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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명호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 돌베개 2020
‘세심한’ 읽기와 ‘대담한’ 해석
노경희 盧京姬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meehee11@ulsan.ac.kr
1765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반년간 조선 문인 홍대용(洪大容)이 사신단 행차에 참여하여 북경에서 강남 항주 출신의 세 선비,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를 만나 ‘천애지교(天涯之交)’를 맺고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이 여행에 대해 한문으로 『연기(燕記)』와 『간정필담(乾淨筆譚)』을, 국문으로 『을병연행록』을 지어 자신의 중국 견문을 조선사회에 생생하게 전했다.
이 일은 얼핏 조선시대 600회에 이르는 중국 사행 중 한 사례에 불과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홍대용은 조선 실학이 북학으로 분기하는 데 큰 역할을 한 학자이며, 그가 만난 중국 선비들은 명나라 유민(遺民)의 기질을 간직한 강남의 한족 문인들이다. 이들이 주고받은 필담은 조선의 존명배청(尊明排淸) 사상과 명에 대한 한족(漢族)의 의리, 주자학과 양명학, 거기에 불교와 고증학의 문제까지 광범위하게 포괄하고 있다. 이들의 교류는 단편적으로 끝나지 않고 여행 이후로도 편지를 통해 지속되었으며 후손들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이후 북학을 활짝 펼친 후배들인 박지원과 박제가, 이덕무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으니, 이들의 짧은 만남은 이국 문인들 간의 단순한 교류를 넘어서는 역사적 사건인 것이다.
이국땅에서 이루어진 외국 학자와의 학술 교류, 그리고 ‘홍대용 연구’라고 하면 나에게도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나는 2000년대 중반 일본 쿄오또대에서 유학하던 중 동양사학과 후마 스스무(夫馬進) 교수의 수업을 들으며 홍대용에게 처음 관심을 가졌다. 홍대용과 전혀 상관없는 쿄오또에서 그것도 명청사 연구자로 유명한 교수가 여러 학기에 걸쳐 조선 문인 홍대용에 몰두하고 있다니, 뜬금없고 신기하면서도 낯선 곳에서 내 전공을 만나 무척 반가웠다. 나는 종종 후마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가 연행사와 통신사, 그리고 조선과 일본 에도 문단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후마 교수 또한 홍대용의 1765~66년 여행 자료들을 읽고 있었는데, 그는 특히 1764년 원중거(元重擧)의 일본 통신사행을 함께 주목했다. 원중거가 통신사행에서 일본 학계에 대해 받은 충격이 홍대용에게도 영향을 끼쳐, 홍대용이 중국 여행에서 그토록 외국 학계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같은 시기 중국과 일본의 사행을 한데 묶어 동아시아 삼국의 교류와 학술 양상을 거시적으로 조망하려는 시도로, 통신사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는 일본 학자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후 후마 교수의 조선 연행사와 통신사 연구들이 일본과 중국 학계에 발표되었고, 이는 점차 한국에도 소개되기 시작했다.(후마 스스무 『연행사와 통신사』, 정태섭 외 옮김, 신서원 2008; 후마 스스무 『조선연행사와 조선통신사』, 신로사 외 옮김,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9) 그 연구들은 후마 교수의 명성 덕분에 일본과 중국 학계에서 상당한 권위를 지녔다. 다만, 한국 학계에서는 그의 풍부한 자료 활용 능력과 근거를 중시하는 엄격한 학문 태도를 인정하면서도, 18세기 조선 학계가 보이는 복잡다단한 현상의 이면보다 남겨진 기록에만 집중하는 모습에 당혹감을 느꼈다. 그의 연구 속 조선은 그저 주자학만 신봉하는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모습으로 보인 것이 사실이다.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 홍대용의 북경 기행 새로 읽기』의 저자 김명호 교수는 후마 교수의 연구가 지닌 공과를 누구보다 냉철히 지적해온 학자이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홍대용의 중국 여행이 조선의 내적 흐름과 국제적 차원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다각도로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이 책의 첫번째 미덕은 엄정한 텍스트 교감이다. 저자는 현전하는 홍대용 중국 여행 기록의 모든 이본들을 꼼꼼히 비교 검토하고,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기존 연구의 오독과 오해를 낱낱이 밝혔으며, 홍대용의 원래 의도를 최대한 살려 텍스트를 재구성했다. 홍대용과 항주 문인들의 교류를 중심에 두고 거기서 파생된 복잡한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마침내 18세기 조선과 중국의 지성사라는 거대한 우주와 만난다. 홍대용의 청대 문물 인식으로 요약되는 광대하면서도 정밀한 ‘대담한 세심법’이, ‘세심한’ 텍스트 읽기와 ‘대담한’ 한중 지성사 해석이라는 책의 서술 그 자체를 통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저자는 후마 교수와 전혀 다른 구도에서 동아시아와 홍대용을 연결 짓는다. 홍대용의 중국 여행 중에서 저자가 가장 주목한 것은 당시 조선 지성계를 뒤덮고 있던 ‘존명배청’ 사상의 균열이다. 병자호란 이후 ‘북벌론’과 함께 더욱 심화된 청에 대한 배척과 명에 대한 존숭은, 조선이 명의 뒤를 이어 중화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소중화’ 의식으로 이어졌다. 이는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강령으로 홍대용 또한 그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 그의 중국행은 명에 대한 의리를 간직한 한족 문인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중화(中華)’의 세계 안에서 공명하는 것이 첫번째 목표였다.
그러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던 존명배청 사상은 여행을 통해 청나라의 실상을 마주하면서 점차 균열을 보였다. 자연과학과 실학에 관심이 많던 홍대용은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청의 제도와 문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청 왕조를 제한적으로나마 인정하게 된다. 결국 자기만의 논리로 청을 받아들이니, 이념의 추상체로 존재하는 중화문명을 계승하는 이가 곧 ‘중화’라 생각하고 여기서 조선 또한 ‘중화’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는 다시 청 또한 ‘중화’가 될 수 있다는 논리로 연결되면서, 홍대용의 배청 사상은 커다란 균열을 맞게 된다. 이렇게 ‘보수성과 진취성, 존명의식과 북학사상이라는 모순’(549면) 사이에서 고민하며 자신의 논리를 찾아가는, 한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갈등과 고뇌를 이 책은 남김없이 파헤치고 있다.
같은 인물의 같은 사건에 대해 누군가는 여전히 주자학적 사고에 갇혀 있었다고 평가하고 누군가는 주자학적 세계관을 넘어서는 모습에 주목하는 것은, 연구하는 학자들이 각자의 학문적 배경에 따라 서로 다른 눈으로 이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궁금한 것은 저자가 후속 과제로 언급한, 귀국 이후 항주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통해 홍대용의 후반기 사상이 어떻게 변모해가는가의 문제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항주 문인들의 서신에 대한 현재 중국 학자들의 해석은 무엇인지 부디 소통의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은 18세기 한 조선 문인의 체험을 당시 조선 지식사회의 맥락에 넣고 21세기 한국 학자의 관점을 더해 쓴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일본과 중국의 학자들이 그들만의 학적 배경에서 새로운 해석을 보여줄 때, 그들과 소통하기 위한 하나의 준거를 얻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책 전체가 무려 864면에 이르는 거질로, 본문이 550면이며 주석과 참고문헌이 300면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받으면 처음에는 우선 그 두께에 기가 질려 책을 펼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본문을 읽으면서는 주석의 무게에 압도되어 앞으로 나가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한 글자씩 따라 읽다보면, 너무도 술술 읽히고 심지어 흥미진진하여 다음 내용을 궁금해하는 자신에게 놀랄 것이다. 다 읽은 뒤에는 이 대서사시를 이렇게 쉬운 언어로 차근차근 풀어가는 동시에, 주석을 통해 그 모든 행간들을 자료와 근거로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우직한 성과를 보여준 저자의 집념과 성실함에 동료 학자로서 감사를 넘어 존경을 표하며, 이 진지한 학술서를 세상에 소개해준 출판사에도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