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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성웅 趙誠雄
1969년 강원 강릉 출생. 시집 『절망하기에도 지친 시간 속에 길이 있다』 『물으면서 전진한다』 『식물성 투쟁의지』 등이 있음. siwanore@hanmail.net
위험에 익숙해져갔다
끝내
그는 한뼘 남짓한 H빔 위에 모로 누워버렸다
그의 등 뒤에는 10미터 허공이 펼쳐졌다
가장 위험해 보이는 자세가 그래도 용접을 하기엔 최선의 자세
그는 허공조차 안전지지대로 사용하는 법을 안다
몇차례의 죽음을 넘어
오늘 하루분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까지
오로지
위험에 익숙해져갔지만
그는 이 야만의 세계
삶의 안전을 위한 최고의 역능을 숙련했는지도 모른다
난 한뼘 남짓한 H빔 위에 모로 누운 그의 모습이
목숨을 살리는 방법 같고 삶의 안전을 위한 끈질긴 질문 같고
이판사판 한번 붙어보자는 고공농성 같았다
허공은 모로 누운 그의 모습을 닮아 수평을 이루었다
석진씨가 통증 깊게 말했다
박근혜씨가 구속되던 날
공장 담벼락 한편에 홍매화가 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혹이 위로가 되지 않은 시간이다
난 꽃봉오리 앞에서 서툰 예감보다는 뿌리로 돌아가는 긴 도정을 생각했다
내 몸에 새겨진 그라인더의 진동 속에는 어떤 의미있는 계절도 도래하지 않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경쟁을 허용하면서도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내 사십대는 타락하지 않기 위해 싸웠던 나날이었다
다중(多中)*에 대한 사유 없이는 전망이 열리지 않았다
이뤄놓은 것 하나 없지만 그래도
내게 평등에 대한 예민한 귀가 있다는 것이 어느날 위로가 됐다
정권이 바뀌자 하청업체 관리자들이 먼저 미쳐 날뛰기 시작하고
난 그들에게 인간이 아니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더욱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됐지만
여전히 내 마음이 쏠리는 건
낡은 안전화며 다 해진 목장갑이었다
경쟁을 견뎌내느라 낡고 해진 마음이여
과연 경쟁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쓴 마음이여
난 공감에 이르는 바닥에서 바닥으로 살겠다
*
지각한 석진씨는 업체 반장에게 한소리 듣고 와서도 질문을 놓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는데 정말 죽을 것 같더라고요
성웅씨가 힘들어할까봐 억지로 출근했어요
성웅씨,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겨? 일하기 위해 먹고사는 겨?”
먹고사는 문제와 일
난 석진씨 질문의 바깥을 고민하다 답변할 때를 놓쳤다
놀 수 있을 때 어떻게든 더 놀고 싶은 나는
일할 수 있을 때 어떻게든 한푼이라도 더 벌려는 석진씨의 마음을 조용히 헤아려보고
잔업하라는 소리에 표정부터 어두워지는 나는
잔업한다는 소리에 표정부터 밝아지는 석진씨 눈빛 곁에 내 마음을 가만히 내려놓는다
(변변찮은 내 체력은 견디지 못하는 시간까지 이를 악물어야 했다
하루 4시간 노동은 그런대로 버티겠는데 6시간이 넘어가면 온몸이 아프다)
아픈 몸으로 석진씨와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홍매화가 열어놓은 쪽부터 해가 지기 시작했다
질문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정권도 바꿔냈는데 주말 다 쉬고 하루 6시간 일해도 먹고살 수 있어야죠
이젠 상식이 되었으면 좋겠네요”라고 석진씨가 통증 깊게 말할 때
홍매화 향기가 번져 저녁노을을 낳고 있었다
대화가 산란되는 시간은 참 붉었다
모두 붉은 중심이었다
난 석진씨 지친 어깨 위에 내 손을 올려놓으며
100년 전 하루 6시간 노동제 쟁취를 내걸고 싸웠던 러시아의 노동자들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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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중多中의 시대
살아온 날들이 헛헛해지고
살아갈 날들이 막막해질 때가 있다
몸살, 내 삶이 살려고 애쓰는 시간이다
어느날 함께 공부하러 가는 길 위에서
돌쑥 선배는 “다중多中의 시대”를 말했다
다중多中이라는 단어가 오래도록 입가에 맴돌았다
자립한 개인들의 통섭을 소망했던 난
내 삶-몸살의 치유지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일생일대의 비상 그 자체다
단계 따위, 대의제 따위는 당장 걷어치워버려라
난 높은 무대를 철거하고 스스로 광장이 된 다중多衆이 다중多中의 시대를 열 것이라는 걸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