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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세계서사, 어떻게 쓸 것인가
혼종위기의 세계와 미국(迷國)
이혜정 李惠正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저서 『냉전 이후 미국 패권』, 공저서 『한반도 국제관계사의 재인식』 『안보의 논리, 평화의 논리』 등이 있음.
heajeonglee@gmail.com
지금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 거시적·구조적으로 보면 국제정치의 현실은 패권 불가능/부재의 패권 궐위시대이다. 기후위기와 인공지능 등 신흥기술은 인간과 자연 및 기술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혹은 전복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탈근대적·인류세적 도전에 직면해서, 미국이나 중국 그 어떤 개별 강대국도 국제체제 전반을 통제하고 국제공공재를 제공하며 보편적인 지지를 받는 사회체제의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패권 불가능/부재의 궐위시대를 맞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시간과 공간, 영역별로 동시다발적인 위기들이 서로 착종되어 기존의 경계와 표준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지만 그를 대체할 새로운 시대의 전망은 지극히 불확실한 혼종위기가 현재 국제체제, 정확히는 국제 무질서의 대표적 특징이고,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있다.
미국(美國)의 귀환?
2021년 1월 대통령 취임사에서 바이든(J. Biden)은 미국의 귀환, 미국 민주주의와 패권의 복원을 공약했다. 바이든은 2020년 대선에서 미국의 최대 악, 어둠의 체현이라고 비판했던 트럼프(D. Trump)와 2024년 대선에서 재대결을 벌일 것이 확실해 보인다. 바이든이 공약한, 민주주의의 전범이자 자유주의 혹은 (적어도) 규칙 기반 국제질서의 수호자로서의 아름다운 나라, 미국(美國)은 돌아왔는가?1
바이든 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 설리번(J. Sullivan)은 2023년 9월 말 미국의 시사잡지 『더 애틀랜틱』(The Atlantic)이 개최한 공개 대담 행사에서, 바이든 정부가 냉전과 탈냉전에 이은 미국 패권 3기의 토대가 될 ‘힘의 우위’를 구축했다고 주장했다. 바이든 정부의 대외정책 독트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답하면서다. 그 내용은 10월 초 외교전문매체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미국 힘의 원천’이라는 제목으로 기고되었다.2
설리번에 따르면 미국의 압도적 힘의 우위에 따라 지정학적 경쟁이 부재했던 탈냉전시기는 끝났고, 기후위기와 신흥기술, 중국의 부상 등에 따라 상호의존의 지정학적 경쟁 시대가 열렸다. 바이든 독트린은 산업정책을 통한 자강 및 내적 균형, 동맹과 파트너를 활용하는 외적 균형, 글로벌 사우스에서의 리더십 제고, 그리고 직접적 군사개입을 자제하는 군사력의 절제된 운용을 네가지 기둥으로 삼아, 중국과의 전략경쟁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미국의 우위를 확보하고자 한다.
설리번은 특히 중국과의 전략경쟁에 투입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군사력의 절제된 운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대표적 사례이자 성과는 러시아와의 직접 대결을 피하면서 러시아의 침공에 대항하는 우끄라이나를 다방면에서 지원하는 것과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군을 통해 중동에서의 ‘영구한 전쟁’에서 빠져나오고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과 수교하는 것을 적극 지원하는 것 등을 통해 9·11테러 이래 중동을 가장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국과의 전략경쟁과 우끄라이나 지원을 병행할 수 있는가 하는 우려에 대해서는, 우끄라이나에 대한 미국 여론의 지원이 “깊고 넓고 지속적”이라고 주장했다.3
설리번이 10월 2일 「미국 힘의 원천」을 기고하자마자 10월 3일 연방의회의 공화당 하원의장이 축출되면서 의회 리더십의 공백이 발생했고,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대규모 테러와 로켓 공격으로 1,200여명이 사망하고 240여명이 납치되었다. 우끄라이나를 “깊고 넓고 지속적”으로 지원할 입법부가 멈춰서고 중동의 안정성이 깨져버린 것이다.
매카시(K. McCarthy) 하원의장의 축출은 그가 연방정부 폐쇄를 막고자 민주당과 임시 연방예산안 편성에 협력한 데 불만을 가진 일부 급진 공화당원들(프리덤 코커스)이 주도한 불신임 투표를 통해서였고, 신임 의장은 10월 25일에야 선출되었다. 이는 10월에 시작하는 연방정부 회계연도에 맞춰 제때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는 미국정치의 상시적인 기능부전4과 2010년 중간선거에서 티파티 세력이 의회에 진입한 이후 이들을 제어하지 못한 공화당 지도부의 무능이 결합된 결과였다.5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공격에 맞서 가자지구를 전면 봉쇄하고 하마스의 절멸을 목표로 하는 가자전쟁을 시작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잠정 봉인 혹은 우회하며 얻었던 것으로 보였던 중동의 안정성은 신기루였을 뿐임이 드러났으며, 바이든 정부는 하마스를 ‘절대 악’으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는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전폭적으로 인정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긴급 군사지원을 실시했다. 이제 미국은 유럽과 중동에서의 두개의 전쟁과 더불어 잠재적으로 대만해협에서의 전쟁, 현실적으로는 중국과의 전략경쟁이라는 세가지 지구적 도전을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가자전쟁과 관련해서도 이스라엘 지원과 확전 방지, 그리고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 최소화라는 세가지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다.
바이든 정부는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0월 18일 이스라엘을 직접 방문해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몸소 그리고 재차 공약한 이후 백악관으로 돌아온 바이든은, 이스라엘(143억 달러)과 우끄라이나(614억 달러)에 대한 지원을 이민·국경 문제(136억 달러)와 국무부의 인도적 지원(91억 달러) 등과 묶은 1,060억 달러 규모의 추가 안보예산 지원요구를 정당화하는 대국민연설을 했다.6 바이든은 우끄라이나전쟁과 가자전쟁을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묶어내며, 미국이 당장 적극적으로 우끄라이나와 이스라엘을 지원하지 않으면 양차 세계대전처럼 더 큰 전쟁으로 확전될 것이고 그에 따른 미국의 피해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이 민주주의와 국제질서 수호의 ‘등불’(beacon)이자 ‘필수국가’(indispensable nation)임을 환기하며 다음과 같이 연설을 마쳤다. “우리는 미국이다. 우리가 단합하는 한 우리가 못할 일은 없다.” 7
지독한 낙관주의 혹은 시대착오적 미련이었다. ‘필수국가’는 설리번의 ‘바이든 독트린’도 인정하는, 지금은 사라진 탈냉전 ‘단극의 순간’에 탄생한 용어이다. 특별 안보예산을 ‘임시’ 하원의장에게 전달해야 하고, 2020년 대선에 불복한 트럼프가 공화당을 장악한 현실의 미국은 분열된 미국(迷國)이다.8 가자전쟁은 서구 전반과 미국사회의 분열을 가속화하였고, 미 의회는 바이든이 요구한 우끄라이나와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이민·국경 문제 등을 둘러싼 이견 때문에 아직(2024년 2월 초)까지도 승인하지 않고 있다. 그사이 이스라엘이 자위권의 이름으로 가자지구를 초토화하는 하마스 절멸작전을 펼치면서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2만 7,000명을 넘어섰다. 미국 국내법을 우회하면서까지 이스라엘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고 국제사회의 휴전 요구를 유엔 안보리에서의 거부권 행사 등으로 막아서고 있는 바이든 정부는 ‘소방관’을 자임하지만 사실은 ‘방화범’이라는 비판과 국제적 고립을 면치 못하고 있고, 중동에서 미군 사망자가 나오면서 확전의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9 가자전쟁과 관련된 바이든 정부의 곡예는 위태롭기만 하다.
미국(迷國)의 전쟁들
지금 미국은 네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트럼프의 집권을 허용한 선거인단제도 등 표의 왜곡을 제도화한 오래된 헌정질서 속에서 기존의 정치적 분열이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와 착종된 ‘내전’, 우끄라이나와 가자에서 진행 중인 두개의 ‘대리전’, 그리고 전략경쟁, 경제안보 혹은 위험완화(de-risking) 등의 이름으로 중국의 경제적 부상을 봉쇄하려는 대중국 ‘경제전쟁’이 그것들이고, 이들은 또 서로 연관되어 있다. 가자전쟁은 우끄라이나전쟁을 계기로 바이든 정부가 거둔 일정한 외교적 성과를 상쇄하고 바이든 대 트럼프의 ‘내전’을 악화시키고 있으며, 트럼프의 재집권 전망이 나오는 2024년 대선 경쟁은 다시 미국이 대외적으로 세개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가장 큰 장애로 작동하고 있다.
출범 첫해인 2021년 바이든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철군 과정에서의 난맥상으로 상당한 대내외적 비판에 시달렸고, 이를 계기로 바이든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그러나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끄라이나 침공은 바이든 정부가 나토(NATO)의 확대와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 등으로 서구 민주주의의 단합을 이끌어내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는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우끄라이나전쟁은 또한 미국이 비록 글로벌 사우스의 적극적인 동참을 조직해내지는 못했지만, 러시아의 주권 규범 위반을 비판하며 민주주의 연대를 넘어 규칙 기반 국제질서의 명분을 강화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2022년 여름 이후 유럽 ‘전선’에서는 우끄라이나가 실지(失地)를 회복해나갔고, 국내적으로도 반도체 법안과 인플레이션 감축법 등 대표적인 산업정책의 입법화에 성공하면서 ‘중산층을 위한 외교’나 ‘바이드노믹스’의 기반을 구축했다. 이들 입법과 동맹 강화를 배경으로 중국에 대한 강력한 첨단기술 수출 및 투자 통제 조치들을 시행했고 2022년 말 중간선거에서 예상외로 선전하기도 했다.
이렇듯 2022년 상당한 성공을 거둔 바이든 정부는 2023년 들어 대내외적인 난관에 직면했다. 인플레이션과 이민·국경 문제 등으로 ‘바이드노믹스’의 성과가 바이든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중 전략경쟁도 안보, 경제의 양 측면에서 난관에 직면하여 일정한 조정이 이루어졌다. 2022년 8월 당시 하원의장 펠로시(N. Pelosi)의 대만 방문 이후의 대만해협위기와 2023년 2월 중국의 정찰 풍선을 미국이 격추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양국간 긴장을 해소하고 적어도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을 막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미국의 산업정책은 한국과 유럽 등 동맹국들의 경제적 이익과 충돌했고 대중국 기술, 투자 통제는 동맹국들뿐 아니라 자국 기업들의 반발도 초래했다. 바이든 정부는 유럽이 2023년 3월 제시한 ‘위험완화’의 대안을 적극 수용하여 4월부터 이를 대중정책의 좌표로 천명하였고 6월부터는 블링컨(T. Blinken) 국무장관을 시작으로 고위급 각료들이 연달아 방중하며 대중 전략경쟁의 안정적 관리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책적 선회는 러시아와의 직접 대결을 피한다는 우끄라이나전쟁에서의 ‘대리전’ 원칙과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그리고 더 직접적으로는 중국과의 경제적 상호의존을 완전히 절연(decoupling)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 때문이었다. 이를 미국의 입장에서 평가하면 현실적 한계에 따른 ‘현명한’ 정책조정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동맹국의 입장에서 보면 바이든 정부는 트럼프의 대중국 관세와 ‘미국 구매와 제조’ 정책 등을 계승하는 데서 더 나아가 기존의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미국의 시장개방/자유무역은 완전히 폐기하고 산업정책을 부활시켰다. 패권의 대외적 핵심이라 할 패권국과 동맹국 간 공동의 경제적 이익 창출은 도외시하고 동맹들을 중국 견제에만 동원하고 있는 것으로, 미국은 더이상 전면적인 편승의 대상이 아니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동맹을 동원하지만 그에 따른 피해를 방지하거나 보상할 능력이 없다. 대중 전략경쟁에서 미국은 일종의 ‘이익 사유화, 비용 사회화’ 동맹정책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2023년 여름부터 우끄라이나 ‘전선’과 미국 ‘내전’에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발생했다. 6월 시작된 우끄라이나의 대반격은 기대했던 것처럼 최소한 끄림반도로 이어지는 회랑을 점령해 러시아와의 평화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 전선이 거의 변동하지 않은 채 전쟁은 교착되었다. 우끄라이나는 병력과 물자를 소진한 반면 러시아는 서방의 경제제재를 일정하게 견뎌내고 군수품 생산능력을 갖추면서 전쟁의 전망은 러시아에 유리하게 반전되었다.10 2024년 미국의 ‘대리전’ 목표도 우끄라이나의 공세가 아니라10 장기적인 방어 태세 확립으로 바뀌었다.11
한편 2023년 3월부터 8월까지 이어진 트럼프에 대한 4건의 형사 기소, 특히 8월의 머그샷 촬영은 역설적이게도 트럼프의 정치적 부활로 이어졌다. 2022년 11월 중간선거에서 트럼프가 지지한 후보들이 대거 낙선하면서 플로리다 주지사 드샌티스(R. DeSantis)가 트럼프에 맞서는 강력한 대항마로 등장했었다. 하지만 드샌티스가 즉각적으로 대선운동에 뛰어들지 않고 트럼프와 정면으로 대립각을 세우지 못하며 주춤하는 동안, 트럼프가 자신에 대한 형사 기소를 기존 체제의 탄압으로 규정하면서 공화당원들 사이에서 지지율이 반등하여 2024년 1월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드샌티스는 경선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트럼프가 사실상 독주하는 가운데 대규모 인프라 투자와 해외 기업들의 투자 유치, 3%대의 낮은 실업률 등 바이든 정부의 업적이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으면서, 바이든 캠프의 대선전략은 트럼프를 미국 체제의 암적 요소이자 민주주의의 위협요인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적하는 것으로 초점이 옮겨졌다.
2023년 10월 가자전쟁의 발발은 우끄라이나 전선의 교착, 대중 전략경쟁의 관리 모드로의 선회 혹은 미국 힘의 한계를 인정한 ‘휴전’ 모색—이는 11월 바이든-시 진핑(習近平) 회담에 대한 일반적 평가이다—, 그리고 트럼프의 정치적 부활에 따른 ‘내전’의 재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가자전쟁은 하마스 절멸과 가자의 비무장화, 그리고 팔레스타인 사회의 비극단화를 목표로 하는데,12 9·11테러 이후 미국의 대테러전쟁은 물론 2차대전 중 독일과 일본 도시들에 대한 미국의 융단폭격, 특히 원폭 투하가 이스라엘이 상정하는 자위권의 모델이고, 팔레스타인 사회의 비극단화 모델 역시 2차대전 전후 미국이 독일과 일본을 점령하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한 것이다.13
이스라엘의 이러한 자위권과 전쟁 모델을 인정한다면 대규모 민간인 피해는 필연적이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하마스가 민간인 시설을 이용하거나 그러한 의심이 드는 한, 병원이든 난민촌이든 학교든 민간인 피해는 하마스를 목표로 한 정당한 군사적 공격에 따른 ‘부수적 피해’이기 때문이다. 2023년 10월 말 이스라엘 국방부는 소수의 하마스 지도부를 타격하기 위해 자발리아 난민촌을 공습했고 최소 50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고 인정했다. ‘이것이 정당한가’라는 CNN 앵커의 질문에 대해서 이스라엘 국방부 대변인은 “이것이 전쟁의 비극”이라고 답했다.14 이러한 비극이 이어지는 한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또다른 하마스가 출현할 것이고 팔레스타인 사회의 비극단화는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인정하면서 민간인 피해 최소화와 확전 방지, 전후 2국가 구상 등으로 그 행동을 통제하려는 바이든의 곡예는 ‘불가능한 과업’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지원에 그 어떠한 조건도 붙이지 않고 있는 바이든 정부의 입장은 미국 국내법적으로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10월 18일 미 국무부 해외 군수지원 담당자 조시 폴(Josh Paul)이 사임했다. 인권침해를 자행하는 군대에는 국무부와 국방부가 군수를 지원하지 않도록 하는 국내법(The Leahy Law)이 존재하고 그에 따라 군수지원에 앞서 면밀한 조사가 필수적인데, 우끄라이나에 집속탄을 지원할 때도 작동했던 국무부 내의 조사와 논의 절차가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에서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스라엘에 무조건적인 군사 지원을 하는 기존의 논리, 즉 안보가 확보되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 양보할 것이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이어서, 이스라엘을 지원하면 할수록 중동의 평화는 깨질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하였다.15
바이든 정부가 뿌찐에 대해 제기했던 규칙 기반 국제질서의 훼손, 유엔총회의 결의문 채택을 근거로 한 국제사회에서의 고립, 전쟁범죄와 집단학살 등의 규범적 비판들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바이든 정부는 유엔총회에서 141개국이 러시아의 우끄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결의안에 찬성한 것을 근거로 러시아의 국제적 고립과 규칙 기반 국제질서의 정당성을 강조했지만, 가자전쟁과 관련해서는 153개국이 찬성한 즉각 휴전안에 반대한 10개국의 하나이자 G7 중에서도 유일한 반대 국가가 되어버렸다. 남아공의 제소로 국제사법재판소가 가자에서 이스라엘이 자행하고 있는 집단학살의 우려를 일부 인정하고 비록 즉각적인 휴전은 아니지만 긴급하게 예방적 조치들을 취하라고 판결한 것도, 이스라엘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미국의 도덕적 위상의 추락을 보여준다.
가자전쟁이 미국의 ‘내전’과 착종되는 지점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이스라엘과 우끄라이나 지원에 관한 이견이다. 신임 하원의장 존슨(M. Johnson)을 포함한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MAGA) 세력은 이스라엘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에는 찬성하는 반면 우끄라이나 추가 지원은 반대하고, 다만 이민·국경 문제에 대한 합의를 전제로만 소극적으로 찬성한다. 트럼프는 자신이 당선되면 우끄라이나전쟁은 24시간 안에 해결할 것이라 주장하고, ‘나쁜 타협’보다는 ‘노 딜’이 낫다며 이민·국경 문제에 대한 타협을 강력하게 반대하여 2024년 2월 초 상원의 이민·국경-우끄라이나와 이스라엘 지원 패키지 타협안은 좌초되었다. 바이든은 트럼프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미국의 국가이익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16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바이든 정부의 핵심적인 자강/산업정책인 인플레이션 방지법은 무효화되고 중국에 대한 관세는 대폭 인상될 것이며 대만에 대한 지원은 약화되리란 전망이다. 트럼프 2.0의 ‘유령’이 미국(迷國)을 배회하며 바이든 독트린 전반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가자전쟁과 미국 ‘내전’의 또다른 착종 지점 혹은 방식은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 중 일부—진보세력, 청년, 흑인, 아랍계/무슬림/팔레스타인 등—의 반발이다. 특히 일부 아랍계 유권자들은 대선에서 제3의 후보에 투표하는 등 바이든의 이스라엘 편향을 적극적 방식으로 ‘처벌’하고자 한다. 유대계의 영향력에 비하면 이러한 움직임은 대단히 미미하지만, 결국 2024년 대선도 6, 7개의 경합주에서 박빙으로 결정될 것이기 때문에 이들 경합주에서 아랍계의 반발은 바이든 캠프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변수이다. 바이든 캠프는 두가지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바이든 정부가 아랍계의 정치적 반발이 거센 미시간주를 방문하기 직전인 2월 1일, 행정명령으로 서안 정착촌에서 폭력을 행사한 일부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제재를 발표한 것처럼 이들을 달래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바이든 연합의 균열이 생길수록, 예컨대 바이든의 이스라엘 편향에 반대한다고 무슬림 입국을 금지하는 트럼프를 찍을 것이냐 하는 딜레마가 생기는 것처럼 트럼프의 위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트럼프 시대의 세번째 대선과 미국(未國)
바이든 자신이 트럼프가 상대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출마하지 않았을 것이라 언급했듯, 2024년 미국 대선은 바이든의 재선이 걸린 선거라기보다는 트럼프의 재집권이 걸린 2016년 이래 트럼프 시대의 세번째 대선이다. 최고령의 현직 대통령과 두번이나 탄핵 기소를 당한 전직 대통령은 서로를 미국 체제의 적으로 규정한다. 바이든과 주류의 입장에서 트럼프는 기존 정치제도와 관행을 무시하는 이단이자 민주주의와 패권의 실존적 위협이다. 바이든 캠프는 트럼프가 당선되면 기존의 민권, 투표권, 여성의 권리, 심지어는 복지혜택 등이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이든 자신이 “우리가 지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 역시 이번 대선을 2016년에 시작한 미국우선주의 운동의 ‘최종적인 전투’라고 주장하며, 바이든이 재선된다면 미국인은 나라를 잃을 것이라고 경고한다.17
2024년 2월 초 현재 트럼프는 경합주들을 포함해 여론조사에서 바이든에 앞서고 있다.18 바이든이 승리하려면 그에 대한 지지는 높아져야 하고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낮아져야 한다. 전자로 향하는 경로는 두가지, 즉 바이든의 성과를 인정하는 경우와 소극적 혹은 부정적으로 트럼프에 반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문제는 두 방향이 서로 상충한다는 점이다.19 또한 바이든 캠프가 희망하는 대로 경제적 성과가 일정하게 인정받더라도 이번 대선의 최대 쟁점인 이민·국경 이슈가 트럼프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도 바이든의 약점이다. 후자, 트럼프에 대한 지지가 낮아지는 결정적 변수는 사법 리스크이다. 바이든 캠프의 희망은 트럼프가 유죄 판결을 받으면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도 있다는 일부 공화당원들의 여론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반란 가담자의 공직 후보 자격을 제한한 수정헌법 14조 3항에 따라 아예 트럼프의 대통령 후보 자격이 박탈당하는 경우도 상정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는 미국 체제의 리스크이기도 하다.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트럼프의 후보 자격을 박탈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대선 이전에 트럼프가 유죄 판결을 받거나, 심지어는 대선 직전까지 선거운동을 하지 못하고 재판에 불려 다니는 경우에도,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강력하게 반발할 것이다. 자신이 미국 민중을 대신해 주류의 탄압을 받고 있다는 트럼프의 주장은 상당한 정치적 폭발력을 갖고 있다. 현재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만족도는 28%로 1·6의회폭력사태 직후 35%보다 더 낮아졌고,20 1·6사태에 대한 공화당원들의 여론은 반성과는 거리가 멀다.21 또한 크루즈(T. Cruz)에서부터 드샌티스까지 당내 경쟁자들이 지금은 대부분 그를 지지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트럼프는 공화당 지도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22
2016년 대선의 선거인단 승부를 가른 것은 중서부 미시간,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3개 주에서의 약 8만 표 미만의 차이였고, 2020년에도 조지아, 애리조나, 위스콘신 3개 주의 약 4만 5,000 표 정도의 차이였다. 이번 대선도 경합주들에서 박빙의 승부로 결정될 것이다. 바이든이 당선되면 트럼프가 불복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고,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대선 불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민주당원들이 트럼프의 정당성을 인정할 가능성은 낮다. 어느 경우든 분명한 것은 미국(迷國)의 분열은 지속될 것이며 새로운 정치연합이 탄생할 가능성은 무척 낮다는 것이다. 패권 이후 미국이 어떤 대외정책을 취해야 하고 취할 수 있는지 하는, 미국(未國)에 대한 전망도 바이든식의 패권에 대한 미련과 트럼프식의 미국 우선주의 사이에서 계속 표류할 것이다. 그에 따라 우끄라이나와 가자전쟁, 미중 전략경쟁, 더 근본적으로는 기술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대립,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인류문명의 전환까지, 지구적 혼종위기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한반도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그간의 관성적인 한국 보수의 ‘미국유일주의’는 물론 진보의 ‘미국우선주의’로도, 미중 전략경쟁과 우끄라이나전쟁 등과 착종되어 위협받고 있는 한반도와 지역의 평화와 안정, 신자유주의 지구화 이후의 새로운 성장과 발전의 모델, 그리고 기술의 교란과 기후위기 시대의 문명사적 전환의 길은 마련되지 않을 것이다. 사라져버린 미국(美國)에 대한 미련과 오지 않을 미국(未國)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지구적 혼종위기와 미국(迷國)의 현실을 직시하고 분단체제의 극복과 인류의 문명사적 전환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아나설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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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미국’에 대해서는 졸고 「미국(美國), 미국(迷國), 미국(未國)」,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참조.↩
- 이하 관련 내용은 졸고 「‘미국 힘의 원천’이 몰락하다」, 창비주간논평 2023.11.14 및 「바이든 독트린, 무엇이 문제인가」, 『동향과전망』 2024년 봄호 참조.↩
- Jake Sullivan, “The Sources of American Power,” Foreign Affairs 2023년 9-10월호.↩
- 현행 미국 예산안 제도에서 의회가 연방정부 예산안 전체를 제때 통과시킨 것은 네차례(회계연도 1977, 1989, 1995, 1997년)뿐이다. “Congress has long struggled to pass spending bills on time,” Pew Research Center 2023.9.13.↩
- 티파티 공화당 의원들을 주축으로 2015년 프리덤 코커스가 조직되었고, 이들 티파티-프리덤 코커스 세력은 전임 공화당 하원의장 베이너(J. Boehner)의 사임과 그 후임 의장 라이언(P. Ryan)의 조기 정치 은퇴를 압박하고 트럼프의 공화당 ‘입성’과 장악을 가능케 한, 공화당 기득권 붕괴의 주요 원인이었다.↩
- “What’s in Biden’s $106 billion supplemental funding request,” Reuters 2023.10.21.↩
- “Remarks by President Biden on the United States’ Response to Hamas’s Terrorist Attacks Against Israel and Russia’s Ongoing Brutal War Against Ukraine,” The White House 2023.10.20.↩
- 졸고 「미국(美國), 미국(迷國), 미국(未國)」 참조.↩
- 요르단의 미군 기지가 이란 지지를 받는 민병대의 드론 공격을 받아서 미군 사망자가 나왔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바이든 정부는 이라크와 시리아 등을 공습했다. 이는 이들 국가의 주권 위반이고, 미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아서 국내법과 헌정질서 위반이기도 하며, 보복을 금지하고 있는 정전론 규범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 뿌찐(V. Putin)에 따르면, 미국이 주도한 대대적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2023년 유럽 최고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뤘다. “Russian economy growing faster than main Western rivals–Putin,” RT 2024.2.2; 2024년 2월 IMF 역시 2024년 러시아의 경제성장 추계치를 2023년 10월보다 1.5% 높은 2.6%로 발표했다. “The surprising resilience of the Russian economy,” Financial Times 2024.2.3.↩
- “U.S. war plans for Ukraine don’t foresee retaking lost territory,” The Washington Post 2024.1.26.↩
- Benjamin Netanyahu, “Our Three Prerequisite for Peace: We must destory Hamas, demilitarize Gaza and deradicalize the whole of Palestinian society,” The Wall Street Journal 2023.12.25.↩
- “Biden’s Support for Israel Now Comes With Words of Caution,” The New York Times 2023.10.30.↩
- “CNN Host Left Stunned as IDF Confirms Israel Hit Refugee Camp With Airstrike,” The New Republic 2023.11.1.↩
- Josh Paul, “This is not the State Department I know. That’s why I left my job,” The Washington Post 2023.10.23; Josh Paul, “I Knew U.S. Military Aid Would Kill Civilians and Undermine Israeli Security. So I Quit,” The New York Times 2023.11.17.↩
- “Biden Blames Trump for Faltering Effort to Address Immigration and Ukraine Aid,” The New York Times 2024.2.6.↩
- “Doom dominates 2024 messaging as Trump and Biden trade dire warnings,” The Washington Post 2023.12.31.↩
- 2024년 1월 17일에서 2월 6일 사이 양자 대결 여론조사들의 평균치는 트럼프 45.8% 대 바이든 44.1%로 트럼프의 1.7% 우세이다. ‘2024 General Presidential Election,’ Realclearpolitics 2024.2.7.↩
- Ezra Klein,“The Democratic Party Is Having An ‘Identity Crisis’,” The New York Times 2024.2.2.↩
- “Record Low in U.S. Satisfied With Way Democracy Is Working,” Gallup 2024.1.5.↩
- 바이든이 정당하게 선출되었다고 인정하는 공화당원은 2021년 말 39%에서 2024년 초 31%로 오히려 줄었다. “Republican loyalty to Trump, rioters climbs in 3 years after Jan. 6 attack,” The Washington Post 2024.1.2.↩
- “Trump Has Devoured the Republican Establishment,” The New York Times 2024.1.30.↩