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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새로운 현실, 다른 리얼리즘

 

SF와 새로운 리얼리티를 찾아서

김초엽과 박문영의 소설을 중심으로

 

 

복도훈 卜道勳

문학평론가, 서울과기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평론집 『눈먼 자의 초상』 『묵시록의 네 기사』 『SF는 공상하지 않는다』 등이 있음. nomadman@hanmail.net

 

* 이 글은 김초엽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2019)과 단편 「혼자인 사람들」(웹진 크로스로드 2019.10); 박문영의 장편 『지상의 여자들』(그래비티북스 2018)과 중편 『사마귀의 나라』(에픽로그 2014); 윤이형의 단편 「수아」(『작은마음동호회』, 문학동네 2019); 정세랑의 단편 「나는 동쪽으로 걸어갔다」(웹진 크로스로드 2019.3)를 다룬다. 이후 인용 시 작품명과 면수만 명기한다.

 

 

1. 2019, 한국 SF의 새로움

 

한국의 SF가 독자적이고도 고유한 장르로 적극 향유되고 다양한 비평적인 평가를 기다리는 문학이라는 사실은 이제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워졌다. 2019년에 한정하더라도 한국의 SF가 그 어느때보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도약하고 있다는 강한 실감은 SF작가와 독자뿐만 아니라 본격문학계에서도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 SF를 본격문학의 수준에 미달하는 장르문학이나 대중문학, 나아가 본격문학의 활성화를 위한 자양분을 공급하는 준문학적 원료 정도로 취급하던 일부 비평적 관행은 더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본격문학의 영토와 자장에서 출발한 작가들(김희선 박민규 백민석 윤이형 조하형 등)의 슬립스트림(slipstream)적인 시도가 만들어낸 SF의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한국 SF의 뚜렷한 성취는 분명 문단시스템의 공모전이나 등단 형태를 거치지 않은 SF작가와 팬덤, 독자, 출판 공동체가 수행한 오랜 협업의 뜻있는 결과라고 하겠다.

한국 SF의 일견 새로운 부상은 물론 이전보다 대거 등장한 작가와 작품, 팬덤의 활약, 독자층의 확대, 활발해진 SF 해외번역과 국내외 출판 등이 만든 스펙트럼의 한 효과다. 하지만 문학비평은 빛의 파장과 굴절의 광학을 엄밀히 조사해 한국 SF의 스펙트럼을 이루는 빛과 색채의 특이성, 즉 작품의 새로움(novum)을 측정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겠다. 한국의 SF 장르가 직관적으로 무언가 새로운 문학인 것처럼 보이는 이때, SF의 무엇이 새로운가. SF는 어떻게 다른 스펙트럼으로 현실을 조명하는가. 그리고 SF의 리얼리티는 무엇인가.

서구에서 SF는 오랫동안 장치, 관습, 기능으로 문학적 잠재력을 확보한 장르다. SF의 시학적 특징을 도드라지게 하는 핵심은 SF를 구성하는 두 단어(과학, 소설)의 재정의를 통해 도출된 바 있다.1 첫째, 과학(science). ‘과학’은 하드 사이언스(hard science)를 포함해 인류학, 페미니즘, 미래통계학, 인구론, 맑시즘 등을 포괄하는 인지(cognition)로 대체 가능하다는 비평적 제안은 여전히 효력이 있다. 둘째, 소설(fiction). 이때 ‘픽션’은 시끌롭스끼(V. Shklovsky)와 브레히트(B. Brecht)가 말한 낯설게하기(estrangement)로 대체·확장됨으로써 현실의 규범을 상이한 관점에서, 새로운 시각과 기준으로 평가하고 재활성화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SF에서 새로움이란 인지와 낯설게하기를 매개하는 것으로, “작가와 (내포) 독자의 현실 규범에서 이탈하는 총체적인 현상 또는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작가가 쓰고 독자가 읽는 SF의 의미장(場)은 텍스트 안팎을 넘나들면서 우리의 경험적 현재, 이데올로기, 규범 등에 맞서 대안적 미래, 대항 헤게모니, 혁신 등을 상상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SF의 새로움은 인지적 낯설게하기만으로 성취되지는 않는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세계 전체 또는 국면의 중요한 변화를 수반”해 “독자의 경험적 규범”을 흔들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SF의 서사를 새롭다고 말할 수 있다.2

이쯤에서 최근 주목받는 한국 SF의 신예 김초엽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최근 페미니즘 리부트의 SF적인 유추(analogy)라 할 수 있는 박문영의 장편소설 『지상의 여자들』 등을 살펴보려 한다. 김초엽의 단편은 과학적 외삽을 문학적 은유로 재서술하면서 존재자의 불완전한 지표와 결핍 그리고 그로부터 환기되는 여러 ‘감정의 물성’을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박문영의 장편은 ‘만일 남자가 사라진다면’이라는 가정법으로 2016년 전후 전개된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분출된 성적 적대(antagonism)의 면면을 집약적으로 유추해 독자에게 인상적으로 환기시킨다. 차이를 약술하자면, 김초엽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과 외계존재의 교류는 대체로 텍스트 바깥 우리 현실의 적대를 다소 평면적으로 거울 반사하는 역할에 충실한 편이다. 이에 비해 박문영의 장편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에는 작가가 텍스트 바깥 현실의 적대를 텍스트 내부로 어지러이 투영하는 데서 비롯되는 강렬함과 역동성이 느껴진다.

 

 

2. 우리 자신에게 가장 낯선 외계존재

 

한국 SF의 주요 작가인 듀나의 소설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SF는 기본적으로 메가텍스트적 특징, 즉 이미지·배경·모티프·코드의 백과사전을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그것들을 상호텍스트적으로 반영하는 문학 장르다.3 예컨대 인간이 만든 인공적 피조물은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1818)에서 비롯된 변종을, 지구를 침략하는 외계존재는 웰스(H. G. Wells)의 『우주전쟁』(1898)의 이미지와 모티프 등을 광범위하게 상호 참조한다. SF를 읽는 어려움과 즐거움, 독해의 친숙함과 낯섦은 개별 SF 작품에서 발견하거나 학습하고 그것을 더 넓은 SF 역사의 맥락에서 고려하도록 요구하는 메가텍스트적인 특징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물론 상호텍스트적이고 자기반영적인 글쓰기라는 이유로 SF에서 발견하고 싶은 즐거움과 새로움이 독자에게 절로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우선 눈에 띄는 SF의 메가텍스트적 요소와 특징을 일별해보면 다음과 같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외계존재와의 조우(first contact), 인간을 숙주 삼는 외계존재의 정신기생(mind parasite), 생명의 외계기원설인 정향 범종설(pangenesis), 융합과 분열을 거듭하는 생명체의 공생 진화, 마인드 업로딩 등등. 김초엽의 소설에 등장하는 과학적 가설 또는 SF의 메가텍스트적인 요소들은 그 자체로 다양하고 흥미롭지만, 중요한 것은 소설의 묘사와 서술의 화학작용에 의해 소설에 외삽된 과학적 코드 또는 메가텍스트가 상상과학(imaginary science)의 문학적 은유로 어떻게 참신하게 재활성화되는가다. 우선 김초엽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서술적 장처(長處) 하나를 말해보겠다. 「관내분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등의 소설은 주인공이 자신의 기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주인공은 오래전에 사라졌거나 죽은 자들이 남긴 유품들, 책과 기록으로 남은 타자의 흔적을 추적한다. 그럼으로써 주인공의 서사는 그가 추적하거나 조우하는 타자의 서사와 결합하거나 타자의 서사(유품)를 계승한다. 서사는 죽음과 이별의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기록하고 후대에 유산으로 전승된다. 이야기는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되는 설화를 닮게 되며, 주인공은 우주에 홀로 남겨진 단독자가 아니라 이야기를 전수받거나 전하면서 앞세대의 인물들(할머니, 어머니, 이모, 자매 등의 여성)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마치 분열과 융합을 반복하면서 공생 진화해나가는 세포와 기관들처럼. 이러한 서술적 특징은 작가가 고안한 과학적 장치들과 결합하면서 꽤 색다른 문학적 상상력으로 재탄생한다.

「관내분실」은 “고인들의 기억과 행동 패턴을 마인드 업로딩”(232면)해 도서관 데이터베이스에 보관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은하는 생전에 애증병발의 존재였던 엄마를 찾아 마인드 도서관에 가지만 ‘관내분실’, 곧 그녀를 식별할 인덱스가 지워진 사실을 알게 된다. 엄마의 데이터는 마치 도서관에 잘못 꽂힌 책처럼 반(半)영구분실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관내분실」의 서사에 외삽된 마인드 업로딩은 그 자체로 영혼과 자아에 관한 오래된 철학적 질문을 서사적으로 유도하는 측면이 있다. 소설에서 적고 있듯이, 자아가 유동적이고 가소적(可塑的)이라면 스캐닝된 시냅스 패턴의 결과물로 컴퓨터에 업로드된 마인드는 자아만큼이나 가소적인가, 아니면 마인드는 그저 “고정되어버린 일종의 박제된 정신”(255면)에 불과한가. 그런데 김초엽은 마인드 업로딩에 대해 파고들기보다는 주인공이 엄마 생전의 삶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서사를 위해 그것을 활용한다. 은하는 여러 경로로 엄마가 생전에 종이책을 출간하는 출판사에 근무했음을 알게 되고 그녀가 만든 책들을 구한다. 은하는 책에 남은 엄마의 흔적을 시냅스 스캐닝하고 그녀의 특정한 마인드를 찾아내 보안카드의 인덱스와 연결한 다음, 마침내 엄마의 마인드와 가상현실에서 조우한다. 그리고 자신을 임신함으로써 직장을 그만두고 “엄마만의 방”(270면)도 없이 우울과 유폐 속에서 그녀가 오랫동안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엄마의 마인드는 엄마일까, 아닐까. 그녀의 마인드는 “살아 있는 정신”일까, “재현된 프로그램일 뿐”일까,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까?” 물론 이게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소설은 은하가 엄마에게 힘든 한마디를 건네고 엄마 또한 딸의 손끝을 잡는 장면으로 끝난다. “엄마를 이해해요.”(271면) 「관내분실」에서 마인드 업로딩은 엄마의 정체에 대한 질문(정신인가 프로그램인가)을 던지기보다 생전에 어려웠던 두 존재의 만남을 매개하는 은유로 기능한다. 소설에서 엄마의 정체보다 중요한 것은 엄마를 만나는 주인공의 마음이다.

「스펙트럼」은 명시적으로 외계 생명체와의 ‘최초의 접촉’ 모티프를 새로운 방식으로 상상하려는 단편이다. 소설은 촉망받는 우주비행사였으나 우주에서 조난사고를 당한 후 40년 만에 발견된 할머니 희진이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고독 속에서 손주인 화자에게 외계존재 ‘루이’와의 경이로운 만남의 기록을 전하고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에는 “에일리언 콘텐츠”(65면)의 세례를 받고 자란 희진이 불시착한 외계행성에서 조우한 ‘무리인들’에게 실망감을 느끼는 대목이 나온다. 무리인들은 희진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시시한 모습의 외계존재였다. 확실히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무리인들은 생김새부터 몸짓, 희진을 대하는 태도, 군집생활에 이르기까지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의 외계존재적 표상이다. 또한 무리인들의 행성과 지구 생물들의 “생화학적 기본 요소들이 일치”하기에 “미생물-외계생명 씨앗 가설”(76면)을 증명하고 나아가 “행성의 생명체들과 인간은 공통 조상”(77면)을 지닐 수도 있으리라고 가정되는 곳이다. 여기서 그친다면 영국의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의 정향 범종설을 적당히 외삽하고 지구 행성인의 속성으로 환원되는 외계존재를 고귀한 야만인으로 재현한 평범한 SF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스펙트럼」의 새로움은 다른 데서 온다. 수명은 3~5년에 불과하고 개체는 소멸하더라도 자아는 다른 무리인의 몸으로 전달된다는 소설의 약술만으로 외계존재로서 무리인들의 독특성을 부각하기란 아무래도 어렵다. 그렇다면 희진을 보살피고 목에 장신구를 건 루이들이 동굴에 ‘색채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겠다.

희진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루이가 서로 다른 광원 아래에서 다르게 보이는 색들을 어떻게 같은 색으로 인지하는지, 의미 단위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색상 자체인지 혹은 인접한 색과의 차이인지. 그들의 ‘그림’에서 형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지 아니면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지.”(89면) 바꿔 물으면 루이가 그린 것은 그림일까, 그들만의 언어일까. 루이가 한 일은 의사소통일까, 예술적인 표현일까. 그것은 서로 다른 것일까. 색채 언어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여기서 소설의 제목이 ‘스펙트럼’임을, 희진이 지구로 귀환한 후 “빛을 모으고, 분리하고, 보통의 감각으로 볼 수 없는 대상을 보게 하는 도구”(79면)인 유리를 수집했다는 진술을 힌트 삼아보자. 한마디로 이 소설은 “모든 대상은 항상 어떤 특정한 빛 안에서 나타난다”4는, 스펙트럼에 의해 분기되는 빛의 다른 색깔은 각기 다른 의미장을 이룬다는 이야기로 고쳐 읽을 수 있다. 독일의 철학자 프레게(G. Frege)는 대상의 객관적인 의미 이외에도 조명 또는 채색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개는 고양이와의 차이에서 개라는 의미지만, 개와 ‘댕댕이’의 차이는 의미의 차이가 아닌 조명(채색)의 차이다. 개를 댕댕이라고 부르면 개는 다른 ‘조명’을 받으면서 나타난다. 무리인들의 색채 언어는 희진과 같은 지구인의 언어와 다른 의미장을 이루며, 따라서 그들 각각은 어떤 공통된 속성들로 환원될 수 없다. “루이와 할머니의 관계는 재현될 수 없을 것이다.”(95면) 희진이 행성에서 가져와 평생 연구한 루이의 색채 언어, 희진을 수십년 동안 관찰해온 그 언어의 일부는 이렇게 단순하게 번역된다. “그[희진]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96면) 그러나 인용한 문장의 색채 언어를 우리는 어떻게 상상해낼 수 있을까. 그것은 또 얼마나 흥미로울 것인가.

「스펙트럼」의 자매격인 「공생 가설」 또한 정향 범종설과 미국의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의 공생 진화설을 화학적으로 결합한 가정을 서사로 밀고 나가는 단편이다. 만일 인간의 “공생의 대상이 지구상의 생물”이 아니라 외계존재라면,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이라면?(129면) 아마도 「공생 가설」의 주인공인 류드밀라가 그린 경이로운 그림은 「스펙트럼」의 루이가 달리 그렸을 법한 색채 언어일지도 모른다. 두 소설의 친연성은 이처럼 도드라지는데, 그것은 무리인들의 행성이 지구와 생화학적 조건이 얼마간 일치하는 행성인 것처럼, 류드밀라가 그린 그림의 행성 또한 “마치 우주 어딘가에 있는 또 다른 지구, 더욱 환상적인 지구의 존재”(106~107면)를 닮았다는 진술에서도 발견된다. 또한 「공생 가설」은 또다른 ‘에일리언 콘텐츠’인 정신기생의 메가텍스트성에서 짐작되는 기생체와 숙주의 섬뜩한 주종관계를 뒤집는다. 그리하여 류드밀라가 그림으로 남긴 행성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오래전에 폭발로 사라진 행성을 떠난 외계존재 ‘그들’이 지구의 어린아이의 뇌 속에 머물다가 사라지는 공생의 이야기로 다시 쓰인다.

「공생 가설」이 서사적으로 흥미로워지는 부분은 류드밀라가 그린 행성이 실제로 발견되던 날, 그 사건에 아기들이 반응하면서 얻어진 것, 곧 브레인 머신 인터페이스 연구팀이 뇌가 만들어내는 전기 신호와 패턴에서 유추한 ‘사고언어’가 출력되는 대목에서다. “「우리가 시작된 곳이야」/「우리의 행성이 보고 싶어」/「류드밀라」/(…)/「류드밀라는 그곳을 제대로 그려냈는데」/「그리워」”(118면) 연구팀은 유아들의 사고언어가 욕구와 자극에 반응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에 주목한다. 연구팀은 류드밀라의 그림 「나를 떠나지 말아요」에 대한 유아의 반응에서 유추한다. 왜 우리는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을 그리워할까. 왜 많은 이가 수많은 가상세계 대신 류드밀라의 행성에 그리 열광했던 것일까. “우리에게 그들이 머물렀기 때문이겠죠.” 이렇게 독자들은 김초엽 소설의 주제인 “우리를 가르치고 돌보았던 존재들에 대한 희미한 그리움”(141면)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멀리 떠나온 외계존재라는 각성과 함께.

김초엽의 SF는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성격의 인물들이 화합해 빚어낼 법한 아름답고도 따뜻한 이야기가 위주로, 적대와 불화를 겪는 인물과 이야기는 그만큼 적어 보인다. 따뜻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라서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만 작가가 활용하는 ‘공생 진화’가 융합뿐만 아니라 분열을 내포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면 첫번째 소설집에서는 융합의 감각이 확실히 우세한데, 이후라도 분열이 텍스트에 기입되고 충돌하는 이야기를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까. 일단 이런 질문을 남겨놓고 적대와 불화의 파노라마라 할 수 있는 박문영의 소설로 넘어가보자.

 

 

3. 세계의 종말로 가부장제의 종말을 상상하기5

 

영국의 페미니스트 문화비평가 니나 파워(Nina Power)는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유명한 문장을 패러디한 적이 있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가부장제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더 쉽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취할 법하다. 세계의 종말을 그리는 대개의 소설에서 재난과 종말은 결코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의 『로드』(한국어판 문학동네 2006)를 영화화한 「더 로드」(존 힐코트 연출, 2009)에서 핵겨울(nuclear winter)의 생존자인 주인공 소년과 아버지는 인간도살 사냥꾼들에게 쫓기는 모녀를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볼 뿐이다. 최진영의 장편 『해가 지는 곳으로』(민음사 2017)가 보여주듯이 세계의 종말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여자와 아이들은 폭력과 살육에 노출되어 길을 헤매는 고양이와 개보다 나을 바 없는 처지다. 그러나 “디스토피아의 수동적 여성 희생자를 더이상 참아내지 못하는”6 대항적 아포칼립스 서사를 상상해볼 수도 있다. 미국의 영문학자 일레인 쇼월터(Elaine Showalter)는 “남성의 폭력을 용서하고, 봐주고, 감추고, 수용할 의사가 없는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의 분노를 반영”(329면)하는 최근 영미권 여성 판타지의 흐름에 주목한 바 있다. 이러한 판타지는 그 어떤 장르보다도 ‘세계의 종말’ 같은 SF의 메가텍스트적 코드와 결합할 때 강력히 점화될 수 있다.

박문영의 『지상의 여자들』은 가상의 지방도시 구주에서 남자들을 ‘소거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다. 최근 몇년간의 한국 페미니즘 운동과 사유의 반향을 추체험하게 하는 상황과 설정, 담론과 상상이 잘 용해된 작품이다. 『지상의 여자들』은 절제된 어휘와 문장, 서술자 주도의 일방적인 전개보다는 가능한 한 다면적인 상황을 제시하는 서사와 묘사로 소설에서 일어나는 세계붕괴의 상황에 대해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감응하도록 유도한다. 이 작품에서 벌어진 사건은 다음과 같은 섬뜩한 목격담에서 잘 드러난다.

 

“너무 놀라서 다 기억하긴 어려운데요. 그 사람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건 처음 봤어요. 옷이 얼룩덜룩 희길래 선녀벌레들이 붙었나 싶었어요. 근데 남편이 옷은 안 털고 먼 데를 보면서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팔을 허우적대면서 춥다고, 너무 춥다고 했어요. 목이요, 자라목이 쑥 빠지는 것처럼 늘어났어요. 누가 머리를 잡고 위로 당기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 발이 땅에 휙 뜨더니 가 버린 거예요. 그거, 하늘로 솟구치는 놀이기구 있잖아요. 거기 탄 것같이요.”(66면)

 

소설은 불가사의한 상황을 직접 묘사하는 대신에 남자들이 사라지는 장면을 곁에서 목격한 여자들의 증언을 제시하는 서술방식을 택한다. 그런데 구주시의 남자들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로 하나둘씩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기에 소설의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최초로 사라진 사람은 필리핀 아내의 “머리채를 거머쥐고 주먹으로 배를 치던 남자”(11면)였다. 그리고 여자아이를 골목에서 강간하려 했던 남자도 “좁쌀 같은 얼룩”이 “급속도로 늘어나더니” “숨이 막힌 듯, 목을 뒤틀”다가 “두 발이 시멘트 바닥 위에 떠올”(63면)라 사라진 것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소설 초반부에서 사라진 남자들은 모두 여성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도중에 사라졌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지상의 여자들』은 ‘남자들은 왜 사라졌나’라는 질문을 추적하는 데 골몰하지 않는다. 물론 사라진 남자들의 행적과 근황을 추정하는 단서와 소문, 추리의 파편들은 무수하다. 그러나 ‘남자들은 왜 사라졌나’는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남자들이 사라진 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로 바뀐다. 그러니까 남자들이 사라진 이유보다 중요한 것은 남자들이 사라진 후(‘세상의 끝’) 구주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나(‘세상의 시작’)다. 주인공 성연의 말이 흥미롭다. “세상의 끝과 시작이 한국 구주에서 동시에 움텄으니까요.”(318면)

아포칼립스는 ‘세상의 끝’으로 ‘세상의 시작’을 열어젖힌다. 이것을 가장 집약해 보여주는 장면은 미혼모가 아이에게 즉흥적으로 지어 들려주는 “세상에 없는 그림책”(141면)의 한 대목일 것이다. “옛날 옛날에 하늘에 살던 천사가 땅을 내려다봤어요. 땅에는 슬픈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남자들이 우락부락한 손으로 여자들을 때렸어요. 보다보다 화가 난 천사는 나쁜 남자들을 골라 하늘로 데려갔어요. 땅에 남은 여자들이 눈물을 멈추고 노래를 불렀어요.”(140~41면) 박문영의 아포칼립스는 실제로는 뒤집힌 소망충족의 동화인 것이다. 『지상의 여자들』은 남자들이 사라짐으로써 비로소 구주에 그동안 어떤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었는지, 남자들이 사라짐으로써 비로소 여자들에게 가능해진 삶이 무엇인지, 남자들에게 새로이 일어난 일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세계의 종말’의 메가텍스트적 코드는 대안적 삶과 공동체를 형상화하는 기능으로 변모한다. 소설에서 꽤 풍부하고도 다채롭게 묘사되는 삶의 현저한 변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는 실종자들을 더는 기다리지 않는 여자들의 선언적 인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을 기다리지 않는다.”(251면) 바야흐로 여자들의 지위와 복지가 향상되는 유토피아가 개시된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남자들이 온순해졌다는 사실”이다. “함부로 굴지 않는다는 것, 겁을 내고 있다는 징후가 유의미했다. 천사든 바이러스든 외계 생명이든 상관없었다. 화내는 남자들을 데려가는 빛무리는, 세상을 구하러 온 존재였다.”(296면) 그렇다면 이러한 남녀 간의 ‘분리’가 이 작품이 궁극으로 제시하려는 것일까. 그러나 ‘분리’는 이 소설의 시작일 뿐이다.

『지상의 여자들』의 특정한 대목이나 대사와 장면을 분리해내 편의적으로 읽으면 이 소설은 최근 페미니즘 운동의 여러 흐름에서 당파적인 관점 한둘을 부각해 대변하는 인상을 줄 수도 있으리라. 그렇지만 소설의 내포작가는 그러한 안이한 독법을 허용하지 않도록 특정 인물이나 집단의 견해로 수렴되지 않는 다면적이고도 모호한 상황을 최대한 제시하려 한다. 『지상의 여자들』은 아포칼립스의 양의성을 살려 누군가에게는 아포칼립스적인 상황이 다른 누군가에는 유토피아의 시작임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남자가 사라지는 혼란의 상황 속에서 자주 흔들리고 엇갈리는 두 여성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가기도 한다.

주인공 성연은 직장일로 잠시 떨어져 사는 남편과 무미건조한 가정을 애써 유지하지만, 환경운동단체에서 일하는 이혼녀이자 어린 시절 친구인 희수에게 감정적으로 기울고 있으며, 희수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성연이 희수에게 이끌리는 면에는 성연이 어린 시절 사촌에게 성폭행당한 피해생존자라는 과거가 자리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이 희생자라는 사실에 매이지 않으려 하며, 그러한 성연에게 희수는 희생자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지위를 거듭 상기시킨다. 구주에서 남자들이 사라지는 상황을 놓고 두 여자가 주고받는 대사와 행동은 그들이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7 성연은 실종자들이 갈수록 여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으로만 한정되지 않는 상황에 주의한다. “남자라서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살의를 품고 고통을 가하는 존재는 누구든 없어질 수 있어요.”(309면) 그러나 희수는 성연과 달리 남자들이 사라짐으로써 구주에 찾아온 여성의 해방에 주목한다. “우주에게 인간은 해롭고 남자는 더 해로워. 성연아, 상황을 직시해. 넌 안전해도 고통받는 여자들이 줄어들었잖아.”(305면)

『지상의 여자들』은 성연과 희수, 두 여자의 삶의 내력과 상황에 대한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 미묘하게 흐르던 사랑의 전류를 독자가 더욱 직접적으로 감지하게 되는 마지막 순간을 인상적으로 포착한다. 남편 형근이 시모와 함께 찾아온 구주 버스터미널에서 성연은 그들에게 고백한다. “제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고요.”(321면) 그리고 그 순간, 형근은 사라지고 만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다. “옆이 텅 비어 있었다. 의자, 후문, 화장실에도 형근은 없었다. 성연과 시모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322면) 만일 이 문장 너머의 다음 이야기를 상상한다면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될까. 성연은 구주의 다른 여자들처럼 사라진 자신의 남편을 찾아 헤맬까, 구주에서 남자들이 사라진 이후 동숙하기 시작한 희수와 커플이 될까.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겠지만, 『지상의 여자들』은 해답이나 노선을 제시하는 소설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성별에 따라 또는 성별과 상관없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기도 하겠고, 누군가에게는 좀더 숙고할 만한 여지를 풍부하게 남긴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남겨놓겠다. 구주에서 남자들을 하나둘씩 사라지게 만든 ‘빛무리’, 외계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왜 빛무리는 하필이면 생물학적 성별의 한쪽만을 지상에 남겨놓은 것일까.

 

 

4. 세계의 종말보다 남북극의 종말을 상상하기

 

김초엽과 박문영의 소설에서 외계존재와의 조우, 공생적 존재로서의 인간존재, 업로딩된 마인드와 자아의 관계,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존재가 증발된다는 아포칼립스적인 가정 등은 서사와 결합하면서 SF의 새로움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한층 촉발한다. 그렇다면 SF는 그동안 우리가 현실이라고 불러온 것을 어떻게 다른 스펙트럼으로 새롭게 조명하는지, 또 새로운 현실을 발견해내는 문학 장르일 수 있는지 앞의 작품들을 근거로 다시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은 우리의 논의를 위해 잠시 꺼내 사용할 만한 철학적 공구다.8 사변적 실재론은 우리의 현실인식과 관련해 귀한 통찰을 던져주는데, 철학에서 상관주의(correlationism), 즉 의식과 세계, 주체와 객체, 인간과 비인간은 분리되기 어렵기에 둘의 상관관계를 조명하는 것 외에 세계, 객체와 비인간 그 자체를 인식하는 행위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사변적 실재론자라면 인간 탄생 이전 우주의 빅뱅, 44억년 전에 만들어진 암석 지르콘(zircon)과 같은 절대적 실재를 사유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사유의 결과, 이러한 절대적 실재는 어떤 이유(raison) 없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존재의 우연성은 우리가 존재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필연적 진술이다. 그러면 우리는 존재의 우연성을 SF에서 언제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떠한 인간적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고 그에 저항하는 기이한 객체(weird object)와 마주칠 때이거나 과학(인지)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세계붕괴가 일어나는 상황과 맞닥뜨릴 때다.

사변적 실재론에 의하면 SF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객체, 비인간적 존재 등은 우리 인식과 상상의 재현적 상관물로 한정되거나 환원되지 않는다. 또한 그것들은 존재와 세계의 우연성을 강력하게 증명한다. 이러한 서술은 분명히 현실(reality)에 대한 우리의 기존 이해를 재고시킬뿐더러 폭넓게 확장시키는 측면도 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지각과 경험의 범주 너머를 상상하는 일을 현실이 아닌 환상이나 망상으로 지칭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 환상과 망상의 독립적 주권을 인정하는 데는 좀처럼 인색했다. 또한 SF는 “어떠한 과거, 현재 또는 미래의 과학적 이해에 부합하는 일에 저항하며” “인간 사유나 지각에 의존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객체들을 발견해내는 장점이 있다.9 그리고 객체들은 다만 “인간 조건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객체들, 힘들, 환상과 사유를 포함하는 타자의 조건 속에 인간 조건을 위치시키는”10 역할을 맡는다. 현실에 대한 의미장을 확대하기, 탈인간(지구)중심주의적 객체들을 발견하기, 다양한 행위자 네트워크에 인간을 재배치하기. SF와 더불어 열릴 수 있는 새로운 현실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김초엽 소설에서 색채 언어를 사용하는 루이와 류드밀라 행성의 ‘그들’은 새로운 리얼리티에 얼마나 부합하는 객체일까. 이들은 얼마간 색채 언어를 사용하는 비인간, 인간 존재의 비인간적 기원을 환기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관내분실」에서 가상현실의 엄마는 생전의 엄마의 ‘정신’이라기보다는 소설 전개상 주인공이 극적으로 조우하기 좋은 형태로 준비된 ‘프로그램’에 가깝다. 비인간적 낯섦보다 인간적 친밀성 쪽으로 좀더 기울어진 존재라는 뜻이다.11 그렇지만 이러한 친밀성은 비판이 아닌 분석의 대상이다. 김초엽은 특정 연령과 성별에 집중되어 있더라도 분명 한국 SF 독자층을 확장시키는 흥미로운 문학적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의 소설에 대한 독자의 애정어린 관심과 공감적 반응의 원인을 예단하긴 조심스럽지만, 김초엽 정세랑 등 동시대 여성서사가 독자들과 주고받는 감응(affect)이 남다르다는 것은 확실하다. 특히 정세랑의 소설은 분위기, 인물 및 서사의 측면에서 김초엽의 소설과 친화력을 보여주기에 같이 언급할 만하다. 이들 소설에서 존재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친밀성’은 그들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과의 ‘정동적 연결’12의 측면에서 폭넓게 다룰 필요가 있다.

「나는 동쪽으로 걸어갔다」는 정세랑식의 친환경 ‘공생 가설’ SF 단편으로, “거대한 외계 지렁이들이 내려와 인류 문명을 파괴”한 이후의 현재와 미래를 그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그러나 서사의 어조 전반은 친밀과 우애의 뉘앙스로 가득하다. 소설은 ‘나는 동쪽으로 걸어갔다’와 ‘나는 서쪽으로 걸어갔다’ 장으로 나뉘는데, 후자는 전자의 미래(평행우주)로 설정된다. 후자의 이야기에서 인류는, 『지렁이의 활동과 분변토의 형성』(1881)에서 다윈이 지렁이를 관찰한 바를 외삽한 것처럼, 지렁이의 습속을 충분히 익힌 듯 지하에서 산다. 다른 종들에 대한 인류의 착취가 종결되고 그들과 공생하는 미래다. “인류는 더 이상 다른 종을 인류를 위해 굴절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이 미래는 전자의 이야기(‘나는 동쪽으로 걸어갔다’)의 배경인 ‘리셋 시기’에서 ‘나’가 동료들과 거대 외계 지렁이들을 추적하고 연구한 결과물로 만들어진 미래이자 그 미래에서 온 ‘나’가 만드는 현재이기도 하다. 외계 지렁이들은 인류의 시각에서는 문명의 종말을 가져오는 재앙이겠지만 인류가 남긴 폐기물인 플라스틱을 먹어치우는 등 지구 행성 편에서는 생명의 가이아다. 「나는 동쪽으로 걸어갔다」에는 인간 종 중심의 시각을 재고하도록 이끄는 대목들이 많지만 ‘공생 가설’의 분열보다는 융합이 더 부각된다.

그런데 정세랑의 단편에는 지나치기 어려운 세부가 둘 있다. 하나는 전자의 이야기에서 ‘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지렁이를 미래에서 보냈다는 진술이며, 다른 하나는 외계에서 온 지렁이가 플라스틱을 먹는다는 언급이다. 전자는 공교롭게도 박문영의 소설에서 남자들을 제거하는 구원의 빛무리가 우주에서 왔다는 대목에 상응한다. 이러한 메가텍스트적 설정은 지상의 구원은 낯선 신에게서 온다는 영지주의적 상상에 기반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낯설지 않은’ 낯선 신(지렁이, 빛무리)의 행위력(agency)을 이끌어내는 존재가 여성 행위자(agent)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추론은 얼마간 김초엽 소설의 친화력 있는 외계존재에도 해당한다. 그렇지만 「나는 동쪽으로 걸어갔다」의 생태적 상상을 촉발하는 주 행위자는 지렁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세상이 끝나가도 우리는 친밀감을 소중히 한다”고 말하는 구원자로서의 인간(여성)이다(물론 이러한 생태적 감각이 한국문학의 상상력에서 여전히 소중하다는 전제하에 덧붙이는 말이겠다). 이 말은 여성이 남다른 행위능력이나 친밀한 유대를 형성하는 역량을 갖춘 정체성의 담지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럼에도 외계존재와의 조우에서 세계의 종말에 이르는 최근 SF의 상상, 곧 억압적 타자를 제거하거나 똑같이 친밀한 타자를 호출하는 환상은 아무래도 ‘관계의 분리’에서 얻어진 산물에 가깝다는 생각이다.13

한편으로 지렁이가 플라스틱을 먹는다는 정세랑 소설의 한 대목은 그 자체로 부각할 필요가 있다. 분해되는 데 500년이 걸리는 플라스틱은 미세먼지, 반감기가 2만 4천년인 플루토늄-239 등을 비롯해 앞서 우리가 중요하게 언급한 사변적 실재론의 객체에 상응하는 또다른 객체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환경학자 티모시 모턴(Timothy B. Morton)은 이를 하이퍼오브젝트(hyperobject)로 명명한다.14

하이퍼오브젝트는 탄소연료에 생존을 의탁하는 인간이 세계에 일방적으로 끼친 행위의 환경적 부산물이지만, 우리의 인식과 상상의 범위를 훨씬 초과하는 객체들이다. 우리는 미세먼지와 스티로폼, 바다로 버려지는 방사선 플루토늄-239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만, 그것들이 무엇인지, 우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해하거나 깨닫기 힘들다. 하이퍼오브젝트를 따로 언급한 것은 과학자들이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르는,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남북극의 종말을 상상하기가 더 쉬워진 현실에 대응하는 문학적 상상력이 절실해졌다는 판단 때문이다. 글을 끝내면서 핵폐기물이 버려지는 섬의 종말을 그린 박문영의 중편 『사마귀의 나라』의 한 대목을 읽어보겠다.15

 

우박은 긴 겨울비를 몰고 왔다. 불그스름했던 숲은 폭우를 맞는 동안 피칠갑을 한 것처럼 번들거렸다. 주민들은 이제 곧 봄이 시작될 거라 장담했다. 그러나 몇 마지기 안 되는 텃밭과 흙 고랑에 좁다란 잎이 솟아나기 무섭게, 섬의 생태는 급격히 뒤틀리기 시작했다. 새로 태어나는 것은 모두가 엉망진창이었다. 생물체 모두가 하나같이 무질서한 형태로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구조에 있어 좌우와 대칭을 찾아볼 수 없었다. 팽창과 분열뿐이었다. 맨드라미의 수술이 꽃 밖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토마토는 한 자리에서 하나씩 열리지 않고, 열매가 열매를 낳는 식으로 미친 듯이 붙어 자라났다. 마을에 하나뿐인 개는 앞발이 일곱 개인 새끼를 낳다 즉사했다. 섬의 새로운 세대 중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는 생명이란 없었다. 군락은 혼돈이었다.(107~108면)

 

소설에서 2083년의 섬은 거기에 초국적기업 동방 유니버설이 방사능 폐기물을 처리하는 시설이 지어지고, 섬의 거주민들은 노동력으로 동원되는 대신에 구호물자를 받아들이면서 생존을 연명하는 공간이다. 인용한 대목에서 우박이 몰고 온 겨울비와 불그스름한 숲은 모두 핵폐기물에 오염되었다. 이 자연은 어떠한 녹색 이미지도 허용하지 않는 ‘자연 없는 자연’이다. 하이퍼오브젝트는 인간의 단기적인 복원력을 넘어서면서 장기 지속하는 비인간적인 원격 행위자다. 하이퍼오브젝트는 또다른 하이퍼오브젝트를, 그에 따른 물질적·심리적 효과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한다. 하이퍼오브젝트는 『사마귀의 나라』에서 신체가 서서히 문드러지는 인물이 자신이 축소되는 축축한 꿈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미세한 감각적 질료로 처음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심리뿐만 아니라 육체, 동식물의 생태계, 지질학적인 조건을 축소 또는 팽창시키면서 항구적 재난의 거대 현실로 변한다. 새로운 리얼리티란 이러한 객체들을 문학의 스펙트럼으로 면밀히 조명하려는 노력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SF와 더불어, 덜 밝혀진 현실의 뒷면에 대한 탐구는, 어느 정도 열렸다.

 

 

  1. 다르코 수빈 「낯설게하기와 인지」, 문지혁·복도훈 옮김, 『자음과모음』 2015년 겨울호 참조.
  2. Darko Suvin, “SF and the Novum,” Metamorphoses of Science Fiction: On the Poetics and History of a Literary Genre,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79, 64면.
  3. 셰릴 빈트 『에스에프 에스프리』, 전행선 옮김, 아르테 2019, 100~101면.
  4. 마르쿠스 가브리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김희상 옮김, 열린책들 2017, 277면.
  5. 이 장은 웹진 크로스로드(2019.2)에 발표했던 글을 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혀둔다. 출처는 http://crossroads.apctp.org/myboard/read.php?Board=n9998&id=1387.
  6. 일레인 쇼월터 「폭력을 상상하기」, 김영아 옮김,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328면.
  7. 이쯤에서 윤이형의 단편 「수아」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소설에서 여성 로봇들 ‘수아’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인간에게 ‘네가 사람임을, 누구도 섬기지 않는 너 자신의 주인임을 증명해보라’며 협박과 테러를 가한다. 여성 주인공 ‘나’는 과거에 ‘인간적으로’ 돌보았다고 생각했던 로봇 수아와 동료 로봇들의 습격을 받는다. 수아의 질문 앞에 주인공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함께 가자는 수아의 요구를 뒤로한 채 도망치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알몸의 그녀를 찍으려는 카메라를 든 인간들의 저열한 스포트라이트뿐이다. 그러나 수아의 질문은 절박했다. “왜 우리는 같은 존재일 수 없다고 생각했어, 엄마?”(335면) “조금이라도 사랑해줄 순 없어, 우리를?”(337면) 「수아」는 『지상의 여자들』에서 남자들의 소멸을 두고 두 여성 인물이 보이는 견해차와 갈등을 화해 불가능한 적대로 확장하는 측면에서 읽을 수 있다.
  8. 사변적 실재론, 그와 유사한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에 대해서는 퀑탱 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우연성의 필연성에 관한 시론』(정지은 옮김, 도서출판 b 2010)과 그레이엄 하먼 『네트워크의 군주: 브뤼노 라투르와 객체지향 철학』(김효진 옮김, 갈무리 2019) 참조. 메이야수와 하먼은 사변적 실재론과 객체지향 존재론을 전개하기 위해 SF를 자주 참조한다.
  9. Brian Willems, “The Zug Effect,” Speculative Realism and Science Fiction,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7, 7면.
  10. 같은 글 28~29면.
  11. 그렇지만 최근에 발표된 단편 「혼자인 사람들」은 달리 주목을 요한다. 이 소설은 ‘쌍둥이 시스템’으로 인간 복제가 가능한 미래에 ‘쌍둥이’를 잃고 분리증에 시달려 섬에 수감된 환자들이 실제로는 자신을 낳게 한 원본을 죽이고 섬으로 자발적으로 들어온 또다른 쌍둥이들로 정체가 드러난다는 이야기다. 소설은 사랑의 동일성과 차이, 원본과 복제의 권력관계, 정서적 불일치 등을 주제로 삼는다. 무엇보다 「혼자인 사람들」은 섬의 분리증 환자들의 연극 같은 말과 행동, 울음과 웃음에서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효과를 창출하는 묘사가 인상적인 소설이다.
  12. 문학장의 새로운 주체로서 독자와 텍스트 간의, 또는 ‘나’-우리의 정동적 연결(연대)에 대해서는 김미정 『움직이는 별자리들』(갈무리 2019)의 1부 ‘2010년대의 정동적 이행과 사건-문학들’을 참조했다.
  13. 지젝(S. Žižek)은 사회적 적대의 분출에서 피억압자 최초의 반응인 ‘관계의 분리’가 ‘분리된 관계’에 의해 어떻게 매개되는지를 분석한다.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이성민 옮김, 도서출판 b 2005, 120~21면). 당연히 ‘관계의 분리’는 억압자가 제거되면 만사형통이라는 환상과는 차별되지만 그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고려에서는 불충분하다. 따라서 『지상의 여자들』이 성연과 가부장적인 시모가 함께 남는 결말로 끝나는 장면은 징후적이다. 빛무리는 유토피아를 가져온 것일까, 아니면 또다른 갈등의 시작에 불과할까.
  14. 이하의 내용은 Timothy Morton, Hyperobjects: Philosophy and Ecology after the End of the World,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3, 특히 1부의 서론 “A Quake in Being”과 2부의 서론 “ The End of the World” 참고.
  15. 이 소설에 대해서는 졸고 「리셋과 무망(無望)의 서사: 김윤주의 「재앙부조」와 박문영의 『사마귀의 나라』」(『SF는 공상하지 않는다』, 은행나무 201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