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대담한 가설, 소심한 구증
임형택의 『동아시아 서사와 한국소설사론』을 읽고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명예교수. 저서 『민족문학의 논리』 『한국근대소설사론』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문학의 귀환』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문학과 진보』 『기억의 연금술』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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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자의 길
언제는 번한 때가 있었으랴만, 나라 안팎이 유독 뒤숭숭한 요즘, 이런 말 하기 좀 미안하지만, 공부 한번 잘했다. 경인(絅人) 임형택(林熒澤) 선생이 평생을 바쳐, 개미 금탑 뫃듯, 우리 소설사의 졸가리를 세운 『동아시아 서사와 한국소설사론』(소명출판 2022)1을 통독하고 보니, 거인의 어깨에 올라 뭇 산을 일람(一覽)2한 듯 절로 우쭐하다.
‘대담한 가설, 소심한 구증(求證)’3이라는 호적(胡適)의 명(銘)이 맞춤이다. 무릇 학자란 담은 크되 마음은 작아야 한다. 어떤 학자는 담만 커서 구멍 뚫린 거대담론을 조자룡 헌 창 쓰듯 두르는가 하면, 또 어떤 학자는 새가슴이라 확인을 거듭하다가 끝내 쪼불뙈기를 면치 못하니, 대담과 소심의 ‘기우뚱한 균형’이 열쇠다. 임형택은 무엇보다 구증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책에 그가 등장하는 사진이 한장 있다. 자료 봉투를 왼팔에 끼고 큰 묘비의 뒷면을 골독히 판독하는 모습이 영락없다. 낙선재 소설 『완월회맹연(玩月會盟宴)』의 작가로 비정되는 안겸제(安兼濟)의 모친 이씨 부인을 찾아, 1988년 봄, 답사에 나선 것이다. “그 자손이 지금 경기도 파주군의 금촌읍 맥금리 상곡이란 마을에 거주”(334면)함을 귀신같이 알아내곤, 정해렴(丁海廉) 대표의 안내를 받아 댁을 방문했으나 6·25 때 세전(世傳) 문헌이 회신(灰燼)했다 하여 허탕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씨 부인의 묘를 찾아 행적을 살피던바, 비문에서 “여사풍(女史風)이 있었다”는 구절을 확인했으니 간접증거는 얻은 셈이다. 이 예는 일종의 반절 성공담이지만 책에는 셜록 홈즈 뺨치는 성공담들이 적지 않다. 책상 씨름도 어렵거니와 발로 뛰는 구증이 기중 힘들다. 품도 많이 들고 헛수고하기 일쑤라, 나이 들면 슬그머니 은퇴하기 마련인데, 임형택은 노익장이다.
물론 이 촘촘한 구증은 도락(道樂)이 아니다. 가설을 검증하고 수정하여 다시 세우기 위한 구증이야말로 가설을 진화시킬 무기고일진대, 이 시련을 넘어 끝까지 살아남은 가설이 인문의 꽃이다. 15~16세기의 문언 전기(傳奇)와 17세기의 국문 규방소설과 18~19세기의 한문 야담(野談)이 한국소설사를 일이관지(一以貫之)로 독해하는 지렛대인데, 그중에서도 한국소설사의 앞뒤를 가르고 잇는 야담이 눈 중의 눈이다.
죽비처럼 성성(醒醒)한 가설을 둥그렇게 감싸는 화두 또한 적적(寂寂)하다. 우리 문학을 외국문학과의 관계 속에서만 파악하는 “비교문학의 관점”은 “적절치 못하다”(18면)고 지적했듯, 그도 4월혁명(1960)에서 배태된 내재적 발전론에 선다. 그렇다고 한국문학을 오직 우리 안에서만 해명하려는 경직된 내재주의자는 아니다. 커녕 중국문학에 대한 해박한 독서와 학지(學知)를 바탕으로 두 나라 문학의 전개 양상에 대한 동이(同異)를 섬세하게 분석하는 한편, 때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곤 한다. 예컨대,
중국소설의 범세계적인 조기성취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럼에도 저 위대한 소설 전통이 20세기 근대전환의 과정에서 (…) 서구적 소설의 압도적 영향으로 거의 새판이 차려진 모양새가 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19면)
일찍이 송대(宋代)에 세계적으로 조숙하기 짝이 없는 도시문명을 이룩한 중국이 왜 근대로 이월하지 못하고 반식민지로 전락했는가? 이 저명한 중국사의 수수께끼와 짝할 도도한 물음이다. 시야가 호활하다. 가령 이 책에 수록된 글은 아니지만, 고려의 ‘몽골복속기’를 동서양을 일통한 몽골 세계주의의 자장 안에서 새로이 독해한 안목은 대표적이겠다.4 사실 이 용어는, 러시아가 킵차크한국 지배기를 ‘몽골의 멍에’(Mongolian Yoke)로 저주(?)하는 것 못지않게, 우리 스스로를 굴욕한다. 세계 최강의 군대를 상대로 한 고려의 항몽전쟁5이 각별했기에 더욱, 황제의 호를 버리고 충(忠)자(字) 왕으로 떨어진 시절의 모욕은 냉철히 기억되어야 한다. 그러나 항몽전쟁 이후를 오직 굴종으로만 파악하는 것 또한 편향이다. 임형택은 고려 지식인들이 굴욕 속에 열린 한줄기 통로를 통해 세계와 호흡하며 고려를 개혁하는 일방, 조선을 개국하는 혁명으로 역동했다고 파악함으로써 침략과 저항의 이분법을 침통히 넘어서던 것이다. 과연 배운즉 딱딱하지 않다(學則不固).
비교문학론마저 비판적으로 섭수한 임형택의 내재적 발전론은 동아시아론으로 진화한다.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려는 데서” 착상되어, 이제는 “인식의 지평을 전지구적 세계로 넓혀나가는 앞마당”(5면)으로 진화한 동아시아론은 화두의 기둥이다. 한국문학을 더 잘 해명하기 위한 핵심적 도구로 개발된 동아시아론이 분단체제의 극복을 통해, ‘서구의 황혼’을 가로지를 다른 문명의 아침으로 사유되는 경지이거니, 고전학자 중 그만큼 현실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을 반짝이는 분을 능히 보지 못했다.
그 증표의 하나가 대화에 근면한 것이다. 전공·비전공을 가리지 않고, 말석·수석을 불문하고, 변화하는 세상/문학을 독해하려는 토론모임이라면 기꺼이 출석한다. 공부하는 후배/제자들과 나란히 토의하는 수평적 정신이 임형택 학문의 주춧돌이다. 살아 있는 회화공동체들과 소통하는 대화의 혼은 바로 본업인 문학연구에 그대로 관철된다. “문학유산은 원래 골동품이 아니다. 오직 독서 행위에 의해, 나의 적극적 해석이 이루어짐으로써 존재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임이 물론이다.”(6면) “나의 적극적 해석”, 곧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문학유산을 과거에서 오늘의 현실로 소환하는 이 진지한 유위(有爲)야말로 생생한 현실성의 온전한 발현일 터.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을 문학책답게 하는 최고의 비밀은 문학성에 대한 자각이다.
여기서 다루는 대상이 문예작품이라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소설로서 읽고 담긴 의미를 풍부하게 해석하되 문학성을 드러내는 일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또한 문학 작품을 대하는 실사구시다.(5면)
가령 윤리적 규방소설의 대표작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의 ‘닫힌’ 구조6에서도 “자아에 대한 의식과 함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307면)가 싹트고 있음을 분간해내는 안목은 예리하다. 이런 복안(複眼)적 시각으로 구닥다리 소설들을 다시 살려내는 메스가 책 곳곳에 빛나는바, 이것이 이 책 최후의 종요(宗要)다. 작품을 무엇보다 작품으로서 대접하는 임형택의 도저한 문학주의야말로 문학연구 역시 문학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인데, 이를 몰각한 연구서들이 범람하는 학계에 대한 경종이 아닐 수 없다. 일가를 이룬 그의 문장 또한 이와 호응할 것이거니와 건실한 문어체 속에서도, 바로 앞에서 말하는 듯 입말의 운율이 활달하매, 이 독특한 문장력 덕에 비전문가인 나조차 800면이 넘는 이 호한한 책을 기쁘게 읽어낼 수 있던 것이다.
2. 즐거운 고전 읽기
이 책은 총 6부로 구성되었다. 총론 1부에, 몸통으로 되는 작가/작품론이 5부다. 5부 중 앞의 3부는 전기·규방소설·야담에, 뒤의 2부는 신소설·근대소설에 할애되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93)부터 횡보(橫步) 염상섭(廉想涉, 1897~1963)까지 한국소설사를 관통한다. 먼저 고전 부분부터 읽어보자.
전기를 논한 제2부의 백미는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논한 1장이다. 임형택 득의의 범주 ‘방외인(方外人)’이 빛난다. 세조 쿠데타의 충격 속에, 물러나면 사(士)요, 나아가면 대부(大夫)라는 조선 지식인의 일반 텍스트 바깥으로 탈주한 “체제 밖의 자유인”(91면) 매월당 사상의 진보성을 철학적으로는 ‘기(氣)일원론적 무신론’(93면), 사회적으로는 군민(君民)의 “공생적 계약관계”(97면)에 기초한 민본국가로 모음으로써, 그 “사상적 기반은 유학”(101면)으로 쾌도난마한다. 이단을 배척하는 도학자 임형택의 엄정한 면모가 한 절정에 있을 때임을 감안하더라도(요즘은 많이 개혁·개방했다), 불교를 오직 외피로만 파악한 유학 중심은 좀 가혹하다.7 그럼에도 소설 『금오신화』에 대한 해석은 새롭다. 특히 “남녀 간에 서로 통하는 감정은 인정의 가장 소중한 것”(121면)임을 천명한 탈도학적 인간론을 각편에서 정밀히 분석하매, 매월당의 인간주의가 중세 질서 안에서 닿을 최대의 인간해방론이요, 미리 온 근대임이 저절로 판석되던 것이다.
또한 『전등신화(剪燈新話)』와 비교한 4절이 탁월하다. 『금오신화』만 나왔다 하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전등신화』는 한국문학을 외국문학의 아류로 전제한 비교문학론의 대표 아이콘의 하나다. 더욱이 중국문학사에서 『전등신화』의 위치가 높지 않다. 임형택은 뛰어난 균형으로 이 난처한 문제를 석명한다. “원대를 거쳐 명대에서 성황을 이루게 된, 성시를 중심으로 흥기한 대중문화의 일환으로서 장편소설이 고도로 발전한”(170면) 중국에서는 이미 문언 전기는 저물었다는 것, 그럼에도 조선은 백화(白話, 중국의 구어체)가 아니라 문어(文語)에 익숙해, 『금오신화』가 『전등신화』를 환골탈태했다는 설명이 조곤하다. 두 작품의 비교도 흥미롭다. “도시적인 분위기 속에서 상인층 내지 부자들의 생활감정인 연애와 쾌락과 이별의 비애를 다룬”(151면) 『전등신화』가 부르주아적이라면, 유학적 현실주의를 지향하는 『금오신화』는 반부르주아적인데, 이 때문에 전자가 권선징악적 해피엔드로 기운다면 후자는 비극을 감내함으로써 소설의 본질에 더 다가갔다는 점이 각별하다. 요컨대 시대와 불화한 매월당이 우리 소설의 길을 열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도 살아 있는 한국소설의 위대한 전통으로 된 기원을 분석한 최고의 논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금오신화』의 일본 문맥이 소략한 것이다. 임형택이 잠깐 언급했듯, 『금오신화』는 최남선(崔南善)이 『계명(啓明)』 19호(1927)에 “원문과 함께 해제를 실어 이 땅에서 다시 빛을 보게 만든 것이다.”(145면) 나는 대학원 때 이 잡지 영인본을 얻어 보고 또 한번 황당했다. 최남선에 의해, 『금오신화』가, 그것도 일본에서 1920년대 말에야 환국을 했다니…… 솔직히 난 최남선을 좀 창피해했다. 신체시의 효시라고 너도나도 모시는 「해(海)에게서 소년에게」(1908)는 제목부터 일본식인데, 그 유치함에 남이 볼까 두려웠다. 그럼에도 조연현(趙演鉉)은 ‘2인문단시대’라는 해괴한 조어로 최남선과 이광수(李光洙)를 올리고, 김윤식 선생(나는 교양과정부 1학년 때 그에게 교양국어를 배운 것에 정말로 감사하는 자다)은 교양과정부 논문집에서 바이런(G. G. Byron)의 장시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까지 끌어다 논하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도 나는 저러지 말자고 다짐까지 두었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 땅으로 건너가서”(145면) 일본에서 애독되는 바람에 실전(失傳)을 면한 『금오신화』에 관한 한, 최남선과 일본에 감사해 마땅하다. 왜 조선은 『금오신화』를 버렸는가? 왜 일본은 『금오신화』에 매혹되었는가? 일본에서 발견되었다는 『금오신화』의 새 편들은 과연 믿음직한가? 이런 물음들에 응답하는 『금오신화』 일본편을 기대한다.
다음 『창선감의록』을 중심으로 규방소설을 분석한 제3부. 임형택이 평가하는 바람에 나도 전에 재미없을 것 같은 제목의 이 소설을 열심히 읽었지만, 역시 『구운몽(九雲夢)』을 덮을 수는 없겠다. 무엇보다 국문본과 한문본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를 따지는 오랜 논쟁을 솔로몬의 재판처럼 재결한 게 상쾌하다. 규방소설의 독자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저절로 『구운몽』의 국문본 선행이 확정되던 것이다(286면). 여성 독자의 대두 속에 한문 전기 대신 국문 규방소설로 장르와 문체가 교체한 17세기는 한국소설사의 일대 진화기로,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의 『구운몽』이 이 진화기의 아이콘이다.
주인공 양소유를 아무리 풍류재자로 포장해도 실상은 “갈데없는 호색한”이라 일갈하면서, “남성 중심적”인 “성적 추구의 서사”(24면)로 『구운몽』을 파악한 시각이 신선한데, 양소유가 환생한 팔선녀를 곳곳에서 만나는 대목대목은 물론, 육관대사의 할(喝)! 한 외침에 성진이 한바탕 꿈에서 깨는 구도 전체가 “게임의 구조”(37면)라는 데 이르면, 거의 포스트모던하다. 그럼에도 『구운몽』의 기속장치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갈망하는 소리가 입력되어 있는 사실”(39면)을 갈피갈피 분석하매, 양면성이 흥미롭다. 과연 문언 전기를 국문소설로 전진시킨 규방소설의 출현은 어떤 사회적 문맥인가?
전통사회에서 부녀자들은 궁정을 포함해서 양반층까지 한결같이 규방에 속박되어 있었다. 저들을 계속 규방에 안주시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형식으로든 살짝 숨통을 터 주어야 하는 변화된 시대상황에서 저들에게 오락과 교양의 효과를 동시에 기대할 수 있는 안성맞춤으로 소설을 착안하였다. 이에 교훈적이고 여성 교양적인 ‘규방소설’이 창출된 것이다.(31면)
『구운몽』과 『홍루몽(紅樓夢)』을 비교분석한 대목도 흥미롭다. 솔직히 『홍루몽』을 읽고 나서 그 대단한 4대 기서(『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가 한동안 어린애 장난처럼 보였다. 소설 보고 놀라긴 첫째가 『홍루몽』, 둘째가 『레미제라블』인데, 그동안 나를 지배했던 루카치(G. Lukács)가 둥둥 증발하는 듯싶을 정도였다. 과연 두 작품의 비교는 가능한가? 임형택은 『구운몽』이 백년이나 어린 동생 『홍루몽』에 비해 “편폭에 있어서 대작이 못”(28면)됨을 선선히 인정하면서도, 문벌 귀족사회의 몰락을 생생하게 묘파한 『홍루몽』과 귀족문학의 독창적 이야기틀을 제출한 『구운몽』의 같고 다름을 역시 놀라운 균형 속에 분석한다. “비판의식의 현실적 출로를 스스로 차단”(35면)한 전자의 염세주의에 대해, 기속장치의 지배 속에서도 인간적 각성을 묻은 후자의 양면성을 특정하면서, “상동성의 구조 위에서 상이한 꽃이 찬연히 피어난 것”(40면)으로 양자를 기룬다.
진보적 학자들이 피해가곤 하던 『구운몽』을 이처럼 명찰(明察)한 그의 안목에 감탄하면서도, 나는 ‘이 소설이 ‘게임의 구조’로 그칠 것인가’ 묻는 마음이다. 육관대사의 제자 성진이 주인공인 겉이야기와 환생한 양소유가 주인공인 속이야기, 대사의 사자후로 후자가 한방에 꺼지는 듯해도, 실상 두 이야기는 마주보는 거울이다. 양자가 서로를 부정하는, 그럼으로써 서로를 머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소설이 걸어나오는 발생학이 종요롭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요, 푸른 것은 황금나무의 삶이로다.” 요컨대, 이 『파우스트』적 주제가 조숙한 우리 소설 최고의 로맨스가 아닐까 싶다.
끝으로 김만중의 호 서포. 그 유래에 대해, 「서포연보」(일본 천리대 도서관에서 발견)를 근거로, 김만중이 평안도 선천에 유배 갔을 때 그곳 지명에서 땄다는 게 통설이지만, 나는 좀 갸우뚱이다. 인천 덕적도에 서포리라는 포구가 있다. 또한 소연평도에 서포 전설이 내려온다. 김만중은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아버지가 선원 김상용을 따라 순절하자, 영남 전선(戰船)을 얻어 타고 강화를 탈출하던 만삭의 어머니가 배 안에서 출산, 아명이 선생(船生)이다. 공전의 전란 속에서 세 식구(어머니 해평 윤씨, 형 만기, 유복자 만중)가 풍랑에 시달리다 구사일생한 서해바다를 기념하여 서포로 자호하지 않았을까? 이 원초적 경험이 『구운몽』을 풀 또 하나의 열쇠일지도 모르거니, 뜻있는 고전학자들의 현명한 검증을 고대한다.
강담사(講談師), 강창사(講唱師), 강독사(講讀師)8라는 획기적 범주로 우리 소설을 한눈에 통찰한 「18·19세기 이야기꾼과 소설의 발달」(1975)을 비롯한 네편의 논문을 모은 제4부는, 문언 전기와 국문 규방소설이 한데 모여 다시 근대적으로 연변하는 일대 결절점으로 된 야담-한문단편을 다룬 정예다. 이우성(李佑成) 선생과 함께 임형택이 수집, 번역, 분석해 출판한 『이조한문단편집』(초판 전3권, 일조각 1973, 개정판 전4권, 창비 2018)은 아마도 우리 고전 발굴사에서 가장 빼어난 업적의 하나로 꼽힐 것이거니와, 이 비평적 개입을 통해서, “소박한 형태의 이야기”(370면)에서 기원한 ‘야담’이 현실주의가 풍부한 문학적 장치를 갖춘 ‘한문단편’으로 정립되었으니, 그 덕에 장르 하나가 세워졌다. 감탄불이(不已)하며 통독한 기억이 새로운데, 18·19세기 “중세하향기에 화폐경제의 발달과 함께 발생한 시정문화의 일환으로 성립”(369면)한 한문단편의 출현과 발전을 우리나라 소설 시대의 진정한 개화를 알리는 결정적 징표로 삼는 그의 뜻이 웅숭하다. 더욱이 한문단편의 교섭사가 놀랍다. 판소리계 소설은 기왕에 알려진 것이지만, 「허생전(許生傳)」을 비롯한 박지원(朴趾源)의 탁발한 단편들이 바로 야담의 유행이라는 문맥에 놓인 점이 밝아지매, ‘침강문화재’인 야담을 인양하여 한국고전문학을 입체적으로 조망한 복안적 시각이 다시금 빛을 발한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위치가 무거운 한문단편이건만, 표기체계가 걸린다. 일찍이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송강(松江) 가사를 “우리나라 진문장(左海眞文章)”으로 높이 평가하는 한편, 중국을 흉내내는 문인학사의 시가란 “앵무가 하는 사람의 말(鸚鵡之人言)”에 지나지 않으매, 나무하는 아이와 물 긷는 아낙의 노랫가락이 오히려 진짜라고 일갈한바,9 서포의 조숙한 모국어선언을 빌지 않더라도, 한문단편은 한문에서 국문으로 진화한 규방소설 시대를 다시 한문으로 돌린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문단편은 “고답적인 문장표현과 다른, 이 땅에 토착화되고 생활화된 한문”(372면)을 사용한 점에서 저 앵무들과는 선을 긋지만, 그럼에도 민중적 현실주의를 지향하되 표기는 한문이라는 모순은 못내 아쉬운 것이다.
3. 하나의 국문학
장덕순(張德順) 선생은 일찍이 ‘하나의 국문학’을 제기했다. 갑오경장을 획으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칼같이 가른 전통단절론을 비판한 문제제기인데, 학부 때 이 말이 비상히 박혔다. 현대문학연구, 아니 국문학연구 전체를 망친 비교문학론을 학적으로 반박할 개념으로 소중하거니와, 제5부와 제6부에 집중된 임형택의 현대문학연구는 바로 그 실천이다.
동농(東儂) 이해조(李海朝)를 다룬 제5부 2, 3장은 내게 천군만마다. 나는 기존의 ‘이인직→이광수 축’을 ‘이해조→염상섭 축’으로 바꾸려는 환부역조(換父易祖)를 기획하고, 먼저 이해조 연구에 착수, 애국계몽운동과 대오를 나란히 한 이해조를 친일개화론에 선 이인직에서 분리하는 박사논문 「이해조문학연구」(1986)를 작성했다. 그때 전두환의 탄압으로 ‘비평’을 빼앗기고 창작사로 국척한 창비가 고맙게도 이 논문을 출판해주었다. 반응은 적막했다. 이인직 타령도 여전했다. 조동일(趙東一)이 『신소설의 문학사적 성격』(1973)에서 이인직의 신소설이 양장한 구소설임을 명쾌히 밝혔듯, 일본에서 양육되어 미국에서 교육받은, 조선인 아닌 조선인이 야만의 조선을 구원하는 구도를 제출한 『혈의루』(1906)는 서부영화 비슷한 통속이다. 일본식 제목부터 낯선 이 작품에 왜 그리 집착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와중에 오직 경인이 최아무개의 이해조론을 지지했다. 나아가 그는 새로운 이해조론을 펼쳤다. 애국계몽기 최고의 한문소설 『신단공안(神斷公案)』(1906)을 분석한 2장은 “야담의 전환”(452면)이란 관점에서 이 방대한 연작소설에 총체적으로 접근한 업적인데, 더욱이 치밀한 구증으로 작자를 이해조로 추정했다. 연작 중 가장 걸출한 「김봉본전」이 빛나는 『신단공안』의 작가가 동농이라니, 고전과 현대를 잇는 결절로서의 이해조의 위상이 이로써 더욱 뚜렷해진 것이다.10
홍명희(洪命憙)의 『임꺽정』을 다룬 제6부 1, 2장은 임형택이 아니고는 쓸 수 없는 글이다. 의적 임꺽정에 관련한 고전 문헌을 박식하게 고증한 것도 고맙지만, 홍명희의 사상과 실천을 촘촘히 점검하여 민족협동전선 신간회(1927~31)에 매진한 경위를 밝히는 한편, 그 창립 이듬해에 연재를 시작한 『임꺽정』이 바로 신간회의 문학적 등가물임을 논증한 것이 정곡이다. 그 한계까지 포함해서 우리 근대문학사상 최고의 역사소설 『임꺽정』을 좌우 통합 축에 자리매김한 바탕에서 임형택은 이 작품을 둘러싼 쟁점들을 요령있게 개관하는데, 야담 문제가 핵심이다.
“『임꺽정』을 애당초 ‘신강담’으로 불렀던 사실”(680면)을 환기하면서 임형택은 먼저 야담과 관련한 염상섭과 임화(林和)의 비판을 분석한다. 염상섭의 「강담의 완성과 문단적 의의」(1929)는 아마도 『임꺽정』을 논한 첫 평론일 것인데, “문예의 초보적 민중화”라는 점에서 야담의 근대적 부활에 긍정하되, “강담은 어데까지든지 강담으로서 완성”되어야 함을 지적함으로써 소설의 강담화를 “역전이요 퇴영이요 타락”이라고 비판한다.11 역사소설을 단 한편도 쓰지 않을 만큼 철저한 리얼리스트 염상섭이 보기에 『임꺽정』은 소설보다 낮은 강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염상섭은 왜 이처럼 냉정했을까? “현재 조선 동아 양지(兩紙)에 연재되는 『임꺽정전』과 『단종애사(端宗哀史)』”에서 보듯, 근대소설이 겨우 정착되고 있는데 느닷없이 홍명희의 『임꺽정』이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함께 나타난 점에 놀란 것이다. 1928년의 이 우연치 않은 동반 등장에서 “금후로 야담시대가 돌아올 것”12을 날카롭게 예감한바, 과연 파시즘의 압박이 차츰 조여오는 1930년대 들어 통속 역사소설이 봇물처럼 터지니 염상섭의 우려가 빈말이 아니었다. 물론 염상섭이 역사소설에 대해 지나치게 염결한 것은 문제일지라도, 소설이 싸워야 할 세계가 과거가 아니라 바로 당대의 현실이란 점을 일깨운 것은 문제적이다.
임화는 『임꺽정』을 세태소설로 비판했다. 모더니즘의 엄습 속에서 우리 소설이 이상(李箱)적 경향의 내성과 박태원(朴泰遠)적 경향의 세태로 분열하는 데 대해 경고를 발한 저 날카로운 평론 「세태소설론」(1937)에서 『임꺽정』 비판은 곁가지인데, 사실 임화를 비판하기는 쉽다. 루카치처럼 분열 이전 좋았던 19세기 서양 리얼리즘소설을 모범으로 삼은 임화는 ‘문제아적 주인공’ 대신 ‘집단적 주인공’이 등장하는 『임꺽정』을 낮춰보기 십상인데다, 죄송한 말이지만, M-Boy(모던보이이자 맑스보이)였다. 임형택은 『임꺽정』의 서사가 실은 일인 주인공으로 통일된 점을 축으로 임화의 오독을 점검하면서, 우리 야담을 비롯한 동아시아소설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진정한 의미의 역사소설”(491면)로 들어올린 『임꺽정』을 옹호한다.
끝으로 이광수의 『단종애사』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싶다. 『단종애사』의 예술성을 부정한 임화에 대해 임형택도 “십분 타당하다”(681면)고 동의했는데, 나는 최근 좀 달라졌다. 『단종애사』는 솔직히 큰 기대 없이 읽었다가 이광수의 천재를 처음으로 실감한 장편이다. 박종화(朴鍾和)가 지적했듯 단종의 폐위를 망국과 유비한 뜻도 깊거니와, 육신(六臣) 문제를 다시 세운 것도 보람이다. 욕망의 연기(緣起)에 종속한 쿠데타세력의 논리를 내재적으로 파악한 이해조의 『한씨보응록(韓氏報應錄)』(1918)으로부터 다시 「육신전」 전통으로 돌린바, 더욱이 미증유의 시련에 직면한 조선 사대부들의 인정물태를 여실히 파악한 서사의 육체성이 두텁다. 요컨대 1928년은 의적형 『임꺽정』과 사대부형 『단종애사』라는 우리 역사소설의 두 유형이 동시에 출현하여 분기하는 한 획이었다. “최남선이 주간하는 『소년』지에 이광수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주선한 것도 홍명희”(651면)였듯, 홍명희·최남선·이광수의 연기가 깊다. 최남선과 이광수를 어떻게 재조정할까, 큰 숙제다.
『삼대(三代)』(1931)에서 『취우(驟雨)』(1952)에 이르기까지 조선 장편소설의 길을 개척한 횡보 염상섭은 “위대한 소설적 체력”(김동석)의 소유자다. 그럼에도 불우를 면치 못했다. 북에서는 반동으로 지목된 채 묵살되고, 남에서는 겨우 1970년대 비평에 의해 발견되어 상기도 문학적 복권을 누리고 있긴 하지만, 그 진면목은 아직도 안개 속이다. 임형택의 『삼대』론(제6부 3장)은 그 본격적 접근이다.
임형택은 염상섭의 산문을 자상히 독해, 염상섭 자신의 말로 그에 대한 오랜 선입견을 해체한다. 그가 닫힌 전망 속에 쇄말로 빠진 자연주의는커녕 리얼리즘의 길에 투철했음을 논증한 뒤, 일찍이 맑스주의의 세례를 받은,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정합되지 않는다고 판단, 중간파로 이동한 내력을 밝힘으로써 반(反)프로문학가란 낙인을 벗긴다. 임형택은 특히 『삼대』를 그 대표적 등가물로 분석하는데, 사회주의자 김병화에 대한 주인공 조덕기의 거리두기를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한층 원만하게 수행하려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조덕기의 자리가 곧 염상섭의 말을 빌리면, “중정(中正)의 길”을 기룬다(720면).
백낙청(白樂晴)은 발문에서 “김병화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달리 덕기를 너무 쉽게 긍정”(802면)한 점을 지적한바, 핵심적 문제제기다. 그런데 한편 작가가 조덕기를 마냥 긍정만 했는가, 한번 물을 만하다. 덕기가 필순이를 돕는 것이 아버지의 반복 비슷하게 떨어질 것 같은 복선이 곳곳에 있는 것으로 봐도 작가와 덕기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나는 오히려 정작 소설에 등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너무 허술하게 그려진 게 문제라고 여기는 편이다. 병화나 필순 애비나 모두 고등룸펜과 멀지 않다.
그런데 해방 직후 염상섭은 새로운 모색에 들어선다. 김재용(金在湧)이 발굴한 장편 『효풍(曉風)』(1948)은 획기적이다. 여전히 중간파로되, 미군정을 정면으로 문제삼아 모든 외세에 반대하는 민주주의통일정부 수립에 고투하는 젊은 주인공 박병직은 기껏 좌익 뒷바라지에 그칠 조덕기의 추상성에서 훨씬 벗어났다. 해방이 가져온 실천의 공간이 실감나거니와, “모스크바에도 워싱턴에도 아니 가고 조선에서 살자는 주의”13가 압권이다. 염상섭은 해방 직후 ‘중정의 길’에서 진일보한다. 1946년 11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에 이름을 올리고,14 1948년 4월 문화인 108인 남북회담 지지성명에 이병기(李秉岐) 김기림(金起林) 정지용(鄭芝溶) 박태원 등과 더불어 서명하고(348면), 신민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할 때 단독정부 수립 반대 및 5·10선거 거부 혐의로 1948년 4월 미군정에 연행, 열흘 구류를 살았고(347면), 결국 1949년 악명 높은 보도연맹에 가입한다(342면). 요컨대 염상섭은 해방 직후 건국의 방략으로 좌우합작에 기초한 신민주주의를 지향한 것이다. 전쟁으로 이 진지한 진화가 물거품으로 화한 일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만, 전후의 그 궁핍함 속에서도 ‘문학의 정치’는 쉼없던 것이야말로 ‘횡보다움’의 또 한끝인 것을!
4. 뱀다리
서평을 마무리하건대, 나의 무지도 무지지만, 불가피하게 단순화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쉽다. 우리에게 끼쳐진 민족 유산의 명예로운 상속자라는 엄숙한 책무에서 우러난 경건하기조차 한 그 정성스러운 마음은 가차없이 삭제되고, 임형택 학문의 고갱이라 할 고증의 그 흥미진진한 계단들이 무자비하게 희생되었다. 역시 훌륭한 책은 직접 읽으며 씨름해야 하는 법. 모쪼록 내 졸렬한 글이 무릇 한국문학을 공부하는 학인들은 물론, 한국소설을 제대로 감상할 안목을 기르고자 목마른 독자들을 안내하는 작은 징검다리라도 된다면 천만다행이겠다.
‘경인’이라는 호가 뜻깊다. 나는 경(絅)이란 이 신기한 한자를 후일 『중용(中庸)』에서 발견했다. ‘의금상경(衣錦尙絅)’.15 비단옷의 광채를 가리느라 덧입는 홑옷이 경인데, 그 해석이 근사하다. “그 문채가 드러남을 꺼림이다. 고로 군자의 도는 흐릿한 듯 날로 밝고, 소인의 도는 분명한 듯 날로 망한다(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16 小人之道 的然而日亡).”17 이우성 선생이 이 호를 내린 속뜻을 짐작한다. 일차적으로는 이름에 들어간 그 형(熒)이란 희한한 한자, 불 셋이 타오르는 형 자를 짐짓 가린 것일 테지만, 더 깊은 뜻은 물론 암연(闇然)히 날로 빛나는 군자의 길을 기룬 것이다. 호와 이름과 사람과 배움이 꼭 맞춤인 ‘경인’의 뜻을 새삼 새기며, 모쪼록 그의 건강과 학문이 늘 오늘 같기를 감축한다.
경인 같은 학자는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 그를 배출한 서울문리대 국어국문학과가 영원히 없어졌기 때문이다. 문리대 국문과는 묘한 곳이었다. 겉으로는 실증주의가 지배했지만, 속으로는 가치들이 불쑥였다. 김태준(金台俊)이 처형되고 이명선(李明善)이 월북하고 김삼불(金三不)이 행불되고, 조윤제(趙潤濟)는 성균관대, 이병기는 전북대로 떠나 이희승(李熙昇) 선생 홀로 남았어도, 그분들은 동숭동 곳곳에 출몰했다. 학풍도 학풍이지만 경인 자체가 꼭 맞춤이다. 원래 소설가 지망인지라 현대문학에 밝다. 웬만한 현대문학도보다 소장 목록이 가멸다. 그러다 고전으로 눈을 돌려 한문을 연찬, 즐거운 독공(篤工) 속에 고전문학자로 우뚝하다. 가히 고전·현대를 통으로 한 그대로 국문학자다. 틈틈이 고서점을 순례하며 먼지구덩이 속에서 보석 같은 저술들을 찾아내 소개하는 등 일찍이 이병기가 수행한 고전비평가 역할까지 겸했다. 더욱이 중일에 두루 미쳐, 동아시아론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자기 공부 속에서 스스로 유로(流露)되었기에 경인의 동아시아(문학)론은 무엇보다 실답다. 누가 이을까? 새 시대의 호흡을 새롭게 몸받을 다른 경인들의 집합적 출현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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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밝힘.↩
- “一覽衆山小(한번 보매 뭇 산이 작다)”. 두보(杜甫)의 시 「망악(望嶽)」에서.↩
- 1920년대 중국 신문화운동을 이끈 문학가·사상가인 호적의 모토.↩
- 임형택 「고려 말 문인 지식층의 동인의식(東人意識)과 문명의식」, 『실사구시의 한국학』, 창작과비평사 2000 참조.↩
- 일찍이 하따다 타까시(旗田巍)는 『원구(元寇)』(중앙공론사 1965)에서 고려를 비롯한 아시아 각지의 항몽 봉기들이 원의 일본 침략을 막았다고 논증함으로써 일본 우익의 카미까제(神風) 사관을 해체했다.↩
- ‘닫힌’ 구조 또는 기속(羈束)장치는 우리 구소설을 비판할 때 으레 따라다니던 천편일률적 공식성, 선악이분법, 권선징악, 해피엔드 등의 상투성을 달리 파악한 것이다. “‘닫힌’ 구조라 해서 그야말로 폐쇄, 고정된 틀은 아니다.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아이러니뿐 아니라, 부정과 창조의 역동적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22면)라는 서술에서 보이듯, 이 용어는 작품의 결을 내재적으로 분석하는 경인의 핵심 개념이다.↩
- 한용운(韓龍雲)이 오세암에서 매월당의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1475)를 다시 주석하여 『십현담주해(註解)』(1925)를 펴낸 일은 저명한데, 그의 서문을 잠깐 보자. “또한 매월이 『십현담』을 오세암에서 주석(註釋)했고, 내가 열경(悅卿, 김시습의 자)의 주석을 읽었던 것도 오세암이다. 수백년 뒤에 선인(先人)을 만나매 감회가 오히려 새롭거니, 이에 『십현담』을 주해한다.” 『한용운전집 3』 신구문화사 1979, 335면(번역은 필자가 새로 다듬었음).↩
- 서사를 구연함에 있어 강담사가 담화조로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러라면, 강창사는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고(판소리꾼), 강독사는 이야기를 청중에게 낭독해 들려주는 형태(전기수)다.↩
- “지금 우리나라 시문은 그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운지라, 설령 십분 비슷하다 해도 단지 앵무가 하는 사람의 말일 뿐이다. 그런데 여항간에 나무하는 아이와 물 긷는 아낙의 이아이아 하며 서로 주고받는 노래는 비록 속되다 할지라도, 진짜가짜를 논한즉 실로 학사대부의 소위 시부 같은 것과 같이 논할 수 없다.” 『시화와 만록』, 차주환 교주역, 민중서관 1971, 404면(번역은 필자가 새로 다듬었음).↩
- 임형택은 “야담은 문학사의 과도기에서 신소설로 변역하는 가운데 함께 운동하고 있었”(452면)다고 지적하며 야담의 근대화 및 국문화로 근대문학을 파악한다. 그런데 이는 이해조에만 거의 한정된다.(나는 이해조가 그의 소설 곳곳에서 야담-한문단편을 활용한 예를 내 박사논문에 적시한 바 있다.) 신소설사에서 야담의 전환을 일반화할 수 없는 까닭이다.↩
- 김종균 편저, 『염상섭작품집 (1)』, 형설출판사 1980, 195~96면. 그럼에도 횡보가 다른 모던보이처럼 전통적 양식 전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 김팔봉에 대한 반론으로 씌어진 「시조와 민요」(1927)를 보더라도, “민중의 예술을 구하는 마음에서 흘러나온 꾸밈없는 소리”(김종균, 210면)인 민요를 높이 평가하면서, “시조와 민요가 새로운 내용을 가지고 부활”(211면)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 같은 책 194~95면.↩
- 염상섭 『효풍(曉風)』, 실천문학사 1998, 335면.↩
- 김재용 「8.15 이후 염상섭의 활동과 『효풍』의 문학사적 의의」, 같은 책 343면.↩
- 『시경』 위풍(衛風) 석인(碩人)편이 출전인데, 원문은 “의금경의(衣錦褧衣)”다. 褧은 絅과 통하매, 『중용』이 살짝 바꿔 인용한 것이다.↩
- 일본의 공식 용어들 중 중국고전에서 용사(用事)한 것이 뜻밖에 많다. 일장기의 ‘일장(日章)’도 아마 여기가 출전이기 십상이거니와, 군자의 도를 표상하는 일장기가 침략의 상징으로 떨어진 일이 안타깝다. 다시는 ‘일장’이 ‘일망’으로 귀결되는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거늘, 평화를 염원하는 일본 국민이 이 연원을 널리 공유했으면 싶다.↩
- 『중용』 3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