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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문학과 새로운 주체

 

비평이 왜 중요한가

비평이 혁명을 의미화하는 방식

 

 

양경언 梁景彦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싸움과 희망」 「최근 시에 나타난 젠더 ‘하기(doing)’와 ‘허물기(undoing)’에 대하여」 등이 있음. purplesea32@hanmail.net

 

 

1. ‘혁명의 낭만화’를 문제화하기

 

김현의 「지혜의 혀」(『현대시』 2017년 3월호)는 밤을 독창적으로 보내고 살아남은 이들의 목소리가 담긴 시다. ‘독창적으로’ 밤을 보냈다고는 했지만, 시에 등장하는 이가 특별히 누군가를 지시하는 건 아니다. 발표 시기가 2017년 3월이니만큼 ‘밤’이라는 표현이 특정 정권의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을 감안하고서라도, 그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과정은 김현의 시를 흥미롭게 감상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자면서 눈을 맞았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시는, 눈을 감고 있었던 이의 감각을 깨운 ‘눈〔雪〕’ 이미지가 장면으로 삽입되면서부터 깜깜한 밤을 제대로 살필 수 없도록 ‘눈〔目〕’을 “가지고” 사라져버린 “부엉이”의 날갯짓을 좇는 과정을 담는다. “부엉이는 내 눈을 가지고/어디로 날아가서/무엇을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라는 호기심은 이전에는 마냥 잠들어 있던 화자를 더이상은 “가만히” 있을 수 없도록 한다. 급기야는 “책장”을 넘길 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의 언어와 “우물”가에서 들려오는 전설의 말들 사이로, 습관적으로 구원을 바라며(화자는 “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반복해서 확인한다) 당연하다는 듯 생애주기를 따르던 사람들의 삶에서(시는 언약식, 돌잔치, 죽음과 관련한 의례 등 한국인의 전반적인 생활상을 연상케 하는 장면에서부터 ‘유가족’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 이들과 화장실에서 끼니를 챙겨야 하는 이의 하루 등 한국사회에서 포착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아울러 언급한다) 촛불이 켜지고 꺼지는 순간들을 파노라마 형상으로 복기한다. 장장 27연으로 이루어진 긴 시인지라 전문을 옮겨 적기는 어려우나 후반부만큼은 잠깐 읽고 가기로 한다.

 

아이는

판사봉과 연필과 실과 청진기와 지폐를 앞에 두고

부모와 조부모와 부모의 친구들과 조부모의 친구들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것을 집어 들어

자신이 가진 가장 깊은 둥지 속으로 넣었다

여자의 미래였다

지혜롭구나 우리들의 아이란

신은

너희의 가장 나중에 것에 있다

 

하야하십시오.

 

울거나

웃거나

 

눈을 맞으며

지혜의 우물 앞에

촛불을 켜고

해골을 들고 서 있었다

해골의 혀를 쓰다듬으며

손을 녹였다

 

물이 떨어졌다

책장을 넘기는 부엉이 소리

썩은 물이 하나둘 퇴진하는 소리

사나흘 꿈 밖으로 나가지 않은 사람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꿈이 아니에요

부엉아,

인제 그만 내 눈을 물고 돌아오렴

 

—「지혜의 혀」 부분

 

아이의 돌잔치를 그리던 시가 느닷없이 “하야하십시오”라는 외침을 받아들이면서도 계속되듯이, 시는 광장에서 ‘하야가’를 부르며 밤을 보냈던 이를 특별한 누군가로 수렴하지 않고 촛불을 켜고 꺼봤던 숱한 사람들로 확장해서 말하는 일에 무게를 싣는다. 촛불은 비단 집회에서 ‘하야’를 외칠 때만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 충실하기 위한 의식을 치를 때에도 밝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시는 광장에서 모두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선취하는 체험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돌잔치가 되었든, 생일잔치가 되었든 간에 범속한 삶의 과정에서도 얼마든지 “미래”를 선취하는 순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것을 두고 일상은 일상대로 귀하고 광장은 광장 그대로 귀한 것이라는 순진한 발상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위의 시는 관성을 그저 따르는 채로 일상을 구성할 때 딸려나오는 부정(不正)한 모습 역시도 부각하고, 한편에선 사람들이 편히 쓰는 입말을 시의 구절로 등장시킴으로써 날것의 말들과 섞일 때에야 모두가 “밤”을 통과하는 현장이 개시될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요컨대 시는 일상을 대변하는 도구가 평상시의 맥락을 비틀고 무기로 역할을 전환할 때 “꿈”이 더이상 꿈으로 남지 않는 광장이 형성될 수 있으며, 내정된 결론이 있다고 믿었던 생애주기에서 비틀어낼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이전과는 다른 일상을 만들어가는 ‘혁명의 일상화’가 이뤄지리라는 태도로 “밤”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는 촛불혁명을 순수한 추상성의 세계로 밀어둔 채 의미화하는 대신에, ‘불순’한 구체성이 있는 세계로 기억함으로써 광장을 끝내 낭만화하지 않는 방식이다.

앞서 이 시를 일러 어둠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보낸 이들의 목소리가 담겼다고 한 것은,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는 생활 한가운데서 발생시키는 삶의 방식이자 그를 통해 계속해서 살아가는 몸들이 직접 만나 지혜를 갈구하고, 협상하고, 도모하는 현장을 열어젖히는 상황을 일컫는다.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지혜의 혀”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존재한다.

김현의 시는 촛불의 광장을 통과해온 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할 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항을 일러준다. 촛불이 “기존의 혁명 개념과 동떨어진 면이 많”지만 “바로 그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새로운 성격의 혁명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백낙청의 의견을 참조할 때,1 촛불을 ‘혁명’으로 의미화하기 위해서는 “‘헬조선’을 만들어온 한국사회의 온갖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개막”2하기 위한 매일의 몸짓을 게을리할 순 없다는 메시지를 위의 시는 전한다. 문학작품을 읽는 일이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돌아보면서 ‘별 볼 일 없으리라’ 여겼던 일상에 입체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혁명의 연장선상에서 매일을 돌보게 만드는 일이라고 한다면, 비평은 그러한 문학 읽기 작업에 ‘지금 그것만으로 충분한지’ 거듭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한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글은 현재 한국문학 현장에서 주목할 만한 주제를 논의하는 비평들에 말을 걸면서 함께 더 고민했으면 하는 부분을 짚고, 그를 통해 문학비평이 재미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기 위해 쓰였다. 이 과정에서 촛불 이후 혁명을 어떻게 의미화할지를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장(場)으로서 문학비평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2. 페미니즘 논쟁이 던지는 질문: 문학은 ‘현실’을 어떻게 담는가?

 

불과 삼년 전만 하더라도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움직임마다 “어차피” 안 될 것이라던 정서가 팽배했던 한국사회가,3 ‘어쩌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점은 촛불이 이룩한 소중한 성취 중 하나이다.

문학비평의 현장은 어떠한가. 촛불과 비슷한 시기에 걸쳐 표절 논란,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 이어 ‘미투’ 운동을 겪은 한국문단은 ‘예전 같지 않은’ ‘위상’이 운운되면서 비평 역시도 ‘무용론’ 혹은 ‘위기론’이 거론되는 실정이다.4 하지만 지금 거론되는 비평 무용론, 비평 위기론은 2010년대 ‘근대문학 종언론’을 참조하면서 벌어졌던 ‘문학의 위기에 관한 이론’에 대한 논쟁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5 현재 한국문학 비평 현장에서 오가는 얘기는 단지 문학에 대한 주목도가 이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에 진행되는 게 아니라, 숱한 걱정들 속에서도 오히려 그 걱정을 주제로 삼고 지금 비평이 감당해야 할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지를 열정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특히 최근 진행 중인 페미니즘과 관련한 논쟁은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운동(movement)의 언어가 우세할 때 비평 역시도 활성화될 수 있음을 실감케 한다.

조연정은 최근의 페미니즘 작품들이 부당한 현실에 즉자적으로 반응하느라 미학적인 결함을 안은 채 쓰였다는 평가에 정면으로 반박한다.6 비평가 자신의 젠더 이슈에 대한 맹목을 마치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고 문학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인 것처럼 여기는 글들을 일러7 “비참한 현실을 그저 관망”(40면)하고 있다고 시원하게 비판하면서, 페미니즘으로 각성된 관점으로 현실의 문제를 일깨우는 소설의 새로운 미학적 성과 역시도 충분히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8 돌봄 노동을 홀로 감당해왔던 여성의 삶이나 데이트폭력 및 성폭력피해자의 삶 등 한국사회에서는 그간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여성의 현실이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과 강화길의 『다른 사람』(한겨레출판 2017)과 같은 소설로나마 가시화됐을 때, 이 작품들은 그마저도 보지 않으려는 독자를 향해 “인생을 통틀어 젠더 차별의 피해자로 지속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쪽”(38면)은 ‘왜 여성인지’를 질문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현실을 변혁시키기 위한 운동의 차원으로 비평의 역할을 넓혀 생각한다면 조연정의 글은 문학이 발현하는 정치성에 대한 주제로까지 확장할 수 있겠다.

랑시에르(J. Rancière)의 의견을 빌려 말하자면 ‘미학적 새로움’의 근거로 ‘여성의 현실’을 제시하는 입장은 해당 작품들이 ‘현실-되기의 정치’를 실현한다고 보는 것에 가깝다.9 이와 같은 입장은 이전에는 공적인 담론에서 가시화되지 않았던 현실이 작품으로 드러났을 때 ‘새롭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이 드러나는 그 자체만을 가지고 새롭다고 얘기하는 순간, 문학은 ‘하나의 대체적인 정치적 기능’을 부여받는 영역에 머물게 된다. 한편 이 반대편에는 문학이 현실에서 떨어져나가야 현실에 대한 저항을 수행한다는 방식으로 ‘문학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입장이 있다. 하지만 문학을 현실에서 떨어뜨리는 입장은 문학의 역할을 미학적 새로움에 의해 ‘사회적 중재 기능’을 담당하는 자족적인 영역으로 한정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와 같은 입장은 문학이 현실의 재현 그 자체보다는 ‘비(非)재현’ 또는 ‘반(反)재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여기므로, ‘절박한 현실’일수록 더욱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소설이 삶의 진정한 현시 형태와 온전히 일치할 수 없”고, 역으로 문학을 통한 “순수하고 평등한 감각체험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고 보는 것” 역시 옳다고만은 할 수 없겠다.10 요컨대 최근 문학비평 현장에서 벌어지는 페미니즘 논쟁은 허구의 형식을 빌린 문학이 ‘문학’의 방식으로 현실과 어떻게 만나는지, 그 재현의 작동방식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다. 백지연이 지적했듯, 뛰어난 문학작품은 폭력과 차별의 현실을 “고발”의 차원으로 담는 “사회적 담론의 형식”과는 다르게 “‘살아 있는’ 존재의 삶 속에서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감동을 전하기 때문이다.11

가령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예시로 마련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현실을 문학작품에 담을 때 ‘새로운’ 미학적 기준을 요청하지 않고, 삶 자체가 스스로 살아나는 바를 충실히 전달하는지를 판가름하는 ‘재현’의 원리에 따라 평가하면 어떨까? 『82년생 김지영』에서 주인공인 ‘김지영’의 목소리가 정신과 의사의 분석 리포트를 거쳐서야 들리는 것이라면, 리포트를 채우는 ‘규범적 언술’에 기대어 진행되는 서사는 처음부터 ‘김지영’이라는 인물의 고유함을 놓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김지영’이라는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김지영’의 삶이 전부 설명 가능하다고 여기는 편협한 시선을 개입시킨 상황 자체가 이중으로 구속된 여성의 현실을 상기케 하는 바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정된 재현의 실패가 현실의 여성들이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문제를 상대하고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애쓰는지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게 하기보다는 ‘김지영’이라는 인물을 주어진 상황에 종속시킴으로써 여성의 삶에 대한 상상 역시도 차단해버리는 효과를 낳고 있지는 않은가? 한편 소설이 여러 자료를 동원하여 ‘김지영’의 실존을 증명하려 할 때마다 “자기동일적 주체의 허구성”12이 폭로되는 것으로 논의가 이어진다면 어떨까? 과연 여성의 이야기는 ‘김지영’의 것만으로 충분할까?

백지은의 고민도 여기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있는 것 같다. 백지은이 “여성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구조와 체계에 안착하지 못한 무언가를 섬세하게 수긍하는 쪽보다는 그것이 우리 사회의 구조와 체계를 탈구시키도록 더욱 예민하게 자각하는 쪽으로 읽혀야 한다”고 말할 때,13 이는 젠더불평등에 의한 억압의 차원을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의 일상과 정치로 얽어내는 문학의 작업이 더욱 섬세해졌으면 한다는 요청으로 들린다. “개별 존재들의 존엄성이 인정받는 평등한 삶을 위한 노력은 단순히 제도를 철폐하거나 초월하는 방식으로 성취되지 않”고, “현실의 적응과 극복은 불가피하게 당면한 현실의 압력을 견뎌내는 제도의 안과 밖에서 동시에 이중적으로 수행”되는 상황을 고려할 때,14 문학은 문학의 형식으로 현실을 읽는 눈을 확보함으로써 사회를 다르게 조명하고 거기에 동참한 사람들의 인식과 편견을 바꾸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3. 문학의 공공성 논쟁이 던지는 질문: ‘무엇을 향해’ 말하는가?

 

한편 최진석이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비평가들의 논쟁에서 특히 “작품이 독자대중과 내밀하게 정동하고 있는” 측면을 반기는 입장에 주목하면서 “한국문학은 대중의 정동, 나아가 공통성에 직접 접속함으로써 문학 ‘바깥’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쓰기의 범람을 경험하는 중”(59면)이라고 말할 때, 그가 주장하는 바는 비평이 “‘커먼즈’로서 문학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공-동성의 사건화”(50면)를 정립하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15 그가 봤을 때 현재 한국사회의 지형은 “언어든 정동이든” “공통적인 것마저 자본에 의해 식민화”(61면)되어 있으므로, 비평에 “‘우리 시대 진리의 정치를 새롭게 사유’하는 기능과 임무”(63면)를 맡겨 “대중의 정동을 포착하여 사건을 사건으로 남겨두는”, “현재의 사건이 또다른 사건으로 이어지도록 관찰하고 촉발하는”(66면) 활동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진석의 논의에서 제기되는 의문을 차례로 살피다보면, 현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당연시 여기는 소유관계를 재배치하는 상상력을 키우고 시스템에 관여하는 제관계를 다르게 실험할 수 있는 문학을 매개로 ‘공공성’을 고민할 때 비평의 과제는 무엇인지 다시금 헤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첫째, 현재 “다양한 쓰기의 범람”이 “일어나는” “문학 ‘바깥’”(59면)이라는 범위 설정에 대하여.

이를 거론하기 위해서는 최진석이 상정하는 ‘문학’의 실체가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는 부르디외(P. Bourdieu)와 델포(G. Delfau)의 의견을 경유하면서 문학에서 논할 수 있는 ‘공공성’의 영역을 (문학작품을 ‘상품’으로 생산하고 공급하는 과정인) 출판시장에 한정한다.16 이에 따라 그가 정의하는 문학의 ‘공공성’이란 제도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니만큼 “국가적 공공성”을 형성하기 위해 길러지는 “‘정상적’ 시민”의 “최소한의 교양”(53면)과 연관된 성격으로만 수렴된다. 그의 입장에서 문학은 “삶과 예술의 근대적 분열”(60면) 하에서 ‘제도화된 예술’의 편에 서 있지만 문학을 구성하는 언어는 (문학상품을 생산하는 제도의 구성원으로서의) 생산자와 (“수동적 소비자에 머물러 있던”) 대중 모두의 “공통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문학이 그 내부에서 “예술과 삶의 오랜 분열을 극복하는 시도”(56면)를 할 수 있고, ‘대중’이 공통의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제도 바깥’으로 문학의 역할을 확장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최진석이 문학의 공공성을 사유할 때 제도로 수렴되지 않은 문학의 역할은 애초부터 논의에서 차단된다. 문학이 상대하는 ‘바깥’을 ‘제도의 바깥’이라 할 때, 그곳은 고작 지금 체제 내부만으로 한정될 우려가 있다. 게다가 ‘삶’과 ‘예술’이 유리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은 문학의 과제를 ‘제도로부터의 탈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만듦으로써 도리어 ‘삶’이라는 표현을 제도와 무관한 숭고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 결과에 다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이러한 논의에서 소환하는 ‘작가/생산자/엘리트’와 ‘독자/소비자/대중’ 사이의 뚜렷한 분절 역시도 비평을 초월적인 위치에 자리매김하기 위한 서두로 기능할 수 있다.

물론 그가 제도로 수렴해서 거론하는 ‘근대문학’은 지금 시기를 “탈근대”(54면)로 정의하기 때문에 꺼낼 수 있는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논의하는 문학이란 좀더 정확히 말해 ‘자본주의 세계체제 하에서의 문학’일 텐데, 지금의 체제하에서도 ‘제도 바깥의 바깥’으로까지 문학의 공공성에 대한 논의를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비평의 역능은 여기에서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최진석은 한국문학이 체제의 바깥을 말하는 데까진 나아가지 못한다고 상정했을 때 가능한 논의를 펼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둘째, 비평의 과제를 ‘정동’의 파악으로 구체화하는 것에 대하여.

최진석은 현재를 “대중의 (무)의식적 감각에 직접 촉수를 맞대는 공통적인 것”(58면)으로 “문학장의 기반이 변형”된 시기로 진단하면서, “창조적 정동의 주체로서 대중 전체가 호출되고 기존의 장르형식이나 글쓰기 형태의 외연이 확장되고 있는 우리 시대에 비평가의 전통적 위상은 더할 나위 없이 좁아져버렸다”(60면)고 평한다. 그가 보기에 앞으로 비평이 할 일은 그러므로 “작가와 독자를 연결시키고, 이들에게 공통의 언어를 기입”하는 “(무)의식적인 감각의 운동으로서 정동”(59면) 파악에 국한된다. 그러나 정말 그게 전부일까. 작품을 읽으면서 비평이 할 일이란 오직 ‘공통의 언어’로서의 공감 지점을 찾아나서는, 소위 ‘정동적 반응’을 살피는 응답의 차원밖에는 없는 것인가.

최근 스타트업 종사자들의 생활을 핍진하게 담았다는 이유로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되었던 장류진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창작과비평』 2018년 가을호)을 예시로 생각해보자. 만약 비평이 대중의 정동을 파악하는 관찰자의 위치를 점한다고 가정한다면, 해당 소설은 많은 사람들이 호응한 작품이니만큼 ‘당연히’ 비평의 대상으로 다뤄져야 할 것이다. 그다음 비평이 할 일은 이 작품에 대한 관심도가 왜 이렇게 높은지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것으로 갈음될 것이다. 가령 소설에서 화폐가 아닌 ‘포인트’로 임금을 받는 장면이 등장했을 때 SNS상에서 독자들은 이것이 현실화될까봐 뜨악해하는 반응을 보였는데, 이를 통해 독자들은 ‘그럴듯한’ 이야기에서 재미를 느낄 뿐 아니라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 일으키는 감정의 동요로부터 재미를 얻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의 차원을 미리 보여주면서 독자들의 감정을 특정 경로로 이끄는 작품이 독자로 하여금 현실을 방어적인 프레임으로 바라보게 하면서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다.

물론 이처럼 독자들이 어디에서 흥미를 느끼는지 파악하는 과정은 시대를 조망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식일 수 있다. 그러나 비평이 대중의 정동을 파악하는 데까지만 말한다면, 비평은 ‘그들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짐작으로 채워지는 소극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SNS상에서 장류진의 소설에 대해 ‘하이퍼 리얼리즘’ ‘호러 리얼리즘’이라는 창의적인 표현이 등장하고 있는 지금, ‘정동의 파악’이라는 역할로 한정하지 않는다면 비평이 논의할 수 있는 주제는 늘어날 것이다. 이를테면 비평은 소설의 리얼리티 확보 방식에 대해서 충실하게 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일의 기쁨과 슬픔」을 통해 말하자면, 소설이 당도한 (‘갑질’의 피해를 입은 ‘거북이알’과 화자인 ‘안나’의 ‘덕질’로 이룩되는 연대라는) 결말에 대해서는 어떤가? 해당 결말을 씁쓸하지만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여겨야 하는지, 소위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찾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한 자기정당화일 수 있다고 봐야 하는지 더 논의해볼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현실에서 비롯된 상상력과, 현실에서 조명되지 못한 장면들과, 현실을 통과해 만들어지는 현실 바깥을 형성하는 사유에 대해서는 어떤가?

비평의 과제가 대중의 정동을 파악하는 것으로 제한될 때, 비평의 몫은 우리 사회가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에서 그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경로의 확인 자체만이 아니라 그 경로가 어디를 향하는지, 잘못된 경로라면 어떻게 바꿔서 나갈지, 어떤 경로가 지금보다 더 나은지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에 있다.

셋째, 문학 현장을 구성하는 이들을 염두에 둘 때 ‘대중/독자’와 ‘비평가’를 구분하는 일이 타당한지에 대해서.

최진석이 “문화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대중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콘텐츠를 개발하고 플랫폼을 제작함으로써 일종의 비평가적 역할을 자임하게 되었다”(60~61면)라고 말할 때 “자임”이라는 표현은 일견 답답한 느낌을 준다. 작가(생산자)와 독자(소비자)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듯이, 등단과 비등단자의 구분을 굳이 의식하지 말고 비평적 대화에 참여하는 순간 누구나 비평가가 된다고 볼 수는 없을까?17 이전에는 ‘대중/독자’와 ‘비평가’가 확연히 구분되고 지금은 아니라는 방식으로 ‘대중/독자’와 ‘비평가’를 명확히 분절하는 논의가 오히려 기존의 비평가에게 권위를 실어주는 효과를 낳고 있는 건 아닐까?

‘비평가’는 다른 무엇도 아닌 ‘독자’의 한 사람이다. 최원식은 표절사태 이후 한국문학의 비평문화를 진단하는 글에서 “비평가란 좋은 독자라는 원칙을 다시 확인하는 데서 출발하고 싶다”고 말했다.18 비평행위가 “자대도 말고 자소도 말고, 작가의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니고, 오로지 독자로서의 책임과 긍지를 지니고 작가와의 협상에 당당히, 그러나 겸허히 임”19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할 때, 문학 현장에서는 좀더 다양한 의미의 구축과 좀더 나은 가치의 창조가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비평이 공공성에 대한 논의를 이어갈 때 치열하게 살펴야 할 것은 ‘누가’ 말하는가가 아니라 그 말하기가 ‘무엇을 향한’ 것인지에 있다.

 

 

4. 비평이 왜 중요한가: 기억투쟁으로서의 비평

 

1장에서 밝힌 본고의 목표 중에는 “문학비평이 재미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가기”가 있었다. 기실 모든 것이 엔터테인먼트가 되기를 바라는 듯한 요즘 상황에서 비평마저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재미’라는 표현을 쓴 건 아니다. 문학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할 수 있는지를 살피는 비평의 작업은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삶’에 대한 바람을 토대 삼아서 진전하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충실히 생각하고, 생각한 바를 다른 이들과 나누는 과정을 필히 동반하기에, 이러한 작업이 진행되다보면 삶에 대한 관성보다는 삶을 향한 활력을 얻을 수 있으므로 꺼내든 표현에 가깝다.

촛불이 기득권 세력의 적폐를 물리치는 일을 일상에서 행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했다면, 이 글은 현재 한국문학 비평 현장에서 진행되는 논쟁에 구체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으로 그 과제를 수행하고자 했다. 문학비평이 싸워야 할 적폐는 ‘으레 그럴 것’이라는 단정을 통해 문학에 대해서 더이상 말하지 않고 답보상태를 자처하는 것, 혹은 자기충족적인 해석의 세계를 형성해 그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는 것, 요컨대 대화를 차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길게 살펴본바, 촛불 이후 한국문학 비평 현장은 비평 스스로 자기폐쇄성을 깨기 위한 분투의 장과 다름없었다. 의미있는 여러 입장들을 차례로 상대하고자 한 이 글은 문학비평 역시도 지금 이 자리에서의 싸움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혁명을 의미화하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증거로 있고자 했다. 이 논쟁이 삶의 어떤 부분을 얼마만큼 건드리는지는 앞으로 여러 비평적 입장들이 계속해서 부딪치고 갈등하는 속에서 질문의 심화와 논의의 확장 정도에 따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비평행위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어지는지에 따라 촛불 이후의 시기를 살고 있는 지금의 문학을 어떻게 기억할지에 대한 판가름이 난다는 얘기다.

비평이 왜 중요한가. 그것은 비평이 문학을 어떻게 기억할지를 끊임없이 겨루는 논쟁의 장으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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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낙청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19면.
  2. 같은 글 24면.
  3. 쉽게 바뀌지 않는 한국사회의 구조가 다른 미래에 대한 상상을 중단시키고, 정해진 결론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무력감을 가중시키는 방식으로 ‘어차피’라는 자조적인 말을 활용하게 한다는 내용을 언급한 글로는 졸고 「삶은 부사(副詞)와 같다고」(한겨레신문 2016.2.25); 백영경 「‘어차피’ 오는 변화는 없다」(『창작과비평』 2016년 가을호) 참조.
  4. 해당 시기에 창간된 문예지들에서 비평 지면이 줄어든 상황을 주목한 글로는 장은정 「설계-비평」, 『창작과비평』 2018년 봄호 참조. 비평가들이 충분히 발언할 만한 지면이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비평의 독자들이 거의 실종 상태인 현재를 진단하면서 ‘비평 무용론’ ‘비평 위기론’의 근거를 살피고, 문학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최근의 비평문들을 꼼꼼하게 따져 읽은 글로는 강경석 「비판적 조감 1: 2018년 봄의 비평들」, 『21세기문학』 2018년 여름호 참조.
  5. 2010년대 초반 위기와 종말 담론을 심심찮게 등장시켰던 비평들이 사유한 ‘문학의 위기’는 무엇보다 ‘문학의 위기에 관한 이론’이었음을 밝혀내고, 비평에서 이론의 도입이 갖는 가능성과 문제점을 이중적으로 살핌으로써 문학의 공간에서 작동하는 비평의 정치를 그린 작업으로는 황정아 「비평의 위기, 비평의 정치」, 『개념 비평의 인문학』, 창비 2015 참조.
  6. 조연정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2018년 한국 문학의 여성 서사가 놓인 자리」, 『릿터』 2018년 8/9월호. 이하 면수만 표기.
  7. 같은 글에서 조연정이 일별하기도 했거니와 여기에 속하는 비평으로는 황현경 「소설이라는 형식: 요즘 소설 감상기」, 『문학동네』 2018년 봄호; 복도훈 「유머로서의 비평: 축제, 진혼, 상처를 무대화한 비평의 10년을 되돌아보기」,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8년 봄호.
  8. 조연정은 문학에서 지금껏 제대로 대변되지 못한 자신의 삶을 읽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 ‘명료한 사실’로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으로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을 주목한 김미정의 논평을 참조하면서, 『82년생 김지영』을 위시한 최근의 페미니즘 이슈를 쟁점화하는 작품들이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데 힘을 보탠다. 김미정의 글에서 『82년생 김지영』은 “특정다수와 호환되기 쉬운 주어의 문체” 덕분에 독자들이 “이제껏 대변되지 못해온 자기를 읽”기 위한 “당사자성”을 획득한 작품으로 읽힌다.(김미정 「흔들리는 재현·대의의 시간」, 『문학들』 2017년 겨울호 참조) ‘재현’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요청하는 본고는 이러한 김미정의 논의가 ‘재현’(represent)을 대의 민주주의하에서의 ‘대표’ 및 ‘대변’, ‘대리’의 의미 정도로 축소시켰을 때 가능한 것일 수 있다는 입장에 있다.
  9. 랑시에르에 따르면 ‘미학적 체제’에서는 ‘예술의 정치’가 두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하나는 “삶과 분리된 예술임을 부인함으로써” “예술을 분리하지 않는 삶을 현실화하려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지배적 삶의 형식에서 스스로 떨어져나옴으로써 그런 삶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랑시에르는 삶과 동화되는 ‘삶-되기의 정치’와 삶을 거부하는 ‘저항형식의 정치’ 사이의 긴장이 미학적 체제가 가능하도록 만들었지만 그 동력을 상실하면서 문학의 정치가 “합의”의 문제로 전락한 바를 언급한다. 이때 문학은 “‘하나의 대체적인 정치적 기능’을 부여받아 점점 더 정치적 개입”만을 형성하거나 “사회적 중재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황정아는 2010년대 초 “자기패배적인 시선으로 문학의 위기를 곱씹은 비평의 분위기”가 “‘문학의 정치’ 논의와 함께 일순 전환”되었을 때 랑시에르의 이와 같은 논의가 적극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간의 비평이 한국문학의 풍경을 “약간의 아이러니를 가미하며 고루하지 않게 일상의 연대를 재구축하는 기획”과 “그런 일상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섬뜩한 재앙과 트라우마를 증언하려는 기획”이 전부인 것처럼 관찰해왔던 것은 아닌지 성찰한다. 황정아, 앞의 글 294~98면 참조.
  10. 황정아 「사실주의 소설의 정치성」,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세계의 소설론과 미학의 쟁점들』, 창비 2015, 180면.
  11. 백지연 「페미니즘과 공공의 삶, 그리고 문학」,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 창비 2018, 128~29면.
  12. 김영희 「페미니즘과 근대성」, 『이중과제론』, 창비 2009, 129면.
  13. 백지은 「당대의 여성 서사가 우리를」, 『릿터』 2018년 8/9월호 34면.
  14. 백지연, 앞의 글 132면.
  15. 최진석 「공-동적 사건의 비평을 위하여: 문학이라는 커먼즈와 비평의 문제」,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면수만 표기.
  16. “근대문학은 작가와 독자라는 개인뿐 아니라 비평과 문단, 출판산업과 시장 등의 외부적 요소들로 구성되어왔다. 특히 문학시스템과 관련하여 공공성이란 문학상품을 생산해 시장에 공급했을 때 ‘공정한 계약’이 발생하는 조건을 감독하는 역할이었다.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시민사회 내부를 자율적으로 규율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공적인 것(Res publica)이라는 개념이 요구되었고, 문학장 또한 거기에 의존했던 것이다. 이것이 문학적 근대성의 제도적 기반이며, 개인주의의 신화로 포장된 문학은 그렇게 근대성의 공적 평면에 연결된다.”(52~53면).
  17. 앞서의 서술은 어쩌면 논의를 진행하는 비평가 자신은 대중의 한 사람이었고 기존의 비평가들은 대중의 반대편에 있었다는 식으로 경계를 세우는 효과를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등단제도를 통해 직업 비평가의 길을 걷는 이들이 다른 이들에 비해 발표지면을 확보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비평이라는 (비평문을 읽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설득의 말하기’를 진행한다는 차원의) 권력행위에 대한 논의를 (비평행위의 충실성을 떠나) ‘등단’을 통한 발표지면 확보 유불리로 치환하는 논리로 읽히기 쉽다.
  18. 최원식 「우리 시대 비평의 몫?」, 『문학과 진보』, 창비 2018, 37면.
  19. 같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