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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위기 속의 비평과 시의 미학적 윤리
2010년대 시인들의 ‘시의 파레시아’
이성혁 李城赫
문학평론가. 평론집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 『미래의 시를 향하여』 『모더니티에 대항하는 역린』 등이 있음. redland21@hanmail.net
1. 문학의 위기와 삶의 위기
비평문을 쓸 때마다, 비평가로서의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이 자문은 비평가는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이어야 하는지 묻는 일이기도 하다. 비평(criticism)의 어원이 위기(crisis)라고 하니, 비평가는 우선 위기를 예민하게 감지해야 하는 사람이겠다. 위기는 사건에 의해 드러난다. 사건은 어떤 미래도 미리 주어져 있지 않는 상황, 즉 위기를 촉발한다. 그 위기의 시간에서 주체성의 문제가 불거진다. 위기가 벌려놓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주체는 어떠한 보증도 없이 자신의 주체성을 스스로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이 예민한 감성으로 세상과 주체성의 위기와 접촉하고 그 위기를 통해 구성되거나 해체되는 주체성의 모습을 형상화한다면, 비평가는 자기 시대와 작품에 표현되어 있는 위기를 들추어내고 주체성을 문제화하면서 그 위기와의 대결에 참여한다.
그런데 한국문학계에서 위기 담론은 ‘문학’에 맞추어 전개된 감이 있다. 결국 예전의 문학 또는 (근대)문학 자체가 더이상 지속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논의가 맞추어져 있었다. 물론 그러한 논의가 의미 없다고 할 순 없는데, 문학에 대한 발본적인 문제제기와 토론 속에서 문학은 좀더 젊어질 수 있고 습성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 국면 속에서 계속해서 돌출해왔던 ‘문학의 위기’ 역시 문제를 설정하고 그 위기와 정면으로 대면하고자 하는 주체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할 것”1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한영인(韓永仁)의 표현을 빌리면 ‘문학+성(城)’ 안의 논쟁이어서, 마치 신-구 논쟁처럼 논의가 전개되고 낡은 문학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문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느냐 마느냐 식으로 흘러갈 위험이 있었다.
문학의 자율성은, 문학이 자본주의 사회와 국민국가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요즘 한국의 상황에서는 사회적 갈등과 위기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알리바이로 변조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한영인은 지금의 한국문학의 위기에 대해 “문단을 둘러싼 각종 추문으로 인해 ‘(한국)문학’ 자체가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위기에 처하고 만 것”2이라며 이전의 주체성을 새로 정립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위기와는 유를 달리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 지탄은 사실상 문학 자체라기보다는, ‘문학+성’을 지키고 그 속에서 안주하고자 하다가 그만 어떤 면이 부패해버린 문학제도의 상태에 대한 것일 터이다(‘문학+성’ 바깥에서 글쓰기에 대한 욕망은 더 증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문학비평이 결국 그러한 성을 계속 지키기 위해 기능했다면, 현 상태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문학사가 위기의 한복판에 있다면, 이 위기는 훨씬 더 보편적인 위기의 부분 형상에 지나지 않는”3다고 말한 바 있다. 문학비평은 문학의 자율적 장 안의 문학을 지키기 위해 문학의 위기를 의식하는 것을 넘어 ‘문학+성’ 바깥의 세상에서 전개되는 ‘보편적인 위기’—삶의 위기—를 더욱 의식할 필요가 있다. 문학을 세상의 위기와 연결하여 사고할 때, 문학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길도 열릴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비평은 자신이 지닌 실천적 성격(정치성)을 스스로 의식해야 한다. 비평은 시단의 지형도를 설명하면서 교통정리를 하는 글쓰기만이 아니라 다른 장르의 문학처럼 삶의 위기에 맞서고자 하는 실천적 글쓰기이기도 하다.
2. 세대론과 냉소적 비평을 넘어서
비평의 정치성에 대해 말을 꺼내면서, 한국 시비평에서 적잖이 보였던 어떤 경향—비평이 문학장 내부에서의 인정투쟁적인 세대론으로 빠지는 경향—에 대해서 언급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4 세대론에 따르면 시사(詩史)는 문학장 내부의 세대교체에 따라 설명된다. 그래서 시사는 벤야민이 근대의 시간성의 특징으로 든 ‘공허하고 텅 빈 시간’을 따라 흘러가는 역사가 된다.5 이러한 인정투쟁에 따른 세대론은 문학의 위기 담론과 마찬가지로 결국 ‘문학+성’의 안과 밖의 경계를 공고히 하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6 신세대가 자신의 문학적·정치적 방향을 뚜렷이 의식화하고 구세대의 문학과 투쟁한다면 인정투쟁은 긍정적인 결과—문학의 쇄신—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신세대의 투쟁이 문학장 내의 중심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인정투쟁이라면 공허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 투쟁에서는 어떤 신세대가 문학장의 중심이 되면 또다른 신세대가 등장하여 문학장의 중심을 향해 이전 세대와 투쟁하는 식으로 문학의 중심 세대 교체가 계속 반복될 뿐이다.
세대론이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2000년대 시비평에서는 문학적·정치적 자의식이 결여된 채로 지나치게 세대론이 내세워졌다. 그런데 최근 발표된 박상수(朴相守)의 글(「발칙한 아이들의 모험에서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은, 뛰어난 분석과 서술의 전개를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대론을 비평 전면에 내세우는 것으로 보여서 씁쓸했다. 박상수는 이 글에서 시적 주체의 “윤리적 모험”(283면)을 감행한 2000년대 시인들을 같은 세대로 묶고는, 주로 2010년대 중반에 첫 시집을 낸 시인들을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에 따라 시를 쓰는 세대로 특징화하여 대립시킨다. 박상수가 비판하는 세대는 후자다. 그는 후자의 세대를 대변하는 비평가로 든 양경언(梁景彦)에게서 “2010년대 시 이외의 다른 것들을 모두 지워버리거나 서둘러 비판하면서 자기 세대의 감각과 현실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294면)을 감지한다. 또한 시의 사회적 실천과 연대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양경언의 비평은 “저 오래된 ‘문학적 진정성’ 추구의 또다른 버전”이며 그 비평에서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시에서 힘겹게 얻어낸 ‘입체적 개인’은 또다시 사라지고 만다”(293면)는 것이다.
박상수는 이 글의 전편 평론(「기대가 사라져버린 세대의 무기력과 희미한 전능감에 관하여」, 『문학동네』 2015년 여름호)에서 사회학적 계급론(부르디외)을 통해 2000년대 이후 시단에 등장한 세대를 흥미롭게 정리한 바 있다. 문학장 바깥의 한국 사회·경제 변화와 계급론을 적용하여 2000년대 시인들을 분류하고 설명하는 그 글의 논의 방식은 신선하기까지 했고 우상파괴적인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현 자본주의에 적용하기에는 다소 낡은 계급론을 거칠고 자의적으로 현 시단에 덮어씌웠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었다. 이에 양경언은 박상수의 논법에서는 “시가 새로운 화법을 발명할 때마다 개시하는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애초부터 차단하는 결론에 이를 수 있는 위험에”7 처한다고 비판하는데, 그것은 박상수가 스스로의 위치를 시적 실천의 동료라기보다는 (다소 독단적인) 사회학적 설명가로 위치 짓는 데 대한 불만이기도 했다. 이러한 양경언의 비판을 받아들여서인지 박상수는 후속 평론에서 계급 개념을 완전히 포기하지만, 다른 기준—‘윤리적 모험’이냐 ‘윤리적 책임감’이냐—으로 세대론을 전개하면서 양경언의 비평을 그 세대론으로 환원하여 비판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전편 평론에서 보여주었던, 문학장 바깥을 통해 시단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마저 그는 저버리고 만다.
박상수가 양경언 등의 ‘윤리적 책임감’ 세대에 대해 가한 비판의 요체는 “아무리 정교한 비평적 논리로 2010년대 시의 정치성과 운동성을 독특하게 조명한다고 해도 결국은 이미 전제된 ‘일상 회복’, ‘타자-연대’, ‘공동체 재건’을 위한 순기능적 효용성이 당위적 목표로 전제”(290면)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타자-연대’를 지향하는 모든 시적 시도는 ‘아무리 정교하게 비평적 논리’를 펼쳐도 “결국” “오래된 ‘문학적 진정성’”(290면, 293면)으로 회귀하게 된다. 박상수의 이 글은 양경언을 향한 비판이 핵심이지만, 그의 비판논리는 시의 ‘타자-연대’에의 지향을 긍정하는 나에게도 문제적으로 다가왔다. 박상수는 ‘문학+성’의 바깥으로 나가서 타자와 연대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와 비평적 담론을 ‘뻔하거나 협소할 것’이라고 ‘전제’함으로써 미리 봉쇄해버린다. 이러한 부당전제는 ‘윤리적 책임감’에 따라 ‘타자-연대’를 수평적으로 지향하는 시는 수직적 차원의 반항을 전개하는 ‘반역적 개인’을 “그냥 통과”(290면)하게 됨으로써 2000년대 시의 ‘입체적 개인’을 놓치고 평면화될 것이라는 이미 ‘결정된’ 결론을 낳는다.8
그런데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우리는 박상수가 “2010년대의 시인들이 무기력이나 무능감을 드러내면 안 되는가?”(293면)라고 항의했듯이,9 거꾸로 ‘2010년대 시인들이 문학적 진정성을 추구하면 안 되는가?’라고 물어볼 수 있다. 박상수는 안 될 건 없겠지만 그러한 추구를 통해 씌어진 시는 미리 예상되는 전개를 보일 것이며 재미없으리라고 미리 ‘전제’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박상수가 비판하는 순환논리이다. 사실 박상수의 이러한 논리는 한국문학사에서 ‘참여문학’에 대한 예술파의 ‘오래된’ 비판을 상기시킨다. 물론 윤리적 책임감이 좋은 시를 자동적으로 낳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리고 윤리적 책임감이 없다면서 특정한 시를 가치 절하한다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우려 차원이 아니라, 2010년대 시가 추구하는 ‘문학+성’ 바깥과의 연대에서 시의 새로운 가능성과 의의를 찾으려는 시도에 대해 세대론의 혐의를 씌우고는, ‘결국은 뻔한 결과에 빠질 것’이라는 냉소적 태도를 보여준다. 어떤 세대론의 강박이 박상수로 하여금 2010년대 중반의 시를 ‘윤리적 책임감’이라는 협소한 틀로 규정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세대론 비평’은 특정 시간대의 다양한 시를 하나로 묶어서 그 특성을 설명한다. 그러한 비평은 현 상황의 위기에 대응하는 비평이 아니라 문학사적인 정리를 위한 비평, 또는 ‘문학+성’ 내부에서의 ‘정치적’ 비평이다. 그보다는 우리 시대 시인들이 ‘문학+성’ 안팎의 위기와 그 위기를 드러내는 사건을 어떻게 체화하고 형상화하는지, 그 위기를 어떻게 미학적 가능성으로 전화(轉化)시키는지 살펴보는 것에서 한국 시비평은 더 생산적인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한국의 문인들은 근래에 불거진 삶의 위기에 대해 고투했다. 특히 세월호참사는 문인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참사 직후 독일에 있던 허수경 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라고 묻고는, 그 사건에서 “무의식 뒤 모든 배반의 손들이 합작해서 판/무덤”(허수경 「누군가 물었다」,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 실천문학사 2014)을 감지했다.
사건은 삶의 위기를 드러내고 주체성의 변화를 촉발한다. 세월호참사가 그랬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은 비통함의 정동을 통과하면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으며, 그들의 주체성 변화를 촉발했다. 지난겨울 촛불이 그토록 지속적으로 힘있게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의 주체성 변화가 그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문학계가 세월호참사에 그토록 빠져들었던 것은 문학인들 역시 그러한 주체성의 변화를 깊이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참사 이후 예전처럼 글쓰기를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세월호 이후’에 문학을 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고민했다.
그런데 사회학자 서동진(徐東振)은 「서정시와 사회, 어게인!」(『문학동네』 2017년 여름호)이라는 글에서 세월호참사 이후 일어났던 문학계의 움직임에 대해 냉소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는 “충격이라는 경험을 통해 세계에 대한 경험을 말하는 이들은 경험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소홀히 하는 것을 넘어서 충격이나 전율과 같은 경험 자체에 넋을 잃고 만다”면서, “오늘 세월호 이후의 문학은” 그런 경험될 수 없는 것을 미적 경험으로 “생산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재난과 그로부터 비롯된 전율을 이야기하는 데 바쁘다”(292면)라고 주장했다.10 또한 그는 “경험이 우리에게 어떻게 들이닥치는지를 밝히는 것이 문학적 실천의 요체라면, 오늘날 문학은 그러한 일에 더없이 무능”하며, “재난 이후의 문학은 경험의 직접성에 넋을 잃은 채 경험이 얼마나 매개되어 주어지는지를 잊는다”(293면)라고 비판을 더하고 있다.
‘세월호 이후’와 ‘세월호 이전’의 문학이 같을 수 없다고 말하는 문인들에게서 세월호라는 스펙터클의 충격과 전율에 넋이 나간 모습을 포착하는 ‘비평가’의 모습은 2008년의 촛불집회로부터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에 취한 중간계급을 읽어냈던 오만한 문화비평—“도시의 환등상이 만보자를 유혹하듯이, 촛불도 월드컵과 2002년 대선을 거치면서 잠복해 있던 대중의 욕망을 거리로 다시 불러내었다”11—을 떠올리게 한다. 문인들이 세월호참사라는 ‘경험’에 깊이 들어가고자 했던 것은 그 참사를 자신의 주체성의 심원한 변화를 가져온 사건으로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반면 문인들이 세월호참사에서 ‘넋을 잃고’ 이를 문학화했다고 생각하는 서동진은, 세월호참사가 지는 사건성—가능성에 개방되는—을 경시하고 자신의 ‘경험’으로 전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내세우는 ‘매개의 변증법’은 어떤 사건의 직접성이 지니는 강렬성을 중화시키고 그 사건을 본질(구조)로 환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사건이 열어놓는 가능성에 대한 인식과 그 사건이 가져오는 위기의 시간—이는 기회의 시간이기도 하다—을 놓쳐버리게 만든다.
이러한 비평—“걸어가면서 묻는”(사빠띠스따) 비평이 아니라 “멈추고 생각하는”(지젝) 비평—은 사건의 바깥 자리에서 날카로운 논평을 던질 수는 있겠지만 그 사건이 지닌 가능성의 실현에 관해서는 무기력하다. 서동진은 어떤 사건으로부터 구조로 소급될 매개를 파악하자고 주장하지만, 사건이 열어놓는 위기에 대한 각성이 없다면 그 위기를 주체성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로 전도시킬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없다. 그가 한국인이 경험의 빈곤을 겪고 있는 사태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벤야민의 「경험과 빈곤」(1933)은, 사실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자는 글이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직후의 위기 속에서 발표된 이 글은 현재 “인류의 경험 전체가 빈곤해”진 상황이지만, “새로운 긍정적인 개념의 야만성을 도입”하여 “처음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기, 적은 것으로 견디어내기, 적은 것으로부터 구성하고 이때 좌도 우도 보지 않기”12를 제안한다. 즉 그는 경험의 빈곤이라는 위기를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자신의 일로 만들고 그 새로운 것을 통찰과 포기 위에 구축”13하는 기회로 삼자고 주장한다. 벤야민에게 비평이란 위기를 기회로 전화시키려고 위기 상황에 개입하는 글쓰기인 것이다.
3. 2010년대 시인들의 실존 미학과 파레시아
세월호참사는 한국사회의 위기를 드러냈고, 그 위기는 정치를 변화시킬 기회—지난겨울의 촛불—를 가져왔다. ‘촛불’은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민주주의혁명을 가동했다. 하지만 지금 그러한 민주주의혁명은 대의민주주의에 갇혀 앞으로 뻗어나가지는 못하는 상태이다. 또한 ‘촛불혁명’의 결과 한국에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부가 들어섰지만, 많은 이들의 삶은 여전히 신자유주의의 자본 기계에 ‘예속’되어 있어서, 그들의 실생활은 여전히 ‘헬조선’의 상황에 놓여 있다. 현재 한국은 혁명이 진행 중인 동시에 위기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이딸리아 출신 정치사상가 마우리치오 라짜라또(Maurizio Lazzarato)는 최근 펠릭스 과따리(F. Guattari)의 논의를 빌려 “‘오늘날 위기’의 본질은 담론적 차원과 실존적 차원을 접합하지 못하는 자본주의 세력들의 무능력에 있다”면서, “이것은 현실화된 경제적·사회적·기술적 흐름들의 집합을 주체성 생산의 잠재적·비실재적 차원, 실존적 영토들, 가치의 세계들과 조합할 수 없다는 뜻”14이라고 말하고 있다.(이에 “주체성의 병리적 증상이 분출”(323면)한다.) 라짜라또가 말한 ‘오늘날의 위기’는 유럽에 한정된 문제일 수 없다. 그가 말한 위기란 현 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주체성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신자유주의의 주체성이 가장 심각하게, 급격히 구성된 나라다. 우리는 주체성의 위기를 드러낸 세월호참사가 신자유주의에 점령된 사회와 국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라짜라또는 현재 부채경제의 노예화밖에 길이 보이지 않는 ‘주체성의 위기’ 시대에, 그 위기로부터 주체성을 새로이 형성하는 기회로 전환시킬 대안으로 실존의 전언어적-정동적 차원(미적 차원)을 변화—특이화—시키면서 이를 담론과 통접하는 ‘미적 패러다임’(과따리)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과따리의 ‘미적 패러다임’은 푸꼬(M. Foucault)가 개념화한 ‘실존(삶)의 미학’ 및 ‘파레시아’(진실 말하기, Parresia)와 상통하는데, 라짜라또는 이 파레시아를 통해 주체성의 특이화(‘윤리적 차이’)를 통한 대안적인 정치적·윤리적 주체가 구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파레시아를 고해성사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라짜라또에 따르면, 푸꼬에게 파레시아의 급진적이고 모범적인 예는 견유학파다. 견유학파는 “존재 상태를 변함없이 유지하는 삶”인 “‘진정한 삶’이라는 전통적 주제를 폐기”하고 “[지금 이곳의] ‘또 다른 삶/또 다른 세계’를 주장함으로써, 현세 내부에 또 다른 주체성과 제도를 창출하려고”(352면) 했으며, 그리하여 “정치와 윤리 (그리고 진실) 사이를 단단히 결합함으로써 파레시아의 ‘위기’, 민주주의와 평등의 무기력을 극복하고 윤리적 차이를 생산”(353면)했다는 것이다.
라짜라또가 설명한 푸꼬의 ‘파레시아’에 대해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겠다. 파레시아의 윤리란 말하는 자가 자신의 실존을 미학적으로 변형하고 특이화하면서 말—담론—과 결합시키고, 그렇게 형성된 자신의 ‘신체-말’을 세상에 투입하여 기존 삶의 양식을 문제시하는 윤리, 그리하여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여는 정치적 윤리라고. 이 과정에서 그 파레시아는 감추어져 있던 이 세상의 위기를 드러낸다. 시 역시 이러한 파레시아를 행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인은 시 쓰기를 통해 자신의 실존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를 되묻고, 자신의 실존적 영토를 재정립하면서 스스로를 차이화하는 데서 더 나아가, 세상의 질서를 문제시하기도 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이러한 파레시아적인 시 쓰기에 ‘미학적 윤리’라는 개념을 연결할 수 있다. 그런데 미학적 윤리—파레시아—의 정치성은 차이화를 통해서 확보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인마다 그 윤리의 양상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파레시아를 실천하는 시인에게는 ‘진정한 삶’이 문제라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의 ‘또다른 삶/또다른 세계’가 문제인 것이다.
2010년대 중반의 한국시가 보여준 ‘윤리’에서 바로 이러한 파레시아의 윤리, 미학적 윤리를 찾아낼 수 있지 있지 않을까? 특히 2010년대에 등단해 시를 발표하면서 자신의 시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시인들은 한국에서의 주체성의 위기가 드러난 세월호참사 전후—신자유주의 ‘헬조선’이 가시화된 상황—에 시를 쓰면서 윤리의 문제와 고투할 수밖에 없었고,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 시를 썼다. 최근 발간된 그들의 첫 시집에는 이러한 과정이 담겨 있을 터인데, 우리는 거기에서 헬조선을 살아가는 시인들에게 닥친 주체성의 위기와 그 위기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미학적 패러다임’을 통해 재구성하면서 현 사회질서에서의 삶을 문제시하는 시적 파레시아를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아래의 시는, 헬조선을 마주한 주체의 주체성이 붕괴되어가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실존을 힘겹게 재창안하려는 주체성을 보여준다.
저녁 뉴스를 보다가 베란다에 나가 세상을 바라본다
어두운 골목에 가로등이 하나둘 켜진다
오늘도 누군가 옥상에서 지상으로 몸을 던졌다
가해자에게도 피해자에게도 이 세계는 지옥이었다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사람은 불을 끄기 위해 바닥에 뒹굴다가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살 타는 냄새가 화면을 뚫고 나와 거실을 가득 메운다
가슴 안에 불을 담고 사는 사람
고개를 숙이고 자신 안의 절벽을 바라보는 사람
사랑의 기억으로 옛 애인의 집 유리창에 돌을 던지고
그녀는 유리 파편을 씹으며 사랑의 기억을 지운다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 몸에 불을 지르고
몸을 받아주지 않아 마음은 잿더미가 된다
나는 새로 도배된 벽 앞에 서 있다
이전의 벽지 문양은 떠오르지 않는다
벽은 끊임없이 나의 기억을 지운다
자신이 고독하다는 생각이 그 고독에서 벗어나게 해줄 때가 있다
(…)
밤늦게 돌아온 아내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눕는다
내가 지금 부여잡은 당신의 손
한 손으로 당신의 손을 잡았을 때 다른 손은 빈손이 된다
그 수많은 손금 중에
내 것과 똑같은 것이 하나는 있을 거라는 생각
당신의 손금을 손끝으로 따라가다
어디쯤에서 우리가 만났을지 가늠해본다
서로의 머리카락을 묶고 자면 우리는 같은 꿈을 꾸게 될까
밤하늘은 별의 공동묘지
이 별에는 어떤 묘비명이 새겨질까
별의 잿더미가 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까마득히 먼 거리가
별들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소음을 삼키고 있다
빈 그네가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신철규 「생각의 위로」 부분(『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2017)
신철규(愼哲圭)는 세월호참사에 깊은 감응을 보여준 바 있는 시인이다. 세월호참사 이전에 원작이 발표된 위의 시에서도, 이 시인의 고통에 대한 강한 감응력은 “살 타는 냄새가 화면을 뚫고 나와 거실을 가득 메운다”라는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시인이 “저녁 뉴스”를 통해 본, 옥상에서 투신하거나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는 사람들은 헬조선 노동자들의 삶의 실재를 드러낸다. 시인은 이 실재에서 “살 타는 냄새”를 맡는다. 나아가 그는 저 죽음을 “가슴 안에 불을 담고 사는 사람”이나 “자신 안의 절벽을 바라보는 사람”, “옛 애인의 집 유리창에 돌을 던지고” “유리 파편을 씹으며 사랑의 기억을 지”우는 사람들의 삶으로 확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이 세계는 “몸에 불을 지르고” “마음은 잿더미가” 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실제로 지옥이다. 이 지옥을 가려버리려는 듯이 “새로 도배된 벽 앞”에서, 시인은 자신의 “기억을 지”우며 서 있다.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자신의 주체성을 말소한다는 것, 그래서 그는 고독하다. 하지만 “고독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도록 “자신이 고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주체성을 말소하면서 그는 지옥을 견디는 것이다.
그가 침대에 누운 “당신의 손”을 부여잡는 것은 자신의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의 표현일 것이다. 시인은 당신과 “같은 꿈을 꾸”고 싶다는 희망에 “그 수많은 손금 중에/내 것과 똑같은 것이 하나는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당신의 손금을 손끝으로 따라”간다. 하지만 한 손을 잡으면 “다른 손은 빈손이 된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언젠가 “같은 꿈을 꾸게 될”지라도, 삶의 한쪽은 비어 있을 것이다. 여전히 “밤하늘은 별의 공동묘지”일 것이다. “별의 잿더미가 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다. 주체성이 말소된 자리의 시공간은 “별들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소음을 삼키고 있”는 “까마득히 먼 거리”와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빈 그네”로 현상한다. 그러나 “빈손”의 다른 편에는 “당신의 손금”을 따라가는 “손끝”이 있다. 그것은 이 죽음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 당신과 “같은 꿈”을 꿀 수 있는 세계를 “가늠해”보는 미학적 실존의 삶이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지옥을 마주한 고독의 시공간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조금씩 찾아나가고, 그리하여 이 지옥에서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에 드러낸다. 이를 미학적 윤리, 시의 파레시아라고 한다면, 시의 파레시아는 우선 이 세계가 지옥이라는 진실을 감당해야 한다.
바다를
액자에 건다.
바다에 가라앉는 나를 본 적이 있다.
팔다리가 부식되어
산호가 되어갔다.
허옇게 변한 사지가
산호들 사이에 갇혀 있었다.
노랗거나 파란 물고기들이 주변을 배회했다.
저기 열대어가 있어, 스킨다이버들이
내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젖은 빵을 찢어 던졌다.
아름답다는 말을 산호 숲에 남겨두고
스킨다이버들은 뭍으로 돌아갔다.
나를 그곳에 둔 채 나도
꿈에서 빠져나왔다.
이곳을 떠나본 자들은
지구가 아름다운 별이라 말했다지만
이곳에서만 살아본 나는
지옥이 여기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
나를 여기에 둔 채 나는
저곳으로 다시 빠져나가서
정육점과 세탁소 사이에
임대문의 종이를 쳐다보고 서 있다.
텅 빈 상가 속에서 마리아가 혼자
퀼트 천을 깁고 있다.
이 액자를
다시 바다에 건다.
—임솔아 「아름다움」 전문,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문학과지성사 2016)
이 시의 마지막 연은 1연을 전도시킨 것이다. 1연과 마지막 연 사이는 이 전도가 일어나는 과정이다. 액자 속의 바다는 아름다운 꿈의 세계, 예술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전반부에서 시인은 임솔아(林率兒)는 그 액자 속의 바다에서 자신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말해준다. 시인에게 그 바다는 아름답거나 쾌적한 곳이 아니었다. “바다에 가라앉”은 그는 “팔다리가 부식되어/산호가 되어갔다”고 하니 말이다. 액자 속 바다(‘꿈-예술’)의 세계는 시인을 “하얗게 변한 사지”로 “산호들 사이에 갇혀 있”는 존재로 만들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꿈에서 빠져나”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곳”으로 귀환한다.(그러나 그 꿈의 세계에 ‘나’를 놔두고 귀환한다) 그 바다를 즐긴 후 “아름답다는 말을” 남기고 “뭍으로 돌아간” “스킨다이버들”과는 달리, 시인은 아름답다는 말을 남길 수 없었다.
그런데 시인이 귀환한 이곳은 지옥인 것이다. 시인은 “이곳을 떠나본 자들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여기’가 지옥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마음먹는다. 그 증명 행위가 “임대문의 종이”와 “마리아가 혼자/퀼트 천을 깁고 있”는 리얼한 세계를 액자에 넣고는 그것을 다시 바다에, 즉 ‘예술-꿈’의 세계에 거는 일이다. 액자에 들어간 그 리얼한 세계가 바로 임솔아의 시 아니겠는가. 예술의 세계에 리얼한 세계를 걸어놓겠다는 것, 그것이 앞의 시에 표명된 임솔아의 시인으로서의 포부다. 이때 저 정육점과 세탁소 사이의 세계, 텅 빈 상가의 세계가 ‘여기’는 아니라는 데에 주의하자. 그 세계는 시인이 “지옥이 여기라는 걸 증명하고”자 자신을 지옥인 “여기에 둔 채” “빠져나가” 서 있는 “저곳”에 있다. 저곳은 아름다워 보이는 여기가 지옥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실재’로서의 현실이다. 그러니까 예술의 세계—문학장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에 현실의 세계를 액자—시—로 만들어 걸기 위해서는 여기를 빠져나가 저기 실재의 세계로 갈 수 있어야 한다.
임솔아는 예술 속에서의 주체성의 위기—산호가 되어버리는—를 인지하고는 그 꿈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와 이곳이 지옥임을 증명하기 위해 “임대문의 종이”가 붙어 있는 실재의 세계에 자신의 실존을 대면시킨다. 그리고 이 실재의 세계를 시로 써서 예술 앞에 건다.(이것이 임솔아의 실존의 미학, 미학적 윤리일 것이다.) 이 행위는 이 시대 예술의 위기를 드러내고 예술가로서의 삶을 문제시한다. 이것이 이 시의 파레시아다. 그렇다면, 꿈의 세계를 이제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또는 아래의 시에서처럼 그 세계에서 ‘내쳐진’ 상황에서 시 쓰기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안태운 시인은 그의 시집 마지막에 실린 아래의 시에서 그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꿈으로부터 내쳐진다. 감은 눈으로, 일부러 눈 뜨지 않고 걸으면 나와 함께 내쳐진 논이 있고 논 위로 걷는 내가 만져진다. 보이지 않는 눈앞에서 그러나 내가 만진 것들은 다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내 손을 멈추게 하고 손은 어둠에 익숙해진다. 걷고 난 후의 일들은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짚이 타고 있다. 눈 뜨면 꿈과 함께 내쳐졌다.
—안태운 「감은 눈으로」 전문(『감은 눈이 내 얼굴을』, 민음사 2017)
위의 시는 “꿈으로부터 내쳐진다. 감은 눈으로”라는 문장과 “눈 뜨면 꿈과 함께 내쳐졌다”라는 상황 사이에서, “일부러 눈 뜨지 않고” 걷는 시인에게 일어나는 감각의 변화를 기록한다. 꿈—예술?—으로부터 내쳐지는 존재. 이것이 안태운이 포착한 우리 삶의 위기 상황이고, 거기서 감은 눈으로 걸으면서 세계의 존재를 감각하기가 안태운의 시 쓰기일 것이다. 안태운에 따르면, 감은 눈으로 시를 쓸 때 “나와 함께 내쳐진 논”의 존재와 “논 위로 걷는 내가” 비로소 “만져진다”. 이때 감각한 세계는 색채가 없다. 감은 눈으로 감각했기 때문이다.(안태운 시의 모호함은 이 눈을 감고 체험하는 감각을 되살리는 데서 오는 것일 테다. 하지만 장님이 체험하는 감각이 실재적인 것처럼 그 모호성 역시 실재적이다.)
그런데 그 감각에는 “내가 만진 것들은 다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은 내 손을 멈추게” 한다는 아이러니한 비극성이 있다.(안태운 시가 시제에 예민한 것은 이러한 사라짐의 감각을 붙들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하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세계를 체험할 때, 세계에 대한 감각은 점차 사라지고 시인은 “어둠에 익숙해”질 것이다. 이때 시인은 걸음—시 쓰기—을 멈출 것이며, 이 걸음을 멈춘 이후에는 “내가 만져”지지는 않게 될 터, 그 “후의 일들은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될 뿐이다. 그 일들은 “감은 눈으로” 감각한 세계와는 다른, “짚이 타고 있”는 현실에서 벌어진다. 이렇게 자신이 만져지는 감각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자 시인은 눈을 뜨고, 그러자 “짚이 타고 있”는 현실이 그에게 닥친다. 시인은 이때 꿈도 내쳐지고 자신도 내쳐진다고 말하고 있다.
안태운은 꿈과 현실 사이에 자신의 실존적 영토를 마련한다. 그의 시는 꿈—예술—과 현실 사이에서 “내쳐진 논”과 같은 버려진 세계—자기 자신의 몸을 포함하여—를 감각하고자 한다. 이를 위한 방법론이 “일부러 눈 뜨지 않고” 걷기일 터, 그런데 그 행위는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내쳐질 운명의 고독을 안고 있다. 눈을 감는다는 이 외로운 행위를 통해 안태운은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실존적 영토를 재정립하고 거기에서 감각되고 정동되는 실재를 기록한다. 이는 내쳐진 세계의 실재를 구제하고자 하는 미학적 윤리에 따르는 행위다. 그 행위를 통해 실재하는 존재를 드러내는 것, 이것이 안태운의 파레시아다.
4. 촛불을 밝힐 시의 파레시아
촛불혁명 이후 세월호가 인양되었다. 세월호의 모습은 처참했다. 세월호참사는 침몰하는 세월호처럼 우리 사회가, 그리고 우리가 침몰 중의 위기에 놓여 있음을 알려준 사건이었다. 바닷속에 수장될 뻔했다가 인양된 세월호의 모습은 폐허가 되어버린 한국사회와 우리의 실재를 선명한 이미지로 보여주었다. 우리는 아직 폐허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그 이미지는 암시한다. 그 이미지는 우리가 그 폐허를 만든 질서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를 가능성의 기회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짐을 불러일으킨다. 이 전환을 위해서는 인양된 세월호의 모습과 같은 우리 세상의, 우리 내면의 폐허를 계속 이미지화해 드러내야 한다.
201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시인들은 자신의 육체와 마음에 각인되어가는 삶의 위기—폐허—를 드러내고 미학적으로 자신의 실존을 재창안하면서 그 위기로부터 존재의 미학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이러한 미학적 윤리에 대해 이 글은 파레시아라는 푸꼬의 개념을 접맥하여 의미화하고자 했다. 2010년대 시인들의 시적 파레시아는, 이설야(李雪夜)의 시를 빌려 말하자면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실상들을 드러내는 성냥개비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냥 한개비를 켜면
눈먼 소녀가 덜덜 떨며 울고 있습니다
성냥 한개비로 촛불 하나를 켜면
망루에 얼어붙은 다섯 그림자가 상여를 밀어올리고
또 성냥 한개비 그어 촛불들을 옮겨 붙이면
높은 사다리 위에 선 그녀가 멀리 타전하고 있습니다
금 간 벽에 부러진 성냥 한개비 긋자
벽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사람들
붕대를 감은 그림자들이 재개발 상가 입구에 멈추고
성냥개비를 입에 문 늙은 소년들이 지하도로 숨다가 멈추고
꽃들이 피다가 멈추고 새들이 날다가 멈추고
돌아보니 아무도 없고, 저 혼자 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무너져내리는 벽 속을 뛰쳐나와 누군가 마지막 성냥을 그었을 때
저기 멀리 불붙는 광장에 눈먼 소녀 머리카락이 보일락 말락
—이설야 「성냥팔이 소녀가 마지막 성냥을 그었을 때」 전문(『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창비 2016)
동화 「성냥팔이 소녀」에서 소녀가 켠 성냥은 소녀의 소망을 담은 환상을 보여주지만, 이제 환상은 더이상 불가능하다는 듯이, 앞의 시에서는 화자가 켠 성냥에 “덜덜 떨며 울고 있”는 소녀가 보인다. 그 성냥팔이 소녀는 자신의 마지막 성냥을 긋고는 환상을 보았던 눈이 멀어버렸다. 이제 성냥은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용산 망루에서 불타 죽고 “얼어붙은 다섯 그림자”, “높은 사다리”를 올라 크레인에서 농성하는 김진숙, 무너지기 직전의 “금 간 벽”과 지하도로 숨어들어가는 “늙은 소년들”을 보여준다. 이 한국사회에 널린 삶의 위기를 드러내는 저 성냥을 바로 세상의 질서를 의문시하는 ‘진실 말하기’, 파레시아의 시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한 시를 쓰는 시인은 자신의 실존적 위기와 미학적 윤리로 성냥을 그어 세상과 삶의 위기와 그 위기에서 생겨나는 가능성—기회—을 드러낸다.
이설야는 그 성냥이 “촛불”을 밝힐 때 쓴 성냥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파레시아의 시 역시 촛불의 불을 붙이는 데 사용되리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때 시인은 “무너져내리는 벽 속을 뛰쳐나와” “마지막 성냥을” 긋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터, 그 마지막 성냥은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밝히고 있는 “저기 멀리 불붙는 광장”을 보여주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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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영인 「문학성(文學性)에서 문학성(文學+城)으로, 그리고 그 밖으로」, 『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하이픈 73면.↩
- 같은 글 74면.↩
- 발터 벤야민 「문학사와 문예학」, 최성만 옮김, 『서사(敍事)·기억·비평의 자리』, 길 2012, 529~30면.↩
- 이 역시 ‘비평의 정치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때의 정치는 ‘문단 내 정치’에 한정된다.↩
- 이를 모더니티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모더니티는 자신의 새로움을 주장하는 상품의 모더니티 논리에 종속될 가능성이 있다. 이와는 달리, 시의 모더니티와 새로움은 이전 세대의 시에 대항하여 자기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서 확보된다기보다는, 현대사회의 ‘흐름’—그것이 상품의 논리에 따르는 모더니티이기도 하다—에 저항하면서 그 결을 거슬러 나아가는 데에서 확보된다.↩
- 이렇듯 세대론에 따라 시사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벤야민이 비판하는 “학문의 역사를 정치적·정신적 사건의 외부에 자율적으로 분리된 과정으로 그때그때 서술하려는 시도”(발터 벤야민, 앞의 글 529면)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양경언 「이제 되었다니, 그럴 리가」, 『문학과사회』 2015년 겨울호 544면.↩
- 이러한 부당전제에 따른 안희연의 시에 대한 박상수의 비평에 대해서 김나영은 “어떤 당위를 전제한 읽기”라고 비판한다. 김나영 「통감하는 주체, 유무의 경계 너머의 말들」,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454면.↩
- 그런데 글에서는 박상수가 누구에게 항의하는 것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시가 무기력이나 무능감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말한 이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 하지만 한국문학은 나름대로 “경험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하여 말해왔으며 말하고 있다. 작가와 시인을 포함한 이 사회의 많은 이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근래 발간된 시와 소설을 서동진이 몇권만 읽어본다면 그 속에서 경험의 빈곤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군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이택광 「촛불의 매혹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당대비평 기획위원회 엮음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 산책자 2009, 54면.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는 사회비평가에게도, 2008년 한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집회와 같은 사건—지난겨울의 ‘촛불혁명’에서도—에서 자신의 위치를 과연 어디에 세워두고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다.↩
- 발터 벤야민 「경험과 빈곤」, 최성만 옮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외』, 길 2008, 174면.↩
- 같은 글 180면.↩
-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기호와 기계』, 신병현·심성보 옮김, 갈무리 2017, 3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