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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미국 민주당 경선 현장
뉴딜 2.0 질서의 개막?
안병진 安秉鎭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전 미래문명원 원장. 저서 『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예정된 위기』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 등이 있음.
nsfsr@khu.ac.kr
운명의 분기점이 될 2020년 미국 대선
미국 대선이 전세계인에게 중요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다. 미국 유권자들은 마치 다보스포럼에 초대받은 유력 인사들처럼 인류의 미래를 좌우하는 결정에 초대받은 슈퍼 대의원이나 다름없다. 나는 가끔 미국 대선에 지구시민들도(더 나아가 지구행성의 미래를 보호하는 대리인들도!) 선거인단으로 참여하는 유토피아적 개혁안을 꿈꾸곤 한다. 그런데 내년 대선을 앞두고 더 자주, 더 절박하게 꿈을 꾸게 된다. 이번 선거는 지구인의 중대선거(critical election)이기 때문이다.
한때 미국 정치학계에 ‘중대선거이론’이 유행한 적이 있다. 시대의 결을 결정하는 분기점이 되는 선거와 그 이후 정치질서의 성격을 분석한 이론이다. 예를 들어 프랭클린 로즈벨트(Franklin Roosevelt)의 진보적 뉴딜 시대를 개막한 1932년 선거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중대선거였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로는 더이상 중대선거가 없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시기가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나는 이제 중대선거론이 이론적으로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2016년부터 2032년까지 12년간 열리는 4번의 대선은 모두 잠재적으로 중대선거이다. 왜냐하면 기존 중대선거론의 변수였던 정치적 균열의 어젠다, 유권자 지형 변화 등을 훨씬 압도하는 거대한 두가지 지진판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바로 ‘기후위기’와 ‘자본주의의 이행’이다.
구떼흐스(A. Guterres) 유엔사무총장은 이미 작년 초에 인류는 2020년까지 급격히 기존 발전주의 경로를 바꿔야 한다는 적색경보를 발령한 바 있다. 이어 올해 5월 호주에서 발간된 기후위기에 대한 시나리오 플래닝 보고서는 2020년에서 2030년 사이에 전시(戰時) 수준의 동원 노력이 없다면 전세계 대부분의 주요 도시가 빠르게는 2050년경부터 재앙적 수준으로 변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1 그리고 최근 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중국과 러시아)가 과연 민주주의 붕괴와 기후파국을 막을 수 있는 제도인지에 대한 회의가 광범위하게 증가하고 있다. 공유사회(commons), 생명체제(biocracy), 탈성장사회, 생태사회주의 등 다양한 백가쟁명식 대안 담론은 이제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향후 10년은 이 기후위기와 자본주의의 재정렬로 인해 지구적 질서가 어디로 이행할지를 결정하는 시스템의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작고한 월러스틴(I. Wallerstein)은 이 분기점을 대략 2050년경으로 예상한 바 있는데, 기후 위기가 과학자들의 예상보다 더 가속화되면 그보다 앞당겨져야 할지도 모른다.
2020년 미국 대선과 민주당의 진로는 바로 이 대전환의 시대라는 흐름 속에서 작동한다. 미국 민주당 경선의 현재 양상과 대선 전망에 대한 글을 요청받으면서 필자의 머릿속에는 다음의 네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첫째, 오늘날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 등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들은 심지어 ‘페이스북’의 기업 분할까지 대담하게 주장하며 기업계 일각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이제 미국 민주당은 한국 진보의 꿈이었던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바뀌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민주당에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가? 둘째, 민주당의 새 비전과 어젠다들은 어떤 강점과 약점을 지니는가? 그리고 이 어젠다로 집권이 가능한가? 셋째, 현재 민주당 후보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데, 만약 민주당 시대가 열린다면 과거 로즈벨트 때의 중대선거처럼 새로운 뉴딜 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오늘날 미국 민주당이 한국의 미래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이 짧은 글에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상세히 담기란 어렵다. 다만 나의 간단한 스케치는 다음과 같다. 현재 미국 민주당은 지난 수십년간의 클린턴주의 정당에서 뉴딜 2.0 정당 질서로 전환 중이다. 만약 민주당이 집권한다면 중간에 혼란이 있더라도 단계적인 뉴딜 2.0 시대가 열릴 가능성이 높다.
뉴딜 2.0으로 이동하다
최근 미국 민주당의 변화는 정말 격세지감이다. 과거 1992년 빌 클린턴 후보의 핵심 ‘386’ 측근인 조지 스테퍼노펄러스(George Stephanopoulos)는 당선 후 자신이 잘 안다고 자부했던 클린턴의 메시지가 조금씩 이상하게 변해가는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 당혹해한 바 있다. 나중에서야 그는 그린스펀(A. Greenspan)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루빈(R. Rubin) 전 씨티그룹 회장, 써머스(L. Summers) 전 하버드 총장 등의 신자유주의자 군단들이 클린턴의 귀를 장악한 것을 알게 되고 절망감에 빠졌다. 비슷한 일이 오바마의 ‘386’들에게도 발생했다. 오바마는 놀랍게도 재무장관으로 써머스 진영의 가이트너(T. Geithner)를 임명하여 미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조롱하는 한국 같은 천민자본주의에서나 볼 수 있는 구제금융의 대마불사 신화를 완성했다. 그런데 그런 써머스가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포스트 케인즈주의자들의 유효수요 창출, 임금주도성장과 유사한 어젠다를 이야기하면서 비주류 경제학자들을 당혹시키고 있다. 클린턴, 오바마 시대에서 오늘날 워런 스타일 민주당 시대로의 이행은 세가지 이론(‘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진보적 네트워크 국제질서’ ‘진보적 포퓰리즘과 운동 정치’)으로 전환하는 것이라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클린턴 시대는 이 세가지 이론과 가장 대척점에 있었고, 오바마 시대의 절충주의를 거쳐 오늘날 민주당은 더 명료하게 이 방향으로 이동 중이다. 민주당 주자들 가운데 버니 쌘더스(Bernie Sanders)는 사회주의로의 구조 이행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 이론들의 가장 극단에 서 있고, 워런은 오바마와 쌘더스 사이에서 방황(혹은 절묘한 줄타기)하고 있다. 그리고 피터 부티지지(Peter Buttigieg), 조 바이든(Joe Biden), 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 등은 오바마 노선의 눈금을 약간 더 진보적으로 이동시킨 정도이다. 이 세 이론적 스펙트럼으로 앞으로 내년 11월, 나아가 집권 후의 민주당 내부의 게임을 조망한다면 좀더 큰 그림이 이해될 수 있다.
첫째, 진보적 신자유주의론(progressive neoliberalism)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론(stakeholder capitalism)으로의 이행이다. 과거 고 노무현 대통령은 농담으로 본인이 ‘신자유주의 좌파’라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S. Freud)의 말처럼 때로 농담이나 말실수에서 숨겨두었던 속내가 드러나기도 하는 법이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클린턴 이후 미국 민주당 주류를 다양성의 진보적 정체성 정치와 신자유주의의 기묘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진보적 신자유주의로 요약한다.2 사실 오바마 시기의 탈인종주의 스펙터클과 의료보험 개혁, 소비자 보호 등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금융·IT플랫폼·할리우드 자본 등의 헤게모니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반면에 오늘날 쌘더스와 워런 등은 부유세를 부과하고 거대 독점을 분할하며 미국식 주주 자본주의를 유럽식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이행시키고자 한다. 기업을 주주, 소비자, 시민, 지구행성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 속에서 이해하는 유럽식 마인드가 드디어 미국사회에서도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워런은 페이스북 등 독점적 거대 사기업을 분할해 규제하고, 기업 연방법인 등록제를 추진해 과거 시어도어 로즈벨트(Theodore Roosevelt)와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의 진보적 독점 분할 시대를 재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린뉴딜(Green New Deal)을 통해 프랭클린 로즈벨트 진보주의 시대의 생태적 부활을 추구한다. 더구나 로즈벨트와 오바마가 못다 이룬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까지 추진하려 한다. 여기서 그린뉴딜이란 온실가스 배출 제로를 목적으로 한 생태적 전환과 경기부양 노선을 말한다. 워런의 그린뉴딜이 오바마가 시도하다 만 그린뉴딜의 대담한 확장으로서 포스트 케인즈주의 경기부양론과 공정경제론이라면, 쌘더스의 그린뉴딜은 상대적으로 좀더 자본주의 구조 전환에 초점을 둔다.3 바이든 등 중도주의자들의 정책은 오바마와 뉴욕타임즈의 프리드먼(T. Friedman)이 애초 주창한 그린뉴딜의 일부 확장 버전이다.
이 대담한 노선 전환을 위한 재정 뒷받침에서 민주당의 모든 주자들은 클린턴 시대와 달리 균형예산을 강조하지 않는다. 반면에 임금주도성장, 부유세, 공해산업에 대한 벌금 부가 등은 더이상 급진적 어젠다가 아니다. 오늘날 써머스 같은 주류 민주당 지식인조차도 사실상 포스트 케인즈주의자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쌘더스 진영은 미국이 기축통화국가라는 강점을 살려 적자재정을 통해 완전고용을 추구하자는 ‘현대화폐이론’(MMT) 등 비주류 경제학이론을 따른다. 최근 민주당뿐만 아니라 미국 주류 학계마저 케인즈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도 놀랄 정도의 급진적 경제이론을 상상하고 있다. 그만큼 기존 자본주의 모델의 오작동과 그로 인한 붕괴가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둘째, 신자유주의 제국론에서 진보적 네트워크 국제질서 이론으로의 이행이다. 클린턴 시대는 과거 네그리(A. Negri)와 하트(M. Hardt)가 『제국』(Empire, 한국어판 이학사 2001)에서 잘 지적한 것처럼 미국 주도의 자본에 평평한 제국과 지구적 경찰을 만들고자 했다. 오바마 시대는 ‘아시아로의 선회’(pivot to Asia) 전략이 함축하듯 이 공격적 제국을 방어적 제국으로 변경했다. 현재 민주당 주자들은 이 방어적 제국론에서 조금씩 발을 빼면서 기후위기, 노동문제 등을 다루는 한층 진보적인 어젠다 및 미국 국익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구축하려 한다. 그린 마셜 플랜을 통해 남미 등 전세계를 미국에 우호적으로 만들고, 자국 신재생에너지 기업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바이든이 방어적 제국론의 계승자라면 워런과 쌘더스, 특히 쌘더스는 헤게모니적 제국을 민주적으로 전환시키는 진보적 네트워크 개입론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엘리트주의 정치와 정당 이론에서 진보적 포퓰리즘과 운동 정치이론으로의 이행이다. 클린턴과 오바마 시대도 진보적 포퓰리즘을 섞기는 했지만 여전히 워싱턴 문법을 상당히 중시했다. 진보적 포퓰리즘이란 기득권 정치문법을 거부하고 국민 일반을 대변하는 운동적 방식으로 정치를 전개하는 것을 말한다. 오바마는 비록 선거 캠페인에서 운동적 정당의 면모를 보였지만 집권하고 나서는 다시 워싱턴의 문법 내에서 움직였다. 이번 민주당 주자들은 큰손 기부자들을 견제하고, 일부 전략가가 아닌 시민집단 지성을 참여시키며, 반(反)기득권 포퓰리즘 담론을 전면적으로 구사하는 등 민주당을 다시 운동적 정당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워런, 쌘더스 진영은 집권 이후에도 과거 클린턴, 오바마 시절보다는 운동적 기반과 진보적 포퓰리즘 언술을 강력하게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오늘날 민주당 주자들은 전반적으로 위 세가지 측면에서 민주당 질서를 과거 뉴딜 질서에 가깝게 복원하려 하고 있다. 단 과거 뉴딜 질서는 단일한 성격이 아니라 국제주의적 기업 헤게모니에서부터 사회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었다. 오늘날 바이든, 블룸버그, 부티지지 등은 기업주의적 뉴딜 노선을 드러낸다. 즉 신재생에너지 국제주의 자본과의 연합을 통한 자본 헤게모니의 강화이다. 반면에 워런, 쌘더스 등은 사회민주주의적 뉴딜 노선 복원에 좀더 가깝다. 즉 기후위기 운동, 노동진영 등 소수진영과의 연합을 강화해 자본 헤게모니를 약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 간의 싸움은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되는가로 막을 내리기보다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지금 민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에 이들 간의 사상 투쟁은 매우 흥미로운 관찰 지점이다.
민주당의 집권 가능성이 높은 이유
최근까지 다수 전문가들의 생각과 달리 트럼프의 재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심지어 세계적인 전략가인 스탠리 그린버그(Stanley Greenberg)는 최근 신간에서 트럼프의 대패 가능성마저 점친다.4 왜냐하면 진보적인 뉴 밀레니얼 세대와 소수인종이 대거 유권자로 유입했고 대도시 연합이 꾸준히 증가하는 등 구조적 추세가 민주당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다만 지난 2016년에는 이 구조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기득권 이미지의 힐러리 클린턴이 드러낸 약점 및 오바마 시기의 한계로 인해 민주당이 패배했다. 이번에는 기득권과 싸우면서도 본선 경쟁력이 있는 아웃사이더 후보가 많고, 여기에 트럼프의 ‘폭정’ 및 구조적 우세까지 결합한다면 압승도 가능하다. 사실 이미 미중 무역전쟁과 기후위기 등의 여파로 아이오와 등 주요 지역에서 트럼프의 지지기반인 농민층과 백인 교외 노동자층 일부도 흔들리고 있다.5 비록 미시건,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등 핵심 승부처에서는 트럼프가 아직 민주당 후보들에게 경쟁력이 있지만 지지율 40%대 초반을 결코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공화당 텃밭인 콜로라도, 애리조나, 텍사스조차도 트럼프 지지율이 일관되게 낮아 민주당 전략가들 사이에서는 선거인단 승부에서 은근히 낙승을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주목할 점은 2016년과 달리 지지층의 열성도 측면에서도 트럼프가 불리하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버니 쌘더스 지지층의 20%가 본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떤 이가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당 유권자들의 정권 교체 의지가 그 어느때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투표 의사에서 공화당보다 민주당 유권자가 10~20% 더 높은 열정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 우세 추세는 2018년 중간선거 및 최근 일부 지역선거에서 아주 일관되게 나타나면서 2020년 결과를 미리 예고하고 있다. 정치 평론가 로널드 브라운스틴(Ronald Brownstein)은 『더 애틀랜틱』(The Atlantic) 기고를 통해 대도시 및 교외지역, 심지어 버지니아 및 켄터키 등에서조차 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의 반(反)트럼프 추세가 일관되게 강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가 만나본 공화당 전략가들도 교외지역 및 농민층의 열성적 지지로 승리한 2016년의 마법이 이번에는 반복되기 어렵다고 고개를 젓는다.6
과연 누가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지명될까? 2월 초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시작되는 예비경선 시리즈까지 아직은 내다보기 힘들다. 심지어 최근 예상을 뒤엎고 블룸버그 뉴욕 전 시장까지 출마를 선언하면서 미래가 더욱 불투명해졌다. 하지만 지금 추세로만 보면 워런에 주목해야 한다. 리버럴 좌파인 워런은 초기 전문가들의 평가와 달리 중도층에서도 조금씩 기반을 넓혀가고 있다. 워런의 지나친 진보적 성향이 스윙 스테이트(경합주) 및 본선에서 부담으로 작용할 수는 있지만, 악화되는 양극화 등으로 인해 강력하게 부상 중이다. 과거 같으면 민주당 유권자들이 그녀의 급진적 부유세 공약에 주춤했지만 지금은 80%가 지지를 보낸다. 앤드루 양(Andrew Yang)이라는 비주류 후보의 기본소득 공약이 열풍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지금 민주당 유권자들은 시스템 전환에 목말라 있다. 워런이 본선에서 트럼프를 꺾을 가능성을 보인다면, 그리고 민주당 유권자 및 스윙 스테이트에서도 공감과 믿음을 형성할 수 있다면 트럼프 대 워런이라는 흥미로운 대결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워런은 기존 구조 타파의 급진적 열정과 본선 승리를 위한 대중성 사이의 절묘한 균형점을 아직은 발견하지 못한 듯하다.
당장 바이든과 부티지지 등 중도진영은 블룸버그라는 중도주의 억만장자의 등장으로 비상이 걸렸다. 왜냐하면 중도층의 표를 분산시키고 기득권 부자들로부터 민주당을 구하자는 워런의 입지를 강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바이든에게는 자신의 아들이 연루된 불확실한 탄핵 정국의 유탄도 기다리고 있다. 만약 탄핵 및 블룸버그와의 경쟁 국면에서 바이든이 싸움꾼이자 노동자의 벗이라는 면모를 보여준다면 민주당 유권자들은 그를 선택할 수도 있다. 혹은 ‘젊은 바이든’인 부티지지를 통해 중도적 안정감과 진보적 세대교체론을 결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론조사가인 네이트 실버(Nate Silver)가 지적하듯이 아직 워런은 중도 성향의 노동자 및 소수계 저변에서는 바이든 등이 가진 기존 토대를 결정적으로 흔들지는 못했기에 내년 초 이후에야 본선 후보가 누가 될지 가늠해볼 수 있다.7
민주당 후보들 간의 변수보다는 외적 변수로 인한 불확실성이 더 커질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탄핵 정국의 나비 날갯짓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아무도 확언하지 못한다. 심지어 아주 희박한 변수지만 공화당 본선 후보가 바뀔 수도 있고, 대부분 경제 전문가들이 예측하는 미국 경기침체가 내년 어느 시점에 닥칠지도 알 수 없다. 혹은 블룸버그 스타일의 제3정당 후보가 나와 양당의 판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다. 물론 펀치백처럼 튀어오르는 트럼프의 반격(특히 10월의 ‘깜짝쇼’라고 할 미국판 북풍)과 이에 대한 민주당의 대응력도 언제나 큰 변수다. 지난 2016년 대선만큼이나 이번 대선도 예측이 불가능하다. 지역 전문가들에게는 고난의 행군 10년이 아닐 수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누가 당선되더라도 그들의 어젠다 성공 여부를 떠나 지구적 질서, 그리고 한반도 질서에 엄청난 폭풍우가 몰려올 거라는 사실이다.
민주당이 집권하더라도 전망은 밝지 않다
과거 로즈벨트는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진보적 뉴딜 노선에 대해 일관성을 지키지 못한 중도주의자에 불과했다. 그는 부단히 균형예산과 케인즈주의 사이에서 비틀거렸다. 그에 비하면 지금 워런이나 쌘더스는 진정한 진보적 버전의 로즈벨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로즈벨트의 강력한 우군이었던 거대한 외적 자극이 약하다. 즉 미국 기존 경제모델의 확연한 붕괴, 강력한 노동과 좌파 운동, 레닌 모델의 위협 등 말이다. 비록 급속한 악화로 기후문제가 민주당 유권자의 제2의 관심 어젠다가 되었지만 아직은 전반적 체감도가 낮고 사회운동이 둔하다.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 같은 석학은 2028년경이면 화석연료 산업이 붕괴한다고 예상하고, 캘리포니아의 빈번한 산불로 부유층마저 별장을 포기해야 했지만 말이다.8
더구나 로즈벨트 시대의 초당적 협력문화와 달리 지금 미국정치의 양극화는 서로를 ‘문명의 적’으로 규정한다. 애초에 공화당 싱크탱크의 구상이었던 ‘오바마 케어’조차 피투성이 싸움 끝에 민주당 표만으로 통과되었을 정도다. 워런과 쌘더스가 추진하는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 부유세, 그린뉴딜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것은, 오늘날 민주주의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정치지형에서 혁명을 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전지구적 리더십에서 미국은 지나치게 정치자본이 훼손되었고 미국 내 지지기반도 분열되어 있다. 그냥 문 닫아걸고 우리끼리 잘살자는 피터 자이한(Peter Zeihan)류의 노골적 고립주의 정서가 대중적 힘을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민주당 대통령은 제2의 뉴딜 노선을 시도하겠지만 이는 비틀거리면서 다양한 단계를 밟아갈 가능성이 높다. 특히 워런은 강력한 현상유지 세력들에 의해 오바마처럼 퇴각과 동요를 어느 정도는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들을 거치면서 더 높은 수위의 전환적 뉴딜은 (만약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화석연료 산업의 붕괴가 본격화되는 시점 전후로 궤도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 단 그때 인간의 힘으로 기후위기를 역전시킬 분기점을 넘어서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지금은 이 불확실한 확률에 기도라도 하고픈 심정이다. 나의 전망을 ‘닥터 둠’의 견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당장 미국 주류 과학자의 저널, 군 안보 보고서부터 찾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미국 민주당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조합
만약 미국 민주당 대통령 시대가 열린다면 그 시사점은 무엇일까? 여러 함의 중에서도 우리의 당면 관심사는 미래의 한반도 기후 파국보다는 현재의 한반도 안보 위기이다. 나는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와 달리 민주당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조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민주당 당선자는 단기적으로는 트럼프식 광폭 행보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하더라도 북한인권 문제 등 걸림돌이 많아 북미수교까지는 험난하고도 긴 과정이 필요하다.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내년에 트럼프와 김정은이 획기적 빅딜로 최종 수교까지 결정적 진전을 이루어놓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힘들다면 작은 디딤돌이라도 놓고 민주당 대통령 기간(희망컨대 8년) 동안 교황 등의 지원, 공화당의 분열하에 이를 완성하는 것이다. 과거 중국, 베트남, 쿠바, 이란 등 매우 힘든 상대들과 협상할 때도 시작은 설령 공화당 정부가 했다 하더라도 민주당 정부에서 결정적 수위의 마침표가 이루어졌다.9 지금부터라도 한반도의 단기·중장기 로드맵을 미국 내 초당적 합의 기반을 닦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 이후 존 케리(John Kerry) 전 국무장관 등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특히 기후위기의 관점에서 한반도 평화노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경제 노선에서 민주당과의 공통 지반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리버럴들은 언제나 한국의 진보진영에 몇년 앞선 비전과 영감을 주곤 했다. 제3의 길이 그랬고 임금주도성장론도 그렇다. 오늘날 미국 민주당과 시민정치운동은 기존 중대선거들을 뛰어넘는 비전, 어젠다, 활동방식, 인재 충원의 새로운 전환을 시도 중이다. 총선, 대선을 앞둔 한국의 민주당, 정의당 및 시민정치운동 등 이른바 진보진영은 단순한 이슈 선택을 넘어 포괄적 의미에서 새로운 진로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아니, 진보라는 구태의연한 단어부터 의심하는 것이 좋다. 개념적으로는 뉴딜 2.0 시대를 향한 철학·가치·어젠다·인재·활동방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가지 생각해볼 점은 많은 경우에 한국의 진보진영은 우리의 구체적 맥락을 사상하고 미국의 혁신 시도를 표피적으로 모방하는 것에 그쳤다는 사실이다. 아마 앞으로 2022년까지 비슷한 오류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향후 10년은 미국의 리버럴 진영도 분명한 답을 내놓기 어려운 전인미답의 영역이다. 우리에게는 미국의 앞선 노력들 근저에 깔린 가치들을 숙고하는 동시에 그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이중의 험난한 과제가 있다. 설령 워런이나 쌘더스 식의 급진적인 그린뉴딜 노선이 옳다 하더라도 현재 미국과 한국 정치제도와 문화에서 가능할까? 단지 유럽식 비례대표제로 전환하면 다 해결되는 문제일까? 지금은 오히려 근대 리버럴 민주주의가 기후위기와 불평등 해결에 최종 실패했다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고민하고 작은 실험이라도 실시해야 할 때가 아닐까? 미국 민주당 대선주자들이 비록 대담한 그린뉴딜 노선으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근본적 질문과 상상력은 미흡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너무 오랫동안 오작동을 일으켜온 미국 민주주의의 제약이 사소한 개혁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전환기에는 모든 단단한 기초가 흔들리기에 ‘불가능의 정치’의 공간이 크게 열린다. 트럼프가 모든 정치문법을 깨는 신기록을 계속 경신하듯이 말이다.
사실 한국에는 미국의 지식담론을 넘어서는 논쟁이 펼쳐졌던 과거도 많다. 예를 들어 과거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은 비록 이론적으로는 조야했지만 미국의 중대선거론 논쟁보다는 시야가 더 넓었다. 지구행성의 불가역적 악화 분기점이 다가오고 세습 자본주의체제가 흔들리는 지금이야말로 지구과학자와 사회과학자가 모두 참여해 진정한 글로벌 사회구성체 논쟁을 벌일 때가 아닐까? 이른바 ‘지구행성 구성체’ 논쟁을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의 지성 사회가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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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vid Spratt, Ian Dunlop, “Existential climate-related security risk: a scenario approach,” Breakthrough: National Centre for Climate Restoration 2019. ↩
- Nancy Fraser, The Old is Dying and the New Cannot Be Born, Verso 2019. ↩
- John Bellamy Foster, “On Fire This Time,” Monthly Review 2019.11.1. ↩
- Stanley Greenberg, RIP GOP: How the New America is Dooming the Republicans, St. Martin’s Publishing Group 2019. ↩
- 졸고 「‘왕좌의 게임’으로 본 2020 미 대선 삼국지」, 『신동아』 2019년 7월호. ↩
- Ronald Brownstein, “The Suburban Backlash Against the GOP Is Growing,” The Atlantic 2019.11.6. ↩
- Nate Silver, “National Polls and State Polls Show Pretty Much The Same Thing,” FiveThirtyEight 2019.11.6. ↩
- Jeremy Rifkin, The Green New Deal: Why the Fossil Fuel Civilization Will Collapse by 2028, and the Bold Economic Plan to Save Life on Earth, St. Martin’s Press 2019. ↩
- 졸저 『예정된 위기: 북한은 제2의 쿠바가 될 것인가?』, 모던아카이브 2018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