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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연준 朴蓮浚
1980년 서울 출생.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 등이 있음.
gkwlan@hanmail.net
밤안개에서 슬픔을 솎아내는 법
1988년
이것은 수줍음에 관한 노래
계단을 오르다 발이 사라진 아이의 주제곡
그애는 시종일관 뛰어다녔다
붙잡아도 소용없었다
잡아도 흘러가버렸다
밤과 안개가 합작해 아이를 도왔다
물 아래
녹을 수 있게
물 아래
흐를 수 있게
물 아래
잠길 수 있게
이미 그런 걸로 가득한
가망
가망이라니?
가슴에서 명치를 떨궈내는 법
그런 게 있을까,
생각하지
아이는 무대의 왼편과 오른편에 반씩 서 있고
오른쪽으로 보내지 왼발을
왼쪽으로 보내지 오른발을
구르듯이
생각하지
안개를 떠먹는 아이를 밤에서 솎아내는 법
생각을 생각하고 생각을 생각하며
안개는 커튼은 깃털은 손끝은
연주하지
건드리면 열리고 열리면 사라지는
얼굴은 커튼 없는 무대
두 눈은 하는 수 없이 켜진 조명
이곳에서 밤의 악사들이 태어나고
뱀을 문 광대들이 흘러 다니고
생각하지 얼굴의 암전에 대해
귀뚜라미가 백년 동안 기어가는 장면이
공연의 전부라고
그러면 또
안개에 빠져 죽은 여자 몇
아코디언 연주에 춤추는 춤추다 흘러내리는
음악으로 만든 계단
생각하지
계단이 접힐 때마다 사라지던 아이의 유년
딴따라라고 놀림받던 유령의 튀어나온 무릎
관객의 취한 눈빛 속
일렁임 속
웃으며 뛰어다니던 쥐들 속
음악
데려오는 것은 모조리 삼켜버리던
그 밤
안개들이 짐승처럼 아이를 먹으려 했지
맛있어했지
뱉고 핥고 다시 뱉었지 동글동글
혀로 굴려가며 아이를 빚던
음악
아이의 형태가 그들의 혀끝에서 이루어지던
그 밤
아무래도 아이가 완성될 기미가 안 보이자 우르르르, 다른 상대를 찾아 떠나던 안개들의 변심
생각하지
밤안개에서 슬픔을 솎아내는 법
그런 게 있을까
작은 인간
작게 말하면 작은 인간이 된다
작은 인간은 작은 상자
사적인 영역
항아리 요강 무릎담요 속 캄캄한 전진
아스팔트 위가 아니라 아스팔트 아래
회전문을 밀치고 밀치다, 되돌아오기
돌고 돌아 소용돌이 속 정적 되기
먼지들의 집
빗자루 되기
작은 인간은 작은 우주를 들고 나간다
겨울을 걸으면 발에 치이는 알과 껍질
계절이 쓰고 버린 것들,
작은 연두 야윈 연두 굶은 연두 취한 연두가
얼굴을 든다
작은 인간은 부르면 사라진다
작은 인간을 위한 강과 다리
건너는 사람 없는
사소한 걸 이야기하면 사소해진다
공책을 펼치면 거기
작은 인간을 위한 광장
납작하게,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는
이름들
사소한 명단이 걸어다닌다
작은 이름표를 달고 작게 작게
봄이 되면 봄 아닌 걸 치워야 한다
아지랑이를 먹으면 죽는다,
누가 말하는데
작은 인간은 천천히 그것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