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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기리
2020년 김수영문학상을 받으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가 있음.
creativeleegiri@gmail.com
블록 꽃
오늘도 안 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새로 깎은 연필이 단번에 부러지거나
팔꿈치로 툭 쳐버린 커피가 뒷굽을 적실 때
이것이 우리가 주고받은 마지막 대화일 때
조카가 다 숨었다고 어서 찾으라고 한다
네가 그렇게 말해버리면 삼촌이 어딨는지 다 알게 되잖아
하얀 레이스 커튼을 몸에 두르고 두 눈을 양손으로 가리면
자신을 다 숨겼다고 생각하는 무구한 기분이 내게도 필요한데
나는 조카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는다
나란히 앉아 들려주던 풍경들이 길목에 겹쳐진다
진홍색으로 물든 화살나무가 타오르는 불처럼 느껴진다고
우린 끝내 춥지 않은 곳에서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의자가 삐걱거렸다
거짓말, 아직 이렇게 향기가 남아 있는데
미리 꺼내놓은 노랑 원피스와 단화가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절대 믿을 수 없어
어서 찾으라고 말해줘
번호를 꾹꾹 누르고 전화를 걸어보면
내 옆에서 주인 없는 전화기가 울리고 있다
받을 때까지 끊지 않는다
내가 가장 좋아한다고 했던 책을 펼치자
만원 한장이 나풀나풀 공중을 맴돌다
손이 닿지 않는 책상 뒤편으로 떨어진다
무엇이 자꾸 안 된다는 건지
안 된다고 하면 그만두어야 하는 건지
살아 있기로 한 말들이 귓속에서 피를 흘린다
성냥을 오래 붙잡고 있으면
잡은 손이 뜨거워지고 성냥을 기울이면
무언가 태울 것이 생긴다
당신들이 죽으면 내가 강해져야만 하잖아
그렇다고 해서 내가 먼저 죽거든
당신들은 견디지 않아도 돼
약해도 돼, 애써 약해져도 돼
보는 것마다 다 번진 모습으로 보인다
아쿠아 유리를 끼운 것처럼
모래가 유치원을 뒤덮고
끊어진 가방끈이 죽음보다 높은 자리에 둥지를 엮는다
우리가 보고 걷고 배우던 풍경들은 사실이었는데
나는 점점 사실을 비껴가는 데 능숙해지고 있다
이것이 사랑이 꿈꾸는 장면이다
의미 없는 선반을 깨끗이 치우고
나는 또다시 영원을 희망하며 조립하고 있다
향기와 처음부터 없었으면 죽지도 않았을 삶을 부러뜨리고
우리가 만나서 살았었지요, 기념하려고
조카가 배고프다고 배를 문지른다
나는 냉동 생선의 꼬리를 움켜쥔다
춘수(春愁)
낮잠을 자고 일어나 기지개를 켜기 위해 거실로 나왔다.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는 내가 보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깍지를 끼고 두 팔을 높이 뻗었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개미가 바닥에 고인 햇볕을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뗀 자리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운명을 의미하는 손금 위에 개미의 몸이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개미의 이목구비까진 보이지 않았지만. 개미의 얼굴을 눈으로 직접 본 적 없지만. 창밖으로부터 시작되는 봄을 보고 있었을 거다. 목련이 구더기처럼 피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벚꽃이 활짝 핀 나무가 종종 가지를 늘어뜨려 창을 두드리는 밤도 올 거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또다시 기지개를 켜러 나오겠지. 거실은 아직 차가운 공기에 휩싸여 있고 거울 속은 깜깜하겠지. 들어가고 싶어서 깨버리고 싶은 계절도 있겠지. 꽃망울이 맺혀 있는 걸 보곤 누군가의 눈물을 모아 매달아둔 것 같다고 말한 사람에게도 봄이 왔을까. 봄이 오고 있었다. 밝아 오는 곳을 향해 걷던 개미와 휴지통에 버려진 개미가 동시에 살아 있는 봄이. 신음 가득한 봄이. 몸이 찌뿌둥했다. 몸이 자꾸 풀리지가 않았다. 창틀에 쌓인 먼지나 닦아야겠다. 다 쓴 부탄가스와 염색약은 잠시 옆으로 치우고. 거울이 금이 난 명치를 부여잡고 내게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