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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제21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
남현지 南弦志
1977년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namnamsss@naver.com
호수공원
눈앞에 호수가 있고
나는 시민과 조경이 익숙한 듯이
벤치에 앉아서
방금 점심을 먹고 식당에서 나오다가
묶여 있는 개를 바라보는 회사원처럼
호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배가 부르다는 게
큰 개가 묶여 있다는 게
누가 길을 물어서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호수만 보이는데
꿈에서는 나도 찰랑거리다가
귀를 기울이면 자신이
물질처럼 쏟아져서 깨어났다
잉어 몇마리와 엉겨붙은 물풀을
떼어내면서
호수는 잘 묶여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건물처럼
고요하게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생각하면서
호수를 따라 걸었다
삼십분 전에 본 사람이
다시 옆을 달리고 있다
빛의 생산
전기 좋아해요?
이제 그만
그걸 자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담배를 마지막으로
집에 불타오르는 물건이 없어졌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전기를 좋아하는구나
전기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두 없는 세계
슬프지만 그럴 수 있고
종달새는 본 적도 없고
나 없는 세계는 지금도 뭐
언제부터
고통 없는 세계
그건 상상을 안 합니다
자연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봄기운이 완연한
오늘 날씨 이야기처럼 다들
두줄을 넘기지 말라고
고통에게 차례를 지키라고
말할 거라면
사물들은 다 잘 있습니다
가끔 고장이 나고
그것을 고치거나 버립니다
빛이 깜빡거리면
문제가 있는 거고
담배는 진짜 끊었습니다
퇴근
첫눈이 내리는데
갑자기 돈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와
사과 상자 안에서
더 붉어진 사과 이야기
나무는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그만큼의 붉은색을
중개인들의 몫으로 넘겨주었다
모자라요?
가게 주인은 상한 사과를 덤으로 넣어주고
나는 충분하다고 다시 빼낸다
한밤중에 사과는
검은 봉지 안에서 조금 더 붉어지고
나무는 멀리서 눈을 맞고 서 있다
뭘 잘못한 사람처럼
엉거주춤하게
버스를 긴 줄로 기다리다가
집을 향해 걸었다
도로에 집으로 가지 못한 차들이
눈을 맞고 서 있고
떨어진 사과 하나는
붉은색을 들고 굴러갔다
앙코르 와트의 버섯 상인
간에 좋아요
살이 빠집니다
상황버섯을 팔던 상인은
실은 돈을 모아서
포카라로 가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거기서 인류의 멸망을 기다릴 거라고
관광객들에게
포카라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푸른 하늘
흰 구름
히말라야의 산기슭
나는 기쁩니다
버섯은 얼마입니까
실업자가 야구 보는 이야기
분명한 마음이 있었는데요
사라졌습니다
고장 난 사람처럼 야구만 보았습니다
공이 뭐라고
공은 분명한데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니까
개의 마음을 알 것 같고
공의 궤적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야구를 보는 동안
아픈 사람들의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공을 보는 개의 마음은 알아도
나를 보는 아픈 사람들의 마음은 모르겠는데
엄마는 내가 멀쩡해 보여요?
아름다움처럼 모르겠는데
나 없이 내게로 오는
그 마음들은
아무도 사할을 넘지 못하도록
투수와 타자가
긴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쉽게 하나가 되는데
그러려고 모인 거니까
온 힘을 다하여 야구를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공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조금만 참아달라고 하던 사람들이 사라질 때까지
매일 죄송하다고 말해야 했던 전화기를 잊을 때까지
그러면 프랜차이즈 스타가 이적해도
돈이 모자라면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는 팬들만 남아서
내가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어리석지 않으려면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포지션이 없으면 게임이 안 되고
응원팀이 없으면 야구가 재미없습니다
공놀이죠
돌아오지 않는 공도 가끔 있지만
야구에서는 돌고 돌아야 합니다
야구가 끝나면
아픈 사람에게 병원에 가야 한다고 답장합니다
사회보장제도를 알아보자고 말합니다
의사가 알려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에 따라서
차라리 돈을 많이 벌지 그랬어……
그렇게 말해주는 시가 있었다면
저작권으로 농담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맥주가 지겨워요
사라진 마음이 지겹습니다
공은 왜 자꾸 돌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