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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황병승 黃炳承
1970년 서울 출생. 2003년 『파라21』로 등단.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이 있음. stepson@hanmail.net
목마른말로(末路)·1
이보게 친구 나는 때때로 젊은 시절의 엄마를 떠올리며 울곤 한다네 그러나 지금은 울지 않지 지금은 그녀가 나의 엄마가 아니기 때문에
기만…… 파묻고 떠나온 걸세
팔월의 햇빛이 쏟아지는 이국의 거리를 나는 걷고 또 걸었다네 엉망의 머리칼로 엉망의 머릿속으로 누가 보아도 누군가의 덜 떨어진 아들처럼, 술에 취해 연신 중얼거리며 몸도 마음도 완전히 녹초가 될 때까지 걷고 또 걷고 있을 때, 길 한가운데 삼삼오오 모여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홈리스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네 그때 나는 그들을 닥치는 대로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이 옳을 것이네 마치 그들이 내 지친 눈을 부시게라도 한 것처럼 나는 이내 성난 얼굴이 되어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순순히 길을 비켜주었네…… 더러운 오오꾸보 놈들 더러운 오오꾸보 놈들 나는 마음속으로 용서를 빌었네 울면서 울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뜨거운 기분에 대해 우리는 다만 한가지만을…… 마음속으로 나는 용서를 빌었다네, 나 자신을 향해 그 누구에게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을 향해 말일세
이듬해 나는 동경을 떠나 빠리 외곽에 있는 독신자아파트에 살고 있다네 너무도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지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숲과 공원에는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질 않는다네 아니 프랑스인들은 개미만도 못한 존재들이니까! 대화가 통하질 않으니 말일세 그들은 차라리 유령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나는 아예 집밖으로 나가질 않는다네 마치 빠리라는 감옥에 홀로 감금된 이방인처럼 이보게 제발 바보를 모욕하진 말게 바보는 적어도 두려움을 모르니까, 매일밤 옆집 여자의 목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오곤 한다네 불어로, 불어로! 바보를 더이상 모욕하지 말아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없어 바보들은 적어도 가족을 팽개치고 달아날 만큼 겁쟁이는 아니니까! 간신히 나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네 매일밤 들려오는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 때문에 나는 밤마다 사전을 펼쳤고 그녀의 말을 간신히 알아듣게 되었을 때 나는 괴롭고 비참한 심정이 되었네 늙은 광부가 숨겨둔 상자를 열었을 때 다이아몬드가 한방울의 찬물이 되듯이 말이야
이보게 친구 나는 그날밤 이상한 꿈을 꿨네 마을사람들과 경찰들이 피투성이가 된 옆집 여자와 함께 내 집의 현관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네 그녀는 잠옷차림으로 쏘파에 누워 있던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네 불어로, 불어로…… 이자가 나를 테라스에서 떠밀었다 감히 이자가 나에게 사랑을 속삭였고 자신의 아기를 원했으며 더러운 얼굴을 내 코앞에 바싹 들이밀었다 이 쥐새끼 이 불한당 형편없는 도적놈아 끔찍하구나 어쩌면 이렇게도 달아난 내 남편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나타날 수 있단 말이냐……! 이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나는 꿈에서 깨어 한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지저분한 얼음이 녹듯이 말이야 온통 검은 물이고 가득 차서 나는 나 자신에게 점령당했다,라는 말이 옳을 것이네 나는 승리했고 나는 완전히 패했네
목마른말로·2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이곳의 창문은 밤도 낮도 보여주질 않습니다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나의 발소리는 나를 놀라게 하고 나의 목소리는 나를 괴롭게 하지요
죽어가는 늙은이처럼 나는 운이 없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역시 더럽게 운이 없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와 새들 구름과 언덕 개와 염소들 모두 저마다의 운을 가지고 있겠지요 나무는 나무로서의 운을, 새는 새로서의 운을, 구름은 구름으로서의, 언덕은 언덕으로서의…… 하지만 만일 그것들이 이 마을로 들어서는 순간, 그것들은 더이상 나무도 새도 구름도 아닌 그저 더럽게 나쁜 운의 덩어리들 더없이 훌륭한 음식과 더없이 훌륭한 잠자리와 더없이 훌륭한 보살핌 속에서도 더럽게 나쁜 운은 사고를 부르고 죽을병과 재앙을 부르며…… 엄마도 아빠도 떠나간 남편도 죽은 딸아이도 모두 더럽게 나쁜 운의 덩어리들 울거나 소리치거나 머리를 쥐어뜯어봐야 천장의 형광등은 머리 위로 떨어지고 문틈에 낀 손가락은 검게 썩어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엄마, 엄마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내 생일인데 아무도 오지 않았어, 당장에, 죽어 없어지기라도 했으면!
죽은 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곤 합니다
—당장에! 네가 원하는 것을 해, 너 하나쯤 죽어 없어진들 달라질 게 뭐란 말이냐, 누가 너 따위를 위해 울어주기나 할까, 한심한 계집애 같으니, 이 쌀쌀맞은 실패자!
애정…… 불타서 재가 되었겠지요
결심 끝에 나는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났지요 광대뼈가 주저앉았고 어금니 두대가 부러졌으며 한쪽 어깨와 다리에 심각한 골절상을 입은 채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내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의 놀라고 걱정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투신이라니…… 이 조용한 마을에서 이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에서! 나는 더럽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피범벅이 된 얼굴로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며 더러워진 정원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변화를 기대하기란 어렵겠지요 나무 위의 종달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이 날아가버리고 손으로 빗어넘긴 머리칼은 누가 보아도 칭찬할 수 없을 테니까요 죽어가는 늙은이처럼 죽어가는 늙은이처럼 대체 누가 누구를 견딘단 말입니까 누가 누구에게 감히 용서라는 말로 화해를 청할 수 있단 말입니까 타락한 어느 목회자의 일요일 아침과도 같은 이 저녁에!
십이월이면, 찬비가 쏟아질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