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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페미니즘 소설의 감정지도 그리기

 

 

이선옥 李仙玉

숙명여대 교수. 주요 논문으로 「1960년대 과학주의 담론의 신체화」 「한국적 칙릿의 특성」 「박완서 문학의 여성성」, 공저 『내 안의 여성콤플렉스7』 등이 있음. sun-oklee@hanmail.net

 

 

1. 페미니즘 리부트와 문학사기술의 쟁점

 

요즘 강의실에 민얼굴에 짧은 커트머리의 여자대학생들이 많아졌음을 확연히 느낀다. 불과 이삼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학생이 긴 생머리를 고수하던 것에 비하면 눈에 띄는 변화다. 하얀 얼굴과 긴 생머리는 순수함을 상징하는 소녀성으로 여성성을 센티멘털리즘1으로 구성하는 외모적 요소이다. 여성성 중에서도 어머니, 아내, 애인의 역할 중 애인의 역할에 대한 요소로 감성과 낭만을 몸으로 구현하는 여성에 대한 오랜 문학적 클리셰이기도 하다. 그런 소녀들이 변하고 있다. 투블록의 짧은 머리에 여성적 곡선을 강조하는 의복을 벗어던진 탈코르셋운동은 여성성의 가면을 더이상 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탈코르셋’을 스스로 말하는 그녀들을 보면 최근 여성들의 변화를 체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역시도 기시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어딘가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그녀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들 역시 짧은 커트머리에 유니섹스 모드의 헐렁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시대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비슷했다. 그러나 1980년대의 그녀들과 2018년의 그녀들은 확실히 달라졌다. 남성들과 같아지려 했던 1980년대 평등운동의 이념은 일상의 여성성을 지우고 민주화의 주체로 거듭나려 했다는 점에서 여성성의 문제가 잠복되거나 미끄러지거나 혹은 침묵되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외모 변화는 명확히 탈코르셋, 즉 억압적 여성성을 벗어던지는 젠더적 주체의 선택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다른 지점에 서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시작해 미투운동과 탈코르셋운동, 메갈리안의 미러링과 불꽃페미액션의 혜화동 시위로 이어진 여성운동의 새로운 흐름은 리부트(reboot)라는 용어로 명명된다. 영화의 시리즈물 제작에서 전작의 기존 설정 등을 갈아엎고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리부트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이삼십대 여성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페미니즘운동의 자기정체성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2 최근의 페미니즘이 리부트하고 싶은 시리즈물의 전작은 무엇일까. 왜 전 시대와 연계하기보다는 갈아엎는 쪽을 택한 것일까.

이런 질문들은 페미니즘 문학이 지금 제기하는 쟁점들 역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정치적 올바름과 미학성은 관점이론(standpoint theory)이 지니는 오랜 고민이었고, 페미니즘을 표방한 작품들뿐만 아니라 문학사를 여성의 관점에서 다시보기(re-vision)하는 작업들 역시도 정치적 올바름과 미학성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을 표방하는 작품들에 대해 도식적이라고 평가하는 미학적 기준 자체에 대해서는 우리가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여성문학사를 다시 쓰고자 하는 연구자들이 고민하는 리부트의 지점은 미학성에 대한 질문으로 보인다.3 최근 출간된 페미니즘 시각으로 문학사 다시쓰기를 시도한 책에서도 이러한 질문을 볼 수 있다.

 

정체성정치에서 발원하지 않은 진보와 연대의 정치란 성립할 수 없으며, 다원적 성별 및 섹슈얼리티 체계와 무관한 ‘정치적 올바름’이나 ‘미학적인 것’이라는 개념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최근 ‘페미니즘 소설’을 비평하기 위해서는 ‘미학성’이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규준 외에 ‘젊은 독자들의 새로운 ‘상식’과 정치적·문화적 역동’이라는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는 마땅한 제안과 함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입체적 논의 또한 요청되는 이유다.4

 

이 글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정체성정치에서 발원하지 않은 어떤 연대도, 정치적 올바름도, 미학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서사적 시민권이나 독자들의 정치적·문화적 역동 등의 새로운 용어를 사용해 설명하고 있지만 민족과 계급, 젠더의 복합성을 고민했던 초기의 여성문학 논의에서도 제기되었던 부분이다. 이후 집합적 주체(collective subjectivity) 개념을 거쳐 교차성(intersectionality) 논의까지 여성주체 개념에서도 복합성과 연대에 대한 문제는 지속적으로 고민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의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논의의 신선함은 정체성정치를 명확히 중심에 두고 연대의 개념이나 미학적 개념이나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의 명료함 때문일 것이다.5 기존의 여성문학 논의에서는 민족민중문학의 동일성 주체에 대한 과잉 상상력에 균열을 내고 복합적 주체에 대한 상상력을 이끌어내려 노력했다면, 지금의 논의들은 명백하게 전복적 상상력을 보여주려 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점이 있다면 선명성에서 오는 단순화에 대한 우려이다. 오혜진의 글에서도 그런 우려가 보이는데, ‘이야기꾼’에 대한 재평가가 그러하다.

앞서 인용한 오혜진의 글은 천명관과 정유정의 작품에 대해 고평의 기준이 되었던 ‘이야기꾼’이라는 미적 규준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그간의 리얼리즘 문학론에서 강조해온 이야기꾼, 즉 장편서사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사실은 복고적인 과거로의 회귀를 욕망하는 남성중심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 때문에 소수자들에 대한 서사적 시민권이 억압되거나 무시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장편서사성에 대한 민족문학사의 미적 규준이 남성중심의 공동체에 대한 회귀적 욕망과 관련된다는 비판은 일견 공감되지만6 이야기성 자체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간의 남성중심적 미적 규준에 대한 비판은 1990년대 후반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이 보여주었던 선명성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호미 바바(Homi K. Bhabha)의 제국주의 모방서사(mimicry)에 대한 이론이 수용되면서 최정무 등의 이론가들이 보여주었던 탈식민주의 페미니즘7은 식민지민족해방문학이 기실은 제국주의 모방서사이며, 훼손된 남성성의 회복을 위해 여성을 혐오하고 계몽하는 방식으로 스스로 계몽자의 위치를 획득하는 남성중심적 서사임을 밝힌 바 있다. 이상의 「날개」가 보여주는 여성혐오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식민지 민족주의도 제국주의의 민족주의도 가부장적 남성동맹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닮아 있다고 주장하는 이 책은 민족주의가 성별화되고(gendered), 성애화된(sexualized) 관계를 재생산한다고 비판한다. 특히 식민지를 거치면서 훼손된 남성성을 회복하기 위해 여성에 대한 계몽자로서의 위치(식민지를 계몽하는 제국주의적 계몽자와 유사한 방식)를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모순적이게도 식민지 민족주의는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성이 강화된다고 주장한다.8

 

여성주의와 민족주의는 근대성의 모순이 낳은 산물이다. 근대성의 프로젝트인 여성 운동은 형제애로 충만한 공동체를 상상하는 민족주의와 상충한다. 민족주의는 개인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관념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구체제의 계급적 위계질서를 재구성해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국가를 단일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성과 인종을 차별하는 데 이용되어 온 것이 바로 이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의 개념이기도 하다.9

 

이런 관점은 문학사 논쟁에도 그대로 이어져 민족문학사 서술이 남성중심적일 수밖에 없다는 회의론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식민지 시기의 민족문학도 이 관점에서 보면 가부장성의 강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점은 식민지 시기의 저항문학 전체를 제국주의 모방으로 몰고 가는 위험을 안고 있다. 모방은 국경을 넘어서면서 전혀 다른 수용 맥락과 균열적 텍스트를 만든다는 점을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이상의 「날개」가 보여주는 자기분열적 주체는 그리 쉽게 계몽자의 위치로 봉합되지 못한다. 제국주의적 계몽의 모방이라고 단언하기에는 각각의 텍스트가 지니는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해서 좀더 섬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문학사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여전히 민족, 민중이며 그 삶의 재현 가능성에 놓여 있다면 여성문학과의 갈등은 문제적이고 풀리지 않는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근본적으로 민족문학사는 민족이라는 동일성의 판타지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최근 페미니즘 비평이 보여주는 강력한 문제제기 역시 문학사 서술에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민족은 신자유주의시장에서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공동체이며, 그로 인한 담론적 공감력 역시도 만만치 않다. 분단국가로서의 삶의 질곡이나 전쟁의 경험 또한 단순한 상상력이 아닌 경험적 현실인 상황에서 여성의 현실에 대한 재현은 늘 뒷전이게 마련이다. 그간 페미니즘을 표방한 작품에 흔히 내려지던 도식적이라는 평가도 이러한 재현의 위계에서 온 관습은 아닌가 질문해보아야 한다.

문제는 남성중심성에 대한 네거티브비평이 단순화될 우려뿐만 아니라 대안적 미적 규준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10 여성의 대안담론에 대한 논의에서는 흔히 비체(abject)되기를 들고 있는데, 최근 담론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패러디나 미러링이 그러한 예다. 여성의 오염물이미지11의 비체를 재전유함으로써 비체에 행위자성을 부여하고 혐오의 구조에 틈을 내는 전략이다. 젠더패러디, 가면쓰기, 잡년되기, 여성성의 재전유 등이 그런 전략으로 등장하고 있다.12 문제는 서사의 경우 그러한 전유와 해체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미학적 규준이 훨씬 더 견고하고 독자와의 소통도 인터넷 담론처럼 직접적 피드백과 패러디물의 재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 텍스트 독서는 미학적 성과보다는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 평가받아온 데서 짐작 가능하듯이 독자대중과의 소통이 중요하다. 또한 당대의 페미니즘 운동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페미니즘 텍스트는 각 시대마다 제기되었던 평등의 이슈들을 담아내고 당대의 여성독자들과 공감하는 방식으로 존재해온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독자성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미학적 규준들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기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글은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표어를 내건 작품들의 다시읽기를 시도하는 글이 될 것이다. 김진옥의 『나신』(우일문화사 1978), 박완서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삼진기획 1989),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이 세 작품은 각 시대의 페미니즘 운동과 조응하는 작품들이다. 작품에 여성해방이론을 전경화해서 싣기도 하고, 가족법 개정 문제나 현실의 기사들이 작품에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에세이와 소설의 장르해체적 특징을 보인다. 또한 독자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고 여성운동의 담론장 속에서 수용되고 논의되었다는 점에서도 함께 읽어볼 만하다. 늘 그렇듯 페미니즘 작품이 지니는 관념성이나 도식성 등 미학적 결함에 대한 비판 또한 이 작품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당대의 문학현상을 일으키고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야기는 새로움이기보다는 보편적 여성의 삶에 기반하고 있어서 그 이야기의 공감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가설이 이 글의 출발이다. 이야기보다는 감정에 대한 공감이 더 큰 것은 아닐까. 각각의 작품들이 교감하고자 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이 가설이 좀더 실체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에 의하면 감정은 소중함(가치)의 지각에 대한 지적 반응이고, 감정은 윤리적 판단의 중요한 체계가 된다. 예를 들어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너무 강렬하고 고통스러워서 나의 행동과 행복의 가치 모두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법의 기준이나 양형 역시도 혐오스러운 것, 두려운 것을 피하는 감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왔다. 결국 감정은 단순히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가늠(appraisal) 또는 가치에 대한 판단으로, 항상 어떤 대상의 중대함이나 중요함에 대한 생각과 결합되어 있는 어떤 생각을 포함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슬픔, 두려움, 기쁨, 희망, 분노, 감사, 미움, 질투, 질시, 동정, 죄의식 등 감정은 육체의 욕구와 구분되는 것으로 대상에 대한 중요성을 판단하는 윤리적 기준이 된다.13 이 글에서는 마사 누스바움의 감정 개념을 사용하여 세 작품이 독자와 어떤 감정을 공감하고 그것이 대상에 대한 어떤 판단을 내포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 작품들이 다른 미적 규준에 의해 구성되고 변화해간다는 특징이 밝혀지길 기대한다.

 

 

2. 김진옥 『나신』: 분노,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기록

 

페미니즘을 표방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은 김진옥의 『나신』이라 할 수 있다.14 1978년 출간 당시 표지 문구도 “남성 본위의 가치관에 도전하는 현대여성의 도약!”이라고 당당히 명시되어 있다. 김치수는 이 작품에 대해 당시로서는 거의 처음 등장한 새로운 소설이며, “여성의 인간 회복 혹은 인격 회복을 위한 싸움”15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가부장적 결혼제도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공감을 주면서도 주인공이 자신의 뜻대로 삶을 이끌고 여성해방에 이를 수 있다는 너무 쉬운 결론16은 현실감이 부족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주인공 설지영은 35세 남편과 동갑으로 영문과 전임강사이면서 시인이자 주부로서의 역할을 해내느라 고군분투하는 인물이다. 홀로 된 시아버지와 친정어머니를 함께 모시기로 하면서 벌어지는 시집살이를 통해 자아각성에 이르게 된다. 어느날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고 이혼을 요구하지만 남편 재일은 지영을 강간하고 그로 인해 임신하게 된 지영은 낙태수술을 받고 이혼을 강행한다. 그러다 미국유학 시절 알고 지냈던 화가 이현우와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고 오랫동안 사랑해왔다는 그의 고백을 통해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결혼 없는 동반자관계를 이루어가기로 한다. 이러한 이현우와의 비동거가족 형태는 여성해방운동의 영향을 보여주는 새로운 가족 형태라고 평가되기도17 하는데, 이같은 영향이 작품의 도처에 드러난다.

이 작품에는 여성해방론의 교과서 같은 내용들이 가득하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아무 이유없이, 죄없이 받는 형벌—만일 이유가 있었다면 그저 여자로 태어났다는 선천적인, 지극히 우연히 점찍힌 그 자연의, 운명의, 혹은 남성 본위의 인류사회”(9면)가 자행하는 형벌을 받는 존재라고 서술하고 있다. 남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그리고 자신이 속깊이 열등시하고 있는 혹은 멸시하고 있는 여자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신과 꼭 같은 인간, 오직 생리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과 조금도 다름없는 어둡고 괴로운 인간조건에 예속돼 있으며 자신과 조금도 다름없는 정신과 육체, 욕망과 고뇌를 가진 자매혼 혹은 형제인 인간이라는 것을 잊고 있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과대망상증에 걸려 있는 인간일 따름이었다”(38면)라고 말한다. 또한 지영과 친구 난희, 옥진 세 여자가 새출발을 고민하는 이야기에서는 현대적인 여권론이 서술되기도 한다. 여성이 열등한 이유는 여성에게 괴상한 윤리관을 뒤집어씌워 키우기 때문이며, 설사 선천적으로 열등하다 하더라도 인간은 자연을 극복하는 존재인데 여성만 자연에 묶어두려 하지 않는다면 여성도 남성에 못지않은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는 주장을 지영의 입을 빌려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여성인물 설지영의 분노와 흥분, 억울함이 텍스트 전체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18 그 감정은 계몽적인 담론과 뒤섞여 작가의 것인지 인물의 것인지조차 경계가 모호할 정도이다. 집을 나와 거리를 방황하며 여성에 대한 부당함에 분노하는 내적 독백이 진행되는 대목은 당시 독자들에게 상당한 공감을 일으켰을 것으로 보인다. 학교를 그만두라는 시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심신이 지친 그녀가 미친 듯이 걸어가다 마주한 장면은 남편 재일의 화실에서 흘러나오는 환한 불빛과 맥주파티 현장이었다. 광기 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젊음과 자유를 구가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지영은 분노한다. “그녀는 부러웠던 것이다. 눈에 눈물이 고이도록 부러웠던 것, 그것은 남자에게는 가정이라는 혹이 없었다는 것이었다.”(35면) 세상은 아직도 전통과 관습의 칼을 휘두르며 여자를 난도질하고 있다고 지영은 생각한다.

주인공의 분노가 극에 달하는 장면은 집을 나가는 순간이다.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후 이혼을 요구하지만 아내를 오로지 전리품 정도로 여기는 남편은 강간으로 대응한다. 임신한 아이를 지우고 이혼을 요구하며 집을 나간 그녀는 길거리를 방황하며 비명처럼 다짐한다.

 

여자, 여자, 그 비참한 자연의 노예, 운명의 노리개, 종의 먹이……서러움이 복바쳐 올라와 그녀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난 절대로 그 자연의 노예로, 운명의 노리개로, 종의 먹이로 되돌아가진 않을 테다. 절대로, 절대로. 그녀는 속으로 외친다. 난 봉사도 희생도 안할 테다. 내가 믿지 않는 것에 봉사하지 않겠단 말야. 절대로 절대로 봉사 안할 테야.(112면)

 

여자로 태어나 헌신해야 한다는 관습을 절대로 따르지 않겠다는 그녀의 다짐은 서러움, 억울함,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읽다보면 유독 말줄임표가 많고—한면에 9개의 말줄임표가 쓰이는 경우도 있다(115면) —‘절대로 절대로’처럼 반복되는 어구도 많은데, 흥분된 감정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인 서술전략으로 보인다. 신경숙 소설의 말줄임표가 침묵과 저항적 수동성을 표현하는 서사전략이었다면, 김진옥 소설의 말줄임표는 분노를 표현하는 말더듬이 서사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분노는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억울함과 분함이 작품의 지배적 감정으로 드러난다. 감정은 나 자신의 안녕에 중대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외적인(즉 통제 불가능한) 것과 관련해 현재의 사태를 등록하는 나만의 방식19이라고 본다면 이 작품의 분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대상, 즉 가부장적 세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는 하나의 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노를 통해 이 시대의 독자들과 공감하고 소통했을 것이라 판단된다. 분노는 자신이 부당한 행위를 당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고 위해의 대상에 대한 복수의 감정이다.20 대상을 향한 분노는 이 시기 여성운동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한데, 아직은 여성들 간의 연대나 서로의 고통에 대한 공감 등이 잘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여서 분노의 감정이 앞서 있다. 특히 이 작품에는 아이에 대한 특별한 애도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점이 독특하다. 대상에 대한 분노에 압도되어 아직은 타인과의 공감으로 나아가지 못한 시기의 감정적 고립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1975년 세계 여성의 해가 선포되고 1979년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이 채택되는 등 1970년대는 성평등에 대한 요구가 전세계적인 운동으로 일어난 시기이다. 우리나라에도 여성해방이론서들이 197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여성운동의 흐름과는 달리 사회 전반적인 규범의 벽은 여전히 견고했기에 여성 작가들의 좌절과 분노가 작품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3. 박완서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슬픔, 정당한 것들을 향한 용기

 

1985년 『또 하나의 문화』와 『여성』이 여성문학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작한 시점부터 박완서의 『서 있는 여자』(학원사 1985)와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등의 페미니즘 작품과 중산층 여성의 삶을 다룬 작품들, 그리고 『나목』(1970)과 『엄마의 말뚝』 연작,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연작 등 전쟁의 증언과 재현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에 대한 평가는 늘 엇갈렸다.21 가부장제에 대한 인식과 중산층 여성의 삶의 질곡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전자의 작품들이 중요하게 언급되지만 박완서의 작품 역시 도식성과 대중성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전쟁 체험과 집합적 기억을 재구성해낸 후자의 작품들이 민족문학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면서 박완서 작품을 대표하는 앤솔러지가 되었다. 색과 맛으로 기억되는 일상적 기억과 짐승의 시간이 교차하는 독특한 여성적 기억의 방식은 전쟁을 공동체의 기억으로 재구성해내면서도 쉽사리 갈등을 해결하는 서사적 봉합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성적인 관점의 올바름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늘 페미니즘 작품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해온 것이 아닌가라는 찜찜함이 남아 있다. 여성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페미니즘 주제를 내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고민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호주제나 가족법에 대한 현실 담론이 그대로 서술되는 부분이나 인물의 도식성 등에 대해 미학적 결함이라고 평가할지, ‘몫 없는 자들의 몫’이 서사화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감각의 분할이 일어나는 것22으로 새롭게 해석해야 할지 갈림길에 서 있다. 박완서 자신도 좋은 문학이라면 저절로 페미니즘 문학이 되는 것23이라는 소극적 입장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박완서의 작품에서 페미니즘을 표방한 작품이 등장하는데, 『서 있는 여자』와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두 작품이다. 이 글에서는 슬픔과 정당한 것들을 향한 용기를 잘 보여주는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 소설은 여교사인 차문경이 미혼모가 된 후 아이의 친권과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 법정에 서는 이야기이다. 가부장적 호주제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삼은 작품으로 1988년 호주제폐지안이 다시 국회에 상정되었던 시대 상황과 조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경은 서른다섯살 이혼녀이고 동갑인 김혁주 역시 아내하고 사별한 홀아비다. 대학 동창인 이들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문경은 임신하지만 이혼녀는 안 된다는 혁주의 어머니 황여사의 반대로 헤어지게 된다. 혁주는 부유한 처녀에게 장가가서 잘 살다가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하게 되자 문경의 아들 문혁을 자신의 호적에 입적하려 한다. 교사직에서 해직되고 음탕한 여자로 손가락질당하며 악착같이 살아온 문경에게 아들 문혁은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다. 처음에는 호적에 입적시키겠다는 제안에 동의했지만 결국 아들을 빼앗아 가려는 술수였음을 알게 된 그녀는 스스로 공부하고 아들을 지키기 위해 법정에 서게 된다. 그리고 법정에서 승리하며 통쾌한 해피엔드를 그리지만 미혼모의 삶과 아이의 불안이 현실로 남아 있다.

이 작품의 결말에는 가족법의 부당함과 조정위원들의 가부장성이 얽힌 조정과정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차문경이 처음 아들의 입적에 동의했던 이유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부계혈통 사회니만치 홀로 모계혈통으로 기르는 외로움과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24기도 하고 아이를 원칙대로 키우는 것이 어미의 도리를 다한 것 같은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생모임을 기재해달라는 문경의 요구부터 삐거덕거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가정법원으로부터 출두하라는 통지서를 받게 된다. 김혁주가 제기한 자(子)인도 청구권 소송의 피신청인이 된 것이다. 그녀는 홀로 가족법을 공부해 “자에게 의사능력이 없는 경우라도 친권자의 인도청구권은 언제나 인정되어서는 안 되며 자의 복리를 위한 것인가를 고려하여 결정해야 한다”(187면) 라는 법적 근거를 찾아낸다. 이런 법조문을 그대로 서술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조정위원 방박사와의 관계는 여성단체의 재판조력 케이스를 보는 듯한 장면으로 박완서의 작품에서는 좀 낯설다. 그 때문에 계몽적 언술이 서사화되지 못한 채 미학적 결함으로 남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박완서의 작품에서 장르 경계 허물기는 늘 시도되는 서사전략이었고, 이 작품의 경우는 현실 담론이 좀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그 애에게 거는 저의 가장 찬란한 꿈이 뭔줄 아세요? 남자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여자를 이용하고 짓밟고 능멸해도 된다는 그 친부의 권리로부터 자유로운 신종 남자로 키우는 거죠. 그 꿈을 위해서도 그 애는 제가 키우고 싶어요”(191면)라는 차문경의 당찬 용기로 이어진다. 결국 문경은 자신의 아이를 부정했던 혁주의 편지를 찾아내고 이를 근거로 재판에서 승리한다.

 

차문경여사

여사가 본인의 아이를 낳았다구요? 여사의 말귀를 못 알아듣겠음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여사로부터 그와 같은 협박을 당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본인이 기억하고 있음을 환기시켜드리고자 합니다. 앞으로 다시 이런 허무맹랑한 협박으로 본인의 신성한 가정의 평화가 위협을 받을 시에는 여사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것이며 본인도 응분의 조치를 취할 것임을 경고합니다. ×년×월×일 김혁주(193면)

 

시뻘건 도장 자국이 가슴에 아리던 그 편지는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었고 문경이 승리하게 된다. 이 작품의 감정적 특징을 들라면 역시 슬픔이다. 생명과도 같은 아들을 잃는다는 슬픔, 그것이 지니는 윤리감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여성들이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박완서가 전달하는 감정의 교감이다. 마지막에 판사가 편지를 읽는 장면과 혁주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목에는 이러한 슬픔의 감정에 교감할 수 있는가라는 이 작품의 질문이 들어 있다.

판사가 이 편지를 읽었다. “전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여서 문경이도 처음 듣는 것처럼 귀를 기울였다. 그런 지독한 사연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읽을 수도 있구나. 그 여자는 아득한 낭패감에 사로잡혔다.”(195면) 그 순간 그녀는 그에게 제발 용기를 가지라고,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고 응원을 보낸다. “그래서 제발 정직하라고 마음으로부터 그 못난 남자를 격려하고 있었다. 문경이의 강렬하던 시선이 슬프고 따뜻하게 풀렸다.”(106면) 그 시선과 서로 스치는 순간 혁주는 ‘사실입니다’라고 인정한다.

아이를 잃는다는 것의 비통함,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사회가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에 박완서는 그리 큰 기대를 가지는 것 같지는 않다.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겨우 한순간의 교감이 아이를 구해냈지만 공감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판사들은 언제나 우리 사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정조는 슬픔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남아선호사상이나 아이를 빼앗아 가려는 이기적인 가부장적 가족 현실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텍스트를 지배한다. 그러나 그 분노의 끝에 박완서가 발견하는 감정은 슬픔이다. 소중한 것을 상실하는 슬픔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가부장적 현실을 넘어서는 윤리감에 대해 제안하는 것이다.

 

 

4.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쿨함 그 뒤에 오는 연민

 

최근의 독서시장은 페미니즘 붐이라 일컬어질 정도이고 비평장에서도 지식담론의 장에서도 페미니즘 논쟁으로 뜨거운데, 그 중심에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6)이 있다.25 이미 ‘김지영현상’이라 불릴 만큼 많은 평자들이 분석한 이 책을 감정의 측면에서 다시 보면 어떨까. 페미니즘 붐의 수용맥락에서 인기를 얻은 단순한 문학현상으로만 보기에는 텍스트 자체의 감정적 특징이 지금 독자대중과 교감을 불러온 측면이 있다고 판단된다.

표지의 소개글도 인상적인데, 최지은의 독서실감은 이 작품의 감정적 공감이 무엇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하나도 낯설지가 않은데 새삼 눈물이 고이다니 이상한 일이다. 눈 돌릴 수 없는 통계와 보도 사이, 그리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세한 차별과 폭력 속에 성장한 나와 내 또래 수많은 지영이들의 삶에 대한 담담하고 서글픈 보고서. 어차피 해피엔딩은 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운 좋게, 혹은 우연히 살아남은 ‘여아’들이었던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기록을 남길 수밖에.

 

낯설지가 않은데 눈물이 난다는 독서실감은 통계나 신문기사, 현실 사건 등으로 무장한 이 텍스트가 이야기가 아니라 감정으로 읽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담담하고 서글픈 보고서’라는 대목에 주목하게 되는데, 앞서 보았던 김진옥이나 박완서의 작품이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면 이 작품은 ‘쿨함’을 가장한 주인공의 불행에 연민과 동정을 보낸다. 2015년 서른네살의 나이에 치매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김지영의 출생부터 성장, 취업, 연애와 결혼, 출산의 과정에 대한 일종의 ‘의료기록지’와도 같은 기록을 소설의 내용으로 삼고 있다.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다 결혼해서 딸아이를 낳고 전업주부가 된 그녀의 평범한 삶이 왜 무너지고 그녀의 정신은 왜 허물어졌는가에 대한 질문에 이 작품은 목청껏 대답하지 않는다. 치매의 상황도, 맘충이라는 소리를 듣고 좌절했던 순간도, 결혼 전 다녔던 회사동료들이 몰카의 피해자가 되어 정신과 치료를 받는 상황도 그저 모두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 허윤은 작품의 화자는 권위를 가진 남성지식인인 정신과 의사이고, 여성 인물은 열심히 살았지만 실패하는 감상소설의 순결한 주인공과 닮아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26 이 작품의 미학적 결함을 정확하게 짚은 분석이지만 이 착한 페미니스트 서사를 로맨스 서사의 대체제로 읽는다는 분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로맨스 서사를 소비하는 젠더적 관습과 부딪치지 않는 착한 여자의 고통이라는 서사가 이 책의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이 텍스트가 환기하는 감정은 좀 다른 측면으로 읽힌다. 독자들은 왜 이처럼 새롭지도 않은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일까. 『82년생 김지영』을 읽는다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작품의 감정적 특질을 찾아보면 요즘 여성들의 감정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지점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김지영이라는 인물의 감정적 특징은 ‘쿨함’이다.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페미니즘의 흐름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으나 2000년대 중반 여성문학의 흐름을 주도한 작품들은 포스트페미니즘의 칙릿이었고 칙릿의 소비주체로서 여성들의 감정적 특징은 ‘쿨함’27으로 무장하는 것이었다. 개인주의 주체로 정립되는 이 과정에서 여성들의 담론은 자기계발론과 맞물려 들어갔고, 그녀들의 쿨함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김지영은 뉴욕의 ‘캐리’를 꿈꾸었던 포스트페미니즘의 슬픈 초상이다. 이제 남녀는 평등해졌고, 여성도 자신의 욕망을 얼마든지 드러낼 수 있는 자기결정권이 강조되던 시대에 실상 김지영들은 매일의 일상에 숨어 있는 불편함과 불쾌함과 열패감을 곱씹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한 세세한 일상의 차별과 폭력성이 감정적 강요 없이 기록될 때 아이러니하게도 읽는 독자들은 인물에 대한 연민과 함께 자신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된다. 연민은 다른 사람이 부당하게 불행을 겪고 있다는 인식에 의해 초래되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28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공감하는 슬픔의 감정이다. 쿨함을 가장하며 살아온 그녀들이 사실은 정신적 파탄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판단, 이러한 텍스트의 감정적 특질이 독자들의 몰입과 열성적 지지를 만들어내는 이유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미학적 결함도 두드러지지만 페미니즘 소설을 읽는 새로운 미적 규준을 감정의 교감으로 본다면 그걸 가능하게 하는 서술전략은 이 작품의 장점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5. 맺음말을 대신하며

 

‘자전적 글쓰기’라는 장르적 특성을 설명하는 비평용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여성작가들의 자전적 글쓰기는 문학적 미숙성으로 평가되었고, 허구적 이야기성의 부족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자전적 글쓰기라고 명명되기 시작하면서 여성적 글쓰기의 자전적 성격은 자신들의 경험을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욕망을 반영하는 글쓰기이며, 그녀들의 고립을 벗어나려는 비명과도 같은 글쓰기라는 재평가가 가능해졌다. 그런데 여전히 해석할 수 있는 자신의 말을 가지지 못한 여성문학의 한 흐름을 꼽자면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과 함께 등장하는 작품들이다. 정치적 올바름과 문학적 도식성으로 치부되는 이 작품들에 대해서는 담론적 유행을 선도하는 운동적 가치는 평가하지만 문학적 가치에 대해서는 평가하기 어려웠다. 이 글에서는 감정의 공유 텍스트로서 이 작품들의 서사적 특징을 분석하려 했다. 『나신』이 보여주는 분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가 보여주는 슬픔과 용기, 『82년생 김지영』이 보여주는 연민과 공감은 이 텍스트들이 여성독자들의 시대적 감수성을 반영하고 그것을 작품화하는 데 일정 정도 성과를 보인 작품이라는 점을 알게 해준다. 그러한 감정적 소통이 이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의 독자성이고 페미니즘 작품이 대중성을 띠게 된 원인이 아닐까. 좀더 다양한 페미니즘 작품들을 분석해나가는 과정에서 이 작품들의 감정지도 그리기가 가능해진다면 페미니즘 작품에 대한 문학적 독법도 좀더 풍성해지리라 기대한다. 감정이 단순히 신체적인 반응이 아니라 대상을 보는 방법이며, 좋은 삶을 사는 것과 관련된 윤리적 판단을 포함한다는 마사 누스바움의 주장은 감정의 텍스트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남성중심사회의 관습과 충돌하는 여성들의 감정구조를 중심으로 텍스트를 읽어내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좀더 적극적으로 읽어내는 작업이 필요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페미니즘 텍스트의 감정지도를 그려보는 것은 감정의 위계적 지위를 새롭게 만들거나, 혹은 이성 대 감정의 이분법에서 가치의 역전을 위한 시도는 아니다. 다양한 가치들, 다양한 미적 규준이 만들어질 때 문학을 읽는 우리 눈도 더 풍성해지고, 위계적인 문학사 서술에 대한 대안적인 기술도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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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나라에서 감정과잉과 센티멘털리즘을 소녀성으로 본격 구성하고 이것이 애인의 요소로 재구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1960년대로, 『여학생』이나 『여원』 등의 잡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2. 페미니즘 리부트는 1990년대 이후 등장한 포스트페미니즘의 신자유주의적 판타지의 실패에서 출발했으며, 페미니즘 리부트의 중요한 의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으로 공적 영역의 재편에 중심을 둔다. 이들은 포스트페미니즘의 자장 안에서 등장한 소비주체로서의 여성, 자유주의적 주체, 온라인 주체의 특징을 지니면서 87년체제의 젠더무감성을 재수정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손희정 『페미니즘 리부트』, 나무연필 2017, 47~50, 87면 참조)
  3. 심진경 외 좌담 「미투시대 페미니즘 문학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자음과모음』 2018년 여름호 참조. 페미니즘 문학뿐만 아니라 정치성과 미학성에 대한 고민은 1980년대 민중문학에 대한 재평가 역시 마찬가지로 보인다. 랑시에르의 감각의 분할 개념을 노동소설을 재평가하는 데 적용하기도 하고, 여성 노동자들의 장편 수기에서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투쟁 실패담의 패턴을 분석하면서 노동자들의 연대 가능성을 비통한 감정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분석하기도 한다.(배하은 「1980년대 문학의 수행성 연구: 양식과 미학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박사논문 2017, 164~66면)
  4. 오혜진 「‘이야기꾼’의 젠더와 ‘페미니즘 리부트’」, 권보드래 외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민음사 2018, 363면.
  5. 황정미 「젠더 관점에서 본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공공 페미니즘과 정체정 정치」, 『경제와사회』 114호, 2017, 41면. 2000년대 이후 대중적 페미니즘 담론은 개인적 삶과 일상생활에서 체감하는 차별과 억압을 정치적 문제로 상승시키고 젠더 정의의 실현을 요구하는 정체성 정치의 흐름을 보여준다고 분석하면서 지금까지 여성운동이 충분히 의제화하지 못한 채 이면에 남겨져 있던 부분을 정치화하는 특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6. 방영웅의 『분례기』(1967), 이문구의 『우리 동네』(1977~81) 같은 토속적인 작품들, 농촌공동체성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애수와 자본주의 비판을 담고 있다는 작품들을 다시읽기하면서 여성에 대한 비하와 젠더무감성을 확인했다.
  7. 일레인 김·최정무의 『위험한 여성』(박은미 옮김, 삼인 2001)에서 보여준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은 호미 바바 등의 탈식민주의 이론 중 민족국가는 불가능한 통일성에 대한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주장을 참고하고 있다(Homi K. Bhabha, Nation and Narration, Routledge 1990).
  8. 최정무 「한국의 민주주의와 성차별구조」, 같은 책 31~33면 참조.
  9. 같은 책 21면.
  10. 백지연은 여성혐오비판이 지니는 정치적 힘에는 동의하지만 이러한 혐오비판이 논의구조 바깥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성혐오비판에 대한 새로운 대안적 비평의 기준과 미학적 규준이 만들어지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다.(「페미니즘 비평과 ‘혐오’를 읽는 방식」,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23면)
  11.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주체도 대상도 아닌 아브젝시옹(abjection, 비체 혹은 비자아)은 성스러운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 버려지고 오염된 신체, 찢겨지고 피 흘리는 신체라고 정의하고 있다.(『공포의 권력』, 서민원 옮김, 동문선 2001, 116~17면) 생리혈, 임신, 출산 등 여성의 몸은 오염된 몸, 불완전한 동물성을 보여주는 몸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고 비체로 구성된다.
  12. 이현재 『여성혐오, 그 후』, 들녘 2016, 37~48면.
  13. 마사 누스바움 『감정의 격동 1: 인정과 욕망』,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5, 26~30면, 64~65면.
  14. 여성해방의식을 다룬 최초의 근대소설은 나혜석의 「경희」(1918)이지만, 『나신』은 ‘페미니즘이론’을 작품화한 최초의 소설이라 볼 수 있다.
  15. 김치수 「여성해방과 소설」, 『문학사회학을 위하여』, 문학과지성사 1979, 104면.
  16. 같은 글 106면.
  17. 명혜영 「우먼리브 자장 안의 ‘가족’: 도미오카 다에코의 『신가족』과 김진옥의 『나신』을 중심으로」, 『일본문화연구』 39호, 2011, 218면.
  18. 김진옥의 또다른 작품인 『북두칠성』(석탑 1985)에서도 이러한 분노의 감정이 주를 이룬다. 엄마는 여덟번째 딸을 낳다가 사산 후 자살하고, 저주라도 받은 듯 일곱 딸들 모두 가부장제의 희생양이 되며, 이 중 넷이 죽는 여인 잔혹사라 할 만한 작품이다.
  19. 마사 누스바움, 앞의 책 30면.
  20.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조계원 옮김, 민음사 2015, 186면.
  21. 박완서 논쟁에 대해서는 이선옥 「1980년대 여성운동 잡지와 문학논쟁의 의미: 『또 하나의 문화』, 『여성』을 중심으로」, 『여성문학연구』 43호, 2018, 24~27면.
  22. 자크 랑시에르 『불화』, 진태원 옮김, 길 2015. 랑시에르에게 정치는 치안을 규정하는 감각적인 것의 짜임과 단절하는 것이며, 부분들의 몫들의 부재가 정의되는 공간을 다시 짜는 일련의 행위들이라고 정의되며(267면), 이데올로기 안에서 표상/재현/상연되는 것은 그들이 실존 조건과 맺고 있는 관계(217면)라고 설명하고 있다. 노동소설의 미학적 재해석을 위해 자주 인용되는 랑시에르의 의견은 페미니즘 소설을 재해석하는 데도 유의미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23. 「페미니즘문학과 여성운동」 좌담에서 박완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내가 페미니즘 문학을 해야지 하고 의식해 본 적이 없어요. 페미니즘 문학은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좋은 문학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절로 만들어지는 거 아닐까요. 내 생각에 진짜로 좋은 문학이라면 그 자체로서 페미니즘 문학일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돼요. 여성들이 얼마나 간교하고 지능적인 체계에 의해 지배받아 온 계층이에요? 여성들을 누르는 위치에서 살아온 남성들보다 사회의 각계 각층의 모순을 더 상세히 알 수가 있다고 봐요. 훌륭한 문학이라면 자연스럽게 페미니즘 문학이고 민중문학이 포함되는 게 아닐까요?”(『여성해방의 문학: 또 하나의 문화 3호』, 평민사 1987, 22면)
  24.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8』, 세계사 2012, 160면. 이하 같은 책에서 인용.
  25. 「‘82년생 김지영’ 악플 달릴수록 판매량 치솟아…100만 눈앞」(YTN 2018.9.17)이 기사에서 민음사 관계자는 영화 주연 논란 이후 주문량이 다시 늘어나고 있다면서 100만부 판매가 가까워졌다고 밝혔다. 주인공으로 발탁된 여배우가 악플에 시달리고, 이 책을 읽었다는 여자 아이돌이 협박과 혐오에 시달리는 한편 오히려 책에 대한 관심과 판매량이 급증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페미니즘 도서의 열풍에 대해서는 정고은 「2015〜2016년 페미니즘 출판/독서 양상과 의미」, 『사이』 22, 2017, 169~72면 참조.
  26. 허윤 「로맨스 대신 페미니즘을: 김지영현상을 읽는 여성의 욕망」, 『문학과사회』 2018년 여름호.
  27. 서유미의 『쿨하게 한 걸음』(창비 2008)을 떠올리게 된다.
  28. 마사 누스바움 『감정의 격동 2: 연민』,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5, 53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