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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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야 李雪夜

2011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가 있음.

lsy196800@hanmail.net

 

 

 

레스타벡1

 

 

“내가 무너진다면 생도맹그의 단 하나뿐인

자유의 나무는 쓰러지고 말리라.

그래도 자유의 나무는 다시 살아나

땅속 깊이 수많은 새로운 뿌리들을 내리리니”2

 

 

1

 

시장에선 채찍이 불티나게 팔리죠.

흑인 소녀와 소년들은 네살이 넘으면 레스타벡이 되죠.

레스타벡은 아이들을 지옥으로 던진 점령자들의 언어

 

첫 흑인 노예혁명을 이룬 땅이지만,

가난한 집 아이들은 다른 집 노예가 되죠.

 

꿈에서도 채찍이 감겨와 푸른 멍 속에서 깨곤 해요.

 

 

2

 

거대한 설탕공장이었죠.

오른손은 오른발에

왼손은 왼발에 묶인 채 사탕수수밭에 도착한 흑인 노예들

깡통 입마개를 한 채 일하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사탕수수 한조각 먹을 수 없죠.

목에 칭칭 감긴 줄 때문에

물고기 한마리 넘길 수 없는 가마우지처럼

쇠사슬이 목에 채워진 채로,

밤낮으로 손톱이 벗겨지도록 일만 하죠.

 

곧고 빽빽하던 산과 들판의 나무들도 모두 사라졌죠.

주술에 걸려

일만 하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좀비가 되었죠.

 

영혼까지 사슬에 묶여

무덤 밖을 나와서 사탕수수를 베요.

죽어서도 일을 벗어나지 못하죠.

 

 

3

 

아이들은 진흙쿠키를 하루에 한번, 운이 좋으면 두번 먹죠.

달콤한 진짜 쿠키는 죽을 때까지 못 먹을 거예요.

곧 지진이 일어날 테니까요.

 

진흙쿠키로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유령처럼 세계를 떠돌아요.

밤을 틈타 밤을 넘고 국경을 넘고 넘어도

결국은 자신들의 땅에서처럼 아무것도 가질 수 없죠.

검고 검은 밤들을 연명하죠.

혁명은 신기루처럼

너무 아득해요.

독립은 했지만 백이십이년 동안 배상금으로 탈탈 털어간,

에펠탑의 하늘은 높고 푸르죠.

 

풍요롭던 카리브해의 후예들은

가장 가난한 땅을 밟고 살아가는 거죠.

 

노예의 땅에서 자란 아이들을

다시 노예로 파는

그것은 백인의 신들에게서 배운 기술

 

 

4

 

콜럼버스가 발견한 에스빠뇰라섬은 눈부시게 아름다워요.

 

카리브해에 펼쳐진 파도의 노래는 슬픔을 숨기느라 수평선까지 구름을 피워 올리죠.

 

가난한 씨앗들 물에 잠겼죠.

 

 

5

 

흑인 소녀들이 찢어진 영혼을 꿰매는 동안

주인들은 프랑스 와인을 마시며 밤마다 축제 하죠.

 

소녀들 대신 부두인형이 울어주는 동안

뜨거운 태양도 잠시 파도 속으로 숨어버리죠.

 

까만 얼굴의 소녀들은 다시 태어나도 레스타벡이 되죠.

 

그들에게 신을 되돌려줘야 하는데

아직 남아 있는 꿈이 진흙처럼 자꾸만 부서져요.

 

 

6

 

오늘도 시장에선 채찍이 불티나게 팔리겠죠.

 

태양을 창조한 신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던

흑인 소녀와 소년들

그림자까지도 채찍에 맞아 찢어지는 밤

 

죽은 나무 곁에서 살아 있는 나무가 떨고 있는

검은 뿌리들이 서로의 목을 감고 있는

 

내일이 왔다가 돌아서 가는

 

 

 

툰드라 육식조

 

 

검은 아스팔트와 시멘트 사이에 핀 꽃들을 따라

나는 문 닫은 거리를 걸어요

그 끝에서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인사해요

얼굴의 반을 가린 채

커다란 툰드라 육식조처럼 눈만 보여주는 자세로 걸어요

눈은 입이 되었어요

입은 막막한 심장

 

이 도시에서 새들은 몸을 숨길 만큼만 자라나요?

 

“이 새는 북극 툰드라가 서식지로, 극지방 기온에 완벽하게 적응했습니다.

날개를 펼치면 1.5배나 되니 가장 큰 육식조인 것도 당연합니다.”

 

바탕화면 가득 날아가는 툰트라 육식조

그래요 당연한 날개

당연한 완벽

나는 완벽하게 이 세계의 기후와 슬픔에 적응했어요

 

나무 없는 땅

툰드라의 입 다문 동토 위로 눈이 내려요

내리는 눈에는 새의 눈물과 피가 섞여 있어요

 

비닐을 뒤집어쓴 채

육식조처럼 날개를 다 펼쳐 날고 싶어요

열대야의 꿈속을 날다가

얼음 속에 갇혀버린 새소리를 듣는 밤

 

비에도 완벽하게

이 세계의 절박한 거짓에 적응하는 눈신토끼와 뭇별들

 

이젠 더이상 자라지 않기로 해요

바위보다 느린 사향소처럼

이끼 먹은 순록의 눈동자처럼

 

뭉개진 꽃들을 따라

다시 돌아오는 길

누구에게나 눈으로만 인사를 해요

얼굴이 녹아 흘러내려도

눈만 보여주는 자세로

 

 

--

  1. 레스타벡(restavek)은 남의 집에 머물면서 일을 돕는 아이라는 뜻으로, ‘함께 지낸다’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다.
  2. 아이티 혁명가 루베르튀르가 프랑스로 끌려가며 남긴 말로, 아이티 학생들이 암송하는 구절이다. 노암 촘스키 『정복은 계속된다』, 이후 2007, 28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