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촛불혁명, 전환의 시작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최근 저서로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2013년체제 만들기』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등이 있음. paiknc@snu.ac.kr
이 글은 원래 한반도평화포럼의 교육프로그램 한평아카데미 제3기의 마지막 날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라는 제목으로 강의했던 내용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1) 아카데미 강의는 주로 남북관계 전문가들이 진행했지만, 작년 12월 15일 내 차례가 다가왔을 무렵에는 수강생들도 남북관계에 대한 전문적 논의보다 남녘에서 한창 진행 중인 촛불시위로 더 관심이 쏠린 상태였다. 당시 요지문만 배포하고 발언했던 내용을 글의 모양새를 갖추는 동시에 이후의 사태진전과 나 자신의 추가적 연마를 반영해서 이번에 꽤 큰 폭으로 손질했다. 서술순서를 일부 바꾸었고 제목도 약간 수정했으나 기본적인 논지는 변하지 않았다. 수강생을 포함한 그날의 모든 참석자들께 감사드린다.2)
제목과 달리 본고와 강의 모두 남북관계의 현황을 특별히 다루지 않았다. 시민들이 ‘새세상 만들기’를 주도하는 광장에서 그것이 큰 현안으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때그때 현상으로 드러나는 남북관계와 우리의 현실을 구조적으로 규정하는 남북관계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후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이는 전자에 대한 대응이 일관되고 지혜로울 수 없으며, 얼핏 남북관계와 무관한 듯한 새세상 만들기의 과제들 또한 원만하게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본고의 주장이다. ‘남북관계’를 굳이 주제어의 하나로 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1. ‘촛불’은 혁명인가
현재의 상황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시민혁명’을 말하고 ‘촛불혁명’을 말하는데 나도 동의하는 입장이다. 작년 10월 말께 서울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진 촛불 든 시민들의 시위가 직접적인 동력이라는 점에서 ‘촛불’을 부각하는 것은 적절하다.3) 다른 한편, 어떤 의미로 ‘혁명’이며 ‘시민혁명’인지는 약간의 정리가 필요할 듯하다.
혁명이라 하면 정권의 전복에 그치지 않는 사회 전체의 대대적인 전환을 뜻하는 게 상식인데, 국민의 직접행동에 의해 대통령의 중도퇴진이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이 자동적으로 혁명으로 인정될 수는 없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탄핵소추를 인용(認容)한다 하더라도 이후의 사태가 본질적인 변혁에 못 미치는 ‘미완의 혁명’으로 끝날 가능성이 있는데다가, ‘촛불’이 자랑하는 평화적 시위와 헌정질서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혁명과는 거리가 먼 것 아니냐는 물음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문제부터 살펴보자.
‘촛불’은 분명히 기존의 혁명 개념과 동떨어진 면이 많다. 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새로운 성격의 혁명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모른다. 시민들의 봉기로 정권을 바꾸고 사회적 전환을 이룩한 예로는 한국에서 1987년의 6월항쟁이 있었고, 공산당독재의 종말이라는 훨씬 발본적인 체제변화를 성취하면서도 그 두드러진 평화적 성격으로 ‘벨벳혁명’이라는 이름을 얻은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당시)의 시민혁명도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전두환정권이나 체코의 공산당정권은 모두 자유로운 선거공간을 박탈하여 시민봉기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에 87년체제가 획득한 선거공간은 비록 2012년 이명박정부의 불법적 선거개입에 의해 크게 오염되었고 박근혜정부 내내 ‘점진 쿠데타’ 시도에 위협받고 있었지만, 다음 대통령선거를 포기해야 할 만큼 철저히 폐쇄된 상태는 아니었다. 더구나 2016년 4월의 총선이 ‘점진 쿠데타’ 시도에 일격을 가함으로써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높여놓은 바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대대적으로 출동하여 임기가 남은 정권을 퇴출시킨 것은 독재정권에 대한 봉기와는 다른 차원의 사건이다. 독재체제와 맞설 때보다 어떤 의미에선 대중봉기가 어려워진 면이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그러한 어려움을 주목했기에, 일찍부터 ‘2013년체제’ 건설을 주창하며 87년체제를 극복하는 ‘대전환’을 꿈꾸어왔지만 ‘촛불혁명’과 박근혜의 중도하차를 예견하지 못했다.
바로 그 일을 한국의 ‘촛불혁명’이 해낸 것이다. 대중참여의 규모도 ‘벨벳혁명’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일 뿐 아니라 체코의 ‘시민포럼’ 같은 지도부가 없는 상태에서 질서정연하고 철저히 평화적이며 전에 없이 다양하고 끈질기며 창의적인 거사가 이루어졌다. 이런 너무 ‘착한’ 시위에 대한 불만이 일부 참여자나 논평자에 의해 표출되기도 했다.4) 그러나 ‘촛불’의 평화시위는 원리적 평화주의라기보다 그 현실적 성공을 위해 ‘집단지성’이 선택한 탁월한 전략이라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4)
물론 2016년의 촛불은 87년 항쟁의 재연은 아니고 전혀 다른 유형의 시민혁명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해진 데는 객관적 조건의 변화도 가세했다. 그중 하나는 87년에 일단 성취한 민주화된 헌정질서이다. 이게 없었다면 평화적인 시위는 3·1운동 때도 그랬고 5·18 때 그랬으며 6월항쟁에서도 일부 그랬듯이 당국의 무자비한 탄압을 당했을 것이다. 87년체제 아래서도 평화시위에 대한 강제진압이 물론 있었지만,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과 부정부패로 대다수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을 때도 강권을 휘두를 수 있는 체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촛불혁명을 가능케 한 또다른 객관적 여건은 그사이 발달한 스마트폰 등 첨단 소통기기와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대대적인 확산이다. 2008년 촛불시위 당시에도 뉴미디어가 큰 역할을 했지만 이후 8년이 더 지나면서 이룩된 기술발전과 생활상의 변화는 그때와 또 차원을 달리했다. 이러한 여러 조건들의 토대 위에 3·1운동 이래 백년 가까이 이어져온 평화적 저항운동의 전통과 학습이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된 셈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2013년체제 만들기의 실패로 크게 상심했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게 꼭 불행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당시 야당후보가 집권했을 경우 아무리 준비와 능력이 부족했다 해도 박근혜 대통령보다 더 못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데, 다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을 것이다. ‘박근혜가 당선됐더라면 이렇게 못하진 않았을 텐데’ 하는 이가 대다수였기 쉽고, 그리하여 2016년 총선에 새누리당이 승리하고 2017년 대선에 박근혜가 다시 나와 압승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박근혜씨가 선거운동 기간이나 취임 당시의 화려한 공약들을 대부분 배반했으나 ‘100% 국민통합’ 약속만은 역설적으로 95%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탄핵소추에 따른 직무정지 직전 그에 대한 여론지지도는 4~5%에 불과했고 응답자 90~95%가 남녀노소와 지역 및 세대의 차이를 넘어 부정적인 평가로 ‘통합’되었던 것이다.5) 그뿐 아니라 정권교체가 아니라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시대교체’를 하겠다는 공약도 50% 정도는 달성한 셈이다. 시대의 대대적 교체를 위해 광장의 촛불이 결집하게 만들었고, 초유의 시민행동으로 세상과 참여자들의 삶을 이미 상당부분 바꾸었기 때문이다. 공약의 거창함에 비한다면 50%는 만만찮은 달성률이라 하겠다.
2. 촛불혁명의 전망과 과제
촛불혁명이 ‘미완의 혁명’으로 끝날 가능성은 물론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실패한 혁명과 미완의 혁명, 한계를 지닌 채로나마 일단 성공한 혁명 등을 제대로 구별하는 성찰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
촛불이 국회의 탄핵소추결의를 끌어내고도 만약에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된다면 (그후의 사태가 또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언정) 촛불혁명으로서는 일단 실패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실패는 현재로서 상상하기 어렵다. 헌재 재판관들의 법률가적 상식과 자존심도 무시할 일이 아니려니와, 무엇보다 탄핵과정에서의 시민행동이 이미 ‘대못’을 박은 형국이다. 탄핵가결 후 추운 날씨에도 전국적으로 100만여명이 다시 거리로 나온 12월 10일의 7차 집회는, 232만명이라는 역사상 최대규모의 시위로 국회의 탄핵가결을 강제한 12월 3일의 6차 집회에 못지않은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새해 들어 헌재의 신속한 심의진행과 강추위의 내습으로 참가자 수가 다소 줄기는 했으나 박근혜 퇴진 이외의 그 어떤 결과도 용납하지 않을 기세는 설 지난 뒤에도 확고해 보인다.
‘미완의 혁명’은 좀 다른 문제다. 대표적인 전례로 꼽히는 것이 1960년의 4월혁명인데,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봉기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켰다는 점에서 실패한 혁명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요구한 재선거 대신에 기존 국회에 의한 개헌이 이루어지고 7월의 선거로 민주당이 집권했다가 이듬해 박정희의 5·16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요즘 자주 쓰는 ‘죽 쒀서 개 준다’는 표현을 빌리면, 처음에는 비교적 주인 말을 잘 들을 법한 온순한 개한테 주었다가 결국 진짜 사나운 개가 들어서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촛불혁명이 미완으로 끝나는 시나리오라면 탄핵 후 60일 이내 거행되는 대통령 보궐선거에서 촛불시민들이 요구한 새세상 만들기를 수행할 의지나 능력이 없는 인물이 당선되는 사태일 것이다. 4·19를 돌이켜볼 때 유의할 점은, 개헌이 된다거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미완’의 우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헌 문제는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야당 대통령이 나오더라도 촛불민심에 대한 공감과 인식이 부족하거나 그 과제를 실행할 능력이 없는 인물이 된다면 혼란만 더해질 우려가 있다. 군사쿠데타가 다시 일어날 시대는 아니라 해도, 사실상 군부보다 더 강력한 오늘의 기득권세력들이 그대로 남아 낡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되살리면서 마침내 다음 대선에서 대통령직마저 되찾아갈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6월항쟁 이후의 사태를 두고도 ‘미완의 혁명’과 ‘죽 쒀서 개 주기’라고 말하는 논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자칫 이는 사회변혁보다 정권의 향방에 더 집착하는 이야기일 수 있다. ‘양김’의 분열로 87년체제의 첫 대통령직을 노태우에게 넘겨준 것이 6월항쟁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땅을 칠 일이었고 실제로 개혁작업에 많은 차질을 초래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87년 12월의 선거는 그전에 군부독재세력이 ‘호헌철폐’라는 국민요구를 수용했고 7~8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노동자의 시민권 획득이 시작되었으며 다분히 민주화된 헌법을 이미 제정하고 난 뒤에 열린 선거였다. 따라서 노태우정부도 87년체제의 큰 흐름을 거역하지 못했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면서 민주화의 추가적 진전이 있었다. 이른바 민주개혁세력 진영의 인사들은 이명박·박근혜의 ‘보수정권’이 ‘민주정부 10년’의 성과를 역전시켰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굴곡진 형태로나마 초기의 20년간 진행된 민주화를 야당 집권 10년으로 한정하는 것도 일종의 진영논리다. 이로써 이명박·박근혜가 노태우·김영삼의 ‘보수정부’와 구별해 마땅한 ‘반동’과 ‘역주행’의 시대를 열었던 점이 흐려지는 것이다. 87년체제가 1953년의 정전협정체제와 분단체제라는 과거 군사독재체제의 기반을 공유한 태생적인 한계를 지녔지만 남한사회로서는 일단 대전환을 이룩한 시민혁명의 성과라는 평가도 87년체제 초기 10년의 성과를 인정함으로써만 설득력을 지닌다.6) 따라서 비록 야당이 정권획득에 실패한 선거였지만 87년 12월의 대선은 다가오는 19대 대통령선거만큼 결정적인 사건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새세상에 대한 광장의 요구가 어느정도 의제화되긴 했어도 제도화는 거의 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작업의 대부분—일부는 2월 국회에서 이루어진다 치더라도—을 수행할 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고비인 것이다.
촛불시민들의 요구가 단순한 정권교체를 넘어 그동안 ‘헬조선’을 만들어온 한국사회의 온갖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개막하라는 것임은 명백하다. 구체적인 의제로도 특검 수사 등을 통한 인적 청산, 재벌개혁, 검찰개혁, 선거제도 개혁, 교육개혁, 지방자치 강화 등 수많은 과제가 제기된 바 있다.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광장의 함성만이 아니라 숙의(熟議)와 입법의 과정을 요하는 작업이며 차기 정부의 성격에 결정적으로 좌우되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박근혜 이후 ‘누구’가 아니라, 박근혜 이후 ‘무엇’을 말해야 한다”7)는 지적은 일단 경청할 만하지만, 조기 대선이 확실시되는 현 시점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다.8) ‘무엇’을 해내는 건 결국 사람인데다, ‘누구’를 말하기를 꺼리는 시민사회 활동가나 지식인의 태도에는 ‘잿밥에 눈독을 들인다’는 비난과 특정 후보를 거들거나 깎아내린다는 인상을 피하려는 몸조심이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본격적인 인물론을 펼칠 생각은 없으나, 촛불혁명으로 ‘정권교체’ 프레임 자체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정권교체가 시대교체의 필요조건 가운데 하나임은 두말할 나위 없지만, 나는 ‘2013년체제 만들기’를 내세우던 시점에서도 오로지 선거승리에만 집착해서는 선거승리(〓정권교체)마저 놓치기 쉽다는 점을 강조했었다. 그해 실제로 대선에 실패하고 박근혜정권에 혹독하게 시달리면서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더욱 뜨거워졌고, 관심이 온통 누가 박근혜와 새누리당의 아성을 깨고 선거승리를 이뤄낼 수 있을지에 집중되었다. 대선패배 이후 문재인(文在寅) 민주당 전 대표에 대해 호남 민심이 등을 돌렸던 가장 큰 이유도 그가 정권교체를 해줄 인물이 못 된다는 판단이었고, 그럼에도 전국적으로 그의 지지율 1위가 유지된 것 또한 그나마 가장 알려졌고 지난 대선에서 48% 득표의 전력이 있는 문재인을 빼고는 마땅한 후보가 안 보인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촛불혁명으로 박근혜와 친박계가 몰락하고 새누리당이 분열됨으로써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사실 나는 87년체제하에서 ‘국민통합’이 논의될 때마다 이는 분단한국의 현실을 경시한 이상론이고 현실적으로는 새누리당이 정권을 놓친 뒤에야 수구세력 주도의 수구·보수동맹에서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이 떨어져 나오고 의미있는 사회통합이 가능하리라고 주장해왔다.9) 그런데 일러도 2018년에나 가능하다고 본 이 숙제를 촛불혁명이 단숨에 해낸 것이다. 다시 말해 촛불혁명으로 아직 완수된 것은 아니지만 현 정부와 여당에 궤멸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정권교체를 시민들이 벌써 절반은 해낸 셈이다.
반기문(潘基文)씨의 어설픈 행보와 갑작스런 출마포기로 그 점이 더욱 뚜렷해졌다. 한편으로 문재인씨가 범여권 후보 누구를 상대해도 승리하리라는 전망이 커짐으로써 이른바 그의 대세론이 힘을 받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정권교체를 지상목표로 삼는 프레임이 약화되는 기미도 보인다. 적어도 ‘반문재인연대 빅텐트’ 구상이 치명상을 입음으로써 대세론이 87년체제 속의 정권교체를 향한 대세인지 새세상 만들기를 감당한 대세인지를 검토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과연 문재인이 이길 수 있을까’라고 묻던 상태에서 ‘그렇다, 이길 확률이 높다’는 전망이 커져서 선두주자의 입지가 강화되기도 하지만, ‘이쯤 되면 정권교체는 거의 누가 나가도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과 더불어 ‘그러므로 이제야말로 누가 촛불 이후의 대한민국을 이끌기에 가장 적합한가’, ‘단순히 한표라도 더 얻어 당선되는 게 아니라 누가 촛불공동정부의 구성과 운영에 가장 유능할까’10)라는 데로 관심이 이동하는 조짐도 보인다.
특정 후보에 대한 유불리를 떠나 이는 바람직한 진전이다. 문제는 ‘누구’의 적합성을 어떻게 결정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각 당에는 나름의 당헌과 경선규칙이 있고 연합후보를 위한 정치권의 이합집산도 가능하다. 하지만 시민들이 촛불혁명으로 세상을 바꿔놓았는데 다음 정권의 행방은 낡은 시대와 크게 달라진 바 없는 방식으로 정당과 정치인들이 알아서 후보를 정해놓고 국민은 그중 한명을 선택만 하라고 들이미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촛불시민이 대선후보들의 선정과정에도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는 게 도리인데, 다만 대규모 촛불집회가 그 작업에 적합한 현장은 아니며 집회를 주관해온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도 성격상 그런 작업을 주관하기 어렵다. 이에 한편에서는 “민주 정의 평화 평등의 촛불시민 명예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광장 민주주의’ 의지를 결집할 수 있는 ‘개혁 주체’로서 ‘국민운동체’를 수립”하자는 ‘1천인 선언’(2017.1.18)이 나오고, ‘퇴진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몇몇 개별단체들이 주최하여 중요 정치인들을 초빙해 시민토론을 벌이는 방안도 모색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나 자신은 특별한 묘안을 갖고 있지 않지만, 지난 연말에 발표한 ‘신년칼럼’에서의 다음과 같은 원론적 주장을 되풀이하고 싶다.
어떤 특정 방식이 최선이라고 미리 정해놓는 대신, 이제까지의 촛불혁명이 그러했듯이 다양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실험을 해간다면 시민들 스스로도 종래의 고정관념을 털어내는 자기교육의 과정이 되며 집단지성이 다시금 빛날 것입니다. 촛불집회나 ‘만민공동회’에 주요 후보들을 초빙해서 이야기를 들어볼 수도 있고 규모를 조금 줄여서 한층 차분한 토론과 평가를 해보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경우에나 SNS 등을 통한 후속 토론과 검증이 당연히 따르겠지요.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지금 시작하면 민의가 한결 충실하게 투영되는 방안들이 나올 것이며 직접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를 동시에 강화하고 대의민주주의도 개선하는 선례를 만들어낼 것입니다.11)
3. ‘박정희 모델’ 넘어서기
그런데 ‘누구’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듯이 ‘누구’를 점검할 때 ‘무엇’을 어떻게 해낼 인물인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런 점에서 촛불혁명의 과제로 중요하게 제기된 이른바 박정희 모델의 극복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각에서는 박근혜 탄핵과 더불어 유신시대가 드디어 막을 내렸다고 진단하기도 하고 박근혜가 몰락하면서 드디어 ‘박정희 신화’도 끝장났다고 때 이르게 기뻐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때 이르다’고 하는 것은, 박근혜의 당선 이후 정부에 의해 인위적으로 확산되기도 하던 박정희 신화가 그 딸의 상상을 초월하는 국정실패와 이에 대한 국민적 단죄로 거의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아비의 반의반만 됐어도……’라는 토가 달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12) 더 중요한 것은 ‘반의반도 못 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박근혜에 대한 단죄와 별도로 박정희 및 박정희시대에 관한 한층 과학적인 평가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신화’의 부활도 배제하기 힘들다고 본다.13)
유신시대가 드디어 끝났다는 주장도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유신정권의 망령을 되살리려는 박근혜의 시도에 사망선고가 내려진 것은 분명하지만 엄밀한 의미로 유신체제는 1979년 부마항쟁과 10·26사건으로 붕괴했다. 전두환정권이 아류 유신독재를 6월항쟁 때까지 이어가긴 했어도 87년체제의 정착으로 유신시대를 되살리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부질없는 복원 시도가 혼란을 극대화했을 뿐이다.
다른 한편 박정희식 경제성장 모델로 말하면 이는 지금도 위력을 지녔고 제대로 넘어서지 못하면 박정희 신화의 부활에 일조하기 쉽다. 다만 이 경우에도 정확히 어떤 경제모델을 말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경제성장 추구 자체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속성이므로 그것과 박정희 모델을 동일시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성장의 다양한 경로를 단순화할 뿐 아니라, ‘박정희 모델’을 도리어 쉽사리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일부에서는 ‘신자유주의’와 박정희 모델을 동일시하기도 하는데, 세계적으로는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한 것이 1970년대였다고 하겠으나 그것은 여러 면에서 박정희식 발전국가 모델과 상충하는 것이었다. 박정희시대의 경제성장은 비록 빈부격차를 확대했지만 기본적으로 ‘국민경제’를 단위로 삼은 데 비해, 신자유주의는 지구적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절대시하고 개별 국민국가는 그런 범세계적 계급이익의 극대화에 복무하는 도구의 성격을 강화하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물론 그런 기능 수행에 필요한 만큼의 국민경제 챙기기가 허용되지만). 한국에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이 계기였고, 이른바 진보적 논자들이 잘 인정하지 않는 점이지만 그때도 김대중, 노무현 정권들에 의한 대안모색 노력 없이 일방적으로 도입된 것은 아니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와서야 그것이 한층 순풍을 타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박정희식 개발독재에 대한 정권 담당자들의 미련과 ‘봉건적’ 이권세력의 온존으로 신자유주의와 전근대적 발전주의가 뒤섞인 기형적 경제가 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박정희 모델을 국가주도의 발전국가 또는 ‘개발독재’로 한정해서 이해하는 것이 한결 방불하고 생산적일 듯하다. 그것을 통해 한국은 괄목할 고도성장을 이룬 대신,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양극화와 사회갈등심화 등 오늘날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문제점을 안게 되었다. 그 정확한 양상은 전문가들의 분석에 맡길 일이나, 박정희 모델 성립조건으로 반드시 꼽아야 할—실제로 전문가들이 곧잘 간과하는—사항이 있다. 곧, 독재정치와 경제성장을 결합한 박정희식 개발은 한반도의 분단과 남북 대결상태 그리고 지구적 차원의 냉전체제라는 현실 속에서나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5·16 혁명공약 제1항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는다고 하여 도탄에 빠진 민생을 건진다는 쿠데타의 명분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구호였고, 실제로 집권기간 동안 박정희는 이승만시대에 못지않은 대대적인 ‘빨갱이’ 사냥을 했다. 7·4공동성명 등 남북화해를 지향하는 듯한 조치를 취했지만 모두 철저히 자신의 권력보전과 독재강화에 이용했다.
박정희 모델의 이런 성립조건은 87년 이후에도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 87년체제가 1961년 이래의 군사독재를 종식시켰지만 독재의 든든한 기반을 제공했던 1953년 이래의 분단체제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결정적인 한계를 안고 출발했다는 진단도 그런 뜻이다. 독재청산에 상당한 성과가 이룩되는 가운데서도 경제와 국민의식의 많은 부분에서 박정희 모델이 여전히 위력을 지녔고 드디어는 ‘박정희 향수’에 젖은 세력들의 대대적인 반격을 허용한 것도 바로 ‘박정희 모델 성립조건’의 본질적 지속성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촛불이 요구하는 새세상에 걸맞은 경제·사회 패러다임을 만드는 작업은 87년체제의 그런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는 작업이라야 한다. 실제로 수구보수세력은 87년 이후에도 엄존하는 분단현실을 철저히 의식하고 ‘종북몰이’ 또는 ‘안보위기’ 조성으로 자신의 기득권을 강화해왔다. 그런데도 대안적 비전을 표방하는 많은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아직도 분단 안 된 어느 외국의 ‘선진적’ 모델을 답습하려 한다든가 어쨌든 남한만의 온전한 자유민주주의, 사민주의, 사회주의, 또는 평화국가 같은 각종 선진사회 건설 노력에 몰두한다면 ‘후천성 분단인식결핍 증후군’이라는 야유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식인의 담론도 촛불혁명의 성과로 종북담론이 다분히 희화화되고 약효가 떨어지기 시작한 이번 기회를 제대로 살려야 할 것이다.
4. 개헌에 관하여: 헌법과 이면헌법
촉박한 대선 일정에 비추어 그전에 개헌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조기 개헌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는 실제로 성사가 되든 안 되든 개헌추진을 고리로 ‘빅텐트’ 또는 ‘스몰텐트’를 쳐보려는 정략적 속셈이거나, 설혹 정략을 떠난 충정이라 하더라도 김남국(金南局) 교수의 지적대로 시민보다 국가를 앞세우는 국가주의적 발상이다.14) 어느 경우나 촛불민심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이번 촛불은 1987년과 같은 개헌운동이 아닐뿐더러 굳이 말한다면 호헌운동에 가깝다. 헌법에 명시된 민주공화국의 골격을 지켜내고자 주권자들이 직접 나선 것이며, 무엇보다 “헌법이 안 지켜지던 나라를 헌법이 지켜지는 나라로 바꾸는 한층 본질적인 혁명”15)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촛불혁명으로 세상이 바뀌고 있으므로 헌법도 그에 맞춰 개정되는 게 옳다. 개헌론자들이 고치려는 조항들이 촛불시민들이 지키고자 한 헌법 제1조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다만 어느 조항을 어떻게 고칠지에 대한 토론에 시민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폭넓게 참여해야 한다. 따라서 개헌논의 자체를 무작정 뒤로 미루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후보와 정당마다 자신의 개헌구상과 예상 일정표를 제시하고 선거에 임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헌법을 논의할 때 잊어서는 안 될 점은 대한민국에는 공포된 성문헌법 이외에 일종의 이면(裏面)헌법이 존재한다는 현실이다. 통합진보당 해산판결 당시 헌법재판소 스스로 밝혔듯이 대한민국의 법질서는 “북한이라는 반국가단체와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운용되는 것으로서, 헌법 제1조나 10조, 11조 등이 보장하는 국민의 온갖 권리들도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따라 제약되어왔다. 그 단적인 표현이 국가보안법이지만,16) 더 넓게는 ‘빨갱이로 몰린 자에게는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관습헌법이 작동해온 것이다. 정치권의 개헌론자들이 주로 겨냥하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진정한 뿌리도 실은 이 관습헌법, 이면헌법에 있다. 실제로 87년 헌법은 종전의 5공화국 헌법이나 유신헌법에 비할 때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을 획기적으로 제한했고 그 헌법이 제대로만 지켜졌어도 상당정도의 분권형 정부운영이 가능하도록 했다. 물론 더 손질을 가할 여지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특히 중앙정부의 권한을 대통령과 총리 사이에 어떻게 나눌까 하는 문제 이전에 지방자치를 강화함으로써 중앙정부의 권한을 축소할 필요가 있고, 국민의 기본권을 신장함으로써 정부 전체의 권한을 상대적으로 줄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87년 시민혁명으로도 온전히 없애지 못한 이면헌법을 남겨두고 성문헌법만 고쳐서는 아무런 본질적인 변화가 없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개헌이라면 이 이면헌법의 폐기다. 이면헌법은 성문화된 것이 아니므로 국회에서 개정할 성질이 아니다. 방법은 크게 두가지라 볼 수 있다. 첫째, 남북관계의 개선·발전을 통해 북한을 ‘반국가단체’ 또는 ‘주적’으로서보다 교류·협력 및 궁극적 재통합의 대상으로 보는 국민의식의 변화다. 이는 실제로 87년체제 첫 20년간 상당한 진전을 보이다가 이명박 집권 이래 역진을 거듭한 결과 이번 촛불군중들 사이에도 ‘남북관계 개선’이 화급한 과제로 떠오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간 남북관계의 악화가 분단체제의 다른 한 축인 북한의 행동에 기인한 면을 감안하더라도 남한 내에서 이면헌법의 작용이 남북관계 개선을 방해하고 노태우정부 이래의 성과를 역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둘째로, 국내에서 이면헌법을 믿고 온갖 부정·부패와 국정농단을 일삼는 무리들을 응징하며 “글자로 있던 헌법 제1조를 이젠 온 국민이 노래 부르며, 온몸으로 써내려가고 있는 시대”17)를 열어감으로써 이면헌법을 무력화하는 길이다. 완전한 폐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촛불혁명으로 그 작업에 어느 때보다 큰 진전이 이룩되었다. 탄핵심판의 대통령측 변호인이 촛불군중을 온통 ‘친북좌파’로 몬 발언도 이면헌법의 희화화·무력화를 거들어준 고마운 이바지였다.
5. 촛불과 한반도 그리고 세계체제
1987년 당시에는 ‘민주’와 더불어 ‘자주’와 ‘통일’이 운동권의 주요 구호였다. 그때만 해도 ‘분단인식결핍 증후군’이 한결 덜했던 것이다. 그러나 분단을 의식하되 남북을 아우르는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은 미약한 편이어서, 87년체제가 민주화를 제대로 수행하여 다음 단계로 약진하는 과정이 뒤따르지 못했다. 촛불군중 또한 분단체제에 대한 인식으로 무장했다고는 보기 어렵고 남북관계에 대한 시민들의 문제의식도 광장에서 간헐적으로 표현되는 데 머물렀다. 하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이면헌법을 폐기하고 온전한 민주공화국을 이룩하는 작업에 국내에서의 민주헌법 수호와 남북관계의 발전이라는 두가지 길이 있는데 그 둘이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는 인식이야말로 분단체제론의 핵심이다. 그동안 남북관계의 악화가 이면헌법 수혜자들의 창궐을 방조했던 만큼 이들에 대한 확고한 단죄는 남북관계 개선의 길을 다시 열어놓을 것이며, 이는 다시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정의실현에 소중한 이바지가 될 수 있다. 이처럼 맞물려 전개되는 촛불 이후의 새로운 세상은 남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수호하고 삶의 질을 높여가기 위해서도 남북의 느슨한 결합이나마 우선 도모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세계사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범한반도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변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18)
끝으로 앞서 거론한 촛불의 세계사적 의의에 한마디 덧붙인다. 2016~17년 한국의 촛불혁명에서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시기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소련과 동유럽의 독재정권들이 무너지던 대세를 탄 ‘벨벳혁명’이나 6월항쟁 등 일련의 변화와는 대조적이다. 그때 이후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기후변화를 비롯한 생태계의 위기가 더욱 심화된 한편, 세계적인 자본 과잉, 인공지능·자동기기 등의 획기적 발전에 의한 일자리의 경향적 축소, 국제질서를 관리하던 국가간체제의 쇠락에 따른 국지전의 증대와 난민의 대량 발생 등을 감당할 능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다. 이로 인한 대중의 불만은 더러 ‘점령하라’(Occupy) 같은 민주적 개혁운동을 낳기도 하지만, 미국 트럼프(D. Trump) 대통령의 당선이나 유럽에서의 극우정당 득세에서 보듯 파시즘에 가까운 형태를 띠기 일쑤인데, 바로 그런 대세를 거스른 시민혁명이 한국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는 촛불혁명의 앞날이 그만큼 험난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국제관계나 세계경제의 현황이 모두 87년체제의 틀 속에서의 정권교체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임은 물론, 남한의 국한을 넘어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세계사의 틈새를 찾아내기 전에는 앞길이 안 보이게 되어 있다. 이를 위해 먼저 대한민국에 실력을 갖춘 민주정권을 수립해야 하고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을 통해 한국경제의 활로를 찾는 동시에 동아시아, 나아가 유라시아의 지역협력에서 한반도가 걸림돌이 되어온 현실을 혁파해야 한다. 그럴 때 이미 시작된 천하대란기(天下大亂期)에 그나마 덜 어지러운 삶의 터전을 확보할 수 있고, 세계가 대란의 시기를 넘어 새로운 문명건설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창조적이고 비교적 안전한 거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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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의와 질의응답 및 토론은 마로니에방송(http://www.maroni.co)에서 녹화해 유튜브에 올렸다.
2) 아울러 염무웅 교수의 세교연구소 연초 특강(2017.1.20) 「촛불, 광장과 밀실, 그리고 상상력」과 회원들의 후속토론에서도 많이 배웠음을 밝힌다.
3) 철저히 평화적이라는 점에서 ‘명예혁명’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는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확립한 1688년의 혁명을 영국인들이 the Glorious Revolution(영예로운 혁명)이라 부르고 ‘명예혁명’이라 번역해온 것에 빗댄 호칭인데 영국의 당시 왕조교체 자체는 1640년대의 청교도혁명에 비해 유혈사태가 적었을 뿐 완전한 무혈혁명은 아니었다.
4) 2016년 11월 광장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은 문집 『11월: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삶창 2017)에서도 평화주의에 대한 비판을 더러 만난다. 예컨대 “촛불은 계속 타올라야 한다. 하지만 경찰들이 정해놓은 폴리스라인 안에서, 법원이 지정해주는 집회 공간 안에서, 보수 언론이 상찬하는 평화 프레임 안에서의 환호와 함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혹은 상대를 놀라게 하고 싶으면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로 가서는 곤란하다.”(고동민 「노동자들, 촛불과 만나다」, 57면) 이는 원론상 옳은 말이다. 그러나 촛불시위의 평화적이고 다분히 축제적인 성격이야말로 가장 “상대를 놀라게” 만든 집단지성의 성과 아닐까. “박근혜 너머를 고민하는 기득권 세력에겐 촛불의 민심이 언제 평화집회 프레임에서 벗어날지가 진짜 공포니까 말이다”(같은 면)라는 진단도 절반만 옳다. 한편으로 그들이 4·19와 같은 격렬한 대중행동을 염려하기도 하겠지만, ‘폭력시위 진압’이라는 익숙한 프레임이야말로 그들이 소망하는 바이기도 하다.
5) 언론보도에서 회자된 개략적인 숫자인데, 대통령이 직무수행 중일 때 ‘잘못한다’는 평가와 탄핵심판을 앞둔 상태에서 탄핵을 찬성하느냐 여부는 구별해야 한다. 최근의 여론조사 보도는 대략 15% 안팎이 탄핵을 반대한다고 전하고 있으며 박근혜 퇴진 이후 촛불혁명의 완수를 막으려는 세력은 그 이상이기 쉽다.
6) 예컨대 졸고 「큰 적공, 큰 전환을 위하여」, 백낙청 외 지음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큰 적공을 위한 전문가 7인 인터뷰』(창비 2015), 22~26면 참조.
7) 김연철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한겨레 2016.12.12, 27면.
8) 김연철 교수 자신도 한평아카데미 강의 후 토론에서 ‘누구’를 생각하기 시작할 때라는 점에 동의했다.
9) 예컨대 졸저 『2013년체제 만들기』(창비 2012), 73~75면.
10) ‘촛불공동정부’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주창했던 구호지만, 차기 정권은 누가 당선되어도 여소야대가 불가피하므로 개혁과제 수행을 위해 여야를 뛰어넘는 폭넓은 연정(聯政)이 필요하다는 안희정 충남지사의 최근 발언도 그것과 맥이 닿는다. ‘촛불공동정부’가 딱히 기존 야3당의 공동정부로 국한돼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연정’은 이야기가 다르다. 통념상 대연정은 두 거대 정당의 연립정부를 의미하는데, 안지사가 새누리당이 개혁과제에 동참하는 것을 전제했다고 하더라도 민주당이 새누리당과 대연정을 하는 것은 명분도 약하고 현실성도 떨어진다. 안정된 국정운영을 위해서라면 야3당의 ‘소연정’만으로도 국회 과반수가 확보되며, 바른정당마저 참여하는 ‘중(中)연정’이면 새누리당에 의한 국회선진화법 악용을 막아내고 개헌조차 할 수 있게 된다. 바른정당이 참여하는데 선거에 패하고 개과천선한(?) 새누리당이 참여 못할 바 뭐 있느냐는 논리도 가능하지만, 그런 식으로 입법부 내 반대파의 씨를 말리는 게 건강한 사태인지도 의문이다.
11) 졸고 「새해에도 가만있지 맙시다」, 『창비주간논평』(weekly.changbi.com) 2016.12.28, 같은 날 한겨레에 동시 게재.
12) 적어도 대구지역에서는 박정희 신화가 크게 흔들리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현장보고로 한겨레 2017년 1월 12일치 10면 기사 「“박근혜 싫다고 좌로 안 가… 박정희 얼굴에 먹칠한 게 속상”」 참조.
13) 10여년 전의 글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는데 지금도 기본적으로 같은 생각이다. “박정희에 대한 향수야말로 박정희시대 최악의 유산에 속한다. 기본적인 제반 권리에 대한 무관심, 인간의 고통과 가난에 대한 무감각,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해결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잘살아보세’라는 걸인의 철학 이상의 모든 개인적 또는 공동체적 철학에 대한 무지 등을 고스란히 내장하고 있는 것이 ‘박정희 향수’인 것이다. 이런 유산들은 박정희시대에 대한 적절한 판단이 이루어지고 박정희 또한 그의 정당한 몫을 인정받기까지는 그 병적인 작용을 멈추지 않으리라 본다.”(졸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제14장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생각할까」, 275면)
14) 김남국 「개헌, 국가주의적 지름길의 유혹」, 한겨레 2017.1.16, 27면.
15) 앞의 졸고 「새해에도 가만있지 맙시다」.
16) 졸저 『2013년체제 만들기』, 「한국 민주주의와 한반도의 분단체제」 144~47면 참조.
17) 한인섭 「‘주권자 혁명’ 시대로 행진하기」, 한겨레 2016.12.17, 14면.
18) 본고에서는 별도의 논의를 자제했지만 한반도체제의 변혁을 지향하는 국내의 개혁적 통합노선을 나는 ‘변혁적 중도주의’라 불러왔다. 이에 대한 여러 사람의 논의를 모은 책으로 정현곤 엮음 『변혁적 중도론』, 창비담론총서 5(창비 2016), 그리고 주6에 나온 졸고 「큰 적공, 큰 전환을 위하여」의 제6절 ‘무엇이 변혁이며 어째서 중도인가’(56~63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