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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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호 趙仁鎬

1981년 충남 논산 출생. 2006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방독면』 등이 있음.

sd31345@hanmail.net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어렸을 적, 내가 우리의 여왕에 대해 들었던 때가 언제였을까? 아니, 우리에게도 여왕이 있었던 거긴 할까?

2021년 여름,

여왕의 죽음은 평안했다. 그녀는 거의 한세기를 살았고,

해방과 전쟁, 혁명과 테러와 팬데믹을 겪은 위대한 여자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녀는 아홉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자녀들이 커가는 모습이 담긴 것들을 좋아하는

평범한 여자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아이의 젖니로 만든 펜던트 같은

반짝이는 것들 말이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여왕이 있었던 거지? 나는 맥주를 마시다 말고 죽은 아버지의 사진첩을 꺼냈다.

그리고 몇장의 사진에서 파업 노동자들의 공장을 찾은

젊은 여왕의 모습이 아이스크림 얼룩처럼 군중 속에 묻어 있는 걸 발견했다.

1989년의 대롱대롱 멜론 맛 아이스크림.

그해 열살도 채 되지 않았던 나는

멜론이란 과일을 대롱대롱 포장지에서 처음 봤던 기억은 난다.

하지만 나는 그 몇장의 사진만으로는 여왕이 있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맥주를 너무 많이 마시기도 했고.

 

여왕이 죽은 첫째날,

국회의원들과 유명인사들, 각국의 주한대사들이 조문했다.

둘째날은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과 중국의 시 진핑 주석, 일본의 나루히또 천황, 캐나다의 젊은 총리 쥐스땡 트뤼도의 조문이 이어졌지만,

올해 95세가 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장거리 비행이 무리여서 방한하진 못했다.

비로소 여왕이 죽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우리에게 여왕이 있었는지도 몰랐던 나는 조문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광장의 지하철역을 나서며 싸구려 꽃 몇송이를 샀고,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리라,

다짐했다.

 

거의 한세기를 살아온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을 만큼,

관에 누운 그녀는 젊어 보였다.

고귀한 인품을 보여주는 듯한 반듯한 눈매와 숱이 많은 눈썹, 굳게 다문 입술, 작은 얼굴에 비해 굵은 목둘레는

왕관의 무게를 오래 견뎌왔던 그녀의 삶을 함축적으로 보여주었기에

특별히 인상적이었다.

가슴에 올린 깍지 낀 두 손은

그녀의 위엄을 빈틈없이 감싸 안고 있었고

면으로 짠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검소함을,

죽음이 말없이 드러내주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진 못했지만

왠지 계속 눈물이 났고,

결국, 내가 왜 우는지 그 이유를 끝내 기억해내진 못했다.

 

여왕의 해체식은 생중계되었다.

여왕의 고귀한 목이, 절단되기까지는 놀랍게도 단 몇초밖에 필요치 않았다.

대통령께서 그녀의 목을 하늘 향해 번쩍 들어 올리자,

장엄한 국가가 연주되었다.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무엇보다도 가장 흥미로운 건 그녀의 손가락이었다.

깍지 꼈을 때 보이지 않던,

그녀의 숨은 여섯번째 손가락이 거의 한세기가 지나서

세상에 드러났고 그마저도 순식간에 절단되자,

짧고 굵은 외마디 감탄사가

아나운서의 목청에서 흘러나왔다. 그녀의 절단된 신체들은 각국에서 조문 온 사절단들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전달되었고,

국장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내가 광장을 다시 찾은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인적이 끊긴 광장에는

여왕을 기념하는 꺼지지 않는 횃불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며칠이 지나고

나는 해변에 앉아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지만,

우리에게 여왕이 있었는지 지금까지도 기억나지 않는 것만 같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죽은 물고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해변으로 밀려왔다.

유치하게도 나는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라고 쓰고

다시 지우며 휴가의 마지막 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멀리,

아이들이 모래가 묻은 발로

나를 향해 겁 없이 뛰어오고 있다.

 

 

 

부작용의 공동체

 

 

백신을 거부하는 모임인 이 여름의 캠프에서 나는 무슨 고백을 해야 할까?

우리의 텐트는 일인용이고,

옆 텐트의 너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놈이다. 지구가 평평하건 둥글건 너하고는 상관없다. 너란 녀석은 평생 지구 밖으로 나갈 일 없을 테니 말이다.

그 옆 텐트의 김민지는,

동전 괴담에 나오는 김민지 괴담을 믿는다.

십원짜리 다보탑의 밑면을 옆으로 보면 ‘김’이라는 글자가, 오십원짜리 꺾인 볏잎은 범행 당시 사용한 도구인 ‘낫’으로, 백원짜리 이순신 장군의 수염을 거꾸로 보면 잘린 ‘머리’가, 오백원짜리 학의 다리는 김민지의 묶인 ‘손’으로 보인다고 한다.

보인다,가 아니라 보여진다,겠지. 민지야,

그래서 야, 김민지! 부르면 너는 무슨 겁에 질린 사슴처럼 숲속으로 달아나는 것처럼 보여진다.

이 여름의 캠프는 미쳤다.

백신을 맞으면 무슨 특별한 능력이 생긴다는데

아내가 백신을 맞고 죽은 사람을 보게 됐다는 이 남자는 자기도 귀신을 보게 될까봐 두렵대.

정확히 말하자면, 의학적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보인다는 것인데

내가 보기엔 이 남자는 이미 의학적으로 뇌사 판정 받은 거 같다.

이 여름의 캠프는 미쳤다.

아이는 말한다. 자기가 무슨 레고 조각이라고 한다. 그래서 꼭 자기 몸만큼의 틈만 생기면 자꾸만 들어가 있네. 틈을 채워야 한대.

자기는 인체에 무해한 친환경 플라스틱이라는데 열에 약하대.

그래서 아이야,

너는 여름 태양 블록을 피해 도망치고 있구나. 네 녀석은 조그만 레고 조각이니까 말이야.

이 여름의 캠프는 미쳤다.

나는 내가 믿는 것에 대해 오늘 밤 모두가 둘러앉은 모닥불 앞에서 고백해야 하지.

부끄럽게도, 내가 믿는 건 스머프. 파파 스머프.

백신을 맞으면 파래진다는 스머프 설을 믿는다.

내가 왜 이따위 파파 스머프 설을 믿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보여. 파란 멍이라는 게 말이야.

이 여름의 캠프는 미쳤다.

언제부터 이 캠프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곳에 있다. 그저 존재한다.

아직 우리에게 순서가 안 온 거지? 백신 맞는 날이 우리에게 오기나 할까?

백신을 맞으면, 그 모든 걸 알게 될 텐데.

이 여름의 캠프는 미쳤다.

지구가 평평한 접시 같다고? 둥글지 않으면 떨어질 끝이 반드시 있을 테니 넌 거기 끝에서 떨어져 죽으려는 거겠지. 네 녀석이 지구 끝에서 투신할 때

먼젓번 자동차 바퀴에 깔려 죽은 네 녀석의 반려견이

납작한 스티커 자석처럼 냉장고에 붙어 있는데도,

널 원망하진 않을 거다.

이 여름의 캠프는 미쳤다.

김민지, 하고 부르면 길 가던 사람 열에 둘은 돌아본다는 거 안다. 동전 따위야 이제 쓰지 않잖아? 근데 이제 보여. 길가에 김민지들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떨어져 있는 게.

아무도 줍지 않고 있는 동전이란 게. 흔하게 보인다.

이 여름의 캠프는 미쳤다.

알아, 엄마가 레고 사러 쇼핑몰 갔다가 거기서 감염됐다는 거. 레고 손 모양이 그렇게 생긴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란 거.

마이 미니 피겨야. 너는 무엇이든 들 수 있는 갈고리 손이 있으니 죽은 엄마를 다시 조립하렴.

이 여름의 캠프는 미쳤다.

아저씨, 사실 나도 귀신이 보입니다. 아내분이 귀신을 보는 게 아니라 아저씨가 돌아가신 아내분을 보고 있다는 걸. 그런 아저씨를 난 보지요.

이 여름의 캠프는 미쳤다.

파파 스머프라니, 알잖아? 영안실 냉동고 속에서 꺼낸 당신은 온통 푸른 멍투성이. 사람은 죽으면 스머프가 된다는 걸.

이 여름의 캠프는 미쳤다.

백신을 거부하는 모임인 이 여름의 캠프에 오고 나서야 부작용이 꼭 좋지 않은 것만은 아니란 걸,

알았다. 게다가

나는 내가 자가격리돼야 할

진짜로 미친놈이란 걸,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