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정승철 『방언의 발견』, 창비 2018
살아 있는 한국어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myosu02@hanmail.net
감동적인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해 최근 일련의 남북 교류에서도 새삼 확인된 것처럼 지금 한반도에서 한국어의 방언적 차이는 소통의 차원에서는 거의 문제 될 게 없는 수준으로 보인다. 반세기 넘는 분단의 장벽 아래 진행된 체제와 문화의 이질화에도 불구하고 남쪽의 한국어(남한 방언)와 북쪽의 한국어(북한 방언)는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고 감정을 나누는 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 하나의 언어, 하나의 핏줄 같은 조금은 낡고 진부한 수사가 반드시 배타적이고 순혈주의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지 않고도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진실된 역사적 실체와 흐름을 재서술해내는 현장을 목도한 느낌이었다.
남북의 경우가 이럴진대 이동과 정보의 사각지대가 사라지고 개인 간 소통의 많은 영역이 인터넷이 만들어낸 새로운 관계망으로 옮겨간 2010년대 한국에서 표준어와 방언의 대립 구도는 사실상 해체되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오히려 간혹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인터넷의 바다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나는 새로운 언어들일 텐데, 은어화한 온라인 언어들이 한국어의 규범을 파괴하고 소통의 장벽을 만들어낸다는 지적은 적지 않다. 그러나 인터넷 세상에 새롭게 도래한 그 사회방언 역시 지금 한국인의 생활환경과 생활감정을 반영하는 살아 있는 언어다. 젊은 세대 작가의 소설에서 그런 온라인의 소통언어들을 접하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 되었다. 그 언어들 가운데 일부는 표준적인 한국어로 편입되기도 하겠지만 스스로 만든 소통의 벽이나 규범적 일탈의 정도에 따라 계속 소수의 은어로 남거나 사라지는 것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규제하거나 규율할 수 있는 일관된 정책이나 주체는 상정하기 힘들다. 굳이 말한다면 지금 한국어를 쓰는 언중의 의식적/무의식적 결단만이 이 과정에 관여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지역방언이든 사회방언이든 표준어와의 대립 구도 해체는 이즈음 매체환경을 비롯한 광범위한 사회적 변화로부터 영향받은 것이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실제 한국인의 언어의식은 방언에 대한 부정과 차별을 포함하는 표준어 우위의 관념에 상당한 정도로 고착되어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다.
정승철 교수의 『방언의 발견』은 바로 이 점에 대한 우려와 세심한 고찰로부터 출발한 책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최근 ‘스피치 학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교정을 위한 ‘사투리반’을 예로 들면서 이 책을 열고 있는 것도 그래서일 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이 다양한 자료를 톺으면서 새삼 일깨워주는 것처럼, 국가 주도의 표준어 정책이 ‘조국 근대화’ 혹은 ‘국민 총화’의 이데올로기 아래 사회 전 부면에서 강력하게 펼쳐졌던 시절이 그리 오래전도 아니다. 지금의 중장년 세대라면 누구나 기억에 남아 있을 ‘국어순화운동’은 『방언의 발견』에 따르면 1976년 4월 ‘대통령 특별 지시’에 의해 촉발되고 ‘사회정화’ 차원에서 기획되었다. 당시의 교원단체가 마련한 운동 지침서의 한 대목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언어의 순화란 언어에 섞인 ‘잡스러운 것’을 떼어버리고 체계 있고 순수한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156면, 강조는 저자) 여기서 ‘잡스러운 것’, 그러니까 ‘국어’를 오염시키는 주범으로 지목된 것은 “어휘 면에서는 은어, 비어, 속어, 욕설, 외래어 및 외국어와 방언”이다. 말 그대로 ‘순수한’ 언어는 존재한 적이 없다. 언어들 사이의 접촉과 간섭은 거의 모든 자연언어들의 역사에 새겨진 자취다. 한국어의 어휘부에 깊숙이 뿌리내린 중국식 한자어와 일본식 한자어 역시 그런 자취의 일부일 것이다. 당시 ‘국어순화운동’이 일종의 ‘언어순혈주의’와 등을 맞댄 편협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했다는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지 싶다. ‘운동’의 한 목표이기도 했을 고유어 혹은 토착어의 진작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일 테다. 그리고 방언의 경우는 고유어의 진폭과 가능성에 좀더 많이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순수’의 욕망과도 이율배반적인 측면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방언에 대한 배제와 억압을 수반하는 강력한 표준어 정책이 ‘19세기 제국주의 또는 국가주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은 『방언의 발견』에서 여러차례 지적되는 사실이지만, 일본이 오끼나와를 병합하는 과정에서 원주민 언어인 류우뀨우어(琉球語)를 말살하기 위해 ‘방언 패찰’(학생이 류우뀨우어를 사용하면 벌칙으로 목에 걸게 함. 1960년대까지 지속됨)까지 사용했다는 기록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져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영국, 스페인, 일본 등에서 사용된 ‘방언 패찰’의 존재는 방언에 대한 억압이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저자의 되풀이되는 주장에 뚜렷한 역사적 예시가 되어준다.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마련하고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75면)을 원칙으로 삼아 표준어 사정 작업을 벌인 것은 국권 상실기의 한국어 지키기 및 정비 차원에서 그 의의를 충분히 평가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홍기문 같은 이는 “모든 지역 방언과 ‘계급어의 융합’을 전제로 한 표준어 개념”을 제안하면서 “한 방언을 표준어로 선발해놓고 곧 그 이외의 방언을 전부 말살시키려고 하나 그것은 한 언어를 가지고 다른 한 언어를 말살하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노릇”(81면)이라며 선각적인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어는 수천만 한국어 사용자의 개인어로 발화되는 개인방언의 집합체다. 방언이라는 말에도 새겨져 있는 것처럼 통상 지역 간 차이가 가장 크게 드러나지만, 세대나 교육에 따른 차이도 적지 않을 테다. 궁극적으로는 개인 간 차이가 남을 것이다. 그 차이들은 지금 한국인의 생활감정과 사유를 실어 나르는 다채로운 언어적 자산이다. 차이의 억압은 민주주의의 원칙에도 반하지만 한국어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약하는 일이기도 하다.
『방언의 발견』이 소개하는 인상적인 삽화가 하나 있다. 2006년 5월, 사투리 연구모임 ‘탯말두레’ 회원들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현행 표준어 규정(1989년 3월 시행)이 국민의 평등권, 행복추구권, 교육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는 재판관 7대 2의 의견으로 기각되었지만 표준어 규정의 비민주성을 충분히 부각하는 계기가 된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 “잡스러운” 방언(속어, 욕설을 아우르며)이 아니면 드러날 수 없는 한국인의 진실되고 풍성한 생활감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방언의 발견』이 거듭 주장하는 ‘방언 사용권’은 공동체의 기억을 되새기고 보존하는 한국인의 자기이해, 자기재서술의 차원에서도 좀더 적극적으로 제기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너 메 살 먹었네?”
“멥쌀두 먹구 찹쌀두 먹구, 열두가지 곡석 다 먹었슈.”
하고 나서 그녀는 치맛자락 밑으로 어슬렁대던 검둥이 뱃구레에 냅다 발길질을 하며,
“이런 육시럴늠의 가이색깃 지랄하고 자빠졌네. 주둥패기 뒀다가 뭣허구 이 지랄허여. 너 니열버텀 잘 굶었다. 생전 밥구경이나 시키나 봐라.”
하고 거듭 발길질을 하여 금방 어떻게 되는 비명 소리가 들리도록 했다. 내가 듣기에도 담 넘어 들어오는 순경을 물어뜯지 않았다는 핀잔이었다.
—이문구 「행운유수」, 『관촌수필』, 문학과지성사 1977, 7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