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시 이전의 시, 시 너머의 시
신철규 愼哲圭
시인.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등이 있음.
12340158@hanmail.net
1. 너무 많은 혼자, 너무 먼 지구
코로나 팬데믹이 쉽게 지나가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는 바이러스는 세계를, 인간을 멈추게 만들었다. 모든 만남과 집합을 제한하거나 경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까스로 우리는 일상을 부여잡고 있다. 부지불식간에 서로에게 감염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를 위축시키고 서로 거리를 두게 했다. 우리는 더 많이, 더 깊이 혼자가 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혼자의 넓이’를 가늠해보며 우리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인지하지 않으려 했던 ‘나’와 가장 밀착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
5월에 출간된 이문재의 여섯번째 시집 『혼자의 넓이』(창비 2021)는 지금 우리 시대를 정확하게 가리킨다. 어떤 것과도 연결되지 않은 나 자신을 오롯이 마주해야 하는 시간에서 비롯된 ‘혼자’라는 난감함, 그리고 관심이 나로 집중되고 생각은 바깥으로 뻗어나가지 못한 채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 데서 비롯된 ‘혼자’라는 지극한 무거움을 우리는 동시에 느끼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공동체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지속적으로 인간문명의 발전과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던 시인인데 ‘우리’가 아니라 ‘혼자’라니 의아할 수밖에 없다.
해가 뜨면
나무가 자기 그늘로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종일 반원을 그리듯이
혼자도 자기 넓이를 가늠하곤 한다
(…)
혼자가 혼자를 잃어버린 가설무대 같은 밤이 지나면
우리 혼자는 밖으로 나가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제 그림자를 찾아오는 키 큰 나무를 바라보곤 한다
—「혼자의 넓이」 부분
이문재 시인은 지난 2월 팬데믹이 전지구의 발목을 묶어버린 상황에서 시집 원고를 정리한다는 핑계로 강화도에서 한달간 집을 세내어 살았다고 한다. 정작 시집 묶는 작업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몇편의 시만 건져서 돌아왔는데 그중 한편이 바로 「혼자의 넓이」이다. 혼자란 무엇인가. 남과 더불어 있지 않고 홀로 있는 상태이며 다른 사람 없이 홀로 떨어져 있는 ‘나’라는 유일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 우리는 더 많은 것들과 함께한다. 혼자 있는 시간은 혼자가 될 수 없음을 간절하게 느끼는 시간이며, 잃어버렸던, 아니 멀어졌던 자기의 그림자를 되찾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그림자가 생겨나고 태양의 이동에 따라 반원을 그리며 길이가 줄었다가 늘어난다. 결국 다시 가장 안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그림자이다. 여기서 ‘넓이’는 그 그림자가 뻗어나가는 범위와 영역을 동시에 가리킨다. 그것은 나로부터 뻗어나갈 수 있는 공간적 한정에 기원을 둔 ‘어디까지가 나인가’라는 질문과 타인 또는 타자로부터 내가 분리되고 변별되는 지점을 찾는 ‘어디서부터 나인가’라는 질문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나 아닌 것들, 그리고 그것들과의 관계에 더 깊이 ‘스며드는’ 시간이 바로 혼자일 것이다.
이번 시집의 열쇳말은 두개다. ‘혼자’와 ‘남쪽’. 남쪽은 내가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이 사는 곳이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희망을 내포하고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혼자’는 그 반대편에 있다. 혼자는 난감한 존재이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국가와 시장은 개인을 공동체와 완전히 분리하여 ‘혼자’로 만들어버렸다. 모든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사회체제나 질서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탓으로 돌리게 했다는 의미에서 국가와 시장은 승리했다. 이로써 국가와 시장의 구조에 대한 저항이나 비판을 사라지게 했다. 국가와 시장은 기업이 더 많은 이익을 내고 원활히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하수인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기업이 전지구를 지배하고 있다. ‘혼자’가 각성해서 국가와 기업에 저항하고 항의해야 한다.
‘우리’가 없이 ‘혼자들’만 가득한 세상, ‘혼자의 팬데믹’.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최소화하고 자기 안에 머무르는 존재들이 많아졌다. 이들을 어떻게 바깥세상으로 불러낼 수 있을까. 이 혼자들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혼자들이 맞닥뜨린 모니터 속의 세상이 아닌 지구와 연결된 ‘세계감’을 어떻게 회복하게 할 수 있을까. 온전한 삶의 회복은 전지구적 문제에 대한 연대에서도 비롯되겠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은 ‘남쪽’의 회복이다. 남쪽은 나를 이 세계에 붙박게 해주는 “무거운 중력”이며 타인과 결속시켜주는 “팽팽한 인력”(「마음의 바깥」)이다. 그리워할 사람도 없고 자신의 삶의 지향점마저 잃어버린 시대에서 우리는 더욱 더 혼자 안에 갇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혼자’는 바라볼 얼굴이 없고 자신의 얼굴을 보여줄 타인이 없는 상태이기도 하다.
내 얼굴은 나를 향하지 못한다
내 눈은 내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 손은 내 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얼굴은 남의 것이다
손은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기 위한 것
누군가에게 내밀기 위한 것이다
입과 코가 그렇고
두 귀는 물론 두 발도 그러하다
안 못지않게 바깥이 중요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앞에 있는
나 또한 가장 귀중한 사람이다
조금 낯설지만
알고 보면 아주 낯익은 이야기다
—「얼굴—아주 낯익은 낯선 이야기」 전문
얼굴 안쪽인 마음만큼 마음 바깥인 얼굴도, 이목구비도, 몸도 중요하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볼 수 없는 것이며 타인에게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굴은 남의 것이다”. 얼굴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나를 봐주는 “내 앞에 있는 사람”, 바깥의 타인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나 또한 타인의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그를 생성하는 존재가 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귀중한 사람”이 된다. 주체의 시선이 일방적으로 뻗어나가는 보는 행위의 핵심에 감각의 만족과 자기 망각이 있는 반면, 얼굴을 마주 보는 대면은 자기의 위치와 타자의 위치를 끊임없이 반성하게 하여 자신의 인식적·물리적 폭력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타자를 향한 시선과 자신을 향한 시선이 교차·충돌하면서 우리는 타자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책임을 떠안게 되는 것이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이러한 마주봄의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바깥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내 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존재 안의 모순과 대극들을 떠안아야만 우리는 제대로 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화이부동 존이구동(和而不同存異求同)’. 어울리면서 같아지지 않고, 다르게 있으면서 같음을 좇는다. 이를 달리 번역하면, 같지 않기에 어울릴 수 있고 같음을 좇고 있으면서도 다른 것을 놓지 않는다. 1부와 2부에 실려 있는 시들은 대개 관찰과 발견을 통해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이르는데, 이 시들에서 이문재는 우리가 쉽게 지나쳤던 대상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데 공을 들인다. 사태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낯설고도 낯익은 이야기, 새롭지만 오래된 이야기를 발굴하는 것과 같다. 낯설지 않아야 할 것들이 낯설어지고 낯익은 것들이 만들어낸 인식론적 맹목을 뒤집는 것이 시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의 생각은 근본적이어서 급진적이다.
3부에 실려 있는 시들은 바깥 중에서도 가장 큰 바깥, 지구에 대한 생각과 지구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이 담겨 있다. 여기서 그의 잠언들은 하나의 계율에, 기도문에 가까워진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일 생각」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개별자를 아우르는 전체, 부분과 부분을 잇는 연결과 통합, 무한을 거부하는 전체성이 아니라 무한을 향해 가는 전체성에 대한 생각이 담긴 시들이 많다.
이번 시집은 상당한 타협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3부에 있는 시만으로 시집을 묶고 싶었다. 서정적 양식에 충실한, 그래서 독자의 감성을 깨우는 시들을 앞에 배치한 것은 3부에서 이야기하는 메시지들을 읽게 하려는 하나의 입구 또는 미끼 같은 것이다. 3부에 실린 시들이 내가 진짜 전하고 싶은 이야기이며 시집의 안방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지구와 인간의 위기를 절감하게 해주고 싶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문재는 시를 통해 전환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낯선 생각과 낯익은 감각, 낯익은 생각과 낯선 감각의 충돌을 통한 인식의 전환을 꾀하는 것이 ‘전환의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첨단인가,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전환(轉換)의 환은 변(變)과 다른데, 변이 그 자체의 성질이나 모양을 달리하는 것이라면 환은 이것과 저것의 자리바꿈을 통해 달라지는 것을 가리킨다. 영어로는 conversion에 가깝다. 완전히(con) 돌아서는 것(vers), 완전히 방향을 바꾸는 것. 그는 위치와 관점을 동시에 바꾸어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통해 우리의 자동화된 감각과 관습적인 인식을 무너뜨린다. 높은 것과 낮은 것, 위와 아래, 앞과 뒤, 먼저와 나중, 드러난 것과 숨은 것을 뒤집어엎거나 자리를 바꾸어 체제가 강요하는 견고한 관념과 질서를 흔들고 새롭게 정립하고자 한다(이러한 전환의 상상력을 우리의 일상 속으로, 시인의 삶 가까이 끌어들인 것이 1부와 2부의 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큰 이야기, 다른 이야기, 눈앞의 문명이 아니라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먼 지구의 이야기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것은 “낯선 처음”(「시인의 말」)의 이야기들이다.
우리 시가 너무 작은 이야기에 머무르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를 가지고 있다. 사적 영역으로 시를 한정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우리 시는 나와 너를 포함한 인간의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와 과거의 대화에만 충실하다. 나는 이것을 답답하게 느끼고 문제적으로 바라본다. 여기에는 미래가, ‘그들’이, 다른 자연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이 시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의인화된 자연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문학이 큰 이야기, 거대 담론, 지구적 상상을 했으면 좋겠다. 우리 시 안에는 타자가 부족하거나 미약해 보인다.
3부의 시에는 인간의 불행과 고통을 이야기하면서, 지구의 불행과 고통을 그것과 연결시키는 인식의 도약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인간이 잃어버린 것은 지구가 잃어버린 것이고 인간이 아픈 것은 지구 전체가 아프다는 뜻이다. ‘남쪽’의 상실은 비단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급속하게 낡아버린 미래, 손쉽게 폐기처분된 과거 사이에 현재(현실)가 놓여 있다. 그는 스스로 ‘곧추선 풍향계’(「풍향계」)처럼 시간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현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문명의 척후병이 되고자 한다. 3부의 시들은 우리가 훔쳐온 미래에 대한 고발이며, 방사능과 미세먼지와 중금속으로 오염된, 빼앗긴 땅에 대한 뼈아픈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인간 문명의 가장 큰 위기인 에너지, 식량, 기후 문제 등을 빼놓고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이며 허구이지 않은가,라고 우리에게 질문한다.
이문재는 1982년 『시운동』으로 시단에 나왔으니 올해가 그의 등단 40주년이다. 생물학적 나이 예순둘, 할아버지가 되었다고 씁쓸하게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는 데 서툴고 사는 것이 불편하며, 자기 안의 어린아이와 싸우고 있다는 점에서 미성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등단 40년을 맞는 소회를 물어보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간 시에 대해 진지하지 못했다. 시를 쓰느라 밤을 새워 고민해본 적이 없다. 단어 하나를 고심해서 고르는 작업도 거의 해보지 않았다. 이제라도 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나는 시를 빨리 쓰고, 그러고서는 거의 고치지 않는다. 짧은 시든 긴 시든 한 호흡에 쓴다. 그만큼 한편을 집중적으로, 집약적으로 쓴다. 시를 구상하고 설계해서 쓰는 것은 생래적으로 나와 맞지 않는다. 메모지를 안쪽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아이디어가 될 만한 구문들을 때때로 적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습작 시절부터 시는 한달음에 받아쓰는 것이라는 자의식이 강했던 것 같다.
이문재의 시에 나타난 문명 비판이나 생태학적 담론은 너무 포괄적이어서 무책임해 보이기도 한다. 문명전환이라는 대과업을 개인의 힘으로 할 수도 없고 정부는 손을 놓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을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것은 때로 너무 비현실이고 비현재적이어서 허황된 말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생각하면서 나 자신이 바뀐다는 차원에서는 현실적이며 현재적이다. 현재에 머물러 있는 생각은 그 한계가 명확하며 이 체제에 어떤 충격도 줄 수 없다. 미래를 불러오는 생각, 미래와 함께하는 생각이 현재를, 현실을 바꿀 수 있다. 이 쉽지 않은 생각을 그는 빠르게 해낸다. 아니, 힘든 생각이 말이 된다고 판단한 순간 그것은 곧장 시가 된다. 그는 의외로 빨리 쓴다. 이미 자기 안에서 시가 된 것들을 활자로 옮겨놓으면, 받아 적으면 되기 때문이다.
2. 힘든 생각, 힘이 되는 생각
이문재는 한때 ‘곱고 아련한 시’를 쓰는 상상력주의자였다.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데, 이러한 규정은 스스로가 아니라 그와는 대척적인 시를 추구했던 현실주의자들에 의해 내려진 것이다. ‘곱다’는 것은 이미지와 언어의 결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가리키며, ‘아련하다’는 것은 내용이나 주제의식에 선명성이 약하다는 것을 뜻한다. 1980년대 민중시가 선편을 잡고 있던 문학장에서, 군부독재와 권위주의체제의 억압과 싸우거나 그것을 비판하지 않고 자기의 내면에 빠져 있던 시인들은 회의론자 또는 현실 도피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현실의 반대편에 상상을 놓고 상상력을 동원한 이미지의 세심한 가공과 정서의 표출에 중점을 둔 서정시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렇다고 이문재가 정말 곱고 아련한 시를 썼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반적인 규정일 뿐이지 당시의 정치적 현실과 계급 착취 구조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은 그의 시들의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넓다. 이문재의 첫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민음사 1988, 개정판 문학동네 2021)는 들끓는 정념과 막연한 그리움이 뒤섞여 있는 청춘의 기록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젖은 신발’을 신고 길 위를 걸으면서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옛집 지붕’의 환영을 보며 빛이 되지 못한 불을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향일성 또는 구심력을 바탕으로 이 누추한 삶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지 스스로 질문하고, 몽환적인 이미지와 자조적인 언어유희를 통해 세상을 향한 날을 세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떠나오면서부터 그 집은 빈집이 되었지만
강이 그리울 때 바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
강이나 바다의 높이로 그 옛집 푸른 지붕은 역시 반짝여 주곤 했다
가령 내가 어떤 힘으로 버림받고
버림받음으로 해서 아니다 아니다
이러는 게 아니었다 울고 있을 때
나는 빈집을 흘러나오는 음악 같은
기억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살던 옛집 지붕」 부분
그는 “옛집”을 최종적으로 “빈집”으로 만든 것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폐쇄적이고 고정된 집을 떠나 개방적이고 유동적인 강과 바다를 찾아가서도 눈에 아른거리는 것은 “옛집 푸른 지붕”이었음을 시인은 아프게 고백한다. 집 없이는 강도 바다도 없으며, 반짝임도 없는 것이다. 강과 바다 쪽으로 갈수록 그는 과거의 기억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 수밖에 없다. 집의 허물어짐은 곧 나의 허물어짐이었으며, 자신은 무너진 사랑의 잔해라는 것을 뼈아프게 깨닫는다. ‘죽음의 집’에서 ‘사랑의 집’으로 이사하는 것이 길 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아버지라는 이름’을 수락하는 것의 숭고함을 깨달으면서 이 시집은 마무리된다.
그는 세계와의 불화 때문에 길 위로 나섰으며 길 위에서 어른이 되었다. 그는 청춘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 청춘을 버렸다. 아니, 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청춘이 그에게는 고향과 아버지,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으며 청춘을 버리면서 겨우 아버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서른 살인 것이다”(「나는 그를 모른다」).
아프게 이십대를 통과한 이문재의 시선이 머문 곳은 ‘바깥’이다. 바깥은 사물이 온기를 잃고 존재의 무게도 없어지고 존재의 지속성마저 회의하게 되는 세속 도시의 너머를 뜻한다. 『산책시편』(민음사 1993)에서 그는 무관심과 불신,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한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산책을 나서지만 그가 본 것은 울퉁불퉁하고 어긋난 것들을 수평선처럼 매끈한 표면으로 뒤덮은, 허위 또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도시와 문명의 속살이었다. 정해진 만남과 방향을 강요하는 도시의 길이 그물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돌아갈 집은 무너졌고, 그곳으로 가는 길은 끊겨버렸다. “멀리, 살던 집 무너진다,” “옛집을 떠올리는 순간만으로 덜컹/힘이 나 내달리던 적의는 이제 없다” “먼 길 끝을 본다, 내 지나온 길은/죄다, 저렇게 죄다 도마뱀 꼬리모양/잘려나가고 말았으니”(「돌아보지 말거라, 네가 돌아보지 않아도 이미 소금 기둥 되어 있으니—副詞性 10」). 그는 길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 이제 그는 오히려 길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길 밖이 넓다/길 아닌 것이 오히려 더 넓고 넓”(「길 밖에서」)기 때문이다. 길과 길 밖은 한걸음 차이다. 그 한걸음이 무섭고 한없이 더디다. 그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를 느끼고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문재는 『산책시편』을 쓸 무렵 이미지와 상상력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살이 많이 붙어 있는 시, 다시 말해 이미지와 비유가 두드러진 시, 그래서 평단에서 인정받고 강의실에서 읽히는 시 말고 세속 도시에서 생생하게 펄떡거리며 살아 있는 시를 찾아 나선 것이다.
이십대 후반까지만 해도 낮에는 생활인으로, 해가 지고 다시 뜰 때까지는 시인으로 살겠다고 다짐했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삼십대 초반의 어느 날 시인보다는 생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나를 두텁게 감싸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보다 기사(당시 잡지사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가 먼저 떠오르고, 시를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생각보다 기사를 어떻게 구성할까 먼저 생각하는 내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월급에, 도시에, 사회적 압력에 패배했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당시의 상황과 내적 방황이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산책시편』이다. 그때 자끄 르끌레르가 쓴 『게으름의 찬양』(분도출판사 1986)을 접했다. 산책과 느림, 게으름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게 한 책이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반 『녹색평론』을 만났다. 『시사저널』 기자 시절인데, 그때부터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책을 열심히 소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실천가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했다. 그리고 2001년 창간 10주년을 맞은 『녹색평론』을 기사화하기 위해 대구로 내려가 고(故) 김종철 선생을 처음 만났다.
이 세계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인간들 사이로, 우리의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아주 오래 이윽고 내 안이/끔찍한 지옥임을 알았을 때”(「내 안의 감옥」 『마음의 오지』, 문학동네 1999, 이하 같은 시집에서 인용) 마음이 가닿을 수 없고 가닿지 못했던 곳인 “마음의 극지”(「새벽의 맨 앞」), 아직 짚어보지 못한 마음의 어두운 자리를 향해 나아간다.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마음의 오지」), 마음을 떠나간 마음들이 바로 ‘불감(不感)’이다. ‘마음의 오지’를 탐방하고 돌아온 시인이 맞닥뜨린 것은 ‘농업박물관’이었다.
내 시의 최근은 농업이다. 이 난데없는 오래된 미래로서의 농업에 내 시는 도달하고자 한다. 돌아보면, 멀리 ‘옛집 지붕’에서 방랑과 그리움의 고장을 지나, 세속 도시의 한복판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문득 ‘농업박물관’을 발견했다. 그때의 섬뜩함이라니. 나는 농업박물관 앞뜰에서, 이 문명의 가속도를 새삼 목격했다. 아찔했다. 아팠다. 그 가속도는 다름 아닌 내 몸과 마음 안에서 가열찼다. 불과 한 세대 사이에 농업이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나의 30여 년의 삶이란 농업을 박물관에 처박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시인의 말’, 98~99면)
박물관 속으로 들어간 과거 앞에서 그는 자신이 경험하고 알았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다.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는 것입니다”(「농업박물관 소식—거리에 낙엽」). 너무 쉽고 빠르게 과거가 되어버린 것들, 그래서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삶의 진실한 모습들을 박제해놓는 문명의 가속도 앞에서 현기증을 일으키고 고통을 느낀다.
이래서는 정말 끝을 볼 것 같다,라는 강한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더이상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이며, 그는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한다. “진정한 시인이 모두 심오한 생태학자인 것처럼, 진정한 시인은 모두 미래를 근심하는 존재다.” 언제든지 모든 것을 과거의 유물로 만들어버리는 문명의 속도에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사상가나 이론가가 아니므로, 나는 당초에, 그리고 앞으로도 시인일 것이므로 어떤 징후나 직감, 혹은 꿈과 예감의 한 가닥을 겨우 붙잡고 그것을 말하려 할 뿐이다.”(‘시인의 말’). 그의 예언은 성글지만, 너무나 잘 짜여 탈출이 불가능한 인식의 감옥 속을 뚫고 나오는 전환의 상상력과 발견은 성글어야만 한다. 그의 시는 인식의 두터운 안개 속을 뚫고 재빠르게 날아오는 불화살 같은 의외성과 새로움을 담은 ‘성긴 예언들’로 이행한다.
아픈 마음과 무너진 현실 사이에서 고통받던 시인은 이제 ‘나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픔은 몸과 마음이 가장 먼 상태에서 비롯되며, 나음은 몸이 몸으로 돌아오는 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제대로 아프기 위해서는 멀어졌던 마음과 몸이 합쳐져야 한다. 나의 외부였던 몸이 다시 나의 내부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제국호텔』(문학동네 2004)은 자연의 질서를 교란하고 혼자를 가만두지 않는 전원(電源)과 네트워크 속에 포박된 이 세계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마음과 몸이 회복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접촉과 접속은 더 빈번해진 반면 장벽은 다층화되고 다면화되었다.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겨서 인간을 정보의 수신자와 상품의 소비자로 만들어버리는 네트워크를 벗어나 전원을 끄는 것, 다시 말해 언플러그드 상태는 자신의 감각에 의지해서 세계와 더 가깝게 만나는 일, 자기의 살갗으로 세계와 대면하는 일이다. “내 얼굴과 어둠 사이에/아무것도 없”(「비박」)고 “자연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몇 볼트의 성욕」). 그는 전원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문명과 도시를 벗어나 자연과 생태로 더 가까이 다가간다. 자연이 부분적으로 나뉘어 마비에 빠져 있던 몸의 감각을 하나로 통합해주면서 되살리기 때문이다.
『제국호텔』 이후 십년 만에 나온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 2014)에서는 세계감을 말한다. 세계관 이전의 세계감. 느껴야만 보이는 것이지, 보고 나서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시집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오래된 일들’이다. 사물의 근원은 변하지 않았으나 인간의 그릇된 인식이 그것을 잘못 보게 했던 것이다. 진리가 가까이 있는데도 관습적인 인식의 맹목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인식의 더께를 걷어내고 세계와 만나는 감각, 세계와 연결되는 감성으로 세계의 진실을 담아내는 언어의 형식이 아포리즘일 것이다. 그의 시적 발화는 단순한 말들에 기반하고 있다. 그 단순함은 구문이나 문장이 큰 뒤틀림 없이 문법적으로 평탄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의미이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은 그 속에 역설이 포함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사이(틈)’와 ‘관계’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한다. 모든 관계는 연결을 위한 빈 공간이 있어야만 하며 하나의 변화가 다른 것의 변화를 동반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실을 사막과 모래, 만남과 이별을 통해 보여준다. 소통은 교환이고 주고받음이다.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고 버려지는 것이 있어야만 더해지는 것이 있다. “비교적 잘 헤어지는 것”(「봄 편지」)은 이러한 일들이 적절한 비율과 순서로 진행되는 것을 말한다. 떨어지는 꽃잎이 있어야 새로운 꽃잎이 돋아날 수 있고, 봄비는 라일락 꽃잎을 지게 만들겠지만 그만큼 꽃향기를 더 짙어지게 할 것이다. 가는 것만 있고 오는 것이 없거나 주기만 하고 받지는 못하는 것이 쌓일 때 관계는 파탄에 이르고 이 세계는 부패하기 시작한다. 무질서의 완강한 흐름이 아예 그것을 되돌릴 수 없을 때까지, 문명의 질서는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고 자기식으로 수정한다. 떨어져 있는 것을 붙여놓거나 이어져 있는 것을 떨어뜨리고, 곡선을 직선으로, 수평을 수직으로, 평면을 입체로 만드는 인간의 활동으로 문명은 만들어진다. 문명은 나누고 붙이고 깎고 가두고 세운다.
늦었다고 느낀 순간 지금은 가장 늦었지만 늦었다는 인식은 지금을 가장 빠른 시간, 가장 앞선 시간으로 만든다. 먼저 아는 사람이, 먼저 아픈 사람이 먼저 보고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는 그의 말들은 낯설지 않다. 아니, 지극히 옳은 말이어서 굳이 시에서 반복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물음이 솟구칠 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시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가 맨 앞’이기에 더욱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위기이면서 끝인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으면 너무 늦는다고, 더 미룰 수는 없다고, 더 미루면 지금 여기가 정말로 ‘끝’이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맨 앞에 있기 때문에 다른 세계를 먼저 상상해야 한다고.
3.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직통’의 언어
이문재는 1990년대 초반부터 한국시에서 생태학적 관점 또는 담론의 최전선에 있었고 이후에도 일관되게 그것을 견지해왔다. 그는 역진화하고 있다. 그는 문학장의 변화를 거의 완벽하게 거스르고 있다. 그는 한국시의 모난 돌이며 구부러진 못이다. 1980년대 민중시 담론의 후위 또는 변방에 있었던 그는 이제 자기 앞에 있던 사람들이 다른 길을 가면서 뜻하지 않게 맨 앞에 서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촌스럽고 진부하다고 해.
촌스러움은 그의 시가 단순한 말과 형식으로,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던지고 있다는 측면을 가리키고 진부함은 그 메시지가 반복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됐는지 모른다. 그는 『제국호텔』 이후부터 의미 파악이 쉽고 단순명료한 진술로 일관되게 시작(詩作)을 하고 있다. 그것이 심오한 사유의 산물일 때 그 의미는 빙하의 일각과 같은 표층 아래에 깔린 심층으로 내려가며, 한편으로 그것이 사유의 전개 과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때(대개 산문화의 경향이 강하다) 표층에 실린 메시지에 집중한다. 온건한 듯하면서도 불온하고 불온하면서도 온건한 두가지 특성이 양립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내용과 형식의 차원에서 통합과 모순을 교차적으로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문재의 시는 최근으로 올수록 더욱 산문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시와 산문의 가로지르기를 감행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산문집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개정판 호미 2009)의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내게 시와 산문은 아주 가까운 혈연이다. 나는 시를 통해 이 반인간적인 문명의 급소를 발견하고, 그 급소를 건드리고 싶었다. 내 시에 내장되어 있는 문제의식에 물을 묻혀 번지게 한 것이 이 책에 실린 글들이다.(12면)
산문이 시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는 말이지만, 이것을 뒤집으면 시가 산문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시는 산문적 인식, 다시 말해 어떤 논리적 틀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은 인간이 일구어놓은 문명이 어떻게 우리를 옥죄고 억압하고 기만하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를 얼마나 반인간적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꿰뚫어보고 비판한다. 산문이 시의 문제의식을 번지게 해서 좀더 알기 쉽게 쓰인 것과 달리, 시는 풀어 쓸 수 없는 순간적인 진리의 현현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시집을 읽고 이런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시가 어떤 혼돈의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고 미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분명하고 확실한 전언들은 시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시적 주체의 내적 고투 또는 헤맴의 흔적이 시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가 아닐까. 어떤 틀린 말들, 어긋난 말들이 열어젖히는 다른 세계, 다른 감각이 보이지 않는 시, 흔들림 또는 헤맴이 이미 지나갔거나 정리된 상태의 시는 우리를 답답하게 한다. 시인이 모든 것을 통제해서 답을 내리고, 아무리 정확한 진단이라 하더라도 사태나 현상에 대한 정의를 직접적으로 노출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가. 시의 정돈된 내용들은 그만큼 사유의 방황이나 정신의 헤맴이 없었음을 방증하는 것 아닌가. 감각이 인식을 통과해서 개념화하는 과정이 급속하게 진행된 것은 아닌가. 지각의 구체적 깊이와 진실성이 세계의 진실과 닿는 지점에서 좀더 머무를 수는 없는가. 다시 말해, 무명(無明) 속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고 판단 중지의 영역이 좁다. 어둠 속에서 말들이 비집고 흘러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답답한 마음에 어둠의 막을 째고 꺼낸 인공분만 같은 것은 아닌가. 자기의심이 없는 완강하고도 직설적인 발화들을 스스로 불편하게 느낀 적은 없는가. 또한 그의 ‘성긴 예언들’은 너무 반복되어서, 너무 흔해져서, 이제는 그 속도와 활력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없지 않다. 그의 답이 궁금했다.
정제된 언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의식이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할 수는 없다. 비유나 상징이 들어 있지 않은 평범한 진술이라 하더라도 그 의미는 하나로 귀결될 수 없다. 어떤 문장도 오독의 가능성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 일상적인 발화에서도 그러할진대 함축과 내포가 근간이 되는 시에서 해석의 여지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언어 자체의 모호성 때문에 송신자와 수신자 간의 의사소통은 완벽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더 분명한 언어나 문장을 쓰고 싶다. 이렇게 해도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숲으로 된 시가 무엇을 전달하고 무엇을 소통할 수 있을까. 시적 표현이 존재 증명이 되는 시가 전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러고 싶지 않고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완벽한 소통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지만, 최대한 그 상태에 가까워지는 것이 내 시의 목표이며 또한 도전이다.
한편 아무리 내가 썼다 하더라도 나만의 생각으로 이루어진 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깨어 있는 의식 속에서 쓴 시라 해도 ‘나 아닌 것’이 스며들 수밖에 없다. 그것을 무의식이라고, 뮤즈라고, 영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모든 시작에서 보편적인 현상이다. 나 또한 그것이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이라 믿는다. 내가 썼는데 내가 쓰지 않은 문장이나 표현. 이것이 글 쓰는 사람의 딜레마이자 축복이 아닐까.
그의 시에서 언어의 낯선 조합을 찾기는 어렵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그는 힘들게 한 생각을, 힘이 되는 생각을 빠르게 쓴다. 그의 시가 언어의 낯선 조합을 통해 감각을 새롭게 하기보다 의미를 최대한 내장한 언어로 현실을 바꾸는 ‘다른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 세계와 내면이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섬광 같은 이미지와 말의 순간적인 의미론적 이행을 특징으로 하는 언어유희들이 지배적이었던 초기 시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문재 시의 언어를 ‘직통’의 언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매개도 없이 바로 연결된 언어, 그 언어는 투명하고 뜻이 자명하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이해됨 없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닿는다. 그는 단순한 말이 가장 무섭고 힘이 세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시가 세상을 바꾸는 무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는 비명을 질러도 들리지 않는 시대이기에 수사학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우리가 흔히 시는 창조 또는 창작이라고 믿지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움 또는 감각의 갱신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것이 시가 아닐까. 창조가 아니라 성찰. 내 시를 읽는 독자들이 참신한 비유나 멋진 문장에 감동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나는 왜 사는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돌아보게 만드는 손거울 같은 시.
그의 시는 시가 되기 위한 조건이나 상태에 못 미치거나 그 너머에 있다. 그는 너무 크게 보고 또 너무 작게 본다. 안 보이는 것도 보려 하고 보이는 것 너머를 보려고 한다. 그의 말들이 그것을 담기에 너무 작거나 모자라서 때로는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의 시는 시라고 하기 힘든 언술들이 전면에 배치되어 긴장을 떨어뜨리게 하기도 하지만 시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영역이라는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버리는 과감함과 혁신성 또한 가지고 있다.
그는 방랑자에서 산책자로, 그리고 사상가 또는 운동가로 변모해왔다. 그는 사상가라는 말이 자기에게 붙기에는 너무 큰 말이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를 촉진자(facilitator)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촉진자는 전환의 상상력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며, 나와 남을 넘어 세계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불씨, 생각을 바꾸는 도화선 같은 것.
이문재는 이번 시집에서 자화상 같은 시로 「흔들의자」를 꼽았다.
신도시 아파트 주차장
빨간 주차금지 표지판 옆
흔들의자 혼자 앉아 있다
왼쪽 어깨가 기울었다
누가 내놓은 모양이다
흔들어도 안 흔들렸나보다
흔들지 않아도 흔들렸나보다
—「흔들의자」 전문
어깨가 왼쪽으로 기울어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버려진 흔들의자. 누가 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흔들어도 안 흔들렸”기 때문에, “흔들지 않아도 흔들렸”기 때문에. 흔들의자는 네 다리로 안정되게 버티지 않고 반원형의 받침으로 되어 있어 앞뒤로 흔들면서 우리에게 편안한 율동감과 안락함을 준다. 하지만 이 흔들의자는 흔들리는 것을 거부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흔들린다. 남들이 흔들어도 자기가 지켜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흔들릴 수 없고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에 흔들리는 존재이다.
이문재는 이것을 문학의 자리, 시인의 자리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광인 같기도 하고 선지자 같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그의 말 중에 틀린 말이 없다. 이 ‘틀림없음’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그를 자신들의 바깥으로 내치게 만든다. 거적때기를 둘러쓰고 낡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 하염없이 걷는 고행자처럼, 그는 오늘도 낡은 신발을 신고 황혼을 향해 때로는 흔들리면서 때로는 흔들리지 않으면서 걸어간다. 자신이 거기에서 왔다는 듯이, 우리 모두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