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 신예시인특선
최예슬
1987년 서울 출생. 2011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iamyenny@naver.com
목마른 입술로
술도 약도 여자도 없는 방에서
가닿을 수 없는 진리에 대해 쓰다가
자꾸만 잠이 들었습니다
꿈
달콤한 귓속말로 이어붙인 세계
바느질로 군데군데 비밀을 기워넣고
태엽을 감아 분노를 적절히 조절하며
부러진 안경다리를 엮어 의자를 만들고
빨강 페인트로 우체통을 정성껏 칠하고
보드라운 솜을 뭉쳐 인형을 완성합니다
아직 최초의 인류는 도착하지 않았는데……
성난 누군가가 힘차게 소리쳤습니다
“제발 멍청한 축제를 그만둘 수 없나요!”
마을 사람들은 재빨리 비밀 속으로 사내의 목소리를 박음질합니다
이곳은 깨어질 수 없는 세계
날마다 비밀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아직 잠들지 않은 소년은 어린 사과나무에 정성껏 물을 줍니다
꿈에서 깨면 다른 세상에서 깨어난다
오늘은 더러운 해변에서
솜사탕을 만들고 커피 심부름을 한다
맨발에는 사탕 종이와 뒤엉킨 해초들이 감기고……
남은 원두 찌꺼기로 쓰디쓴 커피를 내려 마시며
다음에 도착할 마을을 상상한다
언제까지 우리는 잠들기를 두려워하며
살아 있음을 유예하는 걸까
울며 울며 일곱개의 층계를 오르던* 소년은
늙지도 죽지도 않은 채
달콤한 사과 파이를 베어 물었다.
먼지가 잔뜩 쌓인 창고
“지금 여기 쌓여 있는 물건들 중에서 ‘침대’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다면 네 것으로 삼아도 좋아.”
너는 창고를 활짝 열어주었는데
그곳에는
썩은 나뭇가지만 잔뜩 쌓여 있었다.
--
*박인환 「일곱 개의 층계」
예언자의 고백
그해 겨울 나는
세상 모든 진리를 깨달았지.
믿기 어렵겠지만
선거에 당선되는 시의원의 이름과,
예매한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는 채로,
인간도 아닌, 신도 아닌 어정쩡한 한철을 보냈어.
이전 생애에서 나는
사랑 대신 방랑을,
기적 대신 예언을,
성난 군중에게 돌팔매질을 당하며
죽어가던 그를 향해 맹세했는데,
광화문 어느 까페에서 너에게
엘뤼아르의 시 몇편을 읽어주며
사랑의 맹세를 읊조리다 문득
나의 전생이 떠올랐던 거야.
그 순간
덥수룩한 수염이 자라나고
반곱슬 머리카락이 장발로 불어나면서
—당신을 위해 마지막 사과나무를 심겠소
따위의 말로 너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지.
나는 항상 당신의 언어를 두려워했지.
난해한 말투, 가늠할 수 없는 표정
이해하지 못할 나는 천부적 죄인으로 살았는데,
한치의 오차 없이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당신의 눈빛이 응시하는 곳을 예언했지.
우리는 단 하나의 창문으로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지.
너는 나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오른편에서
상냥한 강아지를 기르고 있었고,
나는 털이 복슬복슬한 검은 강아지를 상상하며
너의 오른쪽이 나의 왼쪽이 될 수 없음을
비로소 나의 자리를 깨달았던 거야.
그래서
나는 운명 대신 기적을 믿기 시작했어.
당첨될 복권의 번호를
어딘가에 합격하게 될 운명을
부유한 자가 더 부유해지는 방법을 점치면서
인간이기도 하고, 신이기도 한 채로 계절을 보냈지.
그즈음이었어.
한 사내가 나를 찾아왔지.
“세상에서 가장 썩어버린 사과나무를 찾아주시오.”
그런데 요즘 누가 썩은 사과나무를 키우겠어.
과수원 주인은 온통 투실투실하게 살이 오른 사과 열매만 보여주었고,
할 수 없이 나는 사과 열매가 갈빛으로 쪼그라들 때까지
과수원에 앉아 사과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지.
마치 호우가 내리는 것처럼 잔뜩 물을 퍼주고
밤마다 반딧불이를 모아 낮인 양 빛을 쏟아부었지만
저물어가는 달의 빛과
솟아오르는 태양의 그림자는
천천히 공전하며 한 계절을 흘려보냈지.
마침내 사과 열매가 갈빛으로 썩을 무렵
작은 언덕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곳에는 비석이 없는 무덤과
무덤을 지키는 검은 강아지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