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민족문학론의 현재성과 새로움
백낙청 합본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하정일 河晸一
문학평론가, 원광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 『20세기 한국문학과 근대성의 변증법』 『분단자본주의 시대의 민족문학사론』 『탈식민의 미학』 등이 있음. jeonghi@wonkwang.ac.kr
대학시절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창작과비평사 1978)은 내게 일종의 교과서였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에 대해 공부했을 뿐 아니라 문학 자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이 출간된 1978년은 내가 대학에 입학한 해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나의 문학공부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으로 시작된 셈이다. 문학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도 이 책을 통해 틀이 잡혔고, 작가와 문학이론가와 사상가와의 만남도 이 책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문학에 대한 나의 독학을 가능하게 해준 교과서였던 것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다녔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 책에서 무언가 2%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도 민족문학이 어째서 세계문학인지에 대한 설득이 충분치 못하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차에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시인사 1979)를 만났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민족문학이 어째서 세계문학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제3세계 민중의 관점이 제1세계와 제2세계가 이루지 못한, 세계를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통합적 시야를 제공해준다는 전언에서 나는 제3세계 민족문학이 세계문학의 향방을 좌우하는 선진적 문학인 까닭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내가 탈식민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문학공부를 해온 것도 이 책에 빚진 바 크다.
나의 개인적 소견으로는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는 숨은 명저다. 출판사(시인사) 사정으로 너무 일찍 절판되는 바람에 그 중요성이 묻혀버리고 말았지만,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에는 민족문학에 대한 백낙청(白樂晴) 특유의 입론이 번뜩이고 있다. 제3세계론·분단체제론·근대극복론의 싹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는 말이다. 이 책에서 백낙청은 민족주의의 극복을 거듭 강조하고, 남북통일이 전지구적 탈식민화과정의 일부임을 역설하며, 제3세계 민족문학은 민중문학이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런 점에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과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맺고 있다. 사실 이 두 책은 한권으로 나왔어야 옳다. 수록된 글들의 발표 시기도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개정판을 내면서 두 책을 합본한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1970년대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의 전체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백낙청이 제기한 의제들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이번 개정판 출간의 가장 중요한 의의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요즈음 문학과 정치에 관한 논의가 분분하지만, 실감으로 다가오는 얘기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정치에 아예 무관심했던 때보다는 나아진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랑씨에르(J. Rancière)에 기댄 최근 논의들에서 얻을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내게 문학의 정치에 대한 랑씨에르의 구상은 일종의 모더니즘 혹은 아방가르드 변호론으로 읽힌다. 윤리적 체제나 재현적 체제는 부차화하면서 미학적 체제만을 특권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나는 이러한 칸트 식의 삼분법으로 문학과 정치의 상관관계를 풀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2000년대의 한국문학비평은 이 문제에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은 채 랑씨에르를 복창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렇게 된 근본적인 까닭이 문학과 정치에 대한 최근 논의에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70~80년대야말로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다. 그리고 그 논쟁을 주도한 것이 바로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이었다. 따라서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를 제외하고 이루어지는 문학의 정치에 관한 논의는 대지에 탄탄하게 뿌리내리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번 합본개정판에서 우리는 문학과 정치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1970년대 백낙청의 날카롭고도 깊은 안목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문학과 정치에 관한 논의를 여기서부터 시작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지, 어째서 굳이 랑씨에르에 매달려야 하는 것인지 젊은 문학비평가들은 진지하게 자문해보길 바란다. 이것이 이번 합본개정판이 2000년대의 한국문학비평에 던지는 새로운 질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