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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임경섭 林暻燮
1981년 강원 원주 출생.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죄책감』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등이 있음. lks903@naver.com
꽃밭에는 꽃들이
언젠가 피어 있었다
블라인드 로프를
한번씩 당길 때마다
몸을 부풀리는 볕
볕과 함께 밖은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잡초 무성한 화단
가운데 꽂혀 있는 어린 모과나무
가지가 흔들리면 거기
바람이 꼭 그만큼 지나가고 있었고
지나간 것들을 향한 손짓이
앙상하게 흔들리며 안으로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손짓은 방향을 잃고
가야 할 때와 와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했다
어린 모과나무 그림자만
방향을 잃지 않고 꼿꼿이
꽃 없는 화단 너머
공터 쪽으로 누워 있었다
공터 위로는 허공이 가득했다
블라인드 로프를
다 잡아당기자 더이상
몸을 부풀리지 못하는 볕
볕을 따라 공터는
어느새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밖을 들여놓은 안은
밖으로 가득 찼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념일
무엇도 기억할 게 없을 때
우리는 기념일을 기다렸다
가을이 가기 전에 흩날리던 눈을
우리는 첫눈이라 불렀지만
첫눈은 우리가 서 있는 거리에
닿자마자 녹아 사라졌다
사라진 것들을
우리는 기념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우리가 죽고 없어졌을 때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 상에 둘러앉아
육개장을 떠먹는 날을 상상하며 우리는
웃음도 울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주고받은 적도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함께 죽음을 상상한 그날을
기념하기 시작했지
그러나 우리는 기억되기보다는
기억하고 싶었다
우리가 사라지기 전에 사라진 것들을 기억할 수 있다면
기억하며 사라질 수 있다면
우리의 죽음을 기다리는 나날이
우리에겐 기념일이 될 수 있다고
기억할 게 없는 날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갈 때
기념일들은 켜켜이 쌓여
우리를 기념할지 모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