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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자카리아 무함마드 『우리는 새벽까지 말이 서성이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강 2020

나의 환상과 타자의 시

 

 

신용목 愼鏞穆

시인 978897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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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광주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에 참가한 자카리아 무함마드(Zakaria Muhammad)는 수수하고 검소한 성품과 무관하게 그 은빛 머리와 콧수염 때문에 어디서든 쉽게 눈에 띄었다. 낮에는 공식일정이, 저녁엔 뒤이은 연회가 있어 일주일 동안 그를 따로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조식 때 먼저 식사를 끝낸 자카리아가 커피잔을 앞에 놓고 고요하게 창밖을 보고 있는 모습을 마주칠 뿐이었다. 공식적인 자리엔 통역이 있었고 사석에선 이 책의 옮긴이이기도 한 오수연 소설가가 통역 겸 안내자 역할을 했지만, 아침 시간만큼은 예외였다. 전날 행사에서 보았던 차분하지만 격정이 느껴진 자카리아의 낭독을 핑계로, 하루는 그의 아침 사색을 방해하더라도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그의 시에 대한 경외심이 묘한 호기심으로 변했던 터라 무례를 무릅쓰고 다가갔다.

친절하게 앞자리를 허락한 자카리아는 배려심이 깊이 밴 말투로 팔레스타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그다드에서 유학 후 귀국 날짜가 단 이틀 늦었다는 이유로 25년 동안 타지를 떠돌아야 했음을 직접 들은 것도 그 자리였다. 이야기를 따라 출렁이는 감정이 목소리를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첨언처럼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고국에 돌아가지 못할 땐 어디에 있어도 타지 같았는데, 이제는 어디에 와도 고향 같은 느낌이 든다고. 특별히 여기 광주가 그렇다고. 그때 나는 그 말이 가진 진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적어도 이 시집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론 내 짧은 영어 실력이 그의 말을 여유 있게 받아내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당시 나는 내가 보고 싶은 자카리아를 보고 내가 듣고 싶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자카리아가 자주 눈길을 주던 창밖으로 금남로가 이어져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구 도청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경을 넘는 개인의 신분을 국가가 보장해주는 것이 ‘여권’이라면,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2003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여권으로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팔레스타인 국민’이다. 이 당연한 말이, 국민은 있으나 국가는 없다는 사실과 만나면 모순 명제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는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특수성을 학습을 통해 내재화했고, 때문에 ‘팔레스타인’이라는 명사가 지닌 적대와 모순을 실재로서 쉽게 승인하거나 ‘분쟁’ ‘이산’ ‘테러’ 등의 단어가 수반하는 형용사와 겹쳐놓는 것으로 그 사유를 매듭짓곤 한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말하지만 그 고통은 이미 ‘타자화된 감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쉽다. 자카리아의 시가 이런 식의 각성을 동반한다고만 말하는 것은 그래서 부족하다. ‘나’와 타자 사이의 필연적인 배타성을 더 높은 차원의 인식체계로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시가 수행한다는 믿음이 우리 전통 속에는 있지만, 그게 지나치게 시를 도구화하고 있으며 시를 협소한 차원으로 몰아넣는 게 아닐까 하는 질문을 그의 시가 던져준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카리아는 언어를 통해서 말하기보다는 언어 안에서 말하는 시인이고, 그래서 언어를 정치의 수단이나 신념의 출구로 삼기보다는 언어 속에 깃든 세계와 역사와 실존 속으로 뛰어든 시인이다. 그게 “시인을 민족적 책무를 어깨에 진 영웅이자 해방자로 보는 옛 아랍 시의 입장과 가장 극명하게 결별했다”라고 평가받고 “그럼에도 그의 시에는 팔레스타인 민중과 함께하는 집단의식이 실려 있다”(172면, 영문 『팔레스타인현대문학선집』 재인용)라고 소개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가 가진 “예언자의 시대로부터 오는 듯한”(174면, 마흐무드 다르위 상 선정 이유 부분 발췌) 목소리는 “죽음이 부리와 열매를 갖고/우리는 위조된 푸른 잎을 가졌지.”(「거래」 부분)에서처럼, 삶을 말하기 위해 죽음을 사용하고 눈앞의 매혹보다 그 실체를 되물음으로써 인간의 전 역사를 지극히 일상적인 자리에서 들끓게 만드는 데 따른 효과라 할 수 있다. 출신으로부터 첨예화된 정치와 그에 따른 일상의 고통을 기대하는 우리의 관성을 배반한 채, 자카리아의 시는 적대와 모순이 무화되는 슬픔의 절대성 속에서 현실을 넘어서는 현실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말은 소용없어./여섯은 애도용이고 기쁨을 위해서는 하나뿐인 걸. 아냐, 열이 애도용이고 하나만 남지.//아, 말을 신에게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우리 입과 목구멍에 수류탄처럼 그걸 던져버린.”(「말」 전문)

말이 슬픔을 다스리는 용도일 뿐이라면 말은 그대로 슬픔으로 남는다. 그 슬픔이 목구멍에서 폭발하는 순간 인간의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저 평이한 언술 속에 모든 것을 태워버린 대낮처럼 하얗게 침묵의 독이 서려 있는 이유는, 삶과 죽음이 그 사이 간격을 버리고 핀 뽑힌 수류탄처럼 오직 하나의 순간 속에 고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이 “내 잠 속에 흐르는 큰 개울이 있어. 낮의 짧은 손은 그 물을 한 국자 떠서 내게 줄 수가 없어.”(「내가 잠들면」 부분)라고 쓸 때, 개울에 흐르는 물이 저 고대로부터 흘러온 생명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으로 맞서고 있는 죽음인 것처럼 말이다. 그것을 시 속으로 스며든 역사라고 한다면 시인의 슬픔은 그 대지에 박힌 쟁기가 된다.

그러니 그를 분노가 없는 시인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옮긴이의 말처럼, 시 쓰기에 대한 “고민의 강도가 가장 높은 지역”(182면)이 팔레스타인일 것이다. 시인이 시를 “가장 단단한 바위 위를 개미들이 다니면서 새겨놓는 길”(산문 「시와 토마토」, 133면)이라고 말한 것처럼, 시의 사회적 책무가 발현되는 과정이 사회적 방법과 동일하지 않을 뿐이다. 연이어 수록된 산문 「연꽃 먹는 사람들」은 한국 여행을 기록한 글인데, 젊은 학승과의 대화를 다룬 일화도 흥미롭게 읽힌다. 학승이 폭력 사용의 부적절성을 섭리에 기대어 말할 때, 자카리아는 폭력의 근원을 되물으며 필요한 것은 탕평이 아니라 판결이라고 역설한다.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의 자살폭탄 테러를 반대해 이스라엘 수색조와 이슬람 근본주의자 양쪽의 위협에 놓였던 자카리아지만, 그의 슬픔이 투명한 천처럼 그의 삶 전부를 뒤덮은 분노에 기인한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제 앞서 말한 ‘타자화된 감각’에 대한 반성을 마무리할 차례이다. 자카리아가 광주에서 느꼈던 동질감을 타자와의 공감이나 연대로 아름답게 마무리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대체로 스스로를 강고하게 규정하는 역사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스스로를 세계의 기본값으로 돌려 당연한 것으로 만들거나 가쁜 일상의 질곡에 비추어 하찮은 것인 양 시간 속으로 숨어버린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으로 세계를 선택하고 원하는 것으로 자신을 구성하며 스스로를 지킨다고 믿는다. 일상의 영역에서 식민과 분단, 디아스포라가 체험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환상으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카리아는 오히려 우리에게서 식민과 분단, 디아스포라를 보고 있었다. 그것들은 자카리아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명백한 우리의 현실로 펼쳐져 있었다. 적어도 그 순간, 나는 내 자리에서도 타자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몫조차도 타자의 것으로 여기면서 타자를 이해할 수는 없다. 어쩌면 우리는 ‘나’와 타자를 잇는 길을 잊었다. 그리고 시인은 그 길이 정치나 과학이 아니라 오직 인간 자체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 지도로 이 시집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