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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황성희 黃聖喜
1972년 경북 안동 출생. 200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앨리스네 집』 『4를 지켜려는 노력』 『가차 없는 나의 촉법소녀』 등이 있음.
hsh7213@hanmail.net
단념
고양이에게는 고양이가 전부이다
그것은 제가 어느 입간판 속에 갇힌지도 모르면서
아무 의심 없이 제 옆에 놓인 사료 봉지를 쳐다본다
저의 머리가 언제나 오른쪽으로 기운 것도 모른 채
저의 혓바닥이 행인의 담뱃불로 지져진 것도 모른 채
한번도 돌아본 적 없는 왼쪽의 세계에 대한
무지 아닌 무지와 달관 아닌 달관의 표정으로
결코 제 입속으로 떨어지지 않을 공중의 간식을 향해
평생 한 종류의 눈빛과 부동하는 한 자세를 선보인다
하지만 고양이는 고양이에 관한 의문을 키우지 않는다
하늘을 의심하는 일이 하늘에게 무슨 소용이 있나
술을 먹고 입간판을 걷어차본 자식들은 알 것이다
아무도 고양이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고양이를 조각조각 부숴볼 수는 있지만
고양이에게 이 세계를 가르칠 수는 없다는 것을
옛날 사람
김종삼을 읽다가 문득 말을 멈춘다
많은 말을 가지면 많은 뜻을 전달할 줄 알았다
그때에야 비로소 남루하였던 나를 알아보고서
의미들은 나의 명령대로 빛나는 거미줄을 짜고
그렇게 되면 밤낮으로 혼자여도 두렵지 않고
거울 없이도 난 내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고
가지각색 의미로 나의 거죽을 쌓아 올려
프랑스에도 가보고 아메리카에도 가보고
살아서 갈 수 없는 단 한곳을 빼고 가는
모든 여행에도 불안한 줄 몰랐을 거다
조금만 더 말을 모으면
나를 설명하는 일이 가능할 거라고
정확한 말을 찾아, 대상 그 자체인 말을 찾아
때가 되면 진리를 치장해볼 것이라고 들떴다
몇권의 말 무덤만 덩그렇게 남길 줄도 모르고
내용도 아름다움도 없는1 카드에다
수신인도 발신인도 없는 카드에다
이제 무엇을 더 써보아야 하나
요즘 아이들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린다
옛날 사람이 되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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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삼의 시 「북치는 소년」에서 빌려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