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50주년 특별기획: 창비에 바란다
다시 현장에서 시작하자
이필렬 李必烈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과학사·화학), 본지 편집위원. 저서로 『다시 태양의 시대로』 『석유시대, 언제까지 갈 것인가』 『에너지 전환의 현장을 찾아서』 등이 있음. prlee@knou.ac.kr
2012년 1월 16일 밀양 이치우 할아버지가 분신자결을 했다. 사흘 전, 교사로 있던 학교에 사직서를 내고 농업과 인문학을 결합한 새 삶을 모색하려던 이계삼(李啓三) 선생의 계획은 이 일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장례를 돕던 그는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 사무국장을 맡았고, 그후 4년 동안 주민들과 함께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으며 한전과 경찰을 앞세운 국가를 상대로 싸웠다. 작년에는 밀양 주민들과 함께 특수공무집행방해죄라는 죄명으로 집행유예 선고까지 받았다. 투쟁 중에 정치가 필요함을 실감하고 녹색당 비례대표로 올 4월 총선에 출마하기로 했다. 작년말에 결국 밀양송전탑 건설은 완료되었다. 신고리 원전 등지에서 생산된 전기도 송전선로를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300여명의 주민이 보상을 거부했고, 이들이 중심이 된 반대대책위와 이계삼 사무국장은 그다음을 준비하고 있다.
처음 창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자고 제안했을 때 이계삼 선생은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며 극구 사양했다. 그래도 서울에 왔을 때 잠깐 보자고 해놓고, 만나서는 두시간 이상 질문을 던졌다.
그가 『창작과비평』을 처음 접한 때는 1991년 대학에 입학해서였으니 꽤 오래전이다. 그해에 『녹색평론』이 창간되었고, 지금 그는 이 잡지의 주요 필자가 되어 있지만, 『녹색평론』은 대학을 졸업하고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창비』는 국문학도였던 그가 보던 유일한 ‘문학잡지’였다. 대학생 시절 그는 『창비』에서 주로 시와 소설을 읽었다. 사회과학 기사가 『창비』에도 실렸지만, 대신 그는 당시에 운동권 학생들이 보던 정세분석지들의 사회과학 기사를 읽었다. 『창비』에 실린 글은 정제되어 있지만 수준이 높아 읽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단다. 당시에 널리 논의되던 창비의 분단체제론은 운동권 필독서인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백낙청, 1994)을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민중민주(PD) 계열이던 그는 분단이나 민족 이야기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어 동의할 수 없었다. 나중에 염무웅 선생이 쓴 고은, 황석영, 김남주 등의 문학에 대한 평론과 권정생 선생의 글을 읽고 나서야 분단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창비의 분단체제론 후속 담론인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론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그는 이미 2004년에 『녹색평론』에 쓴 글(「진정한 현실주의, 절충적 실용주의」, 3·4월호)에서 이중과제론을 절충주의라고 비판한 바 있다. 당시에 교사로 취직한 후 경제사정이 나아져 『창비』를 정기구독하고 있었는데, 새만금 수상도시를 제안한 김석철 등이 참여한 좌담(김석철 박세일 백낙청 성경륭 「동북아시대 한국사회의 중·장기 전략과 단기적 과제」, 2003년 겨울호)을 읽고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이 글을 썼다. 새만금 갯벌을 지키자는 사람들과 온전히 뜻을 같이하던 그는 김석철의 새만금 수상도시론이 본질을 왜곡하고 있고, 창비의 이중과제론이 이 구상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적응이라는 말을 직관적으로 거부한다. 극복하기 위해 먼저 적응해야만 한다면, 적응 과정에서 체제의 압도적인 구심력에 의해 극복의지가 상실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근대극복이라는 이중과제론의 지향점은 타당하지만 적응해야 극복한다는 단계론적 생각이 틀렸다고 보는 것이다. 급진적 생태주의자인 그가 도달하려는 곳은 생태적 전환이다. 그는 이 전환이 파국에 대한 인식과 극복을 위한 실천, 그리고 궁극적 전환이라는 세가지 과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이중과제론의 또 한가지 문제는 실천이 부족하고 인식 쪽에 치우쳐 있는 것이다.
이계삼 선생은 이중과제론을 단계론이라고 하지만, 이중과제론에서도 근대 적응과 극복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하는 것으로 본다. 분단체제 극복도 한반도에 적용된 이중과제인데, 여기서도 적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동시에 극복이 모색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를 부정하는 급진적 생태주의자들에게 근대적응이란 말은 큰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과학기술 비판에서 생태주의로 끌려갔던 나 자신도 ‘적응’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러나 에너지전환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다시 근대 과학기술의 활용이라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적응과 동시에 극복이라는 이중과제가 여기에도 적용된다는 데 이르렀다. 사실 근대 과학기술의 성취를 활용하면서 동시에 극복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과학기술을 거부하고 이 체제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 쉬운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동시대인과 함께 근대 과학기술의 모순을 극복해가려 한다면 이중과제적 사고는 불가피하다는 것이 지금 내 생각이다.
이계삼 선생은 창비의 이중과제론은 거부했지만, 문학을 사랑했던 청년으로서 창비의 문학은 꽤 오랫동안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은 문학 자체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 새로운 작가들을 불신하게 되었고, 읽지 않게 되었다. 작년에 요란했던 문학권력, 표절 논란을 보고는 여러가지로 착잡했다. 우선 그는 진보진영에서 ‘창비=문학권력’을 무슨 공리처럼 받아들이고 공격했던 것 같은데, 방향을 완전히 잘못 잡은 것이라고 본다. 자성 정도로는 어림도 없고, 이 시대에 문학 그리고 한국문학이 무엇인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권력’ 공격은 창비 때문에 한국문학이 시들었다는 식으로 가버린 것 같은데, 말도 안되는 이야기란다. 그는 문인들이 도대체 뭘 했느냐고 묻는다. 밀양 송전탑 같은, 지금 이곳의 현실이 엄청난 문학적 영감을 줄 수 있는데, 이 현실에 언어의 옷을 입히지 않는 문학이 절망적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문학은 제도 안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 있다. 작가들 중 상당수가 대학교수로 일하는 현실도 참 안타깝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아나키(anarchy)적이어야 하는데, 그런 작가들이 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고 문학제도 안에서만 치고 박고 싸운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그의 눈에는 오히려 다큐감독의 영상이나 인권활동가들이 쓰는 글이 훨씬 문학적이다.
그는 창비도 현장이나 논픽션에는 무관심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한다. 창비의 사회문제에 대한 접근이 전문가주의에 기울어져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전문가가 아닌 작가가 문학적인 방식으로 정리해낸 논픽션이 가장 신뢰할 만하다고 본다. 그 속에 인문정신이 깃들 수 있고, 그럼으로써 전문가 중심주의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색다른 시선으로 현장을 보자는 이야기를 하던 중, 교육에 대해서도 전문가가 아니라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문제를 더 잘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와 대화는 자연스럽게 교육문제로 넘어갔다. 교육은 그의 주무대다. 11년간 교사생활을 하면서 그는 전교조, 『우리교육』, 『오늘의 교육』, 전국국어교사모임 등의 활동을 열심히 했다. 교육에 관해서 많은 글을 썼고 책도 여러권 냈다. 현재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한 그의 생각은 “교육불가능” “학교는 의미없는 공간”이라는 표현에서 잘 드러났다. 그는 교사로 있을 때 문제집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게 대학입시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기에 그것이 국어교사에게는 죽음과 같다고 보았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 기후변화, 농업, 평화에 관한 내용과, 좋아하는 시·소설이 담긴 교재를 스스로 만들어서 몇년간 가르쳤다.
이러한 시각에서 그는 창비가 교육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비판한다. 그는 배움을 위해서는 공식적 교육과정보다 잠재적 교육과정이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교육적 만남 속에 있고 무정부주의적인 면이 있는데, 창비의 교육 분야 필자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이 부족하단다. 입시제도나 학교폭력, 교실붕괴를 그저 드러난 현상으로 판단하고 분석하고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국·영·수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보다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배움의 주체인 청소년의 정치적·사회적 권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엎어져 자는 것을 16년간의 학교교육 후에도 청년실업을 겪거나 비정규직이 되는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으로 본다. 창비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든 제도 안에서 해결해보자고 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러나 그의 지금까지 경험으로는 제도를 수정하면 할수록 현실은 더 나빠진다.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제안이다. 예를 들어 청년과 청소년에게 기본소득을 준다고 하면, 이들이 꼭 비싼 등록금을 내는 대학에 갈 것인가? 이들 배움주체가 아마 스스로 질적으로 다른 삶을 설계하게 될 것이다. 지금 아이들은 공교육의 포로가 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친구를 만날 다른 공간이 없다. 부모는 아이를 맡길 곳이 학교 말고는 없다. 국가도 돈 투입할 곳이 학교밖에 없다. 지금 교육문제는 이런 전제 아래에서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인데, 창비도 공교육의 효율성, 학교문화, 입시제도, 교육의 사회적 비용이라는 논의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계삼 선생의 눈에는 창비의 이중과제론, 교육문제에 대한 접근, 교과서 발행, 규모있는 출판사업이 모두 절충주의로 비치는 것 같다.
창비는 생태문제, 에너지 문제를 소홀히 다루지 않았지만 여기에선 적응과 극복의 문제가 첨예하게 부각된다. 과학기술의 이용에 대한 고민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급진적 생태주의자는 원자력발전과 그 부수물인 거대 송전탑을 극복하기 위해서 과학기술, 즉 전기사용을 거부하고 미국의 아미시(Amish) 공동체처럼 살아가는 것을 선호할지 모른다.
이계삼 선생도 밀양 송전탑 싸움에 뛰어들기 전에는 니어링(S. Nearing) 같은 사람의 삶에 끌렸던 것 같다. 그와 가까운 『녹색평론』에 그런 삶이 종종 소개되었으니, 지금까지 그가 『창비』가 소개한 생태, 기후변화, 에너지에 관한 글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밀양 송전탑 싸움을 하는 동안 교육에서 에너지로 ‘업종전환’을 했다고 한다. 전기의 생산과 사용방식, 그것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는 전기사용을 거부하지 않는다. 밀양 주민들도 원자력발전 없이 살아가고 싶지만, 전기 없이 살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기와 에너지를 자급하는 에너지 자립마을을 구상한다. 그런데 원자력 전기는 거부하면서도 전기를 계속 사용하겠다고 하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어떤 전기를 어떻게 생산해서 어떤 방식으로 분배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과학기술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더 어려운 문제도 비켜가지 못한다. 창비는 적어도 이중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런 문제들과도 맞닥뜨려 극복의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인문학과 교육에서 에너지 문제로도 관심을 넓힌 이계삼 선생은 이제 과학기술의 문제와 제대로 만난 셈인데, 에너지에 대한 창비의 문제의식도 눈여겨보겠다고 한다. 그가 긴 대화를 끝내면서 남긴 말은 『창비』가 분단체제나 이중과제 같은 거대담론을 가지고 현실을 바라보는 것보다, 거꾸로 구체적인 문제에서 시작해서 담론에 접근하는 작업을 좀 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현장과 담론의 긴밀한 연결작업을 통해서 더 설득력있는 담론을 내놓으라는 뜻인 것 같다. 창간 50주년을 맞은 『창비』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