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문학, ‘닫힌 미래’와 싸우다
리얼리티 재장전
다른 민중, 새로운 현실 그리고 ‘한국문학’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최근 평론으로 「비평의 로도스는 어디인가: ‘근대문학 종언론’에서 ‘장편소설 논쟁’까지」 등이 있음. netka@hanmail.net
그러나 좀더 훌륭한 시대가 되더라도 예술의 표현이기도 하고 또한 형식의 기반이기도 한 고통을 예술이 망각하느니 차라리 예술이 아예 사라지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다.
—T. W. 아도르노
‘민중적인 것’의 귀환
영어의 ‘피플’(people)에 상응하는 우리말로는 인간, 사람 같은 일상어 외에도 인민이나 민중이 떠오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주민, 시민, 국민, 대중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 말들 사이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두터운 교집합이 형성되어 있지만 함의와 강조점, 놓여 있는 지평은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제각각의 내력을 지닌 수많은 ‘피플’들 가운데서도 오늘날 한국문학의 실상과 사회 현실의 연관을 새로운 수준에서 재구성하고자 한다면, 더욱이 점증하는 사회적 불안과 정치적 무력감에 휩쓸리지 않는 문학적 실천을 도모하는 경우라면 ‘민중’이라는 용어 또는 개념의 상대적 효용성과 불가피성에 새삼 주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민국가의 주권자이자 통치대상으로서의 국민은 물론이려니와 권리와 책임, 자격의 문제와 결부되곤 하는 시민은 다중(multitude), 하위자(subaltern), 소수자(minority) 그리고 난민(refugee) 등 달라진 현실을 반영하는 새로운 내포들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쓰임새가 한정적이다. 여기서 몰주체적인 군중이나 소비자로서의 대중을 논외로 하면 그나마 인민이 남지만 그 내부의 인간중심적 한계 말고도 분단 이후 한반도 남쪽의 언어생활에서 사실상 사상된 용어라는 점이 걸림돌이다.
그에 비해 70~80년대의 반독재 저항운동에 의해 활성화된 ‘민중’은 민주화와 대중소비사회의 약진으로 세를 잃긴 했지만, 한반도 근현대사에서 내발적으로 성장한 변혁주체로서의 상징성을 여전히 지닌 개념이다. 나아가 처음부터 분석적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계 도처에서 가시성을 확장해가고 있는 현실적 존재들, 그러니까 소수자와 난민 같은 ‘시민성(citizenship)의 타자’들과도 상대적으로 접속이 용이하다.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적 주체인 ‘민(民)’과 중생이라는 용례에서 보듯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로서 ‘중(衆)’의 결합으로도 파악할 수 있는 민중은 “그 밑바닥에 인간만이 아니라 동식물 생태계 전체와 소위 이제까지 서양인들이 ‘유기물’에 대척적인 ‘무기물’이라고 불러온 산맥·바위·공기·물·흙·바람까지도 하나로 보는 시각”1)까지 열어줄 수 있어 피플과 피플 너머가 맺는 관계를 총체적으로 재현하는 데 유리할 뿐 아니라 예술적 상상력의 근원에 관련해서도 풍부한 암시를 제공한다. 계급과 성별, 인종과 국적의 어느 하나만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해지는 복수의 사회·문화 현상들을 통합적 시야로 포착할 필요가 있다면 민중담론을 리부트(reboot)할 이유는 충분한 듯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민중을 특정 계급 또는 “국민, 민족, 시민의 위상을 획득하는 데 실패한”2) 이들로 한정하지 않는다. “국민, 민족, 시민”도 계급과 마찬가지로 민중이 가시화되는 국면의 일부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때의 민중은 집합적인 각성과 결단을 요청하는 크고 작은 계기가 없는 한 대개 비가시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식별가능한 정체성을 공유함으로써 유지되는, 우리가 알고 있던 ‘공동체’와는 다르게 존재한다. 다시 말해 민중은 거주지나 계급, 또는 성차 등에 따라 정체성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단위 공동체가 아니며 그렇다고 그중 몇몇의 연합으로 구성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공동체 또는 공동체를 통어하고 있던 규범이나 제도, 코드, 정체성의 동요로부터 가시화된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산업사회로의 재편으로 농촌공동체가 빠르게 붕괴되어갔던 70년대에 민중 개념이 본격적으로 요청된 사실이나 생산자본주의 체제가 소비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고비에서 87년 6월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의 거대한 물줄기가 민중의 이름으로 분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흔히 생각하듯 마땅히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를 박탈당한 피해자가 곧 민중은 아니다. 정체성의 위기 속에서 현실의 모순에 상처입은 자들이,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능력을 통해,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내밀어 함께 일어서는 연대의 순간에 가시화되는 존재가 바로 민중인 것이다. 민중들 사이의 연대가 아니라 거꾸로 연대와 네트워크로서 출현하는 ‘민중적인 것’이 오늘날의 역사적 실감에 부합하는 일종의 2.0버전에 해당한다.3) 사사화(私事化)된 좌절과 무력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집단)들이 사회적 고통의 ‘플랫폼’에 접속하여 고립을 극복함으로써 집합적 해방의 가능성을 개시(開示)하고 확장하는 운동, 바로 그 가운데에서야 비로소 ‘제3자’이길 그치고 저마다 ‘당사자’로 참여하는 민중은 실체화하는 것일 테다. 가령 세월호참사 이후 거리와 광장을 메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선언들이 분명히 보여주었듯이 이러한 민중적 대전환의 움직임은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갖 사회적 수단을 장악한 수구기득권 세력의 조직적 날조와 방조, 훼방에도 참사를 둘러싼 진실은 차츰 얼굴을 드러내고 있으며4) 민주화의 성과를 깡그리 무화시키려는 치밀한 되감기(roll back) 전략5)에 맞서 ‘유권자혁명’에 준하는 승리를 일구어낸 지난 총선의 결과도 일정한 한계 속에서나마 그러한 대전환의 분명한 일부일 것이다. 문제는 당장의 속력이나 규모가 아닌 전환의 방향이며 그것을 좌우하는 핵심은 바로 우리들의 끈기와 자세에 있다.
가시권 밖의 안부6)
오늘의 문학에 대해 말하려는 이 글에서 민중 개념의 함의를 재구성하는 선행 절차가 필요했던 까닭은, 앞서 말한 민중적인 것이 눈앞에서 아주 사라진 듯 보일 때조차 저마다의 고유한 형식으로 그것을 감지 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지속적 현재로 ‘생동’하게 하는 데 문학 특유의 능력과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연대와 저항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시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것이 저류로 침잠한 듯 보이는 어려운 시기일수록 그 잠재력을 발굴하고 가시화하는 문학의 역할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문학은 이러한 힘을 감응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연대의 자원을 생산하고 보전하며 축적한다. 문학이 어디서 어떤 식으로든 지금 여기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고통과 질곡에 맞서 더 나은 ‘다른 세상’을 만드는 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면, 그 가능성 역시 문학이 지닌 그러한 능력에서 올 것이다. 흔히 말하는 문학의 정치성이나 사회성도 민중적인 것의 존재에 대한 신뢰와 문학의 힘에 대한 믿음을 떠나서는 공허한 관념에 떨어질 뿐이다. 최근 첫 시집을 펴낸 안희연(安姬燕)은 문학에 대한 이러한 믿음을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시화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노래할 입이 있고
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다
부끄러움이 만드는 길을 따라
서로를 물들이며 갈 수 있다
절벽이라고 한다면 갇혀 있다
언덕이라고 했기에 흐르는 것
먼 훗날 염색공은
우리를 떠올릴 것이다
우연히 그의 머릿속 전구가 켜지는 순간
그는 휴지통을 뒤적여 오래된 실패를 꺼낼 것이다
스스로 번져가던 무늬들
빛을 머금은 노래를7)
그러나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고 민중·민족문학 운동이 회의의 대상이 된 이래 문학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지속적 도전에 직면해왔다. 우리 사회에서 연대의 감수성이 적잖이 유실되었음을 수세적으로 반영하거나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기정사실화하는 온갖 ‘종언론’과 그 변종 들이 서구의 탈근대이론에 접종해 출현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학의 무력함을 호소하는 많은 말들은 그 주관적 선의야 어떻든 자신들이 문제삼는 바로 그 위기를 가속하는 데 봉사하기 마련이며, 그야말로 ‘다른 세상’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키는 자본주의 논리의 답습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의 고비마다 분출해 자신의 건재를 알렸던 저 민중적인 것의 존재가 엄연하다면 곁에서 그 잠재력을 보존하고 배양했던 우리 문학의 움직임 또한 일시적 후퇴와 정체가 있었을지언정 아예 중단된 적은 없었다. 이른바 87년체제, 분단체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초래한 ‘3중 위기’의 심화 속에서 민중적인 것의 가시성이 커져가는 만큼 문학의 자리에서도 현실 지향의 자의식이 증대되고 있음은 도처에서 꾸준히 감지된다. 수구보수연합의 재집권 시기에 촉발되어 용산참사(2009) 이후 더욱 활발하게 전개된 ‘문학과 정치’ 논의나 밀양과 강정,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 사태 앞에서 젊은 시인·작가들이 보여준 직접적인 현실참여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변화는 훨씬 내밀한 지점에서도 시작되었다. 주로 ‘현실에서 내면으로의 이행’으로 평가되었던 ‘90년대 작가’들이 최근 오히려 그러한 변화의 흐름을 뚜렷이 실감케 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 일가의 평균적 삶을 통해 우리 사회의 압축적 근대화 과정을 전에 없이 큰 스케일로 조감한 성석제(成碩濟)의 『투명인간』(창비 2014)이나 소년 동호의 죽음을 축으로 광주항쟁의 민중적 위엄을 살아 있는 현재로 복원해낸 한강(韓江)의 『소년이 온다』(창비 2014)는 ‘90년대 문학’의 현실지향적 전회(轉回)를 증거하는 뚜렷한 성취다. 이렇게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 마디들을 새롭게 조명해 현재화하고 그 의미를 다시 묻는 작업들은 이기호(李起昊)의 장편 『차남들의 세계사』(민음사 2014)와도 공명하는데, ‘투명인간’ ‘소년’ ‘차남’ 등이 이미 ‘민중적인 것’의 빼어난 상징들일 것이다.
그에 더해 주목할 만한 현상이 이른바 왕년의 민중문학운동을 주도하던 작가들의 현장 복귀다. 『활화산』(세계 1990)의 작가 이인휘(李仁徽)가 8년여 침묵 끝에 중단편 작업으로 돌아온 뒤 이내 소설집 『폐허를 보다』(실천문학사 2016)를 펴낸 것도 놀랍지만, 소설집 『우리의 사랑은 들꽃처럼』(풀빛 1992) 이후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쇳물처럼」(1987)의 작가 정화진이 지난해 단편 「두리번거리다」(『황해문화』 2015년 가을호)로 20여년을 건너 작단에 복귀한 사실은 그 자체가 시대전환의 작은 징후로서 손색이 없다. 지난해 나란히 새 시집을 펴냄으로써 건재를 증명한 백무산(『폐허를 인양하다』, 창비)과 김해자(『집에 가자』, 삶창)는 예나 지금이나 ‘민중시’ 계열의 든든한 버팀목인데,8) 이들이 수행해온 그간의 분투가 외롭지 않았음을 두 작가의 복귀가 증명해준 셈이기도 하다. 또한 세월호참사에 감응한 젊은 시인·작가들을 주축으로 기존의 문학생산제도 바깥에서 창작과 현장낭독의 새로운 플랫폼이 된 ‘304낭독회’는 문단 안팎의 꾸준한 호응 속에 벌써 20회 이상 활동을 지속함으로써 문학운동과 사회운동 양 측면에 신선한 자극이 되고 있다.9) 민중적인 것을 비가시화하는 체제의 압력이 거세질수록 우리 시대의 ‘투명인간’들에게 목소리와 얼굴을 되돌려주려는 시인·작가들의 간단없는 싸움은 이렇게 세대와 출신, 장르와 문학이념의 차이를 막론하고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문학의 자리에서도 대전환은 이미 시작된 것이 아닐까.
앨리스들의 신원
하지만 누구라도 느끼고 있듯이 이 싸움은 어느때보다 복잡한 양상을 띤다. 궁극적으로는 앞서 말한 ‘3중 위기’의 복합성 때문이겠지만, 그것이 초래하는 사회적 감수성 또는 공통감각의 동요로 우리 시대의 시인·작가들은 이중 삼중의 고투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싸움의 어려움은 그것대로 감당하면서 ‘미래를 도모하는’ 새로운 실험을 지속하고 있는 우리 문학의 현장은 따라서 해답의 옳고 그름보다 물음의 간절함과 진실함에 한층 집중하는 단계에 와 있는 듯하다. 그러한 작업을 가장 절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작가의 한 사람으로 황정은(黃貞殷)을 꼽는 데 주저할 이유는 없다. 특히 그의 중편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 2013)는 성석제의 『투명인간』 못지않게 ‘민중적인 것’의 새로운 가시화에 의식적인 경우다.
『투명인간』이 너무나 많아서 구별이 어렵고 눈에 잘 띄지도 않게 된 평균적 존재들을 마주하고 있다면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예외적이라 할 정도로 강렬하고 특수한 고통과 불행을 제시함으로써 예의 가시성의 지평을 국소적 차원에서 펼쳐 보이고 있다. 전자가 통시적 조망 아래 펼쳐지는 시간적 형식이라면 후자는 ‘內’ ‘外’ ‘再, 外’라는 각 장의 소제목이 암시하듯이 공간적 형식을 취하는데 그것은 작품의 주요배경인 고모리를 비롯해 공간이나 장소에 대한 서술적 배려가 유독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황정은 소설 일반의 특징이기도 하다.10) 평균성이라는 선행 관념의 제약 때문에 작의가 실감에 우선하는 부분도 없지 않은 ‘투명인간’에 비해11) 예외적 형상의 ‘앨리시어’가 지니는 장점은 무엇보다 ‘투명인간’류가 이따금 누락할 수 있는 일종의 ‘새로운 현실’을 포착한다는 데 있다.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대를 찾아 머리를 기울여본다. (…) 앨리시어의 복장은 완벽하다. 재킷과 짧은 치마로 한벌인 감색 정장을 입었고 비둘기 가슴처럼 빛깔도 감촉도 사랑스러운 스타킹을 신었다. 그대는 (…) 불시에 앨리시어의 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동전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숨을 들이쉬다가 거리에 떨어진 장갑을 줍다가 우산을 펼치다가 농담에 웃다가 라테를 마시다가 복권 번호를 맞춰보다가 버스정류장에서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가 앨리시어의 체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 앨리시어의 체취와 앨리시어의 복장으로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앨리시어를 추구한다. (…) 그대의 재미와 안녕, 평안함에 앨리시어는 관심이 없다. 계속 그렇게 한다.(7~8면)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도입부다. 누차 얘기되었듯이 이 작품은 의문투성이다. 1인칭인지 3인칭인지 혼란을 주는 앨리시어의 존재가 우선 그렇지만 그가 제목의 앨리스씨와 동일 인물인지 아닌지부터 석연치 않다. 게다가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의 ‘그대’는 누구인가.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가 공유하거나 공유한다고 간주하는 모종의 식별체계가 이러한 의문을 만들어내는지 모른다는 심증을 갖게 되기도 한다. 안(內)과 밖(外)의 구분으로 이루어진 각 장의 제목이 ‘다시, 밖(再, 外)’이라는 의외의 구획 개념에 도달하는 데서도 암시되듯이 앨리시어의 존재는 기성 식별체계를 환기하면서 균열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여장 부랑자”란 설명만 해도 그렇다. 차림새는 여성이지만 실제 여성은 아닌 경우에 붙이는 수식이 여장이라고 할 때 앨리시어가 적어도 통념상의 여성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지지만—본문의 이야기도 이를 뒷받침한다—여장을 성적 지향의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에는 달리 생각할 여지도 없지 않다. 따라서 그의 정체나 지향은 함부로 단정하기 어려운데 그렇다고 그러한 식별 자체의 근원적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것 같지도 않다. 앨리시어는 아마도 그 자신이 기성 식별체계의 산물인 동시에 새로운 식별체계를 요청하는 존재일 것이다.
이로부터 여러 의문이 풀릴 여지가 생긴다. 앨리시어의 등장은 기성 식별체계가 초래한 여러 현실적 존재들의 고통을 두루 상기시킨다. 고모리에서의 폭력 아래 성장한 앨리시어의 삶은 고통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할 지경이다. 따라서 기성 식별체계에 포섭된 공동체와 새로운 식별체계를 요청하는 존재들 중 어느 쪽이 ‘야만’에 해당하는지는 자명해진다. 단정하긴 어렵지만 제목의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앨리시어와 동일한 존재가 아닐 것이다. 앨리시어의 입장에 설 때 ‘그대’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낯설고 불가해할 뿐 아니라 야만적이기까지 한 존재들이라는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앨리시어를 스쳐가는 수많은 ‘그대’들이 정지화면에 포착된 사물처럼 건조하게 서술된 데서 그러한 느낌은 강화된다.
그렇다면 ‘그대’와 앨리시어는 영원히 서로를 배제할 수밖에 없는 관계일까. 그럴 리는 없다. 오히려 앨리시어는 그대를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재미와 안녕, 평안함”에 포섭된 그대들 가운데는 끝내 “이것을 기록할 단 한사람”이 될 그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단 한사람’이 글자 그대로의 단 한사람만이 아니라 ‘자신의 자신됨’, 그러니까 개체성을 유일한 식별체계로 받아들인 존재를 말하는 것이라면 ‘단 한사람’으로서의 ‘그대’야말로 공동체를 통어하고 있던 규범이나 정체성의 동요로부터 가시화되는 민중적인 것의 탁월한 형상화일 수 있다. 여기서의 기록이 무엇을 보존하는 기록인지는 긴 설명이 필요없겠지만 그럼에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대목은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라는 문장의 의미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 한편의 시를 경유할 수밖에 없겠다.
‘야만적인’ 기성 식별체계의 폭력성에 대한 진지한 탐문이자 예의 ‘새로운 현실’의 시적 형상화 사례로는 김현(金炫)의 『글로리홀』(문학과지성사 2014)이 주목할 만하다. 여러 시편들 중에서도 어느 게이 청소년의 실연담을 소재로 한 「늙은 베이비 호모」는 사랑에 관한 소수자적 감수성의 독특한 깊이를 보여준다. 그것은 물론 기성 식별체계 아래서 잘 보이지 않았거나 흐릿했던 무엇이다.
자줏빛 비가 내리는 여름의 텅 빈 교실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빨았네. 어금니를 깨물고 축구화를 구겨 신은 거무튀튀한 감정이었지. 무릎을 꿇은 창밖으로 시간의 좀들은 하얗게 피어오르고.
일렬횡대로 젖은 운동장을 행군해오는 두꺼비 떼의 구령에 맞춰, 녀석은 힘껏 달렸네. 나는 녀석의 반짝이는 드리블을 떠올렸지. 골을 넣을 때마다 퍽을 내뱉던 녀석의 입술은 퍽 신비로웠어. 침으로 범벅이 된 감정은 부드럽고 미끄덩하고.
곧 줄줄 흘러내렸네. 감정의 불알을 감추고, 녀석은 황량하고 사랑스러운 발길질로 나를 걷어찼지. 유리창 안에서 시간에 좀먹은 내가 늙은 신부처럼 나를 나처럼 바라볼 때. 녀석은 똥 묻은 팬티를 끌어올리고 사라지고 아름답고. 나는 면사포처럼 속삭였어. 안녕.
그리고 녀석들을 본 사람은 없네. 아무도. 그래, 아무도.
엉클스버거 냅킨으로 홈타운의 케첩을 닦아내던 우리는 왜 서둘러 늙었을까. 소시지 컬 가발을 쓰고 썩은 맥주를 마시는 오래된 밤, 나는 알 수 없이 노래하네. 카운트다운이 끝나기도 전에 소년의 궤도 밖으로 로켓을 쏘아올린 녀석들을 위하여. 안녕, 지금도 축구화를 구겨 신고 자줏빛 여름에게서 도망치고 있을 글로리홀의 누런 뻐드렁니 호모들의 감정을 위하여. 그리고 건배.12)
산문적으로 펼쳐진 듯하지만 비슷한 자질의 어미들을 반복하거나 조금씩 순서를 뒤바꿔 리듬의 단조로움을 회피하면서 전체적으로 부드럽지만 생생한 현재성의 호흡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시는 하나의 완결된 후일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야기의 내용은 아프기 이를 데 없다. 게이 정체성에 눈뜬 소년 ‘나’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다른 소년인 ‘녀석’이 있다. “비가 내리는 여름의 텅 빈 교실에서 처음으로” 나는 ‘녀석’의 성기를 입에 문다. 나에게는 명백한 사랑의 행위이지만 녀석은 어쩐지 “어금니를 깨물고” 있다. 거기엔 사춘기적 정체성의 동요와 혼란이 있고 금기에 대한 공포와 함께 미지에의 숨가쁜 충동이 동거하고 있다. 이 아슬아슬한 긴장과 열기의 시간을 서서히 잠식해들어오는 듯 유리창은 부옇게 흐려오고 이윽고 그 찰나의 끝에서 녀석의 “황량하고 사랑스러운 발길질”로 모든 것은 끝난다.
그런데 이미 “나는 면사포처럼 속삭였어. 안녕.”이라는 문장이 말해주듯이 나는 자신을 예식장에 홀로 남겨진 비운의 신부처럼 상상하면서도 모멸에 빠지지 않고 ‘녀석’의 아름다움을 재차 긍정하는 데까지 이르는데 그것은 어쩌면 나를 버리고 떠난 ‘녀석’과 함께 비참하게 버림받은 ‘나’ 자신에게마저 ‘안녕’을 고함으로써 가능해진 일일 것이다. 그것은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앨리시어가 자신의 체취를 맡고 불쾌해진 나머지 얼굴을 찡그리는 ‘그대’들에 대해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것은 앨리시어와 ‘나’가 ‘그대’ 또는 ‘녀석’이 끝내 속해 있길 원하는 세계의 “재미와 안녕, 평안함”에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기성 식별체계의 지배를 벗어나 있다면 사랑의 실패가 주는 좌절이나 모멸감도 전혀 다른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물을 수밖에 없겠다. ‘녀석’이 도망쳐 들어간 세계와 ‘나’가 늙은 신부처럼 기다리고 있는 “자줏빛 여름”, 둘 중 어느 쪽이 ‘야만’인가. 따라서 이해와 용서의 “자줏빛 비”13)로 시작해 “지금도 축구화를 구겨 신고 자줏빛 여름에게서 도망치고 있을 글로리홀의 누런 뻐드렁니 호모들의 감정을 위하여” 축복의 건배를 올리며 끝나는 이 시는 에로스와 영성을 함께 머금은 ‘새로운 감수성’의 발현이자 예의 ‘민중적인 것’의 생성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사례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노동문학과 노동문학 이후
황정은의 소설과 김현의 시가 말하는 사랑은 ‘새로운 현실’을 가시화하고 견인하는 힘을 내장하고 있지만,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라는 물음을 반복하거나 “나는 알 수 없이 노래하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당면한 ‘낡은 현실’의 중력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어쩌면 이 중력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 이들의 성취를 더욱 빛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낡은 현실’로부터 한발 비켜선 채 스스로가 질문이 됨으로써 거기에 균열을 내는 방식도 있지만 ‘낡은 현실’의 낡음 자체와 거의 아무런 매개 없이 대결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문학 범주에 속하는 이인휘의 소설집 『폐허를 보다』는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 소설집에는 다섯편의 길고 짧은 단편이 실려 있는데 문제의식의 현재성과 성취도 측면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품은 「공장의 불빛」과 「폐허를 보다」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한차례 해명을 시도한 바 있기 때문에14) 여기서는 후자에 집중하기로 한다.
「폐허를 보다」는 IMF 외환위기 사태로 촉발된 현대자동차 노조의 정리해고 반대투쟁(1998)을 소재의 밑변으로 삼고 그 위에 투쟁의 기억을 공유한 허구적 인물들의 인생유전을 쌓아올린 일종의 후일담소설이다. 작품은 어느 농촌지역의 소규모 냉동식품공장에 다니는 인물 정희가 울산의 거대한 자동차공장 굴뚝에 오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남편을 여의고 홀로 자식을 키우며 살아가는 시골마을의 비정규직 노동자 정희는 왜 그 굴뚝에 올라가야만 했을까.
정희의 남편 이해민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래 민주노조 건설에 헌신해온 강골의 노동운동가였지만 98년의 정리해고 반대투쟁이 회사 측의 구조조정안 일부를 수용하는 위원장 직권조인으로 사실상 패배에 이르자 “자동차 공장의 노동운동이 죽었다고 선언하듯”(308면) 그곳을 떠난 인물이다. 과거 그의 신념에 감복해 민주노조운동에 뛰어들었던 건달 출신의 칠성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뒤이어 이해민 또한 투병 끝에 죽음을 맞게 되는데, 사실 정희의 발심은 남편의 좌절이나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이후 냉동식품공장에서 직접 맞닥뜨린 해고 위협에서 비롯된다. 정희는 그때서야 비로소 해민을 엄습했던 환멸의 정체와 대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소재를 취한 현대자동차 노조의 98년 투쟁이 우리 노동운동사의 커다란 분기가 되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90년대 들어 이미 시민운동으로의 분화가 일어나고 각종 소수자운동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전체 민중운동을 견인했던 노동운동의 상징성만큼은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내실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주도했던 것이 대공장의 조직노동이었음은 물론이려니와 98년의 타협 이후 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의 급속한 분화와 더불어 전체 노동운동의 하강과 고립이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고비에 직핍해들어간 노동문학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던 사실이야말로 일종의 아이러니인데 노동문학의 쇠퇴가 노동운동의 그것보다 훨씬 앞섰던 셈이다. 물론 그 원인을 따지는 작업은 여기서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87년 이후 소비자본주의의 빠른 착근(着根)으로 노동자 계층의 ‘신중산층’화와 같은 일종의 계급분화 현상이 지속되었고 그에 따라 계급감수성 자체에도 커다란 변화가 초래되었음은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현장 노동운동이 합법화, 제도화되는 것 이상으로 근원적인 수준의 변화인데 문학은 바로 그 근원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결말에 이르러 도입부의 굴뚝 장면으로 돌아온다. 물론 거기서 정희가 목격하는 것은 “자본의 세계에서 태어나 자본이 가르쳐준 세상만 보고”(318면) 죽을 수밖에 없는, 하나의 거대한 폐허다.
티끌 같은 희망이라도 잡고 싶어 굴뚝을 올라왔지만 황폐해져버린 인간의 삶이 눈에 가득했다. 정희는 절망으로 무너져내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뒷걸음질쳤다. 그러자 신기루처럼 장벽은 사라지고 광활한 초원이 울타리 밖으로 드넓게 펼쳐졌다. 눈부신 햇살, 드높은 하늘, 나무와 숲이 생명의 기운을 피워올렸다. 온갖 생명체들이 자유롭게 뛰고 날아다니며 평화로웠다. 하지만 울타리 안 사람들은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울타리 안에 있다고 믿으면서 기를 쓰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319면)
위에서 보듯 이 작품에서 공장은 진정한 삶과 생명의 발현을 가로막는 제약들의 상징으로 등장하지만 역설적으로 삶과 생명의 기운이 가장 생동감 있게 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핫도그와 감자떡을 만드는 공동작업 장면(273~74면)이 대표적인데 여기에는 육체노동의 반복이 가져온 고통만이 아니라 협업과 분업을 통한 동료들 간의 연대감이나 노동 자체가 부여해주는 삶의 리듬 같은 것이 배어 있다. 이는 앞서 말한 낡은 현실에 속해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요소다. 그에 비해 인용문에 등장하는 “신기루처럼 광활한 초원”은 아직 막연한데 그것은 등장인물들에게 부여된 고통의 근원이었던 98년 투쟁 당시를 단순하게 처리한 데서 오는 예고된 결함일 것이다. 삶과 노동 자체가 주는 체험적 활기를 보기 드문 직접성으로 전달하고 있는 이 작품은 소재를 선택하는 문제의식이나 그것을 감당해내려는 진정성 면에서 뚜렷하게 빛나지만 다른 한편으론 우리 사회의 민중적 감수성에 닥쳐오기 시작한 더 큰 변화에 무심하다. 그래서 냉동식품공장의 또다른 동료들일 이주노동자들에겐 얼굴과 이름이 없고, 여성 등장인물들은 여전히 남성중심적 시각에 포획되어 있다. 무엇이 진짜 현실인가, 어느 것이 더 ‘리얼’한가라는 물음을 여기서 마주하긴 어려운 일일까?
리얼리티: 세계를 인양하기
지금까지 ‘실감’이나 ‘현실’이라는 말로 까다롭고 말썽 많은 리얼리티(reality) 개념을 에둘러왔다. ‘민중적인 것’의 존재가 영영 사라진 듯 보일 때조차 저마다의 고유한 형식으로 그것을 감지 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지속적 현재로 ‘생동’하게 하는 데 문학의 고유한 역할과 힘이 있다고 할 때, 감지 가능성과 생동성의 원천인 리얼리티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사실, 있는 그대로의 삶 이외에 다른 뜻이 아닐 이 개념은 이론적으로나 철학적으로 파고들수록 수렁에 빠지게 하는 측면이 있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비근한 느낌을 주는 사실적으로 핍진한 것(the verisimilar)과 리얼리티가 어떻게 겹치고 갈라지는지부터가 복잡한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은 전자가 세부의 진실성이나 그럴듯함(개연성)과 두루 관계된 개념이라면 리얼리티는 총체성 또는 총체적 진실성과 연결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총체적 진실을 구현함에 있어서도 사실적으로 핍진한 것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느니만큼 이 둘은 애당초 서로 물고 물리는 습합(習合) 관계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가 문학작품의 리얼리티를 가늠하려고 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할 사항이 당면 현실에 대한 존중의 개재 여부인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물론 그 존중이란 무비판적 수용이나 투항이 아니라 앞서 황정은, 김현의 사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사랑’에 가까운 무엇이며 “자본의 세계에서 태어나 자본이 가르쳐준 세상만 보고 죽는” 삶의 바깥을 꿈꾸는 어느 노동소설가의 그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리얼리티는 작품 평가의 주요한 기준일 뿐 아니라 심지어 당면 목표일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 ‘민중적인 것의 귀환’이 이미 시작된 것이라면 한국문학이 리얼리티 문제에 좀더 의식적이고 적극적이 되어야 할 필요성은 이미 충분하다.
리얼리티와 마주한다는 것은 고통과 마주한다는 뜻이다. 문학에 주어진 소명은 언제나 현실적 고통의 단순한 해소에 있다기보다는 그 고통의 국면을 생생한 현재의 체험으로 지속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 ‘다른 세상’을 여는 힘이 바로 거기에서 나오며 바로 그것이 이 글에서 말하는 ‘민중적인 것’의 요체이기도 하다. ‘다른 세상’에 대한 믿음은 그 세상이 아무런 오류가 없는 세상이라는 맹신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오류까지도 현실의 엄연한 일부로 의연히 감당할 수 있고 또 극복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올 것이다. 일체의 무기력과 체념, 그리고 냉소와 혐오는 투항의 사전절차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라앉고 있는, 우리가 마땅히 건져 올려야 할 세계가 언제나 여기 있다.
--
1) 김지하 「생명의 담지자인 민중」(1984), 『생명』, 솔 1992, 83면. 이러한 민중 개념은 동학(東學)을 위시한 우리 근대종교·사상사에서는 이미 낯선 것이 아니다.
2) 김진호 「격노 사회와 ‘사회적 영성’」, 『사회적 영성: 세월호 이후에도 ‘삶’은 가능한가』, 현암사 2014, 231면. 민중신학은 「마가복음」의 용례를 따라 이러한 존재들을 ‘오클로스’(ochlos)라고 불러왔다.
3) 민중 개념의 이러한 전환은 ‘민중은 있다/없다’ 식의 형이상학적 논의나 개념정의 일반이 갖는 규범화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장점이 있다.
4) 박래군 「감추려는 자가 범인이다: 세월호특조위 2차 청문회를 주목하는 이유」, 『창비주간논평』 2016.3.23.
5) 이남주 「수구의 ‘롤백 전략’과 시민사회의 ‘대전환’ 기획」, 『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참조.
6) 안희연의 시 「백색공간」에서 따왔다.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 2015, 10면.
7)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5~8연, 같은 책 141면. 선언하고 예고하는 진술문의 연쇄가 언뜻 메시지의 강요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에는 그것을 적절히 통어하는 이지적 균제력이 함께 작동하고 있다. 선언하고 나아가려는 힘과 (주관적 과잉을 경계하는) 성찰적으로 붙드는 힘 사이의 팽팽한 긴장에 힘입어 이 시의 불안한 듯 절실한 리듬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특히 “손이 있다” “갈 수 있다” 등의 선언이 모종의 두려움을 통과해 가까스로 내려진 확신의 표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8) 백무산, 김해자의 최근 시집에 대해서는 황규관 「날갯짓과 쇠사슬 사이에서: 민중시의 현재와 미래」, 『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참조.
9) 이에 대한 비교적 자상한 소개로는 「돌아오지 못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본다」, 『시사IN』 2016.4.16. 참조. 본고의 주제와 관련하여 한 대목을 옮겨둔다. “현장의 경험이 작가의 몸을 통과하면서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날’ 이후 글쓰기의 무력함을 체감한 문인들이 많다. 안희연 시인도 그중 하나다. 낭독회에 참석해 읽고 쓰고 공유하는 과정을 경험하며 다시 글을 써나갈 수 있었다. ‘목소리로 발화되고, 청자가 있고, 쓴 글이 공유되는 걸 목격하면서 감정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글이 그렇게 무력하지 않구나. 말하고 들어야 하는구나 하는 자의식이 생겼다.’”
10) 여기에 대해서는 한기욱 「야만적인 나라의 황정은씨: 그 현재성의 예술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15년 봄호 참조.
11) 가령 주인공 김만수가 노동운동에 연루되는 대목이나 끝에 가서 교통사고로 추락사하는 장면 등에서 그런 기미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 김만수가 한 가족뿐 아니라 도시화와 산업화, 민주화의 여정 전체를 감당한 인물임에도 그의 생애를 집합적으로 축조하는 다초점화 방식을 택함으로써 과부하의 느낌은 덜 받게 한다는 데에 이 작품이 주는 놀라움이 있다.
12) 이 시에 붙은 세개의 주석을 제외하고 본문 전체를 옮겼다.
13) 추정컨대 얼마 전 타계한 미국 가수 프린스의 명곡 「Purple Rain」에서 온 모티프일 것이다. “자주색 비는 우리 모두를 용서하고 정화해주는 세례수다.” 투레 「가수 프린스의 ‘성스러운 욕망’」, 『중앙일보』 2016.5.4. 참조.
14) 강경석 「모더니즘의 잔해: 정지돈과 이인휘 겹쳐 읽기」, 『문학과사회』 2015년 가을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