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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촛불의 눈으로 한국문학을 보다
새로운 페미니즘서사의 정치학을 위하여
심진경 沈眞卿
문학평론가. 평론집 『여성, 문학을 가로지르다』 『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 『떠도는 목소리들』 『여성과 문학의 탄생』 등이 있음. stariz87@naver.com
1.#성폭력과 한국문학
세계는 지금 할리우드를 발칵 뒤집어놓은 성폭력 폭로 사건으로 떠들썩하다. 거물급 영화 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이 할리우드 여배우들을 비롯해 회사 직원, 영화 스태프 등을 수십년간 성추행 및 성폭행해왔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이런 폭로는 할리우드를 넘어 미국 전역에서 자신들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폭로하는 ‘미투(MeToo)’ 운동으로 번지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사건은 성폭행의 대상이 사회초년생 혹은 초심자에게 집중되었다는 점에서 2016년 한국문단을 떠들썩하게 했던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연상시킨다. 이를 통해 터져나온 폭로와 고백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나이 든-선생인-유명한-남성작가’가 ‘젊거나 어린-제자인-등단하지 않은-여성독자’를 성폭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1 각 분야에 입문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이러한 성폭력 경험이 집중된다는 점에서, 성폭력은 초심자인 젊은 여성의 입사 절차처럼 여겨질 정도다.2 그러나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나이 든 남자가 어린 입문자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스토리는 이미 다양한 서사적 재현물을 통해서,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소문을 통해서, 술자리의 은밀한 성적 농담으로, “이야기의 클리셰”3처럼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익숙하게 소비되어오지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가 왜 지금 이토록 강력한 사회정치적 이슈로 뜨겁게 타오르는가?
지난해부터 이어져온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서 주목되는 건 두가지다. 하나는 성폭력 피해자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커밍아웃이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성폭력 피해에 대한 폭로가 개별적이거나 특수한 방식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보편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성폭력 피해자는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기를 주저한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 피해 여성에게 호의적이지 않은데, 그 이유는 여성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보통의 성경험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 경험을 가까운 가족에게 털어놓아도 “어디 가서 말하지 마라, 네 행실만 의심받고 아무도 네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4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다. 많은 경우 여성의 성폭력 피해 경험이 비밀에 부쳐지고 개별 여성이 감당해야 할 고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순결 이데올로기가 더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이 말 자체가 사어(死語)가 된 지금 이 시점에서도 “깨진 유리 그릇” “걸레” 등의 표현이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여성의 성경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비록 그 경험이 강제적 폭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성폭력 피해 여성의 커밍아웃은, 남성중심적으로 구획되고 위계화된 ‘좋은’/‘나쁜’ 여성의 구분을 해체하고, 나아가 자신들을 비정상으로 낙인찍는 가부장제적 질서 그 자체를 심문하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최근의 성폭력 이슈는 성폭력 피해 여성의 폭로와 고발이 집단적·연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전의 방식과는 확연히 다르다. 여성의 성폭력 피해 사실에 대한 폭로가 집단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강간과 성추행, 성희롱은 몇몇 개인에게 발생하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닌, 오랫동안 한 성이 다른 성에게 일상적으로 가하는 부당한 폭력과 지배의 표현으로 의미화된다. 이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커밍아웃이 쌓일수록 아이러니컬하게도 개별 피해 여성들의 이름이 익명화되고 전체 발화의 효과는 더 강렬해지는 현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개인의 미숙함과 실수의 결과로 여겨지던 문제와 갈등이 사실은 사적인 게 아니라 비슷한 사회적 위치에 처한 많은 여성들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갈등이자 모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이러한 집단성의 경험이야말로, 여성에게 자신의 성폭행 피해 경험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 토대가 된다.
때로 어떤 공통적 경험은 작가의 상상력과 언어를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다. 세월호참사 이후 작가들의 상상력 지도가 달라진 것처럼 성폭력 고발 사건 또한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재현의 방법에 모종의 변화를 가져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작년부터 SNS를 중심으로 전개된 성폭력 고발운동을 연상시키는 강화길의 장편소설 『다른 사람』, 남녀 간의 사랑의 불가능성을 다룬 그의 몇몇 단편들, 근친에 의한 친밀한 성폭력의 문제를 다룬 최은미의 「눈으로 만든 사람」(『자음과모음』 2016년 봄호), 최은영, 천희란의 레즈비언서사, 내면을 거세한 채 사회정치적 탐구 대상으로서 한국사회에서 차별받는 여성의 삶을 표준적으로 제시한 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 등은 분명 이전의 1990년대 여성문학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성폭력 문제에 초점을 맞춘 강화길의 소설을 중심에 놓고 최근 여성문학의 성정치가 갖는 문제 지점을 두루 검토해보려고 한다.
2. ‘어쩌면 사랑’의 논리
여기서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게 있다. 그 남자가 광기에 휩싸여 있었거나 선천적으로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남보다 더 많은 열정과 신명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앞으로 그 남자가 그 여자에게 어떤 일을 하든, 그건 모두 그의 열정이고 신명이고, 어쩌면 사랑이었을 거라는 점이다. 그 일이 어떤 가혹한 것이든 간에.5
김형경(金炯璟)의 장편소설 『세월』(초판 1995)의 일부다. 여기서 ‘그 여자’는 ‘그 남자’가 “어떤 가혹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그의 열정이고 신명이고, 어쩌면 사랑”이라고 말한다. 열정이고 신명이자,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르는 그 ‘가혹한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성폭행이다. 술에 취한 여자 후배를 여관으로 끌고 가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갖고 이후 자신을 피하는 여자 후배를 스토킹하면서 일방적으로 결혼을 약속하는 남자의 행동이 ‘성폭행’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러나 소설에서 이는 성폭행으로 적시(摘示)되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은 주인공 여성이 어떻게 외부의 폭력과 부딪히면서 왜곡된 성정체성을 갖게 되었는지, 나아가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치유와 극복의 방법이 필요한지에 집중한다. 소설에서 제시된 치유와 극복의 방법은 바로 자전적 글쓰기와 ‘세월’이다. 특히 주인공은 “시간이 퇴적층처럼 쌓여 정신을 기름지게 하고 사고를 풍요롭게 하는, 바로 그 세월”을 통해 과거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 남자’ 또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성문화와 성관념의 피해자일 수 있으며, ‘그 남자’의 행위는 왜곡된 방식이긴 하지만 “어쩌면 사랑”일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남자도 피해자’와 “어쩌면 사랑”의 논리는 성폭력에 대응하는 지난 시절의 방식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노동운동, 민족운동, 민주화운동 같은 거대담론의 맥락 속에서 ‘성폭력’ 문제는 직접적·물리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 남성에게 집중하기보다 오히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큰 차원의 억압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일원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피해자 여성의 대립항은 군사독재나 여타 지배세력으로 상정되었으며 남성의 주체위치나 행위성과 연관된 권력은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6 거기에다가 1990년대 여성문학에서 재현된 ‘성폭력’ 문제는 여성-피해자의 불안정한 내면심리에 집중함으로써 사회적 범죄로서의 성격은 탈색된 채 내밀한 사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지극히 주관적인 문제로 간주된 경향이 강하다. 그 해결 또한 사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7 그럴 때 여성의 성폭력 피해 경험은 사건으로서의 구체성과 실체성을 상실한다. 그 대신 폭력적인 외부세계로부터 상처받은 연약한 내면만이 전경화된다. 이들 소설에서 성폭력 문제가 공적 영역과의 연관성을 박탈당한 채 사사화되고 만 것은 이 때문이다.
『세월』을 지배하는 “어쩌면 사랑”의 논리 또한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적 삼각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그것이 성폭력이라도) 사랑하는 여자를 소유하고야 말겠다는 남자, 그런 남자의 열정에 굴복당할 수밖에 없는 여자, 그런 여자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또다른 남자. 결국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연인이 되어 7년간 그 관계를 지속하다가 ‘그 남자’의 외도로 헤어지게 된다. 왜곡된 사랑일망정 이 소설 속 남녀관계는 사랑의 서사 문법(광포한 열정, 굴복,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배신, 이별)을 중심으로 직조된다. 물론 이 “어쩌면 사랑”의 논리가 시종일관 매끄럽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30대 중반이 된 ‘그 여자’는 어린 시절 엄마에게 들었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최초의 성폭행 서사”로 해석하거나, ‘그 사건’이 있었던 1978년에는 ‘성폭력상담소’가 없었다는 사실을 환기함으로써 ‘그 남자’의 “어쩌면 사랑”이 사실은 성폭행이었음을 우회적으로 폭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 여자’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경험을 ‘성폭행’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 대신 ‘그 사건’은 “척락감(拓落感)”(어렵거나 불행한 환경에 빠짐)이라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로 에둘러 표현될 뿐이다.
지금의 관점에서라면 비교적 자명해 보이는 ‘그 남자’의 성폭력 행위를 왜 ‘그 여자’는 끝까지 성폭력이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한국에서는 1993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었고, 1997년에야 비로소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됐다.8 분명한 것은 어떤 행위와 사건을 성폭력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성애 관계를 유지시키는 성별 권력, 사회·경제·문화적 조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구체적인’ 여성/남성의 섹슈얼리티 경험을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분석해야 한다”9는 점이다. 소설에서 ‘그 여자’의 불안정하고 자기비하적인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순결 이데올로기와 이성애 중심의 성차별 이데올로기를 당연시하는 성도덕과 성관념의 한계 안에서, 그리고 남성의 성폭력 행위를 격렬한 구애로 해석하게 만드는 왜곡된 사랑의 서사 속에서 극단적인 수동성과 무기력함을 내면화함으로써 완성된다. ‘그 여자’가 성폭행을 성폭행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데에는 그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3. 불안은 로맨스를 잠식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인정사정없이 거침없는 폭로를 이어가는 트위터리안, 일베를 미러링하면서 막말 배틀을 벌이는 메갈리안을 떠올린다면 아마 과격하지만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며 성폭행 문제 앞에서도 당당할 것 같은 여성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의 도전적이고 적대적인 영(young)페미니스트는, 스스로를 성적 주체로 선언하고 새로운 사랑의 서사를 구축하고자 했던 1990년대 여성문학의 주인공을 떠오르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1990년대 ‘성적 욕망의 주체로서의 여성’ 담론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김별아와 송경아의 소설에 나타나는 젊은 여성의 성적 모험담, 전경린 서하진 차현숙 등의 불륜서사는 지금의 젊은 여성작가들에게 더이상 시도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성은 이제 저항의 도구도 해방의 계기도 아닌, 공포와 혐오의 대상에 불과하다. 모든 여성이 싸잡아서 ‘김치녀’로 호명되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강간, 데이트폭행, 데이트살인, 이별살인, 그냥 무차별적 살인) 기사를 거의 매일 접하는데 어떻게 여성이 남성과의 낭만적 사랑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남자친구와의 섹스가 몰카 동영상과 리벤지 포르노가 되어 인터넷 음란물 시장을 돌아다니는 상황에서 남성과의 섹스는 공포가 아니겠는가? 강화길의 「호수—다른 사람」에 등장하는 다음의 에피소드는 이런 여성의 공포를 잘 보여주는 예다.
“저기,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남자는 그녀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술집에서부터 따라왔다고 말했다. 중간에 말을 걸 틈이 없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남자가 말했다. 그녀의 집은 십오층이었고, 이제 겨우 오층이었다. 그녀는 숨이 막혔다. 남자는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운동을 많이 한 사람처럼 팔뚝이 무척 굵었다. 단단해 보였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자신의 전화번호를 말했다. 남자가 씨익, 웃으며 들고 있던 핸드폰에 숫자를 입력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금 뜨는 번호가 제 번호예요.”10
엘리베이터 안에서 여성을 성폭행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상황에서 이 남자의 행위는 과연 열정적 사랑의 기호로 해석될 수 있을까? 남성의 관점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쫓아가서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행동은 어쩌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용기와 박력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밀폐된 공간에 모르는 남자와 함께 있는 여성의 입장에서 그것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폭력적 행위나 다름없다. 그럴 때 남자의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몸’은 성적 매력과는 거리가 먼, 여성에게 폭력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에 불과하다. 지배와 복종의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작동되는 남성지배적 상황에서 구애와 폭력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예컨대 합의에 기반한 비폭력적 성관계가 때로는 폭력의 형식을 띠기도 한다. 거친 숨소리, 전투적 태도, 강한 저항과 거부, 굴종과 정복 등의 어휘들은 열정적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대중매체에서 재현되는 성관계는 이러한 폭력의 수사학에 익숙하다. 여자의 옷은 자주 찢기고 육체는 함부로 내던져진다. 이것은 난폭한 사랑인가, 성폭행인가? 아니면 불편한 상황에서 원치 않는 남성의 구애에 못 이겨 하룻밤을 보낸 뒤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는 여성에게 그 관계는 동의된 것인가, 강제된 것인가? 최근 젊은 여성작가들의 작품에서 이성애적 사랑이 부재하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재현되는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11 그런 맥락에서 최은영, 천희란, 박민정의 레즈비언서사에서 시도되는 여성 간의 낭만적 사랑 이야기는 어쩌면 남자와의 사랑을 공포로 받아들이는 시대의 불가피한 징후일지도 모른다.
이성애적 관계의 불균등한 젠더관계를 탐구하는 강화길의 일련의 소설은, 사랑의 문법과 표현방법, 행위의 의미가 젠더적으로 불일치하는 상황을 통해 남녀 간의 관계가 낭만적 사랑서사로 귀결되지 못하는 이즈음의 현실을 예민하게 보여준다. 그 중심엔 여성의 불안감이 있다. 「호수—다른 사람」에서 이러한 불안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만연한 현실이다. 전 남자친구에게 데이트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나’,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해 의식불명 상태인 친구 ‘민영’, 남편에게 머리가 다 뽑혀 머릿수건을 쓰고 호숫가에서 빨래를 하는 ‘미자네’, 엘리베이터, 버스, 지하철 등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성범죄에 관한 소문들. 여성에 대한 폭력은 그렇게 익숙한 공간에서 익숙한 대상에 의해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강화길 소설에서 친밀하고 익숙한 존재가 돌연 공포스럽고 낯선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남녀 간의 로맨스를 미스터리와 호러로 바꿔버린다. 겉보기에 완벽한 그 남자는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가?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짐작과는 ‘다른 사람’이면 어쩌나? 강화길의 단편소설에서 이러한 여성의 불안감이 압축되고 집약된 공간은 바로 ‘호수’와 ‘초록색 기와집’이다. 우선 ‘호수’로 가보자.
이미 많은 사람이 오갔다. 그들이 매번 아무것도 찾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단지 민영이 두고 온 것을 찾지 못했을 뿐, 항상 무언가를 건져올리긴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러니까 어디서 어떻게 오게 된 건지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많았다. 목걸이. 귀걸이. 머리카락. 물에 불은 편지. 풀 수 없는 굵은 매듭. 핸드폰. 오르골. 고양이의 뼛조각. 누군가의 옷. 이젠 더는 누군가의 일부였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잡다한 물건들. 이 호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사연을 얼마나 깊이 담고 있는 걸까.(36~37면)
누군가에게 맞아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민영은 의식을 잃기 직전 “호수에 두고 왔어. 호수에”(13면)라는 말을 남긴다. ‘나’는 민영의 남자친구인 ‘그’에게 민영이 ‘두고 왔다는 물건’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그와 함께 호수를 향해 간다. 그 과정에서 소설은 대답하기 어려운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왜 ‘나’는 “예의바르고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유머 감각도 좋아서 분위기를 잘 이끌”(15면)기도 했던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불편한가? 사고가 나기 전날 만난 민영의 팔뚝에 있던 “푸르스름하고 동그란 멍자국”(25면)은 왜 생겼을까? 왜 그는 집요하게 민영이 자신에 대해 뭐라고 얘기했는지를 궁금해하는가? 혹 이 모든 의심이 ‘나’가 겪은 데이트폭력 때문은 아닐까? 도대체 그는 좋은 사람인가, 무서운 사람인가? 소설에서 그의 정체는 그가 호수에서 찾았다고 짐작되는 물건의 정체(“장도리 같아요.” “아뇨, 머리핀처럼 생겼어요.” 14면)처럼 모호하다. 장도리와 머리핀의 거리만큼이나 그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해석의 대상이 된다.
작가는 그의 정체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사랑의 몸짓은 돌연 폭력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사랑의 자취는 때로 폭력의 흔적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에서 호수는 바로 그러한 은폐된 여성폭력에 대한 기억의 저장고다. ‘강간을 당하고, 두들겨 맞고, 발가벗겨진 채로 발견되고, 여자의 거기에서 돌멩이가 후드득 떨어져내리고……’(40면) 호수에 빠진 ‘나’가 순간적으로 떠올리는 이 폭력의 기억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여성폭력에 관한 떠도는 이야기들이자 실제 여성들이 겪은 경험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결말 부분에서 모호하게 제시된 ‘나’의 “해야 할 일”이란 억압된 폭력의 기억들에 저항하는 몸짓인가, 아닌가? 「호수—다른 사람」 속 ‘호수’는 이 모든 질문과 기억, 흔적들을 삼킨 채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요하다. 「괜찮은 사람」 속 ‘초록기와집’ 또한 마찬가지다.
“지난 일요일, 그가 나를 밀쳤다”(『괜찮은 사람』 81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괜찮은 사람」은 「호수—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의 정체에 대한 의문(‘그는 자상한 로맨티스트인가, 아니면 치밀한 연쇄살인범인가’)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높은 연봉의 변호사이자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그’와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맏딸인 ‘나’의 만남은, 여러모로 백마 탄 왕자와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평범녀의 로맨스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벌어진 단 한번의 실수(?) 때문에 이제 ‘나’는 ‘그’와의 로맨스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번 시작된 그에 대한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가 ‘나’를 밀친 것은 실수일까 고의일까. 왜 그는 경기도 외곽에 마련했다는 ‘초록기와집’에 내켜하지 않는 ‘나’를 악착같이 데려가려는 걸까? “무엇이든 정확하게 계획하고 실행하는 그”(101면)가 왜 고장 난 내비게이션을 고치지 않고 길을 잃게 된 걸까? ‘그 집’ 주변에 있는 “폐업한 지 오래된” “도축장”(95면)과 그곳에서 만난 “고기 썩는 냄새”(96면)를 풍기는 남자는 누구인가? ‘그 집’의 창 너머에서 깜빡이는 “동그랗고 붉은 불빛”(99면)은 무엇인가?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한가? 이 모든 불안과 의심은 다음 질문으로 수렴된다. “괜찮은 사람”인 ‘그’와 결혼하기 위해 ‘나’는 어떤 댓가를 치러야 하는가? 「괜찮은 사람」은 신데렐라 스토리에 여성연쇄살인에 관한 잔혹동화(예컨대 「푸른 수염」 같은)를 겹쳐놓음으로써 로맨스서사 이면에 감춰진 여성의 불안의식과 공포감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그럴 때 ‘초록기와집’은 스위트홈에 대한 기대와 ‘푸른 수염’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되는 공간이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강화길의 두 단편소설에서 성폭행 문제는 직접 다뤄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소설은 여성의 이성애적 욕망이 어떻게 좌절되고 불가능해지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성폭행과 여성살해가 만연한 지금의 현실이 문학적 상상력과 재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해준다. 그 징후는 바로 침묵과 마비다. 이들 소설에서 남자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모두 침묵하거나 마비 상태다. 「호수—다른 사람」에서 의식불명 상태인 민영은 “시체”와도 같은 상태며, ‘나’ 또한 전 남자친구에게 맞았을 때 “가만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영과 ‘나’는 자신들의 폭력의 경험에 대해 침묵한다. 「괜찮은 사람」의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그’와의 안정된 결혼생활을 “가만히 있는 것,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그의 아내가 된 자신을 “도축장에 매달린 거대한 가축 하나”(101면)로 상상하기에 이른다. 이제 로맨스는 더이상 호러와 구분되지 않는다. 일상을 공유하고 감정을 교류하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친밀한 폭력은, 예측 불가능성과 그것의 훈육적 특성 때문에 많은 경우 여성의 육체를 위축·마비시켜 극단적 수동성과 무기력의 상태로 몰아간다. 그런 점에서 강화길 소설 속 ‘호수’와 ‘초록기와집’은 이렇게 마비된 여성의 종착지(죽음)이자 그러한 죽음들을 은폐하는 침묵의 도가니다.
4. ‘진정한’ 페미니스트는 없다
강화길의 장편소설 『다른 사람』(한겨레출판 2017)은 이들 단편소설과는 달리 2016년에 SNS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성폭력 고발운동에 대한 급박한 문학적 응답을 고발과 고백의 직접화법을 통해 시도한다. 소설은 데이트폭력 피해자인 주인공 ‘나’(진아)가 자기의 피해 경험, 즉 “그가 나를 때린 횟수, 폭언의 내용, 상처의 정도, 병원 진단서와 사진, 판결 내용까지”(23면)를 인터넷에 올리면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성폭력 가해자이자 연인인 ‘이진섭’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와 법이 여성을 보호하지 않는 현실에서 성폭력 경험의 폭로와 고백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성폭행 고발운동은 피해 여성들의 자경(自警)과 자강(自强)을 위한 고육지책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이러한 SNS상의 폭로와 고백이 두가지 내용증명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하나가 진술 내용의 신빙성이라면, 다른 하나는 진술자에 대한 신뢰다.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비공식적이고 은밀한 사생활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입증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이유로 진술 내용의 신빙성은 물론 진술자의 신뢰성도 보증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페미니즘의 투쟁에서 핵심 과제는 우선 여성을 신뢰할 만하고 경청할 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12 그러나 이 소설에서 ‘나’는 인터넷상에서 갑론을박과 스캔들의 대상이 되면서, ‘꽃뱀’ ‘된장녀’ 그리고 ‘헤픈 여자’ 등으로 낙인찍히게 되고 그에 따라 진술의 신뢰성 또한 상실된다. 『다른 사람』에서 데이트폭력 피해자로서의 ‘나’의 커밍아웃이 자기 존재 증명을 위한 여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런 점에서 당연하다.
성폭력은 “그 행위와 여성의 주체성에 따라 다르게 문제화되는 사회 구성물”13이다. 결국 어떤 사건이 성폭력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그 사건을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결국 ‘나’는 현재의 경험 맥락에서 과거에 여성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소문(‘너저분한’ ‘싸구려’)이나 개인적 미숙함과 실수(‘술 마신 내가 문제다’) 탓으로 돌려졌던 성폭행 문제‘들’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는 은폐된 여성(피해)서사를 폭로함으로써 여성 섹슈얼리티에 관한 고정관념과 통념, 그리고 낡은 이야기를 해체하고 새롭게 재배치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에서 그것은 새로운 서사적 욕망으로 귀결된다.
피해자인 유리는 이제 스스로 증언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유리의 일기장을 복원하는 건, 단지 유리와 김동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밝히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건 하나의 조각이었다.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유리 조각들. 깨지고 버려져 누구도 온전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낡은 조각들의 원래 모습. 나는 그걸 맞추는 중이었다. (…) 김이영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유리의 일기장을 받았다. 그녀가 유리의 일기장을 조심스레 펼쳤다. 바로 이 이야기가 시작된 순간이다. 그렇다. 뻔한 결말이다. 어차피 나는 이야기의 클리셰 같은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일. 그렇게 대단하지도 엄청나지도 않은 사건. 그러나 언제나 존재해왔던 사람. 이것이 나의 방법이다. 누군가에게 끝없이 편지를 쓰는 것, 혼자 책 속에 파묻히는 것,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것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모든 것.(331~32면)
소설에서 ‘나’가 자기 존재를 발견하고 자각하는 과정은 자신이 부정했던 여성들이 자기와 같은 강간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특히 ‘너저분한’ 여자로 소문난 유리가 사실은 강간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은, 성폭력 피해자 여성을 스캔들의 대상으로 소비하고 여성의 성에 관한 고정관념을 반복하는 과거의 왜곡된 서사를 바로잡고 감춰진 진실을 폭로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은 다소 혼란스럽고 두서없는 서술시점과 복잡한 스토리라인, 분노와 자책 사이를 떠도는 강간 피해 여성들의 마음의 연설들을 거쳐, 간신히 새로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될 “하나의 조각”, 즉 죽은 유리가 남긴 일기장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유리 조각들”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한 첫번째 퍼즐 조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혹은 침묵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복원함으로써 남성중심적으로 서사화된 성폭행 피해 여성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일기장은 현재 성폭행 피해 문제를 겪고 있는 김이영에게 전달되면서 또다른 여성(피해)서사로 이어질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러나 “뻔한 결말”과 “클리셰”라는 자기비판적 서술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이야기(『다른 사람』)가 새로운 여성서사로 나아갈지는 의심스럽다. 이 소설이 ‘뻔한 결말’과 ‘클리셰’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 소설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때로 이 소설은 여성에게 필요한 성폭력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이 성폭력인지, 성관계에서 동의와 강제는 어떻게 구분되는지, 친밀한 관계에서의 성폭력이 왜 더 문제가 되는지, 성폭력이 얼마나 끔찍한 범죄인지 등등에 관한 지식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매뉴얼 혹은 프로파간다에 근접한다.
또 하나. 소설에서 ‘나’는 유리와 수진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성폭력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이들과 잠재적으로 연대한다. 그 과정에서 강간 피해 경험이 없는 존재들은 그 연대에서 배제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성폭력 피해자만이 성폭력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가령 유리를 성폭행한 남자가 현규 선배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수진은 현규 선배와의 별거를 선택한다. 이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남자는 결국 여성과 연대할 수 없다는 뜻인가? 의문은 계속된다. 완결되지 않은 비문들과 정돈되지 않은 단상들의 나열은 ‘나’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려는 작가적 노력인가, 채 여물지 않은 사고의 흔적인가?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석연찮은 의문을 오로지 작가적 역량의 미숙함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단선적인 진단이 될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지금의 페미니즘운동이 안고 있는 어떤 문제의 징후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강화길의 소설은 한편으로는 영페미니즘운동의 활력을 반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활력에 비례해서 늘어나는 논의의 소박함과 단순함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 중심엔 ‘피해자중심주의’와 ‘페미니스트 신원조회’가 있다.
우선 피해자중심주의란 강간 피해자의 경험은 축소하고 가해자의 언어만을 편향적으로 신뢰해온 오랜 관행을 경계하고, 상대적으로 소외되어온 피해자의 주장에 귀 기울이기 위해 대안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몇몇 페미니스트들이 지적한 것처럼 피해자중심주의는 성폭력 문제를 필연적으로 ‘성폭력 가해자 남성/성폭력 피해자 여성’이라는 오랜 젠더 이분법적 구조로 수렴시키고14 여성의 정체성을 오직 ‘피해자’로만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재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15 다 같은 성폭행 피해자라는 사실만으로 이전의 모든 갈등과 대립이 해소되어 하나의 대안적인 여성연대를 구성하게 되는 『다른 사람』의 결말은 이런 맥락에서 문제적이다. 자기주장의 정당성이 피해경험 여부를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다는 이 소설의 논리는 그 자체가 폐쇄적인 정체성 정치의 일면이다. 소설에서 이러한 피해자중심주의는 적대적 세대론과 결합되어 ‘젊은’ 여성의 정체성을 이중으로 피해자화한다. 그러나 주체를 설명하는 목록은 실제로는 얼마나 길고 다양한가? 심지어 『다른 사람』의 ‘나’조차도 따지고 보면 단순히 피해자로서의 정체성만 있을 리 없다. 작가는 ‘나’에게서 ‘비트랜스, 이성애, 영(young), 페미니스트’ 등등의 복합적 정체성16을 보지 않는다. 사실 피해자로서 여성은 비록 가시화되지는 않더라도 흔적, 증상, 침묵의 형태로 서로 교차하는 정체성‘들’을 동시적으로 갖는다. 그러나 이 소설은 여성을 성폭행 피해자로서만 상상한다. 주체에 대한 그러한 단선적 상상은 역설적이게도 성폭행이 이루어지는 복잡한 사회경제적 맥락을 거세한 채 성폭행 문제를 오직 성폭행 피해 당사자의 문제로만 제한하는 원치 않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성폭행 피해 여성만이 성폭력 문제를 말할 수 있고 이에 저항할 수 있다는 이러한 소설의 논리는, 순정한 윤리적 주체에 대한 상상력을 촉발시킨다. 이는 지난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내부에서도 종종 발견되었다. 성폭력 피해 호소자의 고백에 근거해 끊임없이 ‘진정한’ 페미니스트를 신원조회하고 그런 페미니스트만이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만 간신히 자기 자신을 정당한 주체로 상상할 수 있는 이즈음의 네티즌 심판관을 떠올리게 한다. 문제는 진정한 페미니스트 신원조회가 한편으로는 여성들 사이에 배타적 차이를 설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여성공동체 내부의 차이를 삭제하는 이중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은 결국 폐쇄적인 자기만족적 게토로서의 여성 공동체에 대한 상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동일성과 차이의 논리를 통해 배타적인 동성사회적·남성중심적(homo-social=homme-social)인 내부를 구성하고 이를 근거로 여성을 배제하는 전형적인 여성혐오 논리의 전도된 거울상이 돼버릴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페미니즘서사의 정당성은 서술 주체를 재현 대상과 동일시함으로써 획득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동일시에 대한 상상력이야말로 대상 자체의 실체성을 삭제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니 ‘진정한 여성’17이 없는 것처럼 ‘진정한 페미니스트’도 없다.
강화길의 소설은 성폭력 고발사건으로 전면화된 최근의 급박한 페미니즘적 이슈에 작가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발언해야 한다는 요청에 대한 절박한 응답의 한 사례다. 그것은 문학이 폭력적인 여성혐오적 현실에 더이상 눈감아선 안 된다는 절박한 자각의 소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입의 방식이 현실에 대한 즉자적 반응의 방식이어선 곤란하다. 어쩌면 지금 중요한 것은 성폭력 사건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게다가 비록 성폭행 사건과 성폭행 피해자가 ‘어디에서나 존재하고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클리셰”와 “뻔한 결말”이 소설적 “방법”이 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여성혐오적 현실에 대한 생경한 반영에 그치기보다 재현의 대상과 재현 주체 사이의 거리를 인정하고 재현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성폭력의 현실이 있고 문학은 그것을 전달해야 한다는 식의 사고를 넘어서지 못하면 문학은 단순한 사건보고서나 일기, 매뉴얼의 수준에서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익숙한 세계를 동어반복하기보다 내가 모르는 나 바깥의 어둠에 한줄기 빛을 비추려는 시도야말로 새로운 페미니즘 주체 위치들을 상상하고 실현하는 문학적 출발점이다. 페미니즘서사의 의미있는 문학적 공간은 그럴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창조적인 여성적 언어의 집적과 구축이야말로 우리를 “지금까지 아무도 들어가본 적이 없는 그 거대한 방”18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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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입시생에서부터 등단 준비생, 갓 등단한 젊은 시인, 출판계 젊은 여성 편집자에 이르기까지 문단 안에서 ‘문학의 이름으로’ 광범위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지속되어온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고발한 『참고문헌없음』(참고문헌없음 준비팀 엮음, 2017)은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가 성별, 경력, 사회적 지위, 나이 등에 따라 위계화된 관계 안에서 만들어져왔음을 잘 보여주었다.↩
- 이에 대해 오혜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건 어떤 분야든 젊은 여성이 사회에 진입할 때 겪는 성폭력의 경험이 그야말로 ‘보편적’이고 ‘구조적’이라는 뜻이다.” 오혜진 「‘페미니스트 혁명’과 한국문학의 민주주의」, 『참고문헌없음』 240면.↩
- 강화길 『다른 사람』, 한겨레출판 2017, 332면.↩
- 김소연 「가해자의 리그에서」, 『참고문헌없음』 191면.↩
- 김형경 『세월』 1권, 사람풍경 2012, 415면.↩
- 신상숙 「젠더, 섹슈얼리티, 폭력: 성폭력 개념사를 통해 본 여성인권의 성정치학」, 『페미니즘연구』 제8권 제2호, 2008, 112면. 이혜령 「빛나는 성좌들: 1980년대, 여성해방문학의 탄생」, 『상허학보』 47집, 2016, 440면에서 재인용.↩
- 예컨대 조경란의 「불란서 안경원」(1996)이나 하성란의 「악몽」(1999) 같은 소설에서 성폭행은 다소 모호하게 서술되거나 그러한 상황에 직면한 여성 또한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한다. 혹은 신경숙의 「배드민턴 치는 여자」(1992)에서처럼 여성은 성폭행을 당한 뒤 일시적이나마 욕망의 주체이고자 했던 자신을 학대하는 자기징벌적 태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내면의 상처를 ‘검은 선글라스’로 가린 채 세계와의 소통을 완강히 거부하는 「불란서 안경원」 속 ‘그녀’, 가해자로 짐작되는 남성을 유혹한 뒤 등에 가위를 꽂음으로써 개인적 차원에서 복수극을 완성하는 「악몽」 속 ‘여자’, 성폭행을 당한 뒤에 사면이 막힌 포클레인 안에 들어간 다음에야 비로소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짓는 「배드민턴 치는 여자」 속 ‘그녀’. 이들은 모두 성폭력 문제를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적인 차원에서 해결하거나 자폐적 영역으로 도피함으로써 회피하고자 한다.↩
- 권김현영 「여성주의 인식론과 반성폭력 운동: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 이미경 외 지음, 『성폭력에 맞서다』, 한울아카데미 2009, 247면.↩
- 변혜정 「성폭력 ‘경험들’에 대한 단상: 성폭력 행위와 피해 의미의 틈새」,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 변혜정 엮음, 『섹슈얼리티 강의, 두 번째』, 동녘 2006, 179면.↩
- 강화길 「호수—다른 사람」, 『괜찮은 사람』, 문학동네 2016, 34~35면. 이하 본문의 인용은 면수만 표기.↩
- 어쩌면 이는 사랑에 관한 논의가 관념적 유형(ideal type)으로만 얘기되어온 것에 대한 저항 혹은 그러한 방식의 파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앞으로 세분화되고 다양해진 개별 사례들의 문학적 집적을 통해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는 지금보다 더 정교하게 의미화의 영역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김명남 옮김, 창비 2015, 19면.↩
- 변혜정, 앞의 글 188면.↩
- 이러한 젠더 이분법이 반성폭력운동을 비롯한 페미니즘운동의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은 이미 제기된 바 있다. 백지연 「페미니즘 비평과 ‘혐오’를 읽는 방식」,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25면 참고.↩
- 피해자중심주의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오혜진의 앞의 글과 권김현영의 앞의 글, 권김현영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 허프포스트코리아 2017.3.14. 참고.↩
- 루인 「혐오는 무엇을 하는가」, 윤보라 외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현실문화 2015, 194면. 이 글에서 루인은 구분과 배제의 방식을 통해 비트랜스 여성(소위 이성애자 여성)의 범주를 구축함으로써 비트랜스 여성을 투명하고 자연스러운, 그래서 동질적인 범주로 상상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유한다.↩
- 이 질문은 ‘누가 여성인가’라는 트랜스섹슈얼의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1970년대 트랜스섹슈얼 레즈비언 가수이자 활동가였던 베스 엘리엇이 1973년 레즈비언 페미니즘 학술대회에 참석하려고 하자 페미니스트들이 그/녀를 ‘진짜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쫓아냈던 사건은, 한때 페미니스트의 트랜스포비아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페미니즘운동 내부에서 여성의 범주 문제는 이렇듯 상당히 복잡한 역사적·사회적 과정을 거쳐서 제기되어왔다.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수잔 스트라이커 『트랜스젠더의 역사』, 제이·루인 옮김, 이매진 2016, 158~72면 참고.↩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이미애 옮김, 민음사 2006, 1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