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최원식 『기억의 연금술』, 창비 2021
제도로서의 한국 근대문학을 전복하는 주체로서의 한국 근대문학 기획
홍기돈 洪基敦
문학평론가, 가톨릭대학교 교수 gdhong@chol.com
한국 근대문학의 확립 경로는 두 축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 축이 바다 너머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경로라면, 다른 한 축은 대륙의 중국과 관련을 맺은 경로다. 바다 너머의 영향력이라면 근대문학 제도의 창출과 잇닿아 있다. 가령 1906년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 표기를 보자. 단행본 출간 시엔 완전한 국문체를 따랐지만 『만세보』에 연재되었던 당시에는 한자 위에 우리말 발음을 토 달고 있으며, 국한문혼용을 취한데다 띄어쓰기는 쉼표로써 나타내고 있다. 일본어 표기의 이식인 셈이다. 일본 유학생 이광수는 「문학의 가치」(1910), 「문학이란 하오」(1916) 등의 글을 통해 ‘문학’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며 서양의 ‘literature’의 번역어로 확립시켰던바, 이후부터 문학이라는 용어는 이에 입각하여 통용되는 실정이다.
일본으로부터의 유입 경로를 강조하면서 제도가 의식을 창출한다는 주장으로 나설 때 이인직, 이광수의 영향력은 막강해진다. 근대문학 연구에서 종종 출몰하는 ‘근대의 특권화’ 경향은 기실 이의 심화라 이를 수 있다. ‘한국 근대문학의 새 구상’이라고 부제를 단 문학평론가 최원식의 『기억의 연금술』은 그와 맞서는 자리에 놓인다. “이인직-이광수 축을 이해조-염상섭으로 바꾸는 기본에서 (…) 정지용과 『문장』이 해방 전과 후의 우리 문학을 꿰는 결정적 고리라는 점”을 부각했다는 「책머리에」의 진술은 그가 어떻게 “한국 근대문학의 줄기를 찾자는 것”(6면)인지 보여준다.
‘한국 근대문학의 줄기’ 설정과 관련하여 우선 주목을 요하는 작가는 이해조다. 최원식은 이해조의 『자유종』(1910)을 애국계몽기 최고의 정치소설로 꼽는다. 이는 애국/친일 두 계몽주의가 당대 공론장에서 차지했던 영향력 크기와 상관된다. 애국계몽기 시절 친일계몽주의는 일제를 등에 업고도 미미한 힘을 행사했던 실정이었으나, “경술년을 고비로 그 관계는 역전된다.”(31면) 이로 인해 애국계몽주의 문학이 1910년대 문학과 단절된 반면, 이인직의 친일계몽주의는 최찬식의 『추월색』(1913)으로 계승되고, 일본 신파소설의 번안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이 최원식의 관점이다.
이해조 문학의 평가에서 나타나듯이, 최원식은 근대문학 제도의 유입과 맞닥뜨려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활용하고자 했던 경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근대문학 제도의 도입과 확산 과정에 호응하며 따라가기보다 주체의 의지를 앞세웠지만 관념 우위로 기울어지지 않는 면모는 『기억의 연금술』의 미덕이라고 할 만하다. 이는 그가 대상 작가의 문학정신을 시대상황과 단단하게 결합해 꼼꼼히 분석했기에 가능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독립협회운동에서 모색되었던 “아래로부터 광범한 대중을 조직하여 국민(nation)을 창출하는”(26면) 목표가 확고해지면서 애국계몽기의 문화열이 타올랐고, 그를 반영하는 것이 이해조의 세계라는 일련의 분석은 퍽 조밀하다. 애국계몽기 민족오페라의 위치를 차지했던 창극이 1910년대 총독부의 탄압을 받으면서 신파극에 밀려나는 양상은 애국계몽주의 문학이 단절되는 흐름과 병치되며 설득력을 더하기도 한다.
1930년대 중반 문학계 상황을 파악하는 대목에서도 최원식의 박학은 빛을 발한다. 1928년 코민테른 6차대회에서 결정된 ‘제3기론’을 충실하게 이행했던 이들은 1935년 7차대회에서의 방향 전환에 의해 일순간 극좌 모험주의로 내몰리게 된다. 이념에 중심을 두느라 구체적 현실 분석에 태만했던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문제점은 이 지점에서 부각되었으니 1935년은 공교롭게도 카프가 자진해산한 해이기도 하다. 카프 해산 이후 “프로문학자들이 카프 시기보다 더 절실한 이론과 작품 들을 생산한 반어를”(116면) 최원식이 상기시키는 대목에서 카프에 드리웠던 나프(NAPF, 일본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영향을 되새기건대, 제도 수용 양상보다 작가의 주체적 대응을 우위에 두고자 하는 저자의 태도가 다시 한번 드러난다.
최원식은 7차대회의 선택을 코민테른의 국제적 지도력 약화와 연동하는 사안으로 파악한다. ‘예술의 정치화’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주의가 약화되는 가운데 ‘정치의 미학화’로 치닫는 파시즘의 발흥세는 뚜렷했고,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는 “영국의 ‘산업적 근대성’을 대신하여 “생산혁명과 소비혁명을 보탠” ‘소비적 근대성’에 입각한”(111면) 미국으로 넘어갔다. 식민지 조선 또한 세계사적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으니, 최원식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1935), 이태준의 「패강랭」(1938) 등을 예시로 들며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매먼(Mammon) 숭배로 급속하게 빨려 들어가는 변화를 추출해낸다. “3·1운동에서 드러난 정치적 대중과는 일정하게 차별되는 대중, 일종의 소비적 대중의 원시적 형태가 (…) 출현하였던 것이다.”(116면)
1930년대 모더니즘은 그와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출현해 도시의 속물성을 폭로했으며, 정지용과 『문장』은 당대 현실과의 길항 가운데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냈다. 모더니스트 정지용은 동아시아 고전에 뿌리를 내리고 엄혹한 시대를 견디어냈는바, 최원식은 「장수산 1」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 의미를 되새긴다. 가람 이병기에게 문학사적 위치를 부여한 「고전비평의 탄생」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데 “중국의 문학개량/혁명론을 우리 시조의 현실에 비추어”(134면) 가람이 시조부흥론을 재창안했다는 분석에서는 새삼 중국과의 한 축으로 이어진 근대문학사의 흐름을 떠올리게 된다.
기실 『기억의 연금술』에서 개별 작가·작품론으로 다뤄진 안중근·심훈·강경애 등은 근대문학 제도의 틀로는 제대로 포착하기 어려운 대상들이다. 근대문학 제도 바깥에서 다른 세상을 지향했고, 그 지향을 작품 속에 담아낸 사례인 까닭이다. 안중근은 한문본 「장부가」를 창작하고 직접 한글본으로 번역했다. 최원식은 “미묘한 이행의 자리에 위치한 이 한글 거사가”를 “근대자유시로 가는 (…) 징검다리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44면). “대중적 성공을 거둔 민족주의 계열의 통속작가라는 고정관념이”(177면) 덧씌워진 심훈의 문학사적 지위 또한 복권시키고 있는바, 이때 지렛대로 삼고 있는 것이 심훈의 3년여 간 중국망명기 분석이며, 카프 노선과 결별하여 조선 현실에 밀착한 프로문학을 지향했다는 사실의 검증이다. 만주에 머물렀던 강경애가 조선 문단 바깥을 떠돌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니, 안중근·심훈·강경애에 대한 최원식의 주목은 자연스럽게 북쪽 방면의 문학 경향 복원이라는 맥락으로 다가온다.
『기억의 연금술』의 아쉬운 점은 염상섭에 관한 본격 논문이 누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책머리에」에서 이해조-염상섭 축을 제시하고, 이해조의 애국계몽주의과 1910년대 문학의 비연속성까지 분석된 마당에 이해조에서 염상섭으로 이어지는 관계 복원은 긴요할 수밖에 없다. 「3·1운동을 분수령으로 한 우리 소설의 전개양상」에서 1920년대 신문학운동 가운데 창작된 단편소설들이 문학사에서 어떠한 계보에 놓이는가를 제시해놓았으나, 이는 ‘한국 근대문학의 줄기’라기보다는 ‘가지’에 해당할 터이다. 일관된 기획에 따라 쓰인 논문이 아니라, 기왕에 발표한 논문들을 책으로 묶다보니 불가피하게 발생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이와 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근대문학사를 꿰뚫는 기준과 시각은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으니 “문학사 작업을 위한 예비적 점검”(5면)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그다지 큰 결함으로 남을 까닭도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