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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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咸成浩

1963년 강원 속초 출생. 199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56억 7천만 년의 고독』 『聖 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가 있음. haamxo@gmail.com

 

 

 

하얀 혼

 

 

시베리아의 자작나무는

내리는 비처럼 서 있다

모여 있으면서도 고고함을 잃지 않고

먼 산의 침엽수림 지대에 줄지어 서도

하얀 혼—,

그 산의 영혼처럼 신비롭다

해뜨는 쪽으로 타이가*를 적시며 흐르는

은청색으로 빛나던 저물녘의 강들이

지금, 일제히 황금색으로 사위어간다

매일 밤 북두칠성을 바라보며 해지는 쪽으로 잠들었다

그리고 나는 시베리아의 북쪽 방에 와 있다

칠이 벗겨진 창에는

아직 말하지 않은 변심처럼 한그루

새하얀 나무가 노오란 잎을 달고

비를 맞고 서 있다

나와 자작나무는, 망해버린 혁명의 나라에서

한잎 한잎 계절을 복기하며

뜨거웠던 한때의 깃발들을 떨구는 중이다

거리의 낡은 기념 조각물은

‘공산쥬의로분투하다가젼사한동무들의게’

받쳐진 대로

나는 실패한 독립국가의 사람

헤이허(黑河)에서 오오츠크해까지,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닌 공산주의자가 되어,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총을 든 유학자가 되어 둘러앉아

자작나무를 태워 야영을 준비하는 흑룡강가

(이 어두운 문의 나라)

여기에선 아무르라고

수상하다, 수상하다—낙우송 단풍은 금빛으로 물들어가고

나는 나하고는 없는 사람

수많은 강을 건너, 수많은 국경을 넘어

고고하지도 신비하지도 않은

나는 나하고는 없는 사람

초원의 여우는

여기저기 사냥감의 굴을 뒤지며 무엇을 잊었는지

자주 뒤돌아본다

나는 습지에 잠긴 하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내 실낱같은 목을 넣어보고 싶은

여기서는 오직 나와 하늘뿐

나와 하늘뿐

오늘은 첫눈이 내려, 나와 자작나무는

내가 살던 곳에서는 본 적이 없는

북해로 흐르는 강가에 앉아 눈 내리는 하구를 생각하며

왜 음식이 담기지도 않는 냄비의 바깥을 씻느냐고 묻던, 브리야트인과 중국인들, 그리고 변기에 좌대도 없는, 드나드는 문이 유난히 어두운 이 나라의 관습을 떠올려보았다

아무래도 생활은 습관이 아닌 모양이다

그것은 모국어 같은 것

저버린 모국어 같은 것

이 북쪽 방에는

먼저 살던 몽골인이 종이를 오려

천장 가득 별을 달아놓은

나와 자작나무는 신성한 호수

얼음호수에

고요하게 내리는 눈처럼 귀를 대고

소금을 얻기 위해

유목의 짐을 지고 다니는 순록의 고행과

속이 빈 나무에서 잠을 자는 시베리아 곰의

꿈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죽음의 이야기

그 사람은 나하고는 없는 사람

어르신, 모시러 왔습니다

사냥꾼이 곰을 부르는 소리

그 사람은 나하고는 없는 사람

그래선지

나는 가끔 너무 흰 슬라브 여자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초원의 별을 바라보곤 했다

나와 자작나무와 여우와 곰과 사냥꾼은

얼음 호수에 앉아

아무하고도 없는 나무가 되어

아무하고도 없는 여우가 되어

아무하고도 없는 곰이 되어

그 옛날 물고기의 숨이

방울방울 얼음으로 결정된, 가장 차가운 모국어를 찾아

이 신성한 호수의 전설을 알게 되었다

그건 죽음의 이야기

하얀 혼, 나는 그런 사람

아무하고도

그 무엇과도 연결되지 않는

나는 나하고는 없는 사람이다

하얀 혼—자작나무여,

 

 

--

*러시아의 쌍뜨뻬쩨르부르그에서 시베리아, 오오츠크해에 이르는 광대한 침엽수림 삼림지대.

 

 

 

푸른 호수 위에

흰 섬 하나

 

 

밖에는 눈보라가 몰아쳐

먼 옛날이야기처럼 나무 문짝이 덜컹이고

날리는 눈이 귀신의 차가운 숨소리같이 싸르락이 창을 두드려

나는 아무도 나다니지 않는 길에서

누가 소리 죽여 웃는 소리를 듣고 창 앞에 서 있다

웃음소리는 아직도 귀에 멍멍한데

소나무 판자로 이은 담벼락들 사이로

바람이 쌓인 눈을 돌리고 다닐 뿐

인적이라고는 없고, 굶주린 개 한마리 어슬렁대지 않는다

휘어진 자작나무처럼

추워서 허리가 부러질 것 같으면서도

나는 창 앞에서 쉽게 떨어질 줄을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게 그리운 밤이 올 것이다

기쁨과 슬픔이야

어쩔 수 없었던 것들과, 할 수 없었던 것들

백옥같이 환하게 웃던—, 흐르면서 가만히 있고

가만히 있으면서 흘러가는

하얀 발자국 소리

하얀 발자국 소리

곧 이 얼음호수의 눈보라를 끌며 네가 들어올

저 문이 내 귀가 되어 떨고 있을

우리는 해와 달이 될 오누이처럼 구차하게 하늘에 빌지 말고

맷돌을 굴릴 오누이처럼 차라리 요행을 바라자

어떤 맷돌은 아직도 푸른 바다 밑에서 돌고 있어

넙치며, 오징어며, 명태며, 도다리며, 온갖 것들을 기른다더라,마는

어쩌다 나는 하얀 산같이

하얗게 핀 들판같이

흰 바위같이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태양의 흑점을 살피다 눈이 하얗게 먼 천문가는

그래서 기하학자가 되었다

불을 모시던 어느 사제는

화재가 나자 신전과 함께 하얀 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신성모독에 분노했다

나는 수()의 기쁨도,

신성을 더럽히지도 못해서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흐르면서 가만히 있는

누가 이 추위에 부러 문을 닫지 않은 모양이다

열렸다 닫히고 열렸다 닫히는 하얗게 지새는 소리

밤이 아니면 너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꼭 이런 밤에 나는 하얗게 눈멀고

꼭 이런 밤에 나는 하얀 재가 되어

무너져

푸른 호수에 백발을 감고 있는

하얀 혼—, 끝없이 내릴 흰 눈이 내린다

호수 위에 섬 하나로,

섬 하나도

호수 위에 내리는 눈처럼 잠깐 있다,

사라질 것 같은

오늘은 먼 옛날이야기처럼

눈이 내리고

섬 하나도

호수 위에 내리는 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