 돌릴 ‘님’으로 이끄는 시 본연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한편, 이론에 경도된 비평이 시에서 삶과 진실을 오히려 소거해온 경향을 지적하고 커먼즈로서의 한국시가 일군 성취를 세심하게 읽어낸다. 노동시의 과거와 현재를 다룬 소종민은 전태일의 글에 담긴 탁월한 시적 정신을 확인하는 데서 출발하여, 뜨겁게 주목받다가도 재차 ‘세계에서 추방당한’ 노동과 함께해온 한국 노동시의 역사와 의미, 그리고 여전한 사랑과 분투를 짚는다.

오연경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시가 젠더 규범을 때로 반복하고 때로 해체하며 유연한 발걸음으로 전진해왔음을 밝히고, 젠더가 삶의 본질적 교차성에 접근하는 유력한 방식임을 입증한 이 여성시들이 삶의 승리이자 미래의 자랑으로 기록되리라 예언한다. 주민현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사로잡아 이끌었고 그리하여 그의 시의 DNA 어딘가에 별자리처럼 새겨진 숱한 한국시들을 정성스레 되짚으며 삶의 면면을 날카롭고 열렬하게 품어온 한국시의 다채로운 역량을 증언한다.

이번호 현장은 ‘가자사태가 던지는 질문들’이라는 제목으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과 관련된 두편의 번역글과 번역자 한기욱의 해제로 이루어진 기획 특집으로 구성했다. 전지구적 핵심 현장이 된 팔레스타인은 우리에게 오랜 고난과 처절한 저항의 땅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때문에 정작 구체적인 사정은 소홀히 지나치는 경향도 있었다. 난제 중의 난제로 보이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풀기 위해 어떤 사유의 전환이 제안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 문제가 어째서 서구문명의 ‘문명’으로서 자격을 결정적으로 시험하는지를 이해할 좋은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위기의 남북관계, 지속가능한 평화를 찾아서’를 주제로 문장렬 이승환 정욱식이 나눈 대화는 파탄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만큼 무너진 남북관계의 원인과 현황을 점검하고 개선책을 논의한다. 이 정권의 어리석은 외교정책과 분단체제 강화라는 시대착오적 발상은 수없이 지적되었음에도 새록새록 개탄스럽다. 한반도 전쟁 가능성을 심각하게 제기하는 입장이나 북한의 남북관계 방향전환 선언에 대한 다각도의 평가는 특히 주목할 대목이다. 정부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조건에서 가능한 현실적 방안까지 제시하는 이 대화를 통해 남북관계를 떠올릴 때 유독 엄습하는 무기력을 떨칠 수 있다.

논단에는 ‘ K-담론을 모색한다’ 연속기획 두번째 글을 싣는다. 뉴라이트 같은 보수 역사관이나 산업화와 민주화의 이분법에 포획되어온 한국현대사의 성취를 새롭게 조명하는 홍석률의 글은 토지개혁과 고도성장에서 교육, 불평등, 평화에 이르는 현대사의 주요 면면에 담긴 적응과 도전의 역동성에 주목한다. 백영경은 어느덧 핵심 의제로 부상한 돌봄이 사회전환을 위한 정치적 기획으로 자리 잡는 데 어떤 논의와 실천이 수반되어야 하는지 세밀하게 살핀다. 돌봄을 권리로 접근하는 관점의 한계를 지적하는 대목과 커먼즈적인 방식의 제안이 무엇보다 인상적이다.

이번호 창작란도 감각과 사유를 새로이 일깨우는 작품들로 채워졌다. 시란은 강보원에서 황인숙에 이르는 열두 시인의 정성 어린 신작 시편들을 기쁘게 전한다. 소설란 역시 공현진 구병모 안보윤 이미상 이장욱의 개성적인 신작 단편들로 다채롭게 꾸려졌다. 문학평론란에서 김다솔은 데이터 기술의 무분별한 발전을 부추기면서 스스로 불가피한 미래임을 자처하는 감시자본주의에 맞선 문학적 분투를 박문영과 정지돈의 소설에서 확인한다.

작가조명에서는 이설야 시인이 최근 다섯번째 시집 『순한 먼지들의 책방』을 출간한 정우영 시인을 만났다. 집과 밥과 햇살에서 시간과 장소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온갖 근본들을 품어 시적 순간으로 되살리는 그의 작품이 먼지처럼 순하게 경계를 넘어 가장 멀리까지 이르는 노정을 여실히 전한다. 여러 장르의 신작들을 진솔한 논평과 함께 만나는 문학초점란에서 황규관이 강우근과 이명윤의 시집을, 양재훈이 정태언과 성혜령의 소설집을, 그리고 최진석이 조대한과 박동억의 평론집을 다룬다.

호를 거듭하며 더 큰 기대를 받고 있는 산문 연재 ‘내가 사는 곳’은 이번에 김중미 작가의 인천 강화로 향한다. 마을공동체와 생태환경과 역사를 아우르는 작가의 속 깊은 시선을 통해 ‘산으로 들어가는 문’에서의 삶이 생생히 살아난다. 다양한 분야의 신간을 소개하는 촌평란 역시 간명하고도 세심한 통찰을 담은 글들로 풍성하다.

 

돌이켜보면 지난 2년여의 시간 동안 우리가 토로한 분노와 한탄에는 늘 괴로운 자책도 실려 있었다. 무엇이 모자랐고 어떤 불철저함이 있었는지 아프게 되묻는 노력이야말로 힘있게 나아갈 동력임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창작과비평』은 그같은 촛불시민들의 한걸음 한걸음과 늘 함께하리라 거듭 다짐한다. ‘너무 긴 3년’이란 실은 이 정권의 남은 임기가 아니라 그 시작 지점부터 셈한 햇수임에 분명하다. 이제 준비는 끝났고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기분이기 때문이다.

황정아

황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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