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인권문제는 진영논리와 무관한 것
● 지난호 특집 ‘박근혜 1년, 이제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의 수록 글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서보혁의 「진보진영은 북한인권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였다. 이 글에 대한 사회적 반향은 다소 엉뚱한 곳에서 터져나왔다. 보수신문들이 ‘이례적’ ‘금기를 깼다’ 등의 표현을 써가며 주목한 것이다. 그 의도를 차치하고 사실관계만 따져보자. 『창작과비평』은 작년에도 헤이즐 스미스의 「북한은 반인도적 범죄국가인가」라는 글을 통해 북한의 식량권과 인권문제의 실상을 다룬 바 있다. 또한 창비가 꾸준히 다뤄온 분단체제론은 기본적으로 북한사회에 대한 현실인식의 중요성을 포함한 개념이다. 이 문제를 이념의 영역으로 몰아가는 것은 오히려 보수언론 쪽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서교수의 글에는 “북한인권 문제에 대해 남한의 보수는 ‘인권침해’를 강조하며 ‘인권개선’을 무시하고, 진보는 ‘인권침해’에 침묵하며 ‘인권개선’에 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라고 적혀 있다. 고루한 진영논리를 떠나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등장해야 한다는 뜻일 게다. ‘제대로 된’ 인권 담론을 발굴하려는 창비의 지속적인 노력을 더욱 기대해본다.
이진혁 pluralitas@gmail.com
이제 우리 모두가 깨달아야 할 때
● 대화 「박근혜 1년과 민주파의 대응」이 흥미로웠다. 학계와 국회 원내, 정치평론, 시민사회운동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각자의 경험과 시각에서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보다 실감나게 와닿았다. 특히 박근혜정부가 “보수언론, 재벌, 군부, 보수적 관료 등을 비롯해 여러 집단의 네트워크 형태로 하나의 정권을 형성하고 있다”라는 은수미 의원의 분석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각종 권력기관의 이해할 수 없는 ‘나 몰라라’ 식 대응은 물론, 이번 세월호 참사를 통해 정부 및 관료집단과 기업, 언론 등이 보인 총체적인 난맥상과 마주하면서 한국사회의 권력층이 시민의 자유롭고 안전한 삶을 얼마나 크게 위협할 수 있는지를 절감했다. 이대로 이 정권에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참가자들이 토로한 바와 같이 이제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의 정치”를 지향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사회를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정선일 canon2580@naver.com
교착된 한일관계의 해법을 모색하다
● 권혁태의 「역사와 안보는 분리 가능한가」를 관심있게 읽었다. 이 글을 통해 한일관계의 핵심인 역사와 안보의 상관관계를 파악함으로써 일본의 ‘비정상성’이 그 왜곡을 초래하고 있다는 감정적인 반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우리에게 실질적인 해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악화일로의 한일관계가 제국주의 주도의 국제질서 때문이라는 본질주의적 태도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인 차원의 분석에도 무게를 두는 필자의 관점이 좋았다. 아베정권의 등장 후 평화헌법 개정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바, 개인적으로 일본 내에서 어떠한 정치·외교적 이해관계가 일본 헌법의 미래를 시험대에 올리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글이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사과를 마냥 기다리거나 대미 외교를 통한 협력관계를 기대하는 등 외부적 상황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양국 정권이 가진 일련의 공통점이 역사와 안보 문제를 희석시키지 않기를, 그래서 한일관계에 “공허한 중심”이 생기지 않길 바란다.
한지영 bokshoong@gmail.com
고심하고 주저하며 다가온 ‘안녕’의 문장들
●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이다. 학내에는 지금 노란리본이 펄럭이고 ‘세월호 대자보’가 곳곳에 붙어 있다. ‘안녕들 하십니까’와 같은 대자보는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더이상 낯선 매체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작은 것들의 정치성: 2010년대 시가 ‘안녕’을 묻는 방식」(양경언 문학평론)에서 말하듯 정말로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는 행위인지는 의구심이 든다. 약자의 편에 선 목소리에 폭력과 허례의식이 섞여 있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다.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보여준 정부·언론·대중의 자기검열 없는 발언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 반면 2010년대 시가 “낯익은 화법으로 ‘나’를 내세워 ‘너’를 요청하는 ‘잠재적인 대화의 관계’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씌어지고 있다”라는 주장에는 깊은 공감을 표한다. 고통받는 ‘너’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내가 건네는 위로의 방식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가장 아름답고 정치한 언어를 쓸 줄 아는 시인들이 ‘너’에게 건네는 위로가 참 고맙고 반갑다. 끊임없이 고심하고 주저하며 다가온 ‘안녕’의 문장들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최민주 mminju11@naver.com
성찰을 가져다준 소설의 힘
● 김금희 작가의 단편 「옥화」는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이야기 자체의 흥미와 흡입력도 컸던데다, 조선족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탈북자의 현실을 잘 엿보게 해준 점도 좋았다. 탈북자, 심지어 소설에서는 사회의 주류를 이룬 조선족까지 우리에게는 어떤 존재였던가. 가난하고 처절한 삶을 살아가며, 그래서 두렵거나 혹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이런 ‘오만과 편견’은 어쩌면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제대로 성찰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최근 소설을 자주 읽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오랜만에 접한 작품을 통해 큰 감흥을 얻을 수 있어서 반가웠다. 한국문학이 더 다양한 지역과 소재를 다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강성규 cattiger74@hanmail.net
말이 필요한 날, 대신 말해주던 시
● 박성준의 시 「왜 그것만을 요구하지 못했을까」를 읽으며 “말이 필요한 날이면, 울어줄 사람이 없었다”라는 첫 문장부터 눈이 갔다. 원래 시는 꼼꼼히 읽기보단 느낌만 받고 넘기는 편인데 이 시는 한구절 한구절을 읽고 또 읽었다. 그날따라 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비참한 고백투의 문장이 지금 당장 필요한 문장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두번째 시 「인연」은 ‘사건’과 ‘일상’ 사이의 뜬금없음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힘든 사건투성이인 요즘, 우리에게는 ‘매운 라면’ 한그릇이 주는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정찬영 cksdud24@naver.com
새로워진 문학초점에 거는 기대
● 더 쉽고 생생한 비평의 언어를 만날 수 있었던 ‘문학초점’ 좌담이 지난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획이었다. 기존의 짧은 리뷰 형식에서 담지 못했던 깊은 이야기가 대화라는 형식을 통해 쉬운 말로 담겨 있었다. 개별 작품에 대해 상찬과 비판을 넘나들며 세 평론가가 각자의 입장을 확실히 표현하는 것이 시원스러웠다. 이미 읽은 책에 대한 분석은 내 나름의 평가와 비교해보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책은 그것대로 관심이 갔다. 여전히 난해하거나 불친절한 부분이 더러 눈에 띄긴 했지만, 앞으로 더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해 개성적인 목소리를 들려주는 비평의 간판 코너가 될 가능성이 엿보였다.
이순동 plum0210@hanmail.net
서평으로 만나는 책의 세상
● 잡지를 받으면 가장 먼저 읽는 코너가 ‘촌평’이다. 분량이 적어 부담도 적고, 다양한 분야의 좋은 책들을 소개받을 수 있어서 무척 유익하다. 봄호에 실린 서평들도 그랬다. 솔직히 이 대상 도서들을 일일이 정독하진 못할 것 같지만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필자들의 서평을 읽는 것만으로도 교양이 쌓이는 기분이다. 어떤 분야에서 어떤 책들이 나오는지를 귀동냥하고, 한권의 책이 어떤 미덕과 한계를 지니는지 논하는 것을 자주 접하다보면 좋은 책을 선별하는 나름대로의 식견이 생기지 않겠나.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만화나 실용서 같은 분야에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박성길 munjib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