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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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인 崔志認

1990년 경기 광명 출생.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 등이 있음.

youngerpoet@nate.com

 

 

 

더미

 

 

1

 

수업을 빼먹었다는 이유로 너는 교실에서 뺨을 맞았다 담임이 출석부로 머리를 후려쳤다 네가 눈을 부라렸던 것 같은데, 학교가 끝나고 아파트 놀이터에 모여서 욕을 하고 피씨방에 갔겠지 너는 친구가 많았고 그들을 사랑했었다

 

나는 방송실에서 국어선생에게 맞았다 조금 우울해진 것뿐이었는데 내가 변했다고 했다 변했다고 그는, 내게 잘못이 있다고 멍이 들 때까지 몽둥이를 휘둘렀다 어쩌면 내가 이상해진 게 아닐까

 

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너는 무섭다고 내게 전화했다 너와 같은 층에 살던 중년 남성이 사망했고 며칠 전부터 복도에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었는데 그게 쓰레기 냄새인 줄 알았다고, 그 냄새가 잊히지 않는다고

 

한순간에 온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그 무엇도 정상이 아닌 곳에 있다 그런데 정상이란 뭘까 그것은 자꾸 우리를 몰아댄다 대체 어디로, 어디로

 

지하실에 몇십년 된 쓰레기들이 가득 쌓여 있대 사람들이 떠나면서 버렸대 쓸모없는 것들이 숲을 이룬 거지 농담이야 정신 차리자

 

*

 

사람들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랬을 것이다

너는

목소리가 잘 들리냐고

계속 물었다

 

 

2

 

그만 전화했으면 좋겠어 네가 말했다 나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불운이 닥쳤을 때 누구나 구원을 바라지만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드라마를 본다 곧 끝날 것 같은데, 너와 마주 보고 있던 것 같은데 어디에 있지 난

 

몇편의 시와 미완성 원고 한뭉치

 

*

 

네가 쓴 책의 첫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사람을 애써 찾는 일은 옳은 일인가

 

*

 

뒤를 돌아보니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빛의 꼬리를 바라보았다

 

네가 살아 있을 거라고

아직은 살아 있을 거라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

 

 

급정거한 버스가 경적을 울릴 때

우리는 알았다

잘못된 길이었다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사차선 도로에서

끝과 끝으로

핸들을 돌리며

전진과 후진을 계속했다 비상등을 켜고

생각했다

이 길은 올바른가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가

우리는

유혈사태로 가득한 주말을 목격했다

 

시민의 삶은 고독하고 궁핍하며 짧다

이를테면

언젠가 쓸모 있을 거라며

버리지 않은 서랍 속

너절한 잡동사니처럼 그것이

우리의 삶을 밀어내고 있다

무엇을 버려야 하나

수도복 입은 수녀가

소총 든 군경들 앞에서

무릎 꿇고 있다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고

아내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군경들은 시인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혁명의 법칙

생각만 하지 말고, 당신은 피처럼 용감해야 합니다1

군부는 시민에게 죄를 물었다

외할머니는 죽기 전 이런 말을 남겼다

자주 절망하되 희망을 잃지 말거라

아주 오래전 일이다

가장 약한 자부터

외로워질 것이다

공장을 불태우고

악은 물러가라

악은 물러가라

세상이 끝날 때까지

북을 치는

사람들

 

그사이 나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고

부모에게 돈을 빌려

스물한평짜리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견고해 보이던 일상은

빛과 어둠처럼

무너져버렸고 얼마 되지 않아

무너진 세상이 일상이 되었다

누구나 죄인으로 태어나므로

누구도 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신은 이 세상을

 

온 힘을 다해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앞을 가로막은 현실

내일의 일과 이번주의 일

나는 누구지?

잠에서 깬 아내를 쓰다듬으며

이젠 괜찮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군부의 공격에 맞섰다

달리는 오토바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모든 것을 빼앗는

불한당에게,

손을 높이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북을 쳤다

악은 물러가라

악은 물러가라

 

 

--

  1. 2021년 2월부터 미얀마 모니와 지역에서 시민 불복종 운동이 전개됐다. 이날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한목소리로 “군부 타도”를 외쳤다. 「두개골에 대하여」라는 시를 쓴 시인은 군부에 의해 살해당했다.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시인을 군인들이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