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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진명 李珍明
1955년 서울 출생.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단 한 사람』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세워진 사람』 등이 있음. muwoosujm@hanmail.net
채소밭 노래
꽃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냥 그런 정도
거리가 있다
채소밭의 작물들
꽃보다 더 꽃 같은 가지가지 작물들
채소밭 꽃밭의 하절 채소들은
더 더 꽃이 되어 싯푸르고 짙푸르고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중학교 때 단체로 가서 본 영화 「초원의 빛」
영화 속 울려 퍼지던 시구
채소밭은 초원이 되고
채소들은 꽃이 되고
하절 쏟아지는 빛은
애호박과 풋고추에 짐짓 저를 더 부려주니
너와 나 달궈지는 이 모든 초록빛 영광
호미와 물뿌리개를 놓고 허리를 펼 때
뜨끈뜨끈 익은 땀방울 채소잎 살에 줄줄이사탕처럼
48세대 빌라에 딸린 6평 분양 텃밭 이 찬란한 초원에서
돌쟁이 하나 모신 402호 서른살 새댁과 단둘만 마주친 날
붓기 아직 다 빠지지 않아 부석한 얼굴의 새댁 발그레 말했다
애기가 잠들면 잠들면
커피를 한잔 타 마실까 책을 읽을까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호미 물통 챙겨 들고 밭으로 나오게 된다고
새끼 재우고 근대와 새끼오이 보러 나오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자유에 당첨된 새댁의 온몸의 광활이여
채소밭의 저절로 기쁨이여
원두(園頭)의 꿈
언제고 땅뙈기 홑 몇평이라도 장만하면
자진해 원두의 소임을 맡고자 했다
가만히 오래된 꿈이었다
후원, 아니 부엌의 채공(菜供)은 이제 그만
하늘이 열린 채마밭에서 저절로의 책임으로
허리와 무릎과 손목을 꿇려
비의 햇빛 햇빛의 장대비에도 소임을 다하는
채마밭의 시만을 노래하는 원두의 계절
매일의 원두 일기는 차곡차곡 쌓여가고
다행히 몇년간 빌린 텃밭의 연습도 있었다
흙장난이라는 죄 없이 놀리는 말도 들었으나
세상에 놀랍도록 가슴을 딱 맞춰주는
적산일수(積算日數) 난생처음의 아름다운 말 배웠다
정식 원두가 되어
정식 원두 일기에
적산일수를 으뜸으로 중요히 기록하리라 했다
변두리 산자락쯤 채마밭 딸린 외따른 거처에 들어
원두 일을 시작한 지 이미 십수년
원두 일기를 기록한 지 이미 십수년
그런 한날 비명처럼
펄떡 가슴이 뛰며 꽉 막힌 아파트 거실바닥에서
펄떡 뛰쳐 일어서며 휘둥그레
눈물이 어려도 되련만 눈물은 어리지 않고
심장은 여진의 팔딱임을 계속하는데
어디서 오는지 기상천외한 한 생각이
아이의 이름을 원두로 갈아줄까
뜻 몰라도 원두, 부르는 소리의 느낌 좋잖아
잘 안 쓰는 이름으로 특이하기도 하잖아
원두, 가만히 오래된 제 꿈은 망해먹고
잘 있는 아이 이름은 왜 누구 맘대로 갈아
어처구니없구나 완전 치사 뻔뻔이로구나
치사 뻔뻔 더 나가보자
세월의 슬픔도 거짓이니
원두의 꿈이 나를 놓친 것이라고
아까운 최고의 원두 재목을 놓친 것이라고
원두의 꿈이 손발도 없이 쉬운 꿈만 뿌옇게
눈뜬 잠의 판때기에 그려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