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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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타인의 빛과 ‘나’의 승리

 

 

김영희 金伶熙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페미니즘으로 김수영의 시를 읽을 때」 「생명의 관측소와 새로운 노동시」 등이 있음.

yhorizon@naver.com

 

 

 

주민현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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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현의 시집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를 읽으며 미학과 정치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는 미학과 정치에 대한 기존 논의에 지금 중요한 의제인 페미니즘과 생태정의를 장전하여 젠더, 기후위기, 동물권 등에 집적된 사회모순을 미학적인 언어로 풀어내며 시의 정치성을 갱신하고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생빅뚜아르산을 매번 ‘다르게’ 묘사하는 예술가의 시선으로, 자신이 상상하는 ‘시와 현실’의 미래를 ‘선언적으로’ 그려낸다.

주민현의 시에는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연대의 감각이 전제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란 비단 인간만이 아닌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다. 시집 속에서 우리는 눈빛과 감정으로, 때로는 “침묵”과 “재채기”(「가장자리」) 같은 것으로 서로가 이어져 있음을 확인한다. 이러한 연결은 자본의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황금사슬보다 견고하고 본래적이다. 우리가 “흰 빵은 먹을 수 없는 것/피에 젖은 빵은 삼킬 수 없는 것”은 제빵회사 청년 노동자의 죽음이, 생명보다 우위에 있는 “피에 젖은”(「빛으로 이루어진」) 화폐가 그 빵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흙집에 내려와 앉았던 참새가/나의 화단으로 날아와 지저귀고”(「꽃다발과 따발총」) 있을 때, 강제수용소에 억류되고 강제 산아제한을 당하는 위구르족 여성의 고통과 ‘나’의 감정이 연결된다. 청년 노동자, 소수민족 여성, 개와 쥐, 영혼에 이르는 연대의 감각은 자본과 노동, 민족과 종교, 인간과 비인간의 구별 없이 모든 피조물을 이어준다. 이 순간 시는 ‘피’와 ‘총’의 역사를 기억하고 연대하는 행위가 된다.

시로써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문하며, 주민현은 ‘이야기를 품은’ 시를 통해 주변부와 소수자의 이야기를 그들의 목소리로 발화한다. 전봇대 위에서 작업을 하다 고압전류에 감전된 노동자의 손을 붙잡고, 위험한 작업에 외주를 주는 현실을 기록한다(「밤이 검은 건」). 당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당신의 손을 붙들고, 당신의 집을 방문한다(「전구의 비밀」). 이때 연대의 감각은 환대의 시로 탄생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쓴 시는, 다시 누군가의 고통을 껴안고 누군가의 생명을 붙잡는다.

여기에서 특별한 점은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강조가 ‘나’의 개별성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번째 시 「오래된 영화」에서는 ‘나’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가 중첩된다. 우연과 신비로 가득하지만 필연적으로 반복되고 변화하는 두 이야기는 마치 “오래된 영화”처럼 느껴지는데, 시인은 은유로 가득 차 있는 역사를 바라보며 이를 시로써 기억하고 해석하는 사람이다. 이때 ‘나’의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은 인간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과 분리되지 않는다. 전쟁과 불의의 세계를 인식하는 발걸음은 존재의 사소하고 개별적인 아픔과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걸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현대사회가 부조리한 것은 무엇보다 상품과 소비의 아수라장 속에서 한 개인을 “나로부터 서서히 멀어”(「역사적인 단추」)지게 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자기상실이 결국은 타인에 대한 이해마저 요원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시인이 그리는 미래는 ‘에리카라는 이름의 나라’이다. 이곳은 국적, 인종, 피부색, 성적 지향 등의 차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 곳이다. “뺨이 희다 해도 검다 해도” “에리카는 에리카”이다. 여기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에리카는 “내가 포착한 에리카”일 뿐이라는 인식, 그러니까 타인에게는 언제나 내가 모르는 영역이 있음을 이해함으로써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사랑이 있다. 현실에서는 몸이라는 사적 영역 혹은 사랑이라는 관계에도 차별과 배제의 정치가 작동하지만, 주민현 시의 주체들은 혐오와 상투성의 선을 넘어,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뉴 노멀의 시대”를 꿈꾸며 “해안선 멀리까지 나아간다”. 이들에게는 비장함, 원한, 죄책감 같은 것이 없다. ‘정상성’의 시대에 얼마간 “고독하겠지만”(「에리카라는 이름의 나라」) 그 고독은 어딘가 강인하고 희망적이다. 연대하고 환대하라. 명랑하고 격렬하게 도약하라. 주민현은 오래도록 ‘선명하게’ 상상해온 “키득키득” “다른 천국”(「천사와 악마」)을 선언적으로 그려낸다. 미래에 대한 권리가 그곳에 있다.

 

 

이영종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걷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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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첫 시집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를 읽다보면 전면에 드러나 있든 배면에 감추어져 있든 ‘서정’과 ‘혁명’의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오래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 것 같다. 과거라는 시간을 손에 쥐고 긴 시간 지녀온 감정을 바탕으로 미려한 서정의 어휘를 동원하여 쓰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이영종이 구축한 ‘우리’라는 한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를 지배하는 이미지와 감정과 규칙이 오래된 서정과 혁명의 시간에 닿아 있다.

등단작이기도 한 「노숙」은 멧돼지가 열차에 부딪쳐 죽은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숲이 파괴되고 서식지를 잃은 멧돼지가 먹을 것을 찾아 인근 역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멧돼지가 열차에 부딪친 것이 아니라 “열차에 뛰어들었다”라고 이해한다. 멧돼지가 ‘생존’을 위해 ‘죽음’을 불사했다는 것일까. “도토리 몇 자루”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456억의 희망을 가지고 죽음의 게임에 참가하는 이야기가 그러한 것처럼 멧돼지의 죽음은 현실에 대한 은유이다. 밀어내고 싶은 현실이기에 “믿기로 했다”는 표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시가 생명파괴의 현실을 담고 있음에도 어딘가 아득한 서정의 아우라를 풍긴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한데, 밤 열차, 간이역, 침목, 눈발, 숲길, 개울 같은 어휘를 토대로 멧돼지의 죽음에 빗대어 우리 시대의 가난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정의 세계는 “일리 제내 두립 시목” 같은 오래된 마을 이름에서 드러나는 바, 실력은 조금 부족해도 여유가 넘치는 “약방”이 있고 천지에 꽃이 피는 봄밤의 아늑한 풍경을 만나게 되는, 지역성을 토대로 구축되기도 하고(「옹동」), 인간과 자연과 우주가 어우러져 골 대신 온갖 슬픔이며 황홀을 터트리는 축구경기를 하는가 하면, 뛰다가 “묘하게 슬퍼서 기러기에게 다가간” 것에는 벌칙이 없고 “우레가 울면 선수들이 달 쪽으로 몰려”간 거라는, 공동체성을 토대로 형성되기도 한다(「우리 축구 규칙」). 이 세계에는 햇귀, 담애, 작달비, 남실바람, 는개, 풀치, 콩새, 꽃멸치, 새물내, 풀각시, 개어귀, 꽃쌈, 풀씨같이 시인이 아껴 쓴 서정의 어휘들이 고유하게 빛나고 있어, 우리는 “지구에 손을 푹 집어넣어 여름을 끄집어내듯”(「눈빛 아름다울 때만 말이 나왔으면」)이나 “울 곳 찾아다니다 빗방울 무늬가 있는 눈으로”(「노랗게 종알거리는 눈물」)와 같이 얼마간 잊고 있었던 소중한 서정의 문장들을 무던히도 만나게 된다. 더욱이 이들은 “무와 조려낸 고등어 같던 저물녘”(「이별도 안녕」)처럼 생활의 구체성을 담고 있어 관념의 차원에서 비껴 서 있다.

이영종의 서정은 혁명을 노래하던 시간으로 이어진다. 「풋저녁」 같은 시는 시인의 청년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절의 ‘나’에게 세상은 “고칠 게” 많은 곳이었다. 근본적으로 바꿔야만 할 것 같은 세상에서 “나는 늘 손을 다쳤고” “손 다친 노래를 불렀다”. 여기에서 손은 노동하고 투쟁하는 손이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담의 구호” 그리고 스크럼, 결사대 같은 어휘들이 툭툭 이 시절을 증언하듯 등장한다. 이 시간은 죽음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초승달 부풀어 터지게 불러도」는 죽은 이를 부르는 노래인데, “설익은 시”와 “혁명하듯”이라는 시어가 ‘그’의 죽음을 관통하고 있다. 이때 시가 “설익은” 대상이며 혁명은 “슬픔”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시집의 주된 정서와도 관련이 있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너무 오래 보았다 눈이 부셔 우리가 졌다 그러니 유쾌해도 괜찮다”라고 썼다. 누군가는 이 문장을 “우리가 졌다”는 데 집중해서 읽겠지만, 누군가는 “너무 오래 보았다 눈이 부셔”라는 고백에 오래도록 머물 것 같다. 시인에게 눈부신 그것이란 다름 아닌 “풋저녁”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곳이 비단 과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집 속 ‘우리’라는 정서와 공간과 규칙에 의해 운영되는 서정세계가 그곳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영종의 시집에서 오래된 것은 햇것과 서로 맞물려 있다. 햇감자와 햇망울처럼 구체적인 물질성과 생활을 담고 있는 햇것의 목록이 그러하고 서정과 혁명이 그러하다. 이는 “풋저녁”의 세계와 “설익은” 시가 좀처럼 철들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리하여 끝내 시들지 않는다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이은규 『무해한 복숭아』(아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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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의 시집 『무해한 복숭아』는 ‘한 사람의 부재’에 대한 치밀한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그것이 어떤 성격인지에 따라 타인의 부재라는 사건은 연애의 차원에서도 정치적 맥락에서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무해한 복숭아』는 낭만화된 사랑 속 ‘한 사람’의 부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굳이 ‘시작’이라고 표현한 까닭은 부재의 서사가 ‘의혹’과 ‘죽음’의 계기들을 거쳐 종국에는 사라지는 것을 기록하는 자의 윤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밤의 물체 주머니」에는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삶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 “작은 시골 마을 버몬트에서 메이플 시럽을 만들어 자급자족”하고 “시럽이 눌어붙지 않도록 나무 주걱으로 오래 젓는 일상, 일생”과 같은 문장으로 이들의 서사가 요약된다. 시인이 “우리 상상해볼까요 둥근 탁자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그 사이 달콤했을 저녁의 공기를”이라고 말할 때, 헬렌과 스코트의 ‘달콤한’ 저녁식탁에 대한 상상은 시집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는 경쟁과 속도와 소비에 포위된 대도시의 삶을 벗어나 시장경제로부터 독립해 자신과 공동체와 지구를 지키며 살고자 했던 이들의 저항적 실천이 삭제되어 있다. “지워진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감각을 보여주는 듯한 「살구」는 살구라는 말이 가진 느낌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언어 운용에 집중해서 시를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이를테면 “살구라는 여린 이름”이라는 표현은 살구의 모양과 빛깔, 살구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등을 떠올려보면 금세 감각적으로 이해가 된다. “먼 속삭임들, 닿을 텐데 닿을 것만 같은데”에서도 살구의 이미지와 수줍은 연애의 감각은 효과적으로 조응한다. 하지만 여기서 살구(殺狗)는 ‘개를 죽이다’라는 뜻도 가지는데, 나무에 “개를 매달아” 그로부터 손님을 대접했으며 이듬해 꽃이 만발했다는 “오래된 이야기”가 그 이름에 담겨 있다. 이것은 서늘하고 “의혹으로 가득 찬” 이야기다. 살구는 “여린 이름”일까 “의혹”의 이름일까. 살구라는 이름의 양면성은 낭만적 사랑의 허구를 보여주며 부재의 서사에 균열을 일으킨다.

「납작복숭아」에서 복숭아는 신화 속 “영생”의 열매로 등장한다. 화자는 복숭아가 “물러질 것만 같아서” 하염없이 조심스럽게 대하지만 화자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시의 후반부에서 복숭아는 부재하는 존재가 된다. 시에서 복숭아는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표상하고 있는 대상으로 보이는데, 이는 특히 “영생”에 대한 믿음과 대비되며 더욱 선명해진다. 그러므로 ‘무해한 복숭아에 대한 응원’(‘시인의 말’)은 죽음에 이른 생명에 대한 옹호와 연결된다. 한 사람의 부재가 ‘나’에게는 “부고(訃告)”(「봄편지」)처럼 다가왔으므로, 이는 남겨진 한 사람을 대상화한 것이기도 하고 무고한 죽음에 대한 광의의 비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부재의 서사는 낭만적 사랑에서 의혹을 담은 이야기를 거쳐 죽음/생명에 대한 사유와 연결된다.

이제 남겨진 사람의 윤리는 부재를 ‘기록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분홍분홍 우는 것으로 노래할 뿐”(「키위, 새」)이라고 말하던 화자는 「어린 양의 분홍 발굽」에서 자신을 “어린 양”에 투사해 바라보며 이는 시를 쓰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타자의 서사를 기록하는 작업으로 확장된다. 「밤의 하얀」에는 “피어오르는 불안”과 함께 “웅크리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양과 불의 이미지가 합쳐져 있는 그의 존재는 성경 속 신과 피조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제사에 바쳐지는 화목제물(和睦祭物)을 연상케 한다. 한 사람에 대한 화자의 소망은 “밤새 안 들리는 문장들에 귀 기울여/서사를 기록하는 일”이다. 그 서사 안에는 “모든 포유류의 울음”과 몸으로 “스며드는 불행”과 “피어오르는 불안”이 담겨 있다.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한 사람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시인은 그 이야기를 “아름답게, 기묘하게” 적어보겠다고 말한다. 한 사람이 떠나고, 남겨진 한 사람은 부재를 기록하는 주체가 된다. 그러므로 이 시집이 「복숭아 라이브 드로잉」으로 끝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복숭아 라이브 드로잉”을 계속하는 것, 그 방식으로 “무해한 복숭아를 응원”하는 것이 바로 시인의 사랑이고 윤리이다.

 

이 계절에 나온 시집 중 현택훈 시인의 『마음에 드는 글씨』(한그루 2023)가 있다. 제주에 사는 시인은 제주의 자연과 생활과 언어를 시에 담았다. 제주 방언이 쓰인 시를 사전을 찾아가며 읽다가 문득 시인은 이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시 안에 기록해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시인은 4·3항쟁 당시 학살로 사라진 마을에 대해, 지금은 없어진 ‘한림수직’과 ‘제주서림’에 대해 쓰고 있었다. 시를 쓰는 마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이 글에서 다룬 세권의 시집은 모두 어떤 시간에 부착된 마음을 기억하고 위로하고 응원하고 있다. 그 마음은 필연적으로 타인과 사회에 닿아 있으며, 나와 타인의 연결, 지구에 거주하는 모든 생명과의 연대가 시를 쓰는 마음을 추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타인을 환대하는 시는 ‘나’가 성장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기억하고 기록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삶의 변화와 연결된다. 뽈 엘뤼아르는 “타인의 빛 속에서 나는 나의 승리를 만든다”고 했던가. 이 계절의 시집을 읽으며 시를 쓰는 마음에 대하여 생각해보니, “꿈을 꾸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이며, ‘빛’이 시라는 것을 알 것 같다. “어떠한 손금도 금방 낡은 지도가 되는 이곳에서 그래도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다니 이상하지. 이상한 돌림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빛에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으며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주민현 「빛의 광장」)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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