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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국가범죄와 법의 책무
박성철 朴城徹
변호사. 법무법인 지평 소속. 저서 『헌법줄게 새법다오』 『리트윗의 자유를 허하라』(공저)가 있음. scpark@jipyong.com
1. 간첩조작에서 무죄판결까지 27년
조작하는 방식은 수학공식처럼 단단했다. 결국 간첩이라는 값이 나오고 마는 공식 안으로 빨려들어가면 A, B, C… Z 누구도 낙인이 찍히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설마 국가가 아무 흠 없는 생사람을 잡았겠느냐고, 죄가 있으니 비밀장부를 내어놓듯 세세한 자백을 했겠지 의심한다면, 날조의 현장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깐 조사할 일이 있다면서 밀실로 연행하며 이른바 수사가 시작된다. 1983년 3월초, 공범이라지만 서로를 알지 못했던 A, B, C도 영문을 모른 채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잡혀왔다. “너 간첩이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대답에 주먹질과 발질이 시작됐다. 사나흘 똑같은 추궁과 부인, 구타가 되풀이됐다. 좁은 골방 안에서 거대한 폭력 앞에 팬티만 입은 채 몸서리치며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내게 왜 이러는 거냐고 부르짖을 때 수사관은, 그래 그럼 네 말을 한번 믿어보자고 한다.
간첩이 아닌 걸 증명할 수 있게 모든 행적을 써보라는 말에 사력을 다해 적었다. 굴지의 제약회사 임원이던 A는 영업활동에 매진해 국가경제에 기여한 일을 꼼꼼히 기록했다. 사업에 성공해 제법 여유가 있던 B는 딸이 다니던 학교 기성회, 새마을금고 임원 등 지역 사회단체의 직을 맡아 봉사하고 기부한 일을 소상히 말했다. C는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큰 건설회사에 입사한 전도유망한 기술자였다. 매일 야근을 하며 국내외 공사현장을 누빈 일을 설명했다.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남편이면서 직장의 일원으로 땀 흘리며 사회에 헌신한 일을 보면,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희망은 짓밟혔다. 수사관들은 정교한 조작의 빌미가 되는 낚시를 던진 것뿐이었다. 거래처가 있는 수원에 자주 다녀온 건 출장을 핑계로 그곳에 있는 군부대 공항 주변을 탐지하기 위해서였느냐고 A에게 되물었다. 비행기 이착륙 모습과 헌병의 활동시간 같은 고급기밀을 얼마나 수집했느냐고 추궁했다. 전국을 누비며 영업활동을 한 것은 여러 고속도로 검문활동 정보를 취합한 간첩활동이 아니냐고 다그쳤다. B에게는 학교 기성회 명단, 새마을금고 잡지, 동사무소 내규집을 내밀었다. 북한에 보고하기 위해 집에 보관하고 있던 자료를 압수해온 것이라고 했다. C에게는 원자력발전소 고압용기 제작에 관한 교육을 받으며 북에 넘기려 깨알 같은 메모를 했느냐는 욕설을 퍼부었다.
터무니없다는 반항에 돌아오는 고문은 사람의 행동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했다.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얼굴에 수건을 덮은 채 물을 붓거나 비눗물을 코에 넣었다. 손과 발에 몽둥이를 끼워 책상 사이에 매달았다. 간봉으로 내려치다 지치면 무릎 사이에 각목을 넣고 비틀었다. 코피가 나고 항문에 피가 고이고 혈변을 누었다. 빈혈로 바닥에 실신해도 고문은 끝나지 않았다. 옷을 벗겨 꿇어앉게 하고서 한명은 구둣발로 무릎에 올라타 내리밟고 다른 수사관들은 몸 전체를 걷어차며 저주를 쏟아냈다. 어느날 옆방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릴 때 제대로 자백하지 않으면 네 마누라와 딸도 붙잡아 다 벗기고 똑같이 고문하겠다고 겁박했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이라는 두려움 앞에 모든 걸 체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인지 낮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게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남겨진 가족들도 어디선가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언제 무슨 자백을 또 요구할지, 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원하는 대로 허위자백을 하면 끝에 가서 어떻게 되는 것인지,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인지, 살아서 바깥세상을 다시 볼 수는 있을지, 어느 것 하나 알 수 없었다.
설명되지 않는 공포 앞에 마음이 무너졌다. 자백을 꾸며내기 시작했다. 미리 써준 내용을 보고 베껴 쓰며 살을 붙여나갔다. 유서도 시키는 대로 받아썼다. 조사를 받다 죽임을 당해도 자살로 위장하는 내용이었다. 수사관들이 친절하게 대해주었지만 간첩활동을 한 것이 너무 부끄러워 자살을 한다는 구절을 옮겼다. 쓰는 동안에는 고문을 당하지 않아서 차라리 거짓이라도 적는 게 나았다. 수사관이 원하는 만큼 그럴 듯한 자백을 토해내지 못하면 다시 고문을 당했다. 완성된 진술서나 반성문을 수십번 옮기고 외웠다. 암기검사를 받다 틀리면 또 고문이 시작됐다. 스스로 정말 간첩이 아닌지 착각할 정도가 되었다. 지하 밀실에서 60일쯤 보내며 완벽한 간첩으로 거듭났다.
검찰로 송치될 때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그래도 검사는 다를 것이라 기대했다. 고문에 못 이겨 거짓자백을 했으니 진실을 밝혀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 큰절을 하면서 온몸으로 호소하기도 했다. 거짓말탐지기를 한번만 써달라고 빌었다. 재수사를 해서 털끝만큼이라도 간첩짓을 한 사실이 발견되면 정말 사형을 당해도 좋다고 울부짖었다. 검사는 짜증을 내며 자리를 비웠고 검사실로, 구치소로 바로 그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네가 우리 손을 벗어난 줄 아느냐, 검사님을 피곤하게 해서 좋을 것 하나도 없다며 처음부터 또 고문을 하자고 했다. 절망했다. 국가가 자신을 범죄자, 그것도 대역죄인인 간첩으로 낙인찍은 사실을 절감했다. 범죄 피해자로서 국가에 구조를 요청하면 공권력이 수사관들을 처벌해줄 것이라는 바람은 고사하고 제발 누명을 벗고 싶다는 절실한 소망도 절벽 아래로 처참히 부서졌다.
A는 사형을 구형받고 24시간 수갑을 차는 사형수로 살았다. 조금만 움직이면 수갑은 손목을 조이며 피부를 파고들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가만히 있어야 했는데 얼마 안 가 지쳐 팔이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손목의 피부가 벗겨져 피가 흘렀다. 개처럼 밥을 먹어야 했고, 플라스틱 물통에 쭈그리고 앉아 넘어지기도 하며 용변을 해결했다. 잘 때도 수갑이 조여오는 손목 아래로 피가 흥건했다.
그래도 A, B, C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잔혹한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재판정에서 되뇌었다. 판사들은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골방에서 베껴 쓴 자백은 검찰의 공소장, 법원 판결문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제1심에서 A는 무기징역, B와 C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 10년과 각 7년으로 감형되었을 뿐, 간첩죄를 범한 중죄인으로 대법원에서 1984년 6월 확정됐다. 서울과 춘천 일대에서 암약해온 간첩단이 검거됐다고 신문과 방송을 떠들썩하게 했던 뉴스 이면에 보도될 수 없었던 실화(實話), 믿기 어려운 실체 진실이었다.
교도소에서도 간첩죄인은 특별취급을 받았다. 반체제범으로 분류돼 운동과 급식에서 최하처분을 받는데다 일반수와 교도관 들까지 빨갱이라며 침을 뱉었다. 원망과 체념, 분노와 절망이 뒤섞이며 몸과 마음이 썩어 문드러져갔다. 지옥 같은 세월을 보내고 출소한 후에는 보안관찰을 받았다. 출소날 경찰서에서 온갖 서류를 작성하고 매달 한 일, 만난 사람 등 소소한 것까지 경찰서에 낱낱이 보고해야 했다.
주변의 냉대도 상상 이상이었다. 가까운 이들조차 몹쓸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 멀리했다. 빨갱이와 섣불리 말을 섞었다가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득 찬 사회 분위기에서 더러운 벌레처럼 배척당했다. 간첩, 그 자식과 아내라는 주홍글씨는 돌을 던져도 되는 과녁이었다.
빨간 표지는 세월이 지나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어설프게 제기했다가 친북 또는 종북 논란에 휘말리기 쉬운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 문제는 민주화 이후에도 쉽게 수면으로 떠오르지 못했다. 그나마 2006년부터 약 4년간 활동했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참혹한 조직적 인권유린의 일단을 드러냈다.
A, B, C가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지 24년이 지난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사건 관련자들과 증거를 폭넓게 재조사해 간첩조작을 인정했다. 이를테면 자백을 보강하는 유력한 증거가 된 동사무소 내규집 문건을 B에게 건넸다고 증언했던 당시 동장은 법정에서 허위증언을 했다고 시인했다. 안기부 수사관의 협박에 굴복해 거짓말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육성회 명단은 B가 아니라 안기부 직원이 학교로 찾아가 받아간 것이었다. 불법연행 사실을 숨기려 관련 공문서가 허위로 작성되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피해자들은 2009년 2월 재심을 청구해 1년 만에 재심개시결정을 받은 뒤 서울고등법원에서 2010년 6월 마침내 무죄판결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대법원은 검사의 상고를 기각해 무죄판결을 확정했다. 그러나 슬픈 소설 같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무죄판결 이후에도 조작의 피해자와 가족들의 상처는 아물 수 없었다.
2. 손해배상청구권 시효소멸의 새로운 기준 논란
간첩조작은 일련의 사법절차 안에서 완성됐다.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낸 수사뿐 아니라 검사의 공소제기, 제1심부터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소신과 양심에 따른 제어장치는 없었다. 피해자들을 옭아매 삶을 철저히 파괴한 굴레는 법원의 유죄판결이었다. 여러 공적 기관이 음양으로 관여한 조직적 불법행위로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무고한 이들에게 이제 합당한 배상을 하는 건 문명국가의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하다.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에게 온당한 배상을 하는 특별법 제정 논의가 있었지만 정쟁의 대상이 되면서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피해자들은 각자 알아서 피해구제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A, B, C와 그 가족들도 함께 소(訴)를 제기했고 법원의 판단을 받았다. 사법부는 국가의 배상책임을 얼마나 인정하여 정의의 회복을 꾀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A와 그 가족에 대해서만 일부 책임이 인정됐고, B, C와 그 가족에게는 한푼도 국가가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판결이 확정됐다. 이를테면 B의 아내에게 제1심은 배상액 3억원, 제2심은 2억 4천만원 상당의 배상책임을 인정했지만,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2014년 1월 B와 C, 그 가족 모두에게 국가가 전혀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원심 판결을 파기한 것이다. 2015년 3월 대법원은 환송심에 대한 피해자들의 상고를 다시 기각해 국가의 배상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끝내 확정했다. 사법부는 간첩조작 피해자의 절규에 눈감고 유죄판결을 한 데 이어, 그들이 그간 겪은 끔찍한 고통을 다시 외면했다.
26년 전 조작에 터잡은 유죄판결의 잘못을 법조인만 논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이번 판결의 당부를 가리는 일 역시 법률가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다. 상식과 양심의 문제로 시민들의 공론장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대법원은 왜 그랬을까.
논리적 법 해석에 따른 필연적 귀결이 아니다. 대법원이 근래 태도를 바꾼 것이다. 그사이 법률이 개정된 것도 아니다. 납득할 만한 설명이나 설득도 없이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일부 피해자들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법원의 입장을 변경했다.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으레 국가는 손해배상청구권이 시효로 이미 소멸했다는 항변을 하는데, 대법원이 일부 피해자들의 청구에 대해 그 항변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국가 자신이 불법행위를 저지른 때로부터 5년이 지났으니 피해자들의 권리가 시효로 소멸했다는 게 항변의 골자다. 우리 민법 제766조 제1항에 따르면 불법행위의 피해자는 가해자와 손해를 알 게 된 날로부터 3년 내에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불법행위가 있던 날로부터 10년이 지나도 권리는 시효로 소멸한다(같은 조 제2항). 특히 국가를 상대로 한 청구권은 국가재정법에 따라 5년 안에 행사하지 않으면 사라져버린다. 이런 조항을 원용하는 게 국가의 시효소멸 항변이다.
5년이 훨씬 지났으니 자동적으로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건 아니다. 이런 시효 항변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던 때가 대표적인 예다.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가 무죄 확정판결을 받을 때까지는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다고 보게 된다. 재심을 통해 누명을 벗는 법원의 공권적 판단을 받기 전까지는 감히 국가를 상대로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을 구할 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첩조작이라는 불법행위가 있던 때로부터 5년이 지났다고 해서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그대로 소멸하는 건 아니다.
문제는 그다음 대목이다. 비록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시간제한 없이 무한정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권리행사를 허용할지 쟁점이 남는다. 장애사유가 제거된 때로부터 어떤 상당한 기간 내에는 권리를 행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 상당한 기간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피해자의 권리행사가 지연될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사정이 있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입장이다. 대법원은 종래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의 경우 늦어도 무죄 확정판결일로부터 3년 내에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여왔다.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때로부터 3년 내에 손해배상을 구했다면 국가의 시효소멸 항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법행위 사실을 안 때로부터 3년 내에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는 점에 비춰볼 때, 3년이라는 시간은 큰 무리 없는 제한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종래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시효가 문제될 일은 없었다. A, B, C는 이 기한 내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급심 법원도 장애사유가 사라진 때부터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했다고 판단해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을 배척하고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사건 판결을 내리기 직전부터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무죄 확정판결을 받아 장애가 사라진 때로부터 6개월 내에 소를 제기해야 한다고 했다. 만일 형사보상청구를 했다면 보상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내에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매우 짧은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6개월이라는 새 잣대를 들이대면 B, C와 그 가족의 청구는 전부 기각된다. A, B, C는 재심과 형사보상청구, 손해배상청구를 모두 같은 날 함께 했지만, A가 중간에 이사를 가서 보상결정문 송달을 며칠 늦게 받게 되었다. 그로 인해 A는 형사보상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이 되기 전에 소를 제기한 게 되고, B와 C는 6개월을 며칠 지나 청구한 셈이 되고 말았다.
A, B, C가 국가배상청구를 할 무렵 6개월이라는 기준은 전혀 없었다. 권리행사 장애사유가 사라지고 3년 내에 청구하면 받아들여졌다. B와 C의 사건보다 나중에 대법원에 올라갔더라도 선고가 빨리 난 사건들은 6개월을 넘어 청구한 경우도 국가의 배상책임이 인정됐다. 반면 대법원에 먼저 올라갔어도 아직 선고되지 않았던 사건들은 새로 만들어진 6개월이라는 기준에 따라 줄줄이 원심이 파기됐다. B와 C도 6개월이라는 새 문턱에 걸려 결국 청구가 기각된 것이다.
객관적 장애가 사라진 때로부터 6개월을 넘겨 손해배상청구를 한 피해자는 진정 보호할 가치가 없는 것인가.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들은 무죄 확정판결을 받고 가족관계를 복원하려 애쓰며 소송을 준비했다. 연락이 두절된 가족을 찾아 그간 있었던 일을 알리고 함께 배상을 받자고 권했다. 고립무원의 절망 속에서 이혼을 하거나 C처럼 이 땅에서 도저히 살 수 없어 이민을 떠난 경우라면 관계회복에 시간이 더 걸렸다. 손해를 입증할 책임이 있는 피해자들은 가령 직장에서 쫓겨난 경제적 손실을 참작받으려 재직증명서 같은 서류들을 찾기도 했다. 수소문해 어렵게 자료를 구하는 데 또 시간이 흘렀다. 진저리치게 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소송 기록들도 구역질을 참으며 발췌하고 정리했다. 꼭 소송까지 또 해야 하는지, 국가가 먼저 피해구제를 해주지 않을지 알아보며 망설이기도 했다. 소송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마음먹고 소장을 낼 때면 보통 반년은 족히 시간이 흘렀다. 애초 6개월이라는 제한이 있었다면 당연히 맞췄겠지만 그런 기준은 없었기 때문에 서두르기보다 신중하게 잘 준비하고 싶었다.
소멸시효 제도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오래 영속된 사실 상태를 존중하며, 권리 행사가 없는 데 대한 의무자의 신뢰를 보호하는 반면,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굳이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대법원은, 국가기관이 저지른 비인도적 만행과 그런 조작범죄에 터잡은 유죄판결이 뿌리내린 위법한 상태를 진정 우리 법이 보호할 가치가 있는 굳어진 사실 상태로 본 것일까. 국가는 객관적 장애사유가 사라지면 피해자들이 6개월 안에 손해배상청구를 하리라고 예상하고, 6개월을 넘으면 손해배상을 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국가의 신뢰를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일까. 오히려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이 제도적으로 구제되지 못하면 6개월이 지나서라도 국가를 상대로 민사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예상이 상식에 맞는 신뢰가 아닐까.
괜히 재심을 구했다가 다른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매번 법정에 출석해 무죄판결을 받아낸 피해자들을 ‘권리 위에 잠자는 자’라고 볼 수 있을까. 법원은 형사보상법에 따라 무죄 확정판결의 존재와 구금일수만 확인하면 그대로 액수가 계산되는 형사보상결정을 하는 데도 10개월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6개월을 며칠 넘긴 B, C를 게으른 피해자라고 다시 단죄할 수 있을까.
대법원은 6개월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며 어떤 논증이나 설명을 하지 않았다. 민법상 ‘시효정지의 예에 준하여’ 6개월 내에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단언했을 뿐이다. ‘시효정지의 경우에 준하여’라는 것은 논리적 근거가 되지 못한다. 시효정지에 관한 조항은 전혀 다른 때를 예정하고 있다. 이는 소멸시효 기간만료 전 6개월 내에 미성년자 같은 제한능력자에게 법정대리인이 없는 경우를 전제한 조항이다. 이때 제한능력자가 능력자가 되거나 법정대리인이 취임한 때부터 6개월 내에는 시효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그밖에 부부 사이의 권리나 상속재산에 대한 권리 등과 관련해 시효정지 제도가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국가범죄의 피해자가 나중에 무죄 확정판결을 받는 사례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 그저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제한을 두기 위해 시효정지를 언급한 것이다. 시효정지에 관한 조항이 적용되는 경우는 아니지만 그냥 똑같이 취급하겠다는 일방적인 결론밖에 없다. 사법부도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들의 청구를 걷어차면서 수긍할 만한 이유나 논거를 들지 않은 채 새로운 법을 만든 것과 다름없는 해석을 했다. 마치 신과 같이 한두마디로 6개월이라는 기준을 선언했다. 국민이 지니는 불가침의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헌법상 의무가 있는 국가의 책임이 이런 식으로 간단히 부정될 수 있는가.
3. 배상책임 회피하는 국가, 두둔하는 대법원
만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피해자들은 원상회복을 구할 것이다.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기에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 전보(塡補)는 부득이 금전 배상일 수밖에 없다. 저울의 한쪽 접시에는 국가범죄 행위를, 다른 한쪽에는 돈을 올려놓고 손해의 무게를 단다. 국가범죄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단지 돈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 문제로 둔갑한다. 인권을 유린한 국가의 조직적 범죄행위는 뿌옇게 추상화되고, 손에 잡히는 돈만 센다. 돈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세상이라 저울에 조금만 올려놓아도 금세 균형이 맞는다고 한다.
국가의 인권유린 행위를 먼저 조사하고 사과하며 제1심 판결 후 항소를 하지 않고 배상한 전례들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했다고 보기에 부끄러운 주장을 서슴지 않으며 늘 대법원에서까지 다툰다. 피해가 별 게 아니라며 과다한 배상액이 문제라고 강조한다. 구금되었다가 무죄판결을 받았을 때 지급되는 형사보상금으로 충분하다고, 배상까지는 필요 없다고 한다. 간첩조작 같은 인권유린 행위에 대한 책임은 안중에 없다. 과거 인권유린 사건의 배상액이 너무 많다는 일부 언론기사를 참고자료로 제출하기도 한다. 진지한 반성과 사과는 온데간데없다.
대법원은 이런 피고 대한민국을 꾸짖지 않는다. 오히려 한술 더 뜨며 호응하기도 한다. 국가범죄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는 대법원의 기울어진 저울의 단면을 드러내는 일이 있었다. 인혁당 조작과 직접 얽혀 있는 과거사 사건이다.
1964년 8월 당시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인혁당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D가 인혁당 창당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월북했다고 적시했다. 1975년 2월 법무부장관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발표할 때에도 북괴간첩 D가 인혁당을 조직해 1962년 5월 사업을 보고하고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월북했다는 공식 성명을 냈다.
행방불명된 남편이자 아버지가 엄청난 사건에 연루된 D의 가족은 공포에 떨었다.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D의 월북사실과 북한에서 하는 활동에 대해 알고 있느냐는 조사를 받았고 그후로 형사들이 수시로 찾아오기도 했다. 이민을 가려 시도해봤지만 출국마저 좌절됐다. 친인척과의 왕래도 끊기고 평생 숨어 지내야 했다.
2007년 1월 인혁당사건이 날조된 것으로 밝혀져 피해자 전원이 무죄판결과 국가배상을 받았지만, 월북했다는 D만은 여전히 북한의 간첩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게 반세기가 지난 2008년 2월, D의 장남은 갑자기 국가기관으로부터 아버지 일로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중앙정보부에서 수사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고 무서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정보사령부에서 나왔다는 이는 다짜고짜 아버지가 사실은 북파공작원이었다고 말했다. 국가가 아버지를 대한민국의 첩자로 북한에 보냈다는 것이다. 특수임무 수행 중 전사했다는 내용이 담긴 확인서를 전달하며 자세한 내용은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설령 설명을 들었어도 무엇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종된 D가 북한의 간첩으로 활동하다 월북했다고 알고 한평생 간첩의 가족으로 돌팔매질당하며 지내온 가족은 억울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울화가 치밀다 갑자기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결국 조금이라도 진실을 밝히고 국가의 책임을 묻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
국가는 북파 사실을 인정할 뿐 더이상은 입을 다물었다. 1962년 육군 첩보부대가 D를 포섭하고 북파공작원 특수교육을 시켜 북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대학교수를 지냈지만 좌익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군사정권의 수배를 받고 있던 D는 체포된 뒤 북으로 가든지 아니면 여기서 죽으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D의 임무는 침투 즉시 자수한 뒤 신임을 받아 다시 남파되는 것이었다. 그게 쉽지 않으면 고정간첩으로 잠복해 남한 출신 월북자에게 귀순공작을 전개하라는 명을 받았다.
D를 협박해 강제로 북파했으면서도 월북한 간첩이라는 탈을 뒤집어씌워 인혁당과 북한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활용했다는 게 조작의 실체였다. 그럼에도 국가는 소송에서 적반하장 식의 태도를 취했다. D를 북파한 것은 맞지만 강압적으로 보낸 건 아니라거나 D가 진짜 북의 간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까지 폈다. D가 첩보부대의 북파공작을 역이용해 월북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월북 이후 연락이 끊겨 생사에 대해 아는 바 없다며, 전사확인서는 연락이 두절되었다는 형식적 내용에 불과하다고 했다. 실제 사망시점조차 확인해주지 않았다.
국가의 불성실한 소송행위는 재판부가 나무랄 정도였다. 2010년 5월 제1심 법원은, 간첩조작 행위와 북파 사실을 가족에게도 은폐한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하며, 변론에 드러난 여러 사정을 종합해 D의 아내에게 7억원, 자녀들에게는 각 3억 5천만원의 위자료 배상책임을 지웠다. 항소심 법원도 제1심에서 충실한 심리가 이루어졌다면서 인정된 위자료가 합리적이라고 판시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달랐다. 대법원은 변론을 따로 열지 않으면서도 3년 넘게 시간을 보내다 2014년 2월 위자료 액수가 너무 많다면서 원심을 파기했다. 예외적인 사정이 없는 한 대법원은 사실심의 위자료 산정에 좀체 관여하지 않는다. 불법행위로 입은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 액수는 사실심 법원의 직권에 속하는 재량으로 확정할 수 있다는 게 확립된 법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사건에서는 하급심의 위자료 산정이 지나치게 과다하다는 이유로 파기했다.
확정 판결을 간절하게 기다렸던 D의 아내는 소송 중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대법원의 파기로 피해자들이 실제 받게 된 위자료는 그야말로 현저히 감액됐다. 사망한 어머니의 상속분까지 모두 합해도 자식들에게 인정된 최종 위자료는 2천 5백만원씩이었다. 대통령의 차남이 한약업자들로부터 정치자금 1억원을 수수했다는 기사를 실은 데 대한 명예훼손 불법행위 책임으로 4억원의 위자료가 인정된 1996년 1월 판결에 비견해보면, 부당함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피해자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금액이다. 강제로 북파한 것도 모자라 간첩으로 몰아 한 가정을 파괴한 비극적 사건에 대해 국가가, 우리 사회가 지는 책임의 무게가 기껏 이 정도에 불과한지 의문이 든다.
대법원은, 위자료 액수에는 그 시대와 일반적인 법감정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한계가 당연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 하급심은 손해의 공평한 분담이라는 이념과 형평의 원칙에 현저히 반하는 위자료를 산정했기 때문에 그 한계를 넘었다고 판시했다.
지난 과거는 정의가 회복될 수 없는 시대일까. 지금은 인권을 철저히 유린한 국가범죄를 어떻게 평가하는 시대인가. 대법원이 말하는 일반적인 법감정은 무엇인가. 우리의 보편적 법감정으로는 피해자 가족의 무너진 삶에 대한, 인간의 존엄에 대한 예의를 표하지 못하는 것인가. 법정에서 당사자들을 대면하고 변론을 수차례 열어 고심해 위자료를 정했던 하급심 법원의 판단조차 일반적인 법감정에서 현저히 벗어나 있었던 것일까. 그처럼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 일반적인 법감정이라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는 단지 손해를 전보하고 피해자에게 만족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악행을 제재하고 예방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근대법은 형사와 민사 책임을 분화하는 원칙을 취하고 있지만 민사책임이 현실적으로 불법행위를 제재하는 부수작용을 하는 것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명시적인 징벌적 손해배상이 인정되지 않더라도 위자료 산정의 기준이 되는 여러 요소를 고려할 때 제재 내지 예방 기능도 반영되는 것이다. 판례도 사회에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거나 불법행위로 인한 사회적 파급효과가 클 때 위자료액을 비교적 높게 정하는 추세를 보인다. 국가범죄의 법적 책임을 축소하는 최근 대법원 판결은 위자료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보편법리와도 맞지 않는다.
4. 인권유린 국가 불법행위, 시효배제 입법 필요성
국가범죄 행위는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여태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 최근 밝혀진 정부훈장 수여명단을 보면, 간첩사건을 조작했던 수사관들이 그 공로로 훈장을 보유하고 국가유공자 혜택을 아직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조작하고 날조하는 유전자를 몸속에 담고 있는 괴물은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빈틈을 엿본다. 국가범죄 방지는 현재와 미래의 과제다. 피해자에 대한 합당한 배상을 하는 게 재발방지의 출발점이다.
그런데도 피해자의 아픔을 상쇄하고 국가범죄를 예방할 배상은 현저히 미흡하다. 하루하루 힘들게 버텨야 하는 생존경쟁사회에서 오직 고통받는 것만이 공평함의 지위를 누린다. 피해를 배상받는 것까지 불공정한 일이 되고 만다. 국가폭력의 피해도 그저 개인이 감당해야 할 불운으로 치부된다.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실현해달라는 피해자들의 외침에 대해 지겨우니 이제 그만하라고 답한다. 조직적 국가범죄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경고할 필요가 있는 사건에서 배상액을 논할 때조차 피해자들은 사사로이 횡재를 바라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다 힘들다는 식의 체념이 소수자와 약자를 겨냥해 잔인함을 드러내도 인권을 보호할 책무가 있는 사법부가 이성으로 이겨내지 못한다. 도리어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부정하는 논리를 제공한다. 국가가 인권유린범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지 못할 뿐 아니라 피해자의 손해를 최소한도로 보전하는 역할마저 저버리고 있다.
피해자를 더이상 외면할 수는 없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피해자를 외면하는 것은 국가범죄를 용인하는 일이다. 나와 가족을 미래의 제물로 바치는 셈이다. 입법적 결단으로라도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 이를테면, 법의 존립을 해치거나 헌정질서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내란죄 혹은 외환죄 같은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배제해 형사처벌하는 특례법이 제정되어 있다. 인권을 유린한 국가범죄의 민사책임에 대해서도 시효적용의 예외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국민을 먹잇감으로 삼아 날조를 일삼으며 인권을 유린한 국가의 조직적 불법행위를 특정해 피해자에게 합당한 책임을 끝까지 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국가범죄에 대한 법의 책무를 다할 수 있도록 연대의 손길과 입법적 해결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