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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문광훈 『심미주의 선언:좋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김영사 2015
자기만족적 진정성의 윤리
김남시 金楠時
이화여대 조형예술학부 교수 namseekim@ewha.ac.kr
저자 문광훈(文光勳)에 의하면 이 사회는 “내면적 가치를 의식적으로 배척하면서 동시에 도덕주의적 당위성에 요지부동으로 포박되어” 있다. “개별 보도나 사설은 그렇다 치더라도, 문화면의 칼럼까지 지시와 훈계, 당위와 설교조의 언어로 채워져 있”고, “문학에서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도덕주의적 정언명령과 이데올로기적 집단술어가 지배적”이다. 저자는 이러한 “자기마취적이고 자기강제적인 집단편집증”이, “개항 이후, 더 구체적으로는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사회가 수십년 동안 앓아온 고질적인 사회병리”라고 말한다. “진리든 윤리든 이성이든, 아니면 민족이든 통일이든 ‘좋은 이름’ 아래 행해지는 일의 사회적 강제력이나 도덕적 압박감을 조금씩 줄여가”고,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과도한 사명감과 명분의식, 영웅심리나 도덕적 명령에 대한 자연스런 항체”(431~32면)를 만드는 일이 시급한데, 이 위기가 저자로 하여금 ‘심미주의’를 ‘선언’하게 했다.
저자에게 이 책은, “절박한 마음으로 쓴 실존적 호소다. 그것은 ‘예술을 통해 심미적인 것의 형성력을 갖자’는 요청이고, ‘이 자발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즐거운 자기갱신의 형성력으로 우리 사회의 미진함과 결핍을 조금씩 교정시켜가는 것은 어떤가’라는 하나의 제언이다. 이 제언은, 이것이 아니라면 갈등과 고통을 최소화하면서 현재를 갱신할 수 있는 다른 길은 드물 것이라는, 아니 거의 없는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하나의 정언명령이다. 그리고 이 제언은, 그것이 심미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심미적 정언명령’이라고 말할 수 있다.”(9~10면)
이 ‘정언명령’이 ‘심미적’인 이유는 저자가 사회적 갱신의 가능성을 예술에서 찾기 때문이다. 저자에게 “예술은 삶의 전체 속에서, 온갖 집단주의적 도덕률과 국가주의적 횡포에 대항하면서 보다 높은 진선미로의 길을 향해 ‘비표준화된’ 방식으로 스스로를 갱신해가는 미시적 실천의 비강제적 길”(434면)이다. 여기서 “스스로를 갱신해가는 미시적 실천”의 주체는 사실 예술이 아니라 “심미적 반성의 잠재력”에 기반해 “개인적 자아의 자기갱신적 변형활동”을 수행하는 개인들이다. 이 개인들로 하여금 자기 “삶의 조건을 되돌아보며 성찰케 한다는 점에서 삶을 쇄신”시키는 비강제적이며 윤리적인 힘이 “심미적 경험”이라는 것이다.(59~63면) 저자에게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푸꼬(M. Foucault)조차 “나로부터”(214면) 시작해 “자기의 삶을 만들어”(225면)가는 “자기형성적 실천”(227면)의 이론가로 묶인다.
이런 방식으로 미적 경험을 윤리화하는 ‘심미적 정언명령’이 저자가 비판하는 우리 사회의 ‘도덕주의적 정언명령’과는 어떻게 다른가라는 의문은, 470여면에 달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냥 사라져버렸다. 결국 이 책은 심미주의라는 명찰을 단 자기계발서였기 때문이다. ‘좋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부제도, 보험상품이나 성형외과 명칭을 연상시키는 ‘Life Aesthetic’이라는 영문 제목의 일부도 그렇고, ‘네 삶을 살아라’ ‘가끔, 돌아보자’ ‘불운과 대결하라’ ‘자기를 기록하자’ 등 “심미주의자를 위한 7가지 삶의 원칙”이라는 계명도 그러하며, 매 페이지마다 본문에서 뽑은 문장을 따로 디자인해 경구로 ‘사용’할 수 있게 한 편집도 이런 성격을 분명히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하는 대신, ‘이렇게 살아라’라는 지침을 주는 자기계발서가 모두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진지한 인문학의 외관을 띤 이 두꺼운 책이 자기계발서가 함축하는 개인주의 이데올로기를 ‘심미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는 데 있다. 저자는 정말, 이 사회의 ‘자기강제적 집단편집증’이 “자발적이고 즐거운 자기갱신”이라는 심미주의의 부재 때문이라고 믿는가?
내가 보기에 저자가 말하는 ‘심미주의’는 오히려 우리를 지배하는 자족적 진정성의 윤리를 정당화시킨다. 이 심미주의는 자기성찰적 주체의 내면적 진실과 그가 맞서 있는 허위적 현실이라는 대립 위에 세워진다. 심미주의자에게 인간의 삶은 내적 진실성을 갖춘 개인이 현실의 비진리 앞에서 실패하는 비극적 드라마다. 이 책에 나오는 이태준(李泰俊), 까라바죠(M. da Caravaggio), 백석(白石), 루바쇼프(아서 쾨슬러 장편 『한낮의 어둠』의 주인공) 모두 그런 인물로 그려져 있다. “마음속의 행복”을 향하던 이태준이 “불행한 삶”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언제든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이념과 슬로건과 구호”(317면)이기 때문이다. 까라바죠처럼 “꿈을 추구한 사람이자 이 꿈에 세상의 실체가 있는 그대로 배어들길 바란 사람”은 “자기 꿈의 바로 이같은 진실성에 무너”(346면)질 수 밖에 없고, 백석이 “인간 삶을 구성하는 근본적 몽매와 위선 그리고 허상”(355면)에 대한 “거룩한 슬픔을 담는”(361면) 시를 지은 것은, “이제나 저제나 인간의 현실을 채우는 것은 끝 간 데 없는 모순과 역설과 아이러니”(353면)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혁명적이기에 반혁명적”이던 루바쇼프의 실패한 혁명은, 그가 바꾸려던 현실의 “비루하고 구태의연한 지표면의 타성”(396면) 탓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심미주의자에게는 “슬픔이 늘 세상살이”(330면)가 된다. 슬픔은 심미적 주체의 내면을 채운 진실성이 인간의 실상과 현실의 한계라는 비진리와 맞닥뜨려 생겨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슬픔의 감정은 감정이되 인간의 실상—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인간의 한계를 직시한 데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원히 살지 못하고, 나의 말은 네게 그대로 전달되기 어려우며, 사랑의 밀어는 오해되기 십상이다. 진리는 포착하기 어렵고, 이념은 현실을 이끌지 못한다. 역사는 파국을 거듭하고, 인간은 자연으로 회귀하기 어렵다. (…) 슬픔은 바로 이 편재하는 한계에 대한 직시에서 생겨난 감정이다.”(322면)
진실과 현실, 이념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감지하기에 생겨나는 슬픔, 심미주의자는 이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오직 진실한 것이 아름답다. 그렇듯이 참된 아름다움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모든 진실은 어찌할 수 없는 것들—한계의 영역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진실한 것은 슬플 수밖에 없고, 이 슬픔의 불가항력에 어쩔 도리 없이 아름다움이 녹아 있다”(340면). 이렇게 심미주의자에게 아름다움은 현실의 비진리를 슬퍼하는 내면의 진실성과 결합되어 있다. 바로 “이 슬픔이야말로 모든 심미적 인식의 핵심이고, 아름다움의 고갱이”이자, “삶의 성격에 가장 맞는, 삶의 본성에 질적으로 부합하는 감정”(322면)이다.
이런 심미주의자의 내면적 진실성에 견주어 현실은 불친절하고 폭력적이다. 그는 그런 현실에 맞서는 싸움의 비루함을 견딜 수 없다. 그런 심미주의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서 느끼는 ‘슬픔의 불가항력’을 아름답게 향유하는 일뿐이다. 그 슬픔이 클수록 아름다움은 커지고, 그에 비례해 그의 내면은 더 큰 진정성을 얻는다. 심미주의는 과장된 제스처로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그 현실을 외면하는 탁월한 방식이다. 이런 심미주의자는 심미적 경험을 통해 내면의 진실성을 최고로 고양시킨 후, ‘한계의 영역’인 현실을 상대로 슬픔을 토로한다. 그러고는, 몰려오는 “혁명의 피로”(404면)와 더불어, 우아하게 내면으로 회귀해 “고갈된 기억”(377면)을 되새김질한다. “인간의 모든 실천은 그리워하는 일”(376면)이라고 읊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