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특집 | 위기의 자본주의, 전환의 계기들

 

몸과 기억의 반란

자본의 도시화에 저항하기

 

 

서영표 徐榮杓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 『사회주의, 녹색을 만나다』 『런던코뮌』 『민주주의의 질과 아시아 민주주의 지표』(공저) 『독재자의 자식들』(공저) 등이 있음. seoyp@daum.net

 

 

도시의 삶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편리하다. 도시는 잘 구획되어 있으며, 쉽게 편의시설에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은 언제든지 구매할 수 있다. 사람들 몸의 감각은 이렇게 빈틈없이 촘촘히 짜인 도시의 공간구획과 시간표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피곤하다. 너무나 체계적으로 짜여 있는 시간표에 따라 장소와 장소를 옮겨 다니며 공간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항상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다. 편리하게 느끼지만 ‘자연적인 존재’인 인간의 몸과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적 리듬이 파열음을 내는 것이다. 우울증과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 자기파괴의 충동과 약자에 대한 적대감 표출은 그런 파열음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공간체험의 파열음은 도시 생활이 가져다주는 ‘자기선택’의 환상을 통해 은폐되거나 완화된다. 사람들은 조밀하게 짜인 시간과 공간 속에 살면서도 모든 선택이 자율적이고 능동적이라고 착각한다. 스마트폰과 SNS는 이러한 ‘자율’을 보장하는 확실한 증거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집합적으로 체험하는 공간으로부터 후퇴하여 지극히 개별화된 가상의 공간으로 물러나는 댓가로 주어진 자율성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저기 바깥에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식민화하는 거대한 공간적 구조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유지하는 실천에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그 구조가 만들어내는 적대와 모순은 개인들의 체험으로 분산되어 ‘자율성의 환상’과 ‘이기적 충동’ 속으로 사라진다.

이제 우리 세대에는 자율성의 환상과 이기적 충동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도시의 모순을 집합적 운동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역사적 책무가 주어졌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야 할 집합적 운동은 과거처럼 구조적 모순을 법칙으로 설명하고 규범적으로 주어진 목표를 제시하는 것에 멈추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도시의 논리에 길들어져 스스로를 갉아먹는 적대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지만, 몸의 리듬이나 역사적으로 형성된 ‘우리’라는 집합적 정체성은 그러한 논리와 충돌하는 작고 미세한 떨림과 엇나감을 체험한다. 새로운 도시혁명, 즉 자본이 지배하는 도시가 아니라 ‘인간다움’이 기준이 되는 그런 도시로 전환하는 정치운동은 이렇게 작은 떨림과 엇나감을 역사적 운동으로 전환하는 것이어야 한다.

 

 

근대적 도시의 탄생

 

이제는 고전이 된 19세기 사회학 저작의 저자들에게 ‘도시적인 것’(the urban)은 매우 낯설고 두려운 것이었다. ‘농촌적인 것’(the rural)을 특징으로 하는 전통사회는 작은 공동체로 분절되어 있었고 그렇게 분절된 공동체 안의 구성원들은 강한 소속감과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뒤르껨(E. Durkheim)이 ‘기계적 연대’(mechanical solidarity)라고 부른 것 말이다.1) 이에 반해 공동체보다 개인이 우선하는 도시의 문화는 불안한 것이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형식적이고 부분적이며,1) 그래서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도시화가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도시의 공기는 자유로웠고,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던 억압적 질서에서 풀려난 개인에게는 자율과 자유가 주어졌다.2) 물론 그것은 신분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율과 자유였을 뿐 새롭게 도래한 무자비한 경쟁, 그리고 종교와 신분이라는 외피를 벗어던진, 좀더 노골적인 착취의 세계에 던져지기 위한 자유였지만 말이다.

근대적 도시는 세개의 경쟁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먼저 ‘보수주의’는 새롭게 도래한 도시적 삶을 불편해하고 불온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들은 종교가 사회를 규율하고 신분제가 유지되는 안정적인 질서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적 도시의 어두운 면을 일시적인 병리현상으로 바라봤다. 그것은 이행기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지만 조만간 치유될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개인주의와 경쟁은 불온한 것이기보다 선한 것이었다. 폭발적인 생산력의 발전을 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 도시화가 불러온 사회 변화의 긍정적인 면을 기꺼이 인정하는 동시에 그것이 동반한 새로운 사회적 갈등 양상에 주목한다. 그것은 곧 치유될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새롭게 등장한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은 자본주의가 극복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19세기의 보수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수주의는 전통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자본주의적 질서 그 자체를 비판하는 모든 생각을 ‘공상’으로 몰아가는 자유주의와 교배되어 새롭게 태어났다. 시장의 논리와 원자적 개인의 합리성을 신봉했던 자유주의자들은 날것 그대로의 자유주의로는 체계를 지탱할 수 없다는 자각을 하게 되고 일시적으로 사회주의적 요소를 수용한다. 20세기 중반 출현했던 국가의 개입과 시장의 결합이 바로 그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세계적 불황과 신우파의 반격으로 이러한 타협과 혼합은 깨졌다. 이후 자유주의는 착취, 불평등, 사회적 갈등을 곧 치유될 병리 현상으로 바라보기를 멈추고 그 자체를 이윤 창출의 새로운 투자처로 전환한다. 시장의 자유는 한때 전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지만 이제 기득권과 함께 지켜져야 하는 질서의 중심축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이종교배 결과를 우리는 신자유주의라고 부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풍경

 

앞서 서구사회가 경험한, 그리고 우리는 뒤늦게 압축적으로 경험한 근대화는 ‘노동’을 사회의 중심으로 옮겨놓았다. 지배계급이 과거에 누렸던 특권을 쉽게 내려놓지는 않았지만 노동자들은 집단적인 힘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투쟁에 나설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고, 때때로 승리의 기쁨도 맛보게 된다. 도시는 공장노동자들의 이동경로를 고려해야만 했으며 밀집된 형태의 노동자 거주지의 위생을 개선해야만 했다. 또한 노동자들의 여가가 새로운 사회적 쟁점으로 등장하고 ‘유급휴가’가 보장된다. 귀족과 중간계급만의 특권이었던 휴양지로의 여행이 대중화되고 그에 부응하는 휴양도시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3)

20세기 후반, 우리가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역사적 전환은 이러한 경향을 역전시켰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에서 노동은 ‘잠깐 동안’ 누렸던 중심성을 상실한다. 노동력의 재생산을 보장하기 위해 충족되어야 했던 필요들(needs)은 돈을 벌기 위한 새로운 수단으로 인식된다. 주택, 학교, 병원, 공원, 관공서, 도로는 노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사회적 인프라의 성격을 상실하고 그 자체로 이윤을 만들어내는 사업이 되어버린 것이다.4) 노동의 가치가 중심에 있을 때도 자본주의적 도시는 상품가치의 극대화를 추구했지만 신자유주의적 시대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고 투자와 이윤만이 최고의 가치로 숭상되는 사회에서 기본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은 경쟁력과 효율의 이름으로 가차없이 잘려나가게 된다. 도시경관은 좀더 많은 소비를 조장하는 광고판과 지속적인 개발을 상징하는 크레인, 토지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고층빌딩에 의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된다.5)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노동자의 권리가 침해되며 안정된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새로운 도시경관이 조장하는 쉼없는 소비와 부합하지 않는다. 비정규직과 시간제 노동자들은 충분한 구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새로운 도시경관은 부채를 조장한다. 이제 필수품이 된 스마트폰과 자동차는 ‘할부’라는 이름의 부채이며, 일상의 소소한 소비마저도 ‘신용’(credit)이라는 멋들어진 이름 뒤에 감춰진 부채 위에서만 가능하다. 도심은 금융회사들이 차지한다. 그리고 끝없는 노동의 긴장, 경쟁과 비교에 녹초가 되어가는 사람들은 빚이라는 수렁에 빠져드는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한 채 백화점과 대형할인매장에 진열된 상품을 구매하면서 소비라는 ‘환각제’를 들이마신다. 마치 모든 것이 본인의 의지에 따른 결정인 것처럼 느껴진다. 소비를 통해 스스로를 가꾸고 창조해간다고 생각하게 된다. 19세기 사람 중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졌던 소수가 급격한 도시화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 느꼈던 두려움이 이제 완전히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공동체적 유대를 상실한 원자화된 개인,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도덕적인 기반이 완전히 붕괴된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패배자를 양산하는 사회, 좌절하는 사람들

 

금융화 단계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계급··인종 차이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오직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자기계발에 노력하는 개인들과 그것에 실패하는 개인들이 있을 뿐이다. 대부분이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모두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원치 않는 게임에 말려든다.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계급투쟁, 성차별, 인종차별에서 연원하는 갈등은 병리적이며 비정상적이라고 낙인찍힌다. 그런 낙인은 사람들의 의식을 파고들어 매일의 행위를 통해 차별의 논리가 은밀하지만 더욱 강력하게 작동하도록 한다. 차별이 부정되는 상황에서 여전히 차별받고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를 차별함으로써 존재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간다. 때로는 요란하게 때로는 조용히 속삭이는 자본과 화폐의 논리가 만들어낸 원자로서 존재하는 수많은 ‘나’는 ‘그들’을 향한 투쟁보다는 동료 노동자와의 경쟁에 몰두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갈등, 외국인노동자를 향한 혐오가 만연한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근대 시민의 소통능력은, 교환가치로만 간주되는 집과 토지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동료 시민과의 아귀다툼으로 변모한다. 공유(commons)와 공공(the public)의 개념은 흐릿해진다. 지배계급은 이러한 현상을 일탈과 병리적 현상으로 지탄하지만 방조한다. ‘그들’을 향한 적대가 ‘우리’ 안의 소모적인 적대로 해소되고 있지 않는가.

도시는 이렇게 조장된 허구적 적대에 의해 ‘위험’으로 가득 찬 공간으로 재정의되며 항시적인 ‘감시’장치들을 장착하게 된다. 가상의 공격자에 대한 ‘공포’는 ‘위험’을 또 하나의 축적 영역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몸과 기억의 떨림과 진동은 멈추지 않는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강요하는 질서와 공존하기 어려운 몸의 리듬과 집합적 기억의 ‘원초적’ 저항 말이다.

점차 ‘오른쪽’으로 수렴되는 정치지형은 이러한 사태를 악화시킨다. 좌파를 자처했던 정치집단들이 스스로를 ‘신자유주의 질서 안’의 좌파로 재정의함으로써 우경화되었다.6) 몸과 기억의 떨림은 끊임없이 불만을 쌓지만 그것이 표출될 수 있는 정치적 통로는 차단당한다. 종종 반복되는 광장과 길 위의 집합적 행동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떨림과 진동으로부터 생겨날 수밖에 없는 국지적 저항들은 ‘민족’과 ‘국가’의 허구적이고 강요된 연대 앞에 이기적이라고 지탄받을 뿐이다.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을 지적하면 이미 종말을 고한 유토피아에 기댄 선동으로 공격받는다.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부정하는 ‘정신 나간 좌파’로 낙인찍히게 되는 것이다.

불만은 표적을 상실한다. 엉뚱한 곳을 향할 수밖에 없다. ‘한발 제겨디딜 곳조차 없는’ 상황에 대한 불만은 ‘나’ 자신을 향하고 그것은 곧 자기파괴적으로 표출된다. OECD 최고의 자살률을 ‘자랑하는’ 한국의 모습을 보라. 경쟁논리를 내면화한 신자유주의적 행위자들은 불만을 투영할 ‘약자’를 찾아나서기도 한다. 여성과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혐오가 만연하게 된다. 극우적 선동이 득세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극우적 포퓰리즘의 선동은, 좌절과 불만을 완충해줄 사회적 유대가 침식된 상황에서 오직 개인으로서만 경쟁과 강도 높은 노동을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 불만을 이야기할 기회를 차단당한 사람들의 감정상태와 쉽게 공명한다. 이런 상황을 연출하고 방조하거나 선동한 정치엘리트들은 극우적 포퓰리즘을 비난하며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좌절과 불만을 비껴간다. 사람들의 불만을 철 지난 반공주의나 인종주의와 접속함으로써 무력화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갈등만을 정치적 의제로 삼은 후 나머지는 모두 공식적 정치의 장에서 몰아낸다.7)

극단적인 경쟁논리, 극우적 선동, 엘리트 정치는 오직 ‘나’의 이기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시대의 반영이다. 불행히도 무수히 많은 이기적인 ‘나’는 자신을 드러내는 개성을 가지지 못한다. 정체성의 시대가 표방되지만 개인의 특징은 사라지고 역사는 상실된다. 모두가 대학에 가려고 하지만 왜 대학에 가야 하는지,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수많은 청년들이 공무원이 되고자 한다. 자신의 개성과 적성과는 무관하다. 안정적 직장이기 때문일 뿐이다. ‘나’의 서사, ‘나’의 역사, ‘나’의 정체성은 공기 중으로 사라져버린다.8) 어떻게 하면 ‘그들’과의 적대를 통해 다시 역사와 서사를 가진 ‘우리’ 속의 ‘나’를 회복할 수 있을까?

 

 

몸과 기억의 떨림: 도시에 대한 권리 또는 충족되지 않는 필요

 

아무리 자본의 논리가 공간이 가지는 두께와 부피를 평평하게 만들어 조각을 내어 상품을 만든다 하더라도 우리 몸은 그렇게 분절화되고 평면화된 공간의 폭력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몸은 의식보다 더 예민하게 시공간의 폭력에 반응한다. 비록 그 민감한 반응이 만들어내는 좌절과 불만의 에너지를 한쪽 구석에 밀어넣고 있지만 말이다.

몸과 함께 우리의 기억, 아마도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합적 기억도 자본의 논리를 불편해한다. 원시시대 나약한 인간이 거친 환경과 맹수들 사이에서 생존하고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협동’의 힘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인간이 가진 가장 큰 힘인 언어조차도 그러한 협동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끄로뽀뜨낀(P. Kropotkin)은 진화에서 살아남은 ‘종’, 즉 적자(適者, the fittest)는 협동하는 종이라고 했다. 인간은 그렇게 진화한 것이다. 그는 진화와 역사를 관통하는 유대와 상호부조의 흔적을 추적한다. 이것이 무의식 속에 저장된 집합적 기억을 형성하는 것은 아닐까?9) 그리고 집합적 기억은 서구사회가 성취했던 복지국가처럼 좀더 생생한 체험으로 지금의 현실에 저항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성취한 보편적 ‘인간다움’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전세계가 합의한 인간다움의 기준은 ‘유엔권리선언’에 명시되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정치적 인정과 참여의 권리를 가지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생활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르페브르(H. Lefèbvre)가 ‘도시에 대한 권리’(right to the city)를 제창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국적, 인종, 종교, 언어, 성별에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권리는 역시 국적, 인종, 종교, 언어, 성별에 관계없이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대적 도시화가 가져온 밝은 면인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소통, 전통에 의한 강요가 아니라 능동적 실천을 통한 연대, 그리고 차이를 전제한 공존의 미덕을 발전시키면서 그에 동반되었던 어두운 면(이기주의의 만연과 사회적 유대의 상실)을 일소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시에 대한 권리를 얻는 사회적 투쟁은 곧 도시가 가진 집단적 기억의 장소들이 지니는 두께와 부피를 보존함으로써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서의 도시를 가꿔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시의 건조 환경(built-environment)이 자연생태계와 맺는 신진대사를 회복함으로써 몸의 리듬을 되찾는 과정이기도 하다.10)

하지만 권리는 일상의 진동과 떨림을 표현하기에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으로 전문가 담론에 가깝다. 도시 곳곳에서 체험되는 인간다움에 대한 위협은 권리처럼 분석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건 ‘충족되지 않은 필요’로 체험된다고 말해야 한다. 체험이라는 말에 담긴 감정과 정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몸과 무의식의 떨림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11)

신문을 가득 메운 기사들은 주택난과 주거불안정에 관한 것이다. 교통정체와 사고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공교육 붕괴와 사교육시장의 확장은 또 어떤가.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모금 캠페인을 하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은 채 점점 영리를 위한 산업이 되어가는 의료서비스를 지켜본다. 동네 가게와 시장을 외면하고 백화점과 대형할인매장에 진열된 잘 포장된 상품들로 눈길을 돌리다보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 문제는 결국 어떤 동네가 매립장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지역이기주의로 나타난다. 상하수도 서비스와 전기와 가스를 둘러싼 불평등과 민영화의 위협은 계속된다. 이 모든 쟁점은 보편적 권리 담론이 ‘인권’으로 요약한, 당연히 누려야 할 ‘삶의 질’이 위협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충족되지 못한 필요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몸의 요구와 보편적 담론으로 주어진 집단적 기억이, 충족되지 못한 필요의 체험과 충돌하는 순간들을 떨림과 진동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탈구, 연대, 그리고 저항

 

몸과 기억을 둘러싼 떨림은 신자유주의적 행위자에게는 분열증으로 경험된다. 한편으로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나’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대를 갈망하고 몸의 리듬을 회복하기를 갈구한다. 이러한 분열증은 항상적인 불안을 초래한다. 문제는 이러한 불안이 해소될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떨림과 진동은 필연적으로 엇나감을 초래한다. 아주 짧고 단속적이라서 오래 지속될 수 없지만 하루하루는 한숨과 욕설, 원망과 분노의 순간으로 점철되어 있다. 짧고 강렬한 광고가 펼쳐놓는 삶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지만 결코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는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정치철학자 에르네스또 라끌라우(Ernesto Laclau)를 따라 이러한 엇나감을 탈구(脫臼, dislocation)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12)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게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자각되는 순간, 자연스럽다고 믿었던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느껴지는 순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존적이고 감정적인 떨림의 한가운데서 체험된다. 떨림은 곧 몸과 기억의 저편에 쌓여 있지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를 막연한 불만과 좌절이라는 진앙을 가진다.

사실 엇나감 또는 탈구의 순간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엄청난 비용이 드는 위험한 선택이다. 앞을 향해 달리기 바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는 조건에서 낙오자 또는 패배자로 전락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 고립된 저항은 낙인을 초래할 뿐이다. 그럼에도 도시의 삶은 그러한 탈구의 순간을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마주침의 순간도 제공한다. 마주침의 계기는 우발적일 수 있다. 계획되지 않은 시위에 참여하거나 파업에 연대하는 것은 좌절과 불만이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공감대를 형성해줄 수 있다. 밀양, 강정, 성주, 그리고 광화문에서처럼 말이다. 예기치 않게 겪게 되는 사고와 재난은 세월호의 고통스러운 경험처럼 의식의 전환을 촉발하기도 한다. 탈구의 순간은 때때로 계획된 노력에 의해 성취되기도 한다. 협동조합과 마을 만들기는 불만과 좌절을 공감하고 함께 치유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떨림이 탈구를 경과하고, 탈구의 계기들이 공유되어 사회적 저항과 투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이 정치적 의제로 떠오른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사람들이 ‘지금과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는다. 끊임없이 일자리를 걱정해야 하고 바로 다음주, 다음달의 삶을 고민해야 하며, 쉼없이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사람처럼 앞만 보고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끔씩 옆을 힐끔거리지만 그것은 타자와의 비교로부터 오는 좌절을 더할 뿐이다. 탈구는 이런 맹목적인 달리기를 회의하게 하고, 탈구의 공유는 그러한 회의가 함께 모여 논의되고 숙의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요구로 진화한다. 르페브르가 주장한 것처럼 도시의 거주자는 도시의 정치적 사안에 참여할 권리를 요구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참여는 시간과 공간의 재구조화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리듬으로부터 몸의 리듬을 되찾고 ‘상상’의 여유를 쟁취하는 ‘시간투쟁’은 모이고 이야기하고 ‘놀이할 수 있는’ 공간을 쟁취하는 투쟁이기도 한 것이다.

 

자본과 화폐의 도구적 합리성을 내면화한 고립된 원자로서의 개인들의 합리적인 선택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비합리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생존 자체의 조건을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토지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난개발은 노동보다는 투자(더 정확히 말하면 투기)를 통한 지대와 이자라는 이름의 불로소득을 추구하는 합리적 선택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 합리적 선택은 도시가 품고 있는 두터운 역사와 문화를 파괴한다. 토지의 교환가치를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흔적과 숨결은 고려대상이 아닌 것이다. 신체적 리듬보다는 상품의 유통과 소비를 위해 계획된 도시경관은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이동과 마주침을 방해한다. 서로를 연결해주는 골목은 사라지고 공간과 공간을 절단하는 도로가 도시를 할퀴고 지나간다. 자동차라는 철갑으로 보호받는 개인들은 동료인간(보행자)을 장애물로 간주한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사회성을 훈련할 공적 공간은 자동차로 가득 차고,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과 소음은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한다. 백화점과 할인매장, 멀티플렉스에 모인 사람들은 같은 장소에 있을 뿐 융합되지 못한다. 지하철 역사 안을 떠밀려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은 좌절과 불만을 공유하지만 서로를 밀치고 떠미는 ‘몸뚱이들’일 뿐이다. 백화점의 사람들은 멋들어진 포장지에 싸인 채 소비주의적 욕망을 소곤거리는 상품진열대 사이를 헤집고 다니지만 서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바코드로 이미 결정된 가격은 그 어떤 흥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지금의 삶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소통하려면 ‘불법적으로’ 도로를 점거하거나 거대한 도시 한귀퉁이의 ‘합법적으로’ 허용된 광장에서 만나는 수밖에 없다. 떨림과 탈구를 공유할 공간은 매우 비싼 댓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다. 새로운 도시투쟁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시간을 잘게 쪼개진 단위로 통제하는, 그리고 공간을 자본과 화폐의 논리에 따라 평면화하고 분절화하는 시장과 국가라는 표적과 조우하게 한다. 시장과 국가 안에서 군림하는 엘리트들은 그런 통제와 분절화를 필연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필연을 거부하는 것은 유토피아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우리 몸과 기억의 떨림은 그 ‘불가능하다는 강변’이 허구임을 체험한다.

 

 

불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의 경계

 

자본주의체계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지배계급의 논리는 허술하지 않다. 자본과 화폐의 논리를 내면화하기 오래전부터 우리 의식에 스며들어 있는 근대적 합리성의 맹목성은 매우 강력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우리는 ‘자연과학적 태도’를 우월한 것으로 교육받아왔다. 이런 입장에 서면 매일의 삶에서 느끼는 감정처럼 원인과 결과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생각들은 ‘비과학적’이다. 국가의 관료들과 기업에 고용된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경험적으로 입증 가능한 변수들 사이의 관계만이 과학적이게 된다. 둘째, 여기에 ‘경제학적 논리’가 더해진다. ‘과학주의적 태도’가 제시하는 명확성은 숫자로 표현되었을 때만 성취될 수 있다고 믿어진다. 도시공간, 일상의 시간, 사람들 사이의 유대조차 비용과 편익으로 계산되어 숫자로 제시되어야 한다. ‘과학주의적 태도’와 ‘경제학적 논리’는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힘을 소수 엘리트의 손에 맡기게 한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경험적 명확성과 수학적 확실성 바깥(사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이 바깥에 위치한다)을 무시한 채 자신이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문제들을 기술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이것이 우리가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셋째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기술적 해결의 논리’다.

자본과 화폐의 논리는 이러한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공모관계다. 이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한 저항은 불가능한 것, 실현 가능하지 않은 것, 유토피아로 비난받는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자본과 화폐의 논리가 평평하게 만들어 찢어발긴 공간이 우리 몸과 기억을 불편하게 한다고 해도 시장경제의 대안이 없는 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비록 힘겨운 투쟁의 결과였지만 유토피아가 현실이 되는 드라마를 여러번 연출했다. 실현 가능성 여부는 계급투쟁의 결과이며 힘 대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도시는 공적인 필요충족 기제를 보장받으려는 시민들의 지속적인 투쟁으로 유지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요구했고 그것을 성취해왔다. 국가의 관심 바깥에 있었던 도시 차원의 위생, 보건, 교육, 주거의 문제 해결이 노동하는 절대다수 민중의 정당한 요구로 관철된 것이다. 도시사회학자 마누엘 까스뗄스(Manuel Castells)가 제시했던 탈상품화된 집합적 소비(collective consumption)는 그런 투쟁의 일시적 승리가 가져온 결실이었다. 물론 까스뗄스의 분석처럼 집합적 소비 그 자체가 새로운 도시 문제를 만들어내고 도시사회운동을 촉발했지만 말이다.13) 최소한 복지국가 시절에는 기본적 필요가 집합적인 형태로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은 유토피아이기는커녕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사실이었다.

신자유주의적 반격은 그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유토피아라고 사납게 몰아붙였다. 탈상품화되었던 기본적 필요충족은 다시 상품 세계로 내던져졌다. 계급 간 힘관계가 달라졌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 자체가 역전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드라마의 예고편일 뿐이었다. 그렇게 주어진 새로운 정상과 비정상의 틈바구니에서 도시를 횡단하며 느껴지는 몸과 기억의 떨림이 생겨난다. ‘자연스러움’ ‘당연함’ ‘정상’은 끊임없이 몸의 체험과 집단적 기억 앞에 소환된다. 자본의 거대한 힘 앞에 무력해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다시 한번 필요충족을 탈상품화해야 한다는 열망을 분출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적인 것(the public)과 국가의 통제를 혼동하지 않으려 한다. 민주주의와 참여가 결핍된 공적인 것은 필요충족에 대한 독재(dictatorship on the needs)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촘촘히 작동하고 있는 자본의 논리, 교환가치의 논리에서 벗어나 몸의 리듬을 회복하고 근대적 인간다움의 기준을 충족하면서도 맹목적 근대화 과정에서 상실된 연대의 유대를 되살려내려는 실천, 동시에 개인의 자율적인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는 새로운 도시혁명을 향한 사회적 투쟁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급진적 도시정치의 기억

 

새로운 도시혁명은 도시를 단위로 진행되기 때문에 도시행정 단위가 시간과 공간을 둘러싼 사회적 투쟁의 주요 변수가 된다. 도시정치의 무대인 동시에 중요한 행위자라는 의미에서다. 도시행정 단위는 그 자체가 중요한 행위자이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행위자 사이의 이해관계가 부딪힌다. 그래서 갈등의 중재자인 동시에 갈등의 당사자, 때때로 갈등의 형성자일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도시혁명의 촉진자 역할을 하는 도시정부는 매우 모순적인 위치에 있게 된다. 국가기구 일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것을 시민에게 개방하고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권력형식을 약화시킴으로써 급진적 성격을 강화하는, 일면 모순적으로 보이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역할을 시도했던 사례는 많다. 성공적이었던 경우도 있었다.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지배계급에게 용인될 수 없었던 경우도 있었다. 지배계급의 논리는 ‘대안은 실현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안은 없다’이지만 그들은 언제나 실현 가능한 대안을 목격할 때마다 정치적으로 행동했다. 힘과 무력을 동원하거나 불법을 감행하거나, 또는 최소한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개입을 시도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 사례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여러가지 급진적 실험의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 붉은 비엔나(Red Vienna), 이딸리아 협동조합운동의 중심인 붉은 볼로냐(Red Bologna), 1980년대 중반 풀뿌리사회운동과 신좌파운동으로 좌경화되었던 영국 노동당 좌파의 급진적 런던광역시의회(Greater London Council, GLC) 실험14), 브라질 노동자당에 의해 주도되었던 뽀르뚜 알레그레(Porto Alegre)의 참여예산제도(Participatory Budgeting System), 그리고 세계사회포럼에서 토론되었던 무수히 많은 작은 실험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실험들이 ‘완벽하게’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급진적 도시정치는 도시 엘리트 집단에 의한 자원의 재분배에 그칠 위험에 직면한다. 우리는 이런 경향을 후원주의(paternalism)라고 부른다. 다른 한편으로 밑으로부터 조직된 풀뿌리운동들이 국가장치의 억압적 성격에 환멸을 느끼고 제도 바깥으로 탈주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위로부터의 정치적 개입과 밑으로부터의 운동 사이에 긴장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두 경향 사이의 긴장 속 균형을 찾는 것이 급진적 도시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1981~86년 사이에 존재했던 좌파 성향의 GLC에 참여했던 활동가들은 이런 긴장을 잘 알고 있었다. 마거릿 새처(Margaret Thatcher)의 비민주적 조치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5년 동안 시정부는 복지국가의 관료적 성격을 비판하면서도 시민의 확대된 참여를 통한 복지의 확장을 추구했다. 런던 시정부가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위로부터 재분배하기보다는 시민이 능동적으로 시정에 참여할 수 있게 지원하는 자원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보수진영, 특히 보수언론의 파상공세에 맞서 풀뿌리 조직들을 런던 시정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다양한 개입을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를 ‘시민의 정치주체화’(empowering the citizen) 전략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와 시장에 만족할 수 없는, 즉 국가와 시장에 의해 충족되지 못한 필요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탈구 → 저항 → 연대의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도시사회운동을 조직하고 있었다. 주택, 의료, 가스, 전기, 의료, 교육, 교통 등 까스뗄스가 집합적 소비라고 불렀던 도시 문제들을 둘러싸고 다양한 지역행동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운동들이 불평등한 자원, 정보, 지식을 급진적으로 재분배하는 도시정부를 만나게 되면 도시정치의 가장 중요한 행위자로 성장하게 된다.

따라서 ‘시민의 정치주체화’는 필연적으로 ‘국가의 민주화’(democratizing the state)를 동반한다. 몸, 시간, 공간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도시 문제는 시장과 국가가 인정하지 않은 필요의 충족을 요구하는 사회적 투쟁들이 국가장치 그 자체에 스며들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변형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은 국가장치 안에서 국가에 반하는, 그래서 국가정치를 급진적으로 민주화하는 과정이었다.

‘국가의 민주화’와 ‘시민의 정치주체화’는 민주주의를 무력화하고 사회적 유대의 토대를 허무는 시장의 힘에 맞서게 된다. 이윤과 효율을 내세워 학교와 병원을 파괴하고, 도시경관을 해치며, 종국에는 사람을 이윤창출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시장을 통제하지 않고서는 몸의 리듬을 회복하는 시간과 공간의 재조정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힘이 너무나 강력해서 우리의 삶을 구석구석까지 시장의 논리로 재편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몸과 기억의 떨림은 여전히 비시장(시장의 배후지로 남아 있는 영역), 탈시장(시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실험들), 그리고 반시장(시장을 비판하는 체계적 전환 시도)의 사회적 관계들을 만들어낸다. 국가의 힘에 눌리고 시장의 힘에 포획되어 실패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시장에서 벗어나 있고, 시장에 저항하는 힘들은 ‘이미언제나’ 존재한다. 이것이 완벽해 보이는 체계의 빈틈이라면, GLC가 시도했고 새로운 도시혁명을 기획하는 급진적 도시정부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이 빈틈을 헤집고 들어가 시장을 사회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근거들을 만드는 것이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무모함, 아니 현명함

 

그람시(A. Gramsci)는 유기적 위기(organic crisis)를 정세적 위기(conjunctural crisis)와 구분한다. 그는 체계가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이상 지탱될 수 없는 상태를 유기적 위기라고 불렀다.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를 결정적이고 유기적인 위기로 체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러한 주관적인 판단을 넘어 체계가 한계에 도달하여 전환이 절실히 요구되는 위기는 분명히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바로 그런 유기적 위기의 시대다. 경제적 위기, 정치적 위기, 생태계의 위기, 그리고 사회통합의 위기가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다. 결국 삶의 방식 자체가 더이상 지탱 가능하지 않다는 증거가 속출하고 있다.

결정적 위기, 다층적 위기의 시대를 체감하면서도 그 원인을 제대로 진단·제거하지 못하는 것은 근대사회가 주조해낸 세계관에 우리가 너무나 강력하게 짓눌려 있기 때문이다. 근대의 지평에 갇힌 협소한 과학과 객관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매우 얕게 인식된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과학과 객관의 기준이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는 무수한 몸부림과 아우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몸부림과 아우성은 언제나 과학과 객관 바깥의 공상과 상상의 영역으로 밀려난다.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이라는 비난과 함께. 이제 그런 몸부림과 아우성 속에서 새로운 과학의 패러다임이 출현한다. 추상적이어서 내용이 텅 비어 있는 ‘약한’ 객관성(weak objectivity)이 아니라 삶의 체험, 그리고 기억과 몸의 떨림과 진동에 공감하는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을 추구하는 과학 말이다.15)

탈자본주의 사회를 향한 새로운 도시혁명은 과학과 객관의 폭력에 의해 비가시적인 상태로 눌려 있는 몸부림과 아우성을 가시화하는 투쟁일 것이다. 낡은 근대의 기준으로는 무모한 짓이다. 하지만 근대가 낳은 도구적 합리성의 폭주를 막지 못했을 때 직면하게 될 파국을 생각해본다면, 그리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도구적 합리성 밖으로 탈출하는 것이라면 그 무모함은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가해지는 폭력과 조우하면서 겪게 되는 작은 떨림과 진동의 울림을, ‘과학주의적 태도’와 ‘경제학적 논리’, 그리고 ‘기술적 해결’을 뚫고 나가는 거대한 역사적 운동으로 만드는 도시혁명은 ‘그들’의 기준에서는 공상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사실적이다. 우리는 다른 세상이 필요하고, 그것을 열망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우리의 몸과 기억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

1) 에밀 뒤르켐 『사회분업론』, 민문홍 옮김, 아카넷 2012.

2) 게오르그 짐멜 「대도시의 정신적 삶」,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김덕영 윤미애 옮김, 새물결 2005.

3) Selina Todd, The People: The Rise and Fall of the Working Class, 1910-2010, John Murray 2014.

4) 앙리 르페브르 『공간의 생산』, 양영란 옮김, 에코리브르 2011.

5)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한상연 옮김, 에이도스 2014.

6) Chantal Mouffe, Agonistics: Thinking the World Politically, Verso 2013.

7) 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Verso 2005.

8)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이진우 옮김, 문예출판사 1997.

9)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만물은 서로 돕는다』, 김영범 옮김, 르네상스 2005.

10) Henri Lefèbvre, Writings on Cities, ed. Eleonore Kofman and Elizabeth Lebas, Wiley-Blackwell 1996과 강현수 『도시에 대한 권리』, 책세상 2010.

11) ‘충족되지 않은 필요 개념’에 대해서는 졸고 「도시적인 것, 그리고 인권?: ‘도시에 대한 권리’ 논의에 대한 비판적 개입(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엮음 『마르크스주의연구』 2012년 겨울호)과 「상품화된 일상과 충족되지 않은 필요: 자본주의의 틈새와 저항적 지역정치」(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엮음 『로컬리티인문학』 11, 2014)를 참고.

12) Ernesto Laclau, “New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of Our Time,” New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of Our Time, Verso 1990.

13) Manuel Castells, The Urban Question, Edward Arnold 1977.

14) GLC에 대해서는 졸저 『런던코뮌: 지방사회주의의 실험과 좌파 정치의 재구성』, 이매진 2009 참조.

15) 샌드라 하딩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 여성들의 삶에서 생각하기』(조주현 옮김, 나남 2009)를 참고. 좀더 자세한 설명은 테드 벤턴과 이언 크레이브의 『사회과학의 철학』(이기홍 옮김 한울 2014) 중 9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