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촛불 5년, 새로운 진전을 위하여
더 큰 정의로 공정을 다시 쓴다
신진욱 申晋旭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 『시민』, 공저서 『우리는 복지국가로 간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민주 정부 10년, 무엇을 남겼나』 등이 있음.
socioshin@cau.ac.kr
1. ‘촛불’과 혁명/복고의 변증법
2016년 가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첫번째 촛불집회가 개최된 지 다섯해가 지났다. 유난히도 추웠던 그해 겨울,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손에 쥔 것이라고는 굳은 촛농을 입은 종이컵과 금세 식어버린 어묵꼬치밖에 없었지만 얼굴엔 기쁨이 가득했다. 역사에 예외적으로만 등장하는 거대한 집합열광의 시간, 저항의 역사가들이 말한 ‘광기의 순간’(moments of madness)1이었다.
2021년 가을, 이제 사람들은 더이상 촛불혁명을 말하지 않는다. 촛불의 찬미는 누군가에겐 심지어 환멸을 유발하기도 한다. 무엇 때문이든 누구의 잘못이든, 화려했던 촛불의 장관이 사라지고 노동과 정치가 ‘늘 그래왔던’ 일상으로 돌아온 후 그 어떤 근본적인 사회개혁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마도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지금 이 현실은 촛불혁명의 정신을 배신한 것인가? 아니면 촛불의 정신은 애초에 혁명적이지 않았던 것인가?
촛불혁명, 촛불항쟁, 촛불집회 등 다양한 명칭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에 합의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혁명이란 거대한 계급투쟁에 의해 사회구조와 정치구조의 변혁에 성공했거나,2 사회가 여러 대립 진영으로 갈라지고 민중의 압력에 의해 지배체제와 권력구조가 흔들리는 사건이다.3 그런 의미에서라면 촛불은 혁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럽의 1848년 혁명처럼 즉각적 사회변혁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혁명의 소리가 점점 커지고 가까워져 마침내 폭발”4하게 되는 역사 과정의 신호탄이 되었을 때 그것은 혁명으로 불린다. 우리 역사에서는 4·19혁명이 그러하다. 그럼 촛불은 무엇이었나?
2016년 촛불의 참여자들이 희구한 것이 혁명이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해 여름에 이화여대 학생들이 ‘학위 매매’를 비판하며 본관을 점령하고 1600여명의 경찰을 교내로 불러들인 총장에 항의하며 졸업생들이 ‘졸업장 반납’ 시위를 벌였을 때, 그리고 9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최순실과 그의 딸 정유라의 부정 의혹이 제기되고 10월 29일에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첫번째 촛불문화제가 개최되면서 대역사가 시작되었을 때, 거기 함께한 많은 시민의 염원이 오래된 상식의 복원이었는지 사회구조적 변혁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또한 그 촛불에 더 큰 정의, 더 넓은 평등, 더 깊은 의미에서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희구가 담겨 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 용산참사의 불길, 추방당한 피디와 교사들의 울분, 세월호참사의 희생자들이 남기고 간 바다처럼 무거운 슬픔과 부채의식이 ‘촛불’이라는 작은 공유 상징 안에 응축되어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간단히 촛불은 혁명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당시에 촛불의 혁명적 함의는 아직 추상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이처럼 촛불의 성격은 공존할 수 없는 둘을 함께 품은 ‘혁명/복고’(revolution/restoration)의 모순적 공존이었다. 그람시(A. Gramsci)는 이같은 “‘혁명/복고’의 변증법에서 혁명과 복고 중 어느 것이 압도하게 되느냐”5가 그 사회의 미래 발전방향을 규정한다고 보았다. 그것이 변증법인 이유는 혁명적 격변을 통해 숨겨져 있던 복고의 힘이 실현될 수 있고, 반대로 복고적 의식 저변에 잠재되어 있던 혁명적 에너지가 분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격동의 순간은 그 두가지 가능성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 본질은 바로 불확정성이다.
촛불 이후 이같은 혁명/복고의 변증법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왔는지를 살펴보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 바로 ‘공정’ ‘정의’ ‘평등’을 핵심어로 하는 정치사회적 역동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국민 앞에 약속했다. 이 문장은 탄핵이라는 공통의 요구로 모인 수많은 촛불시민들 내에 공존했던 다양한 미래 비전을 모순적으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개념들은 이제 문재인정부와 진보세력의 위선성을 상징하는 말처럼 되었고, 개혁에 저항하는 집단들이 즐겨 동원하는 담론적 무기가 되었다.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공정’은 기득권 세력의 정치공세와 집단이익을 위한 담론적 무기, 혹은 서열과 차별을 체화한 신자유주의 주체의 인식세계를 표현하는가, 아니면 우리 사회의 해소되지 않은 불평등과 불의를 고발하는 전복적 담론으로서 여전히 의의를 갖고 있는가? 우리가 촛불에 담긴 변혁의 잠재력을 길어올리려면 이미 오염되어버린 ‘공정’ 담론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인가, 아니면 더 큰 정의의 내용으로 공정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고 새롭게 만들 것인가? 이런 고민에서 출발하여 이 글에서는 한국사회의 공정 담론, 공정성에 대한 인식 및 여러 이슈의 성격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2. 공정 담론의 계보와 시민 인식의 변화
공정에 관한 사유와 토론을 위해 먼저 공정 담론의 계보, 그 발화 주체와 맥락, 화용론적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 유용하다. 도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왜, 어떤 의미로 공정을 말하고 중시하게 되었는지 아는 것이 우리 자신의 사유를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목적으로 국내 언론에서 공정 담론이 언제부터, 어느 매체에 의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로 대량생산되어왔는지를 보았다. 아래 그래프는 2000년부터 2020년까지 총 19개 국내 중앙지와 경제지에서 ‘공정성’을 포함하는 기사 건수의 추이를 연 단위로 분석한 결과다.
(a)를 통해 2010년부터 공정성 관련 기사량이 전반적으로 증가하였으며 2017년 한단계 더 상승했음을 볼 수 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2008년 이후로 정권 변화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높은 기사 건수를 유지해왔다. 월간 단위로 기사들을 분석해보면, 이때 공정성은 무엇보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구조적 불평등의 심화 및 사회적 취약층의 불안정성 증가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와 달리 조선·중앙·동아일보는 문재인정부가 들어선 2017년부터 관련 기사량이 폭증했다. 조국 전 장관,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문재인정부 인사들의 공정성 문제에 대한 비판 등이 주를 이루었다.
이상의 분석에서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공정 담론은 진보와 보수 언론 모두에서 빈번히 등장해왔을 뿐 아니라, 최근 관련 보도가 폭증한 보수언론보다 진보언론에서 꾸준히 다루어왔다. 둘째, 진보언론은 ‘공정’의 언어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불안정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뤄왔다면, 보수언론은 문재인정부가 들어선 뒤 정부여당에 대한 공격이나 입시·채용·자격취득의 문제를 중심으로 공정 담론을 생산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공정 담론의 계보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각기 다른 맥락에서 구성된 공정성의 의미들이 오늘날 공정이라는 하나의 언어 형식에 혼재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지금 한국에서 공정은 쉽게 버리거나 끌어안을 수 있는 단일한 담론이 아니라 그 안의 허구를 드러내고, 문제적인 것과 논쟁하며, 긍정적 중핵을 증폭시켜야 하는 복합적 성격의 담론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의 공정성에 대한 시민 인식의 추이는 어떠했는가? 이를 보기 위해 한국행정연구원 ‘사회통합실태조사’의 2013~20년 조사 결과를 분석했다. 조사의 공정성 부문 지표 중 법 집행, 복지혜택, 분배구조, 취업 기회, 성별 대우라는 5개 지표에서 2018년 이후 ‘한국사회가 불공정하다’는 인식이 감소하는 추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문재인정부 첫해인 2017년과 임기 4년차인 2020년을 비교해보면 ‘불공정하다’는 응답자 비율이 분배구조에 대해서는 73%에서 56%로, 취업 기회는 70%에서 52%로, 법 집행은 63%에서 54%로, 복지혜택은 55%에서 44%로, 성별 대우는 55%에서 43%로 각각 감소했다. 특히 공정 문제의 핵심이라 할 분배구조의 경우 성별, 연령별, 직업별, 가구소득별, 교육정도별로 나누어 분석해봐도 모두 비슷한 추이로 감소했다.
그러나 2020년 하반기 이후 한국사회의 공정성 인식이 악화되었다는 여러 조사 결과가 있다. 일례로 KBS가 2020년 9월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에서는 ‘문재인정부에 와서 더 공정해졌다’는 응답이 36.7%, ‘불공정해졌다’는 응답이 32.1%였던 데 비해,6 2021년 신년 여론조사에서는 같은 질문에 대해 ‘공정해졌다’는 응답이 34.6%, ‘불공정해졌다’는 응답이 40.0%로 나타나 부정적 인식이 더 많아졌다.7 즉 한국사회의 불공정에 대한 시민 인식은 십여년간 부정적인 상태를 지속해온 것이 아니며, 문재인정부에 와서 악화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사회불공정에 대한 불만은 각 시기에 정치의 정당성에 대한 태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왔다.
3. 공정성 이슈의 복합적 성격
공정성이라는 이슈는 문재인정부 초기부터 상당한 폭발력을 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사흘째인 2017년 5월 12일 인천국제공항공사를 방문해 ‘임기 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화’를 약속했는데, 이는 즉각 취업준비생을 비롯한 청년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정부 초기의 또다른 공정성 이슈는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팀을 남북한 단일팀으로 구성하기로 한 정부의 결정과 비트코인 투자에 대한 정부 규제였다. 이 세 이슈에서 반발 여론의 핵심은 ‘노력한 사람이 보상받을 기회가 있는 공정한 나라’를 원하며, 권력의 선택으로 누군가 이익이나 불이익을 받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정유라 사건’에 대한 여론과 공통점을 가지는가 하면 더 큰 맥락의 공익을 배제하기도 한다.
2019년의 대표적인 공정성 이슈는 단연 조국 전 법무장관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모든 언론 지면에서 ‘386세대 진보 좌파 운동권’의 ‘기득권’과 ‘이중성’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라는 전형적 서사가 형성되었다. 여기서 불공정 논란의 핵은 자녀의 진학과정으로, 이는 불법·특혜 여부만이 아니라 진보 권력자의 합법적인 계층 세습이 문제인가라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또다른 면은 한국사회에서 거대 권력을 누리며 불공정 구조를 구축해온 검찰과 보수언론이 공정을 외치는 대오의 선두를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즉 ‘공정’의 관점에서 이 사건은 한편으로 진정한 계급 평등에의 기대, 다른 한편으로 공정을 가장한 보수의 역습이라는 양면성을 갖는다.
2020년에는 인천국제공항공사 이슈가 재점화되었다. 보안업무 비정규직 사원들의 정규직화 정책에 정규직 노조가 반발했고, 일부 공시생이 ‘무임승차’에 반대한다면서 ‘부러진 펜’ 운동을 벌였다. 2021년에는 한국건강보험공단에서 유사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는 모두 노동시장의 제도적 분절에 관련되는 사안으로, 정규직 사원들의 좁은 능력주의 관념과 집단이익 추구가 일차적 비판 대상이 되었지만, 일부 공공기관의 정규직 전환이 민간으로 파급된다고 기대할 수 없는 가운데 다수의 비정규직은 정부의 선택 바깥에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상존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대 비정규직 비율은 2016년 32.2%에서 2019년 38.3%로 치솟고 있었다. 이처럼 여러 공정성 이슈들은 기득권층의 정치공세나 능력주의 논리와 더불어, 보다 넓은 정의와 평등의 관점에서도 문제적인 상황들이었다.
한편 명확하게 기득권 집단의 공정성 논리를 보여주는 경우, 반대로 진보주의적 관점에서 불공정의 이슈를 분명히 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전자의 대표적 사례는 ‘의사파업’이다. 2020년 정부의 공공의대 설립 계획에 반대하는 전공의와 의대생이 파업을 일으키며 정부와 격한 갈등을 빚었는데, 여기서도 파업 의사들은 ‘공정성’을 내세웠다. 2020년 9월 1일 ‘젊은의사 비상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의사측은 “망가져버린 부동산 정책,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논란 등”을 언급하며 “공정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정부에 맞서” “의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청년들로서 모든 청년들과 함께 연대하려”8 한다고 선언하며 공정성이라는 보편성의 담론을 한국사회 최상류층인 의사들의 집단이익에 접합시켰다.
후자의 대표 사례는 ‘부동산’ 문제다. 2020년 하반기부터 부동산 가격 폭등과 정부의 부동산·주거 정책에 대한 불만이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정치적 지지가 급락했다. 한국갤럽이 발표한 2021년 7월 1주차 「데일리 오피니언」(제454호)에 따르면,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이 2018년 7월에 31%에서 2019년 3월에는 41%로 증가하고, 국회의원 총선 직후인 2020년 6월에는 42%의 수치를 보였다. 그해 하반기부터는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어 2021년 7월에 이르면 5명 중 4명꼴인 78%가 부정적인 평가를 했다. 대다수 시민들이 이 상황을 ‘촛불의 배반’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상과 같이 지난 몇년 동안 큰 논란이 되었던 공정성 이슈들의 성격을 분별해보면 기득권 집단의 수구적 담론 전략, 신자유주의 주체의 능력주의적 믿음, 그리고 구조적 불평등 문제의 지속 또는 심화에 대한 분노라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혼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4. 공정성의 정치와 헤게모니 투쟁
이제 여러 사회 집단이 다양한 맥락에서 주창하고 있는 공정 담론들이 각기 어떤 가치 지향을 내포하고 있으며, 공정 또는 정의에 관한 어떤 관념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고찰해보기로 한다.
우리는 오늘날 공정, 정의, 평등, 공평, 형평 등의 용어들이 화자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학술적으로도 대단히 다양한 이론과 개념 정의, 번역이 혼재한다. 정치 이론의 경우 롤즈(J. Rawls)는 ‘justice’의 핵심을 공평함(fairness)으로 이론화한 데 비해9 샌델(M. Sandel)이나 왈저(M. Walzer)의 정의론은 ‘justice’를 더 폭넓은 가치들의 맥락에서 설명한다.10 한국에서도 ‘공정’과 ‘정의’를 유사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공정’은 등가적 보상을 뜻하는 ‘공평’과 비슷하게 보면서 ‘정의’를 그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혼란이 지속되는 이유는 단지 사람들이 용어 사용에 부주의하거나 합의를 위한 노력에 게을렀기 때문은 아니다. 근본 원인은 그것들이 고도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개념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사용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하고 과거의 의미 위에 중첩되어 의미의 지층이 형성되어왔다. 또한 다양한 구조적 위치와 경험, 이해관계를 갖는 사회 집단들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개념들을 활용해왔기 때문에 동시대적으로도 매우 다른 의미들이 투사되어 있다.11
더욱 중요한 점은 바로 이러한 다의성이야말로 특수한 하나의 의미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헤게모니 투쟁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이다. 다양한 계층의 행위자들이 서로 다른 정의와 공정의 관념을 우리 사회의 가장 긴급한 과제로 격상시키려고 경합하는 과정은, 그람시가 말한 ‘지적·도덕적 헤게모니’를 향한 투쟁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부분과 전체, 특수와 보편 간의 이같은 관계를 고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공정 또는 정의가 현대사회를 지탱하는 여러 가치 중 하나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현대사회의 법제와 문화는 인간 존엄, 인권, 자유, 평등, 연대, 정의, 공정과 같은 가치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샌델이 주장했듯이 정의는 재화를 분배하는 방식을 뜻하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좋은 삶’과 ‘좋은 사회’가 무엇인가라는 가치의 문제와 관련된다.12
다음으로, 정의라는 개념 안에서도 ‘어떤 정의’인가를 논해야 한다. 형식적 합리성과 실질적 합리성, 또는 절차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의 관계는 현대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중대한 쟁점이 되어왔다. 절차적 정의는 종종 법 집행의 공정성으로 축소되어 이해되기도 하지만, 실은 훨씬 심대한 현대성의 근본원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베버(M. Weber)가 현대사회의 ‘법적-합리적 지배’의 핵심으로 본 것이 바로 절차적 정의다. 그 핵심은 비인격성, 형식주의, 보편주의로, 누가 그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규칙의 적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따라야 할 형식적 규칙이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특권, 특혜, 자의성, 예외성, 예측불가능성 등이 절차적 정의의 반대말이 된다.13
현대사회에서 분배적 정의 역시 폭발적 힘을 갖고 있다. 민주주의와 법치 등 형식적 합리성이 성숙한 사회에서도 통치자가 부의 집중을 방치하고 민중의 고통을 경시하는 경우 대중의 분노가 불붙기도 한다. 분배적 정의 내에도 상반된 정의의 관념이 있는데, 그중 특히 ‘평등’의 가치에 입각한 정의 개념과 ‘비례성’의 원리에 입각한 정의 개념의 구분이 중요하다.14 평등의 원리를 따른다면 만인의 기본권이 보장받고, 경쟁의 조건을 고르게 하며, 과도한 격차를 억제하는 등이 정의의 중핵이 된다. 그와 달리 비례적 정의는 개인의 능력, 노력, 성취에 상응하여 등가적인 보상을 하는 것이다. 특히 현실의 경쟁적 조건에서 상이한 능력과 노력, 성취를 보인 개인들에 대해 차별적인 보상을 중시하는 것을 ‘비교적 정의’의 관념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15
요즘 한국에서 많이 얘기하는 ‘능력주의’ 역시 이런 의미의 비례적 정의와 관련된다. 그런데 보상의 자격을 판단하는 기준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경험, 숙련, 소통과 화합, 조직에 대한 기여 등 다양한 요소가 여기에 포함되며 시험도 그중 하나다. 시험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정기적인 직무평가가 있는가 하면 입시, 채용, 고시, 자격시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한국에서 중요하게 논의되는 의대 자격, 대학 입시, 정규직 공채 같은 것은 정의의 전체 체계 중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지금의 공정 담론이 그러한 것들을 우리 사회의 가장 중대하고 보편적인 정의의 척도라고 믿게 만든다면, 거기에 헤게모니가 있는 것이다.
5.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더 큰 정의로
축의 문명(Axial Civilization)이 시작된 이래로 인류 역사에서 정의라는 관념은 ‘좋은 삶’과 ‘좋은 세상’에 관한 이상과, 그 이상에 비추어 불완전한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는 데서 생겨났다. 미국독립혁명,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과 같은 현대의 대혁명은 이런 근본 가치들이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대중의 참여로 전환된 곳에서 일어났다.16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존중받는 세상, 인간을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로 나누지 않는 세상, 누구도 버림받지 않고 안전할 수 있는 세상에 가까워지는 만큼, 그런 사회적 이상들에 다가가는 만큼 우리는 이 현실이 정의롭다고 느낀다. 정의의 관념은 사상과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사시험, 채용절차, 자격증으로 협소화된 공정론을 넘는 더 큰 정의를 말해야 한다. 그것은 절차적 정의를 중시하되 그 한계를 주시하고, 자본주의사회의 비례적·등가적·계산적 정의의 지배력에 대항하면서, 지배계급들에 의해 간과되고 억압되는 평등적 정의를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개인의 자유, 기회의 평등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완성하는 길이다. 아마르티아 쎈(Amartya Sen)이 강조하듯 각자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즉 역량”17을 모든 사람이 직업과 학력, 성별, 가족 배경에 상관없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실질적인 자유이자 기회의 평등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더 큰 정의는 평등, 존엄, 인권, 박애, 연대와 같은 다른 보편적 가치들과 어울려 풍부해져야 한다. 그것은 닫힌 자아의 경계를 개방하는 ‘공거(共居)의 윤리’18, 공존·공생·공유의 윤리를 사회에 확산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가치에의 헌신은 추상적 도덕이나 논리적 설득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구체적인 문제 현실에의 관여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지 인식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삶의 변화, 관계의 변화다.19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더 큰 정의를 말한다는 것은 아파트 경비원, 청소 노동자, 배달 노동자, 물류창고 노동자, 콜센터 상담직원, 마트 계산원, 식당 서비스 노동자, 학습지 교사, 편의점 알바, 중소기업 공장노동자, 폐업한 식당주인, 실직한 회사원, 돌봄노동자, 독거노인, 이 모든 사람이 정의론과 공정론을 다시 쓰는 주인공이 된다는 것과 같다. 이들이 꿈꾸는 정의, 이들의 무너진 정의, 이들 위에 군림하는 불의의 질서를 말하는 것이 더 큰 정의다. 비정규직이 어떤 절차를 밟아야 정규직이 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누가 왜 비정규직을 양산했는지를 말하라. 정부가 실업자를 도와주는 것이 공정인지 따지지 말고 왜 기업의 수출과 이윤은 느는데 일자리는 늘지 않는지를 따져보라. 그것이 더 큰 정의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의 개념하에 절차적 정의와 비례적 정의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치부해선 안 된다. 절차적 정의의 형식적 보편성과 비례적 정의의 보상 기제는 현대라는 역사적 시간의 제도와 심성구조를 구성하는 기둥의 하나다. 그러므로 절차적·비례적 정의 자체를 폄훼한다면 다수 시민들의 동의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이 글에서 보았듯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절차적·비례적 정의의 열망은 진보적 평등주의의 요소와 혼재하는 경우가 많다. 그 모순적 현실에서 어느 한쪽만 보고 대상을 규정해선 안 된다. 정규직으로 전환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며 박탈감을 표하는 불안한 청년들을 이기심에 찌든 신자유주의 주체로 몰아세울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이들의 불안이 더 큰 정의로 흐를 수 있는 물길을 파야 한다.
독일의 철학자 블로흐(E. Bloch)는 나치 시대에 ‘비동시대적인 것의 동시대성’(die Gleichzeitigkeit des Ungleichzeitigen)에 관한 중요한 글을 발표했다.20 그는 과거를 상징하는 자들과 미래를 상징하는 자들, 역사를 뒤로 돌리려는 세력과 혁명적 세력이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는 불안한 현실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의 통찰에서 탁월한 점은 동시대인들을 반동적 세력과 혁명적 세력으로 단순히 나누지 않고 실업과 빈곤에 지친 청년과 농민, 몰락한 중산층의 반동적 에너지 안에서 혁명의 잠재력을 보았다는 데 있다. 그는 때론 나치에 동조하기도 하는 사회 집단들의 분노를 반동으로만 규정해선 안 되며, 그들 안에 있는 ‘유토피아적 낮꿈’의 파편들을 발견하고 이를 현실적으로 조직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정의’와 ‘공정’의 정치가 벌어지는 장에서도 반동의 에너지와 변혁의 잠재성이 공존하는 ‘혁명/복고의 변증법’이 움직이고 있다. 모순의 총체성을 반토막 내지 말고 역사의 앞길로 굴리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더 큰 정의로 공정을 다시 쓰는 것이 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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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istide Zolberg, “Moments of Madness,” Politics and Society 2(2), 1972, 183~207면.↩
- Theda Skocpol, States and Social Revolutio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 Charles Tilly, European Revolutions, 1492~1992, Blackwell 1993.↩
-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 박현채·차명수 옮김, 한길사 1984, 448면.↩
- Antonio Gramsci, Quaderni del carcere, volume I~IV, Einaudi 1975, Q3 §125.↩
- 「(추석민심) ① ‘대통령 국정운영’ 잘한다 47%, 잘못한다 48.6%」, KBS 2020.10.1.↩
- 「(신년 여론조사) ② 이재명 21.7 이낙연 16.9 윤석열 13.8…보궐선거는 ‘정권 심판’」, KBS 2021.1.2.↩
- 「부동산·비정규직까지 꺼내며 ‘항복 도장’ 찍으라는 전공의들」, 한겨레 2020.9.1.↩
-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Belknap Press 1971.↩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0; Michael Walzer, Spheres of Justice, Basic Books 1983.↩
- Reinhart Koselleck, Zeitschichten, Suhrkamp 2000.↩
- 마이클 샌델, 같은 책 361~62면.↩
- Max Weber, Wirtschaft und Gesellschaft〔1922〕, J.C.B. Mohr (Paul Siebeck) 1972.↩
- 조너선 하이트 『바른 마음』, 왕수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14; Jonathan Haidt, “Of Freedom and Fairness.” Democracy: A Journal of Ideas, No. 28, 2013.↩
- 김정희원 「‘공정’의 이데올로기, 문제화를 넘어 대안을 모색할 때」, 『황해문화』 2020년 겨울호 24~43면.↩
- Shmuel Noah Eisenstadt, Die Vielfalt der Moderne, Velbrück Wissenschaft 2000.↩
- 아마티아 센 『자유로서의 발전』, 김원기 옮김, 갈라파고스 2013, 132면.↩
- 백원담 「공정성 담론과 지구적 공거(共居)의 윤리」, 『황해문화』 2020년 겨울호 2~21면.↩
- Hans Joas, The Sacredness of Person, Georgetown University Press 2013.↩
- Ernst Bloch, Erbschaft dieser Zeit〔1935〕, Suhrkamp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