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후루이 요시끼찌 『요오꼬·아내와의 칩거』, 창비 2013
‘상실의 시대’에 앞선 ‘내향의 세대’의 문학
장정일 蔣正一
소설가 xtopa@hanmail.net
후루이 요시끼찌(古井由吉)의 중편소설 「요오꼬(杳子)」와 「아내와의 칩거(妻隱)」는 두편 모두 병(病)을 주제로 하고 있다. 역자 정병호(鄭炳浩)의 해설을 보면 1960년대 일본 학생운동의 퇴조와 함께 ‘내향(內向)의 세대’라고 불리게 될 한 무리의 신진작가가 등장하는데, 1970년 전후에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들의 특징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두면서 실존이나 개인의 내면을 파고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향세대의 선두주자인 후루이 요시끼찌의 대표작을 통해 병과 내향의 세대 사이의 관계나 병의 정치적 무의식을 탐문하는 독법도 성립할 법하다.
1970년 하반기에 각기 다른 문예지를 통해 발표된 「요오꼬」와 「아내와의 칩거」는 1971년 제64회 아꾸따가와상(芥川賞) 후보에 나란히 올랐다. 이때 「요오꼬」가 수상을 하고 「아내와의 칩거」는 한표 차이로 2위를 차지했다. 이런 비중에서나 책의 수록순서상으로 「요오꼬」를 먼저 얘기해야겠으나 여기서는 「아내와의 칩거」부터 거론한다.
대학을 졸업한 히사오와 레이꼬 부부는 도시와 농촌이 혼거한 교외의 아파트 단지에서 5년째 신혼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회사에서 갑작스러운 고열로 쓰러진 히사오는 응급처치를 받은 뒤 일주일째 집에서 휴양 중이다. 이 작품의 원제 ‘쓰마고미(妻隱)’는 일본 고사(故事)에서 유래한 말로, ‘아내와 더불어 그 속에 틀어박혀 사는 것’,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함께 지내는 것’을 뜻하는데(작품해설), 이야기 전개는 그와 반대로 진행된다. 회사라는 일상적인 틀을 벗어난 부부관계 사이로, 그동안 두 사람이 무관심하게 여겼던 도시 교외의 이질적인 문화가 파고든다. 부부 주위를 맴돌며 남편과 아내에게 새로운 반려를 소개해주겠다고 유혹하는 신흥종교단체의 노파와, 부부가 사는 아파트 옆 단독주택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건축현장 일을 하는 짐승 같은, 그러나 순박한 젊은 남자들의 존재가 그것이다.
쌜러리맨이라는 생활의 쳇바퀴와 아이도 없는 상태로 타성에 젖은 부부생활을 해온 히사오와 레이꼬에게 반문명적이고 원시적이며 관능적인 삶의 숨통을 열어 보여준 것은 병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라는 대중적 관용구로 널리 그 효용이 알려진 병의 긍정성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자기동일성에 고착된 자아를 개방하는 은유로 문학이 애용해온 모티프다. 병은 ‘여는 것’이다.
「요오꼬」는 대학생 S가 홀로 등산을 하다 깊은 골짜기 아래에서 정신을 놓고 있는 요오꼬를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여자대학에 재학 중인 요오꼬의 병증은 방향감각 상실, 대인기피, 숫자에 대한 강박, 음식 먹는 모습을 남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기 따위의 정도가 넘은 결벽증이다. 요오꼬의 하산을 도와준 S는 석달 후 도시의 전철역에서 그녀와 우연히 재회하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남자가 아픈 여자에게 끌릴 때는, 성적인 매료보다는 치료자 내지 보호자 역할을 감수하는 것에서 느끼는 별난 즐거움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 요오꼬와의 만남은 S에게 자기환멸과 신성한 임무를 동시에 부여한다.
병은 서로를 개방한다. 애초에 S와 요오꼬는 돌봐주는 자와 이에 의지하는 자라는 역할로 나뉘었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S는 요오꼬의 질환에 공명하게 되고 그녀와 상호의존적이 된다. 이것은 인간의 신체와 정신이 질환이나 비정상에 끊임없이 열려진 상태, 즉 확고부동한 건강을 측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요오꼬는 그걸 안다. 그녀에 따르면 환자란 “어중간”한 상태인 반면, “건강해진다는 것은 자기 습관이 완전히 몸에 배어버려서 이제 같은 행위의 반복을 기분 나빠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건강한 사람이란 아무 병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병이 아예 나의 습관으로 내화되어 병과 차이를 이룰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요오꼬가 “그렇게 된다면 너는 나를 감당할 수 있을까……?”라고 묻자, S는 “어느 부부든 감당하며 살잖아”(152면)라고 대답한다. 이 대목에 이르러 S가 요오꼬를 만나며 가졌던 양가감정은 완전히 사라진다.
이 소설의 첫머리는 앞으로 있을 두 사람의 인식변화를 암시하고 있다. 그들이 처음 만난 곳은 문자 그대로 깊은 산골짜기였다. 하지만 S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장소는 사흘간의 단독산행이 끝나는 마지막 하산길이며(바깥에서 안으로), 자폐증이 있는 요오꼬의 입장에서는 좁은 방에서 드넓은 세계로의 탈출이다(안에서 밖으로). 소설의 끄트머리에서 작가는 이런 공간적 이항대립의 무너짐을 재차 보여준다. S는 병증이 깊어져 두문불출하는 요오꼬의 집으로 찾아가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받아들이게 되고, 반대로 요오꼬는 병원에 입원하겠다는 결심을 피력한다.
쑤전 쏜택(Susan Sontag)은 『은유로서의 질병』(이재원 옮김, 이후 2002)에서 19세기 중반 이후, 질병을 일으키는 것이 세균임이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질병은 외부 조직의 침략이며, 신체는 면역적 ‘방어’ 기제를 동원하는 것처럼 자체 내의 군사 작전을 통해 이에 반응한다”(134면)라는 군사적 은유가 의료 용어와 행위에 만연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제국주의 시대와 발맞춘 세균학의 발전은 병을 외부의 침입자 내지 격퇴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며, 이런 상징적 전투에는 의학권력뿐 아니라 문학권력도 가담했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 시대의 논객과 문필가는 위생을 문명개화의 기준으로 삼았고 이들에게 질병은 정복되어야 할 야만상태나 계도되어야 할 식민지 주민으로 표상됐다.
세균학적 패러다임이 사라진 내향의 세대에게서는 더이상 병과 나 사이의 판별이 가능하지 않다. 병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나의 일부일 뿐 아니라, 오히려 적당한 병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 나의 실존을 돕는다. 이런 전도(顚倒)는 자본주의세계의 문제 해결을 외부나 혁명에서 찾고자 했던 60년대 일본 학생운동의 실패와 무관하지 않다. 아마 이 세대는 자본주의세계의 모든 병을 수락하기로 한 첫 세대일지도 모른다. 내가 접한 몇권의 일본문학사에서 내향의 세대는 통째 삭제되거나 간략하게 취급되었지만, 바로 이들 직후에 따라오는 무라까미 류(村上龍),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 등의 포스트 현대문학 개척자들에 의해 첫 세대의 수락은 더욱 내면화되고 분열된 형태의 병증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