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당선작의 제목을 빌리면 누군가의 평론을 읽는 것이야말로 글쓴이의 ‘마음의 리얼리즘’과 마주하는 일인 것 같다. 글 한편 한편이 이미 소중한 진실임을 전제하면서 전체적인 감상을 적는다면, 올해 신인평론상 응모작에 실린 마음들은 어쩐지 ‘모색 중’이라는 느낌이었다. 뚜렷한 경향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강한 주장을 삼가는 기색이 보인다는 말이기도 하다. 당당하고 도발적인 발화라기보다 벗어나기를 주저하는 표정이 묻어 있는 것 같다. 촛불 이후 우리 사회가 성큼 나아가기보다 머무는 듯 모색하는 시간대를 지나고 있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싶다. 그렇더라도 ‘글을 쓴다’는 건 분명 어떤 결단이고 그 결단은 크건 작건 모종의 자기 확신을 동반한다. 결국 그 확신을 붙잡고 키워가는 과정이 글쓰기라면 좀 엉뚱하고 실험적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달리 말하면 23편의 응모작 상당수가 허세 없이 차분하게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 논의한 세편의 원고 모두 논지에 집중하되 작품의 세부를 적절히 소환하면서 조심스럽게 진행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먼저 김서로의 「사물의 구원, 존재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은 최근 이론의 주요 경향 중 하나인 ‘사물론’으로 조명한 진은영 시론이다. 사물의 잠재성을 드러내고 사물과 인간주체의 존재론적 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진은영의 시를 해석한 이 글은 인용된 시 대목들과 잘 어우러지며 진은영의 작품이 감당한 “세계의 풍경들에 대한 교정지 역할”을 실감하게 한다. 그런데 논의의 심화단계에서 제시된 ‘존재’와 ‘존재자’의 대비라는 논제는 다소 단선적이며 사물론과의 연결도 치밀하지 않다. 예컨대 ‘물화’ 개념 같은 것과 맞세웠더라면 사물론과 존재론 모두 더 설득력을 가졌을 법하다. 기왕에 이런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면 이론적 감각을 더 본격적으로 발동해도 좋았을 듯싶다.
김이경의 「여름을 향해 한걸음, 더」는 “집과 공간에 대한 다른 감수성”을 중심으로 박솔뫼의 소설을 읽는다. 소설 속의 낯설고 환상적인 공간들이 ‘재난 이후’라는 특정한 맥락을 갖는 점에 착목하면서도 재난의 증언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저항의 시도를 포착하고자 한다. 이 과정은 ‘길 위의 사람들’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장소를 박탈당한 사람들에서 ‘다른’ 장소를 만들어내는 사람들로 서서히 초점을 이동하는 전략과 무리 없이 맞물린다. 박솔뫼 소설의 다양한 양상을 아우르면서도 분석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집중력이 돋보이지만, 무의식, 헤테로토피아, 탈영토화 같은 개념들의 익숙한 권위와 의미에 지나치게 기댄 점이 무엇보다 아쉬웠다. 그런 개념들과 박솔뫼의 소설을 부딪치게 해서 ‘다른’ 파장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비평의 본연에 더 부합하리라 본다.
임정균의 「마음의 리얼리즘」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글은 계급갈등보다 계급 내 갈등을 부추기는 감정의 물신화, 감정교환이 되어버린 감정교류, 감정의 폐기를 종용하는 감정교육 같은 우리 시대의 다양한 감정적 현실을 투시하며 성찰과 저항을 가다듬어온 도정으로 김금희의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전체적으로 세심한 읽기를 통해 ‘마음의 리얼리즘’이라는 호명의 정당성을 충분히 설득하고 있으며, 특히 이 리얼리즘의 작동을 전체와 비전체의 역설적 관계로 해석한 독법이 흥미롭다. 이 과정에서 정동이론의 참조가 불가피하게 그리고 때로 다소 엉성하게 일어나기도 하지만 가능한 한 작품에 밀착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이 글에서 김금희의 소설은 단지 논의를 위해 인용되는 것이 아니라 논의를 밀어나가는 주된 동력이다. 이론의 힘에 기대기보다 소설의 역량을 밝히는 방식으로 자기 역량을 드러내는 것이 비평의 본래 자리라 생각되어 이 글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평론상에 응모해주신 모든 분의 관심과 정성에도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한기욱 황정아
수상소감
임정균
1985년생.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 중.
이 글의 초고를 썼을 즈음 어떤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김금희의 소설이 가진 어떤 섬세함을 있는 그대로 남겨두는 데에 실패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정말 나를 힘들게 한 건 성패가 아니라, 어떤 불가능성에 대한 체감이었다. 그걸 인정하는 건 슬픈 일이었다. 이 글을 잘 고쳐 쓸 수 있을까. 지난 일년간 몇번이고 다시 고쳐 쓰면서도 그런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이렇게 적고 보니 패배감과 섬세함과 불가능성에 대해 한번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걸 ‘어떤’이라는 관형사를 통해 조금은 알 것 같다. 일년 전에 알았다면, 이 글을 고쳐 쓰지 않았을까. 지금껏 엉뚱한 문제에 골몰한 것은 아닐까. 아무튼 이 글이 지금의 형태가 된 것은 문득문득 다시 고쳐 써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선 연락을 받기 직전에도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밥을 푸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어 부끄럽다.
완성의 사전적 의미를 보니, ‘완전히 다 이룸’이라고 한다. 종말, 끝, 허무 같은 낱말들이 떠오르는 말이다. 다행이다. 아직 완성이 아니라서. 이렇게 적고 보니 완성이야말로 부끄러운 말이다.
이 글은 혼자 쓴 게 아니다. 나보다 더 기뻐해준 가족들. 가족만큼이나 기뻐해준 충희, 용환, 원훈, 동원이 형. 마지막까지 읽고 조언을 해준 ‘산미없음’ 친구들. 함께 공부했던 모든 이들의 영향이 없었다면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혼자서는 완성할 수도, 완성될 수도 없다는 걸 이렇게 적고 보니 조금은 알겠다.
아는 것을 쓰는 게 아니라 쓰는 게 배우는 일임을 쓰고 나니 조금은 알겠다. 앎의 기쁨을 가르쳐주신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지금 이 글을 적으며 또 뭔가를 알게 해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렇게 적고 보니 지금껏 내 앎이 보잘것없는 것임을 알겠다. 이 글을 끝내기가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